262-3 그러나 때때로 나는 이런 의문을 품고는 한다. 탄소와 물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주로 이 두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탄소와 물을 기초 물질로 하는 생물인 것은 생명이 처음 태어날 즈음 지구에 탄소와 물이 가장 흔했기 때문은 아닐까? 지구 이외의 행성에서는, 예를 들어 화성에서는 생명이 물과 탄소가 아닌 다른 물질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나 칼 세이건은 물, 칼슘 그리고 각종 유기 분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나와 거의 동일한 분자들로 구성된 집합체이면서, 단지 나와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전부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이상하다. 분자가 나의 전부란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언짢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나는 우주가 분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계를 인간과 같이 복잡 미묘한 존재로 진화하게끔 허용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고양된다. - P262

266-7 하지만 이 계획에는 역오염이라는 새로운 위험이 따른다. 미생물을 찾기 위해 화성의 토양 표본을 지구에 가져와 조사한다면 당연히 표본을 미리 살균시켜서는 안 된다. 그 탐사의 목표는 그것들을 산 채로 가져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지구로 가져온 화성의 미생물들이 공중 보건에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H. G. 웰스나 오선 웰스의 화성인들은 버른마우스와 저지 시의 점령에만 몰두하다가 그들의 면역 체계가 지구의 미생물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것은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화성 미생물들은 없을지도 모른다. 존재한다 해도 그것들 1킬로그램을 섭취하고도 아무 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인 데다 엄청난 도박일 수 있다. 살균이 안 된 화성의 표본을 지구로 가져오고 싶다면 지독하게 엄격한 격리 절차를 갖추어야 한다. 세균 무기를 개발하고 비축하는 국가들이 있다. 간혹 그 나라들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듯싶지만 내가 아는 한 아직 전 세게적으로 전염병을 발생시키지는 않았다. 어쩌면 화성 표본들을 지구로 안전하게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같으면 표본을 채집해서 회수해 오는 탐사를 고려해 보기 전에 먼저 확신할 수 있는 안전 대책부터 강구할 것이다. - P266

269-273 화성의 표면적은 지구의 육지 넓이와 거의 같다. 철저하게 답사하려면 분명히 몇 세기 동안 꼬박 이 일에만 매달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화성 탐사가 완료되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로봇 비행선으로 공중에서 지도를 다 작성하고 이동 차량으로 표면을 샅샅이 조사하고 표본을 지구로 안전하게 가져오고 인간이 화성의 모래 위를 걸어본 후에 말이다. 그런 다음엔 화성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이 지구를 잘못 사용한 수많은 사례가 있다 보니 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만약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화성을 그대로 놔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경우라면 비록 화성 생물이 미생물에 불과할지라도 화성은 화성 생물에게 맡겨 둬야 한다. 이웃 행성에 존재하는 독립적 생물계는 가치 평가를 초월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그런 생명의 보존은, 내 생각이지만, 화성의 다른 용도에 우선돼야 한다. 그렇지만 화성에 생명이 없다면 어떨까? 화성은 원자재의 공급원으로는 적당치 않다. 앞으로도 수세기 동안은 화성에서 지구까지 화물을 운송해 오는 데 드는 비용이 비현실적으로 비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화성에 가서 살 수는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인간이 거주할 수 있도록 화성을 변형시킬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아름다운 세계이기는 해도 화성은 편협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구인에게는 주로 낮은 함량의 산소, 액체 상태에 있는 물의 결여 그리고 많은 양의 자외선 복사 등이 해결해야 할 큰 문제들이다.(저온이라는 악조건은 연중 내내 운영되는 지구의 남극 과학 기지가 입증하듯이 극복하기 힘든 장애는 아니다.) 이 모든 문제들은 공기를 더 많이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대기압이 높아지면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또 산소가 많아지면 지구인도 화성 대기를 직접 호흡할 수 있을지 모르고, 자연스럽게 오존이 형성되어 태양의 자외선 복사로부터 화성의 표면을 보호하게 될 것이다. 구불구불한 운하들, 계단처럼 겹겹이 쌓인 극지 지형, 그 밖의 다른 증거들이 화성의 대기 밀도가 한때 높았음을 시사한다. 이 기체들이 화성에서 모조리 탈출했을 것 같지는 않다. 화성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지표면의 암석과 화학적으로 결합했고 또 일부는 지표면 아래 얼음 안에 갇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현재 극관의 얼음 덩어리 속에 모여 있을 것이다.
극관을 증발시키려면 열을 가해야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극관에 검은색 가루를 뿌려서 태양 광선의 흡수를 조장할 수도 있다. 이것은 지구에서 숲과 초지를 없애 버리는 경우와 반대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극관의 표면적이 엄청나게 넓어서 극관 전체를 검은색 가루로 뒤덮으려면 새턴 5호의 추진 로켓 1,200대 분의 먼지를 지구에서 화성까지 실어 날라야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화성 표면에 자주 이는 강풍이 일껏 덮어 놓은 극관의 먼지를 흩어 버릴지도 모른다. 더 좋은 방법은 자기 복제가 가능한 어떤 종류의 검은 물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까무잡잡한 소형 기계를 화성에 보내서 극관 전역에 걸쳐 토착 물질로부터 자기와 같은 소형 기계들을 복제하도록 한다. 사실 그런 기계들이 있기는 하다. 우리는 그것을 식물이라고 부른다. 적응과 생존에 아주 능한 식물들이 있다. 적어도 지구 미생물들 중 몇몇은 화성에서 생존할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훨씬 혹독한 화성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어두운 색깔의 식물ㅡ예를 들어 이끼ㅡ을 인위적으로 선택해서 유전공학의 기술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 식물이 번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현상을 기대해도 좋다. 먼저 화성의 광대한 얼음 극관에 그와 같은 이끼류의 씨를 뿌린다. 씨가 뿌리를 내려 번창하면서 극관을 어둡게 변색시킬 것이다. 그러면 태양 광선이 아주 효율적으로 흡수된다. 따라서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장구한 세월 동안 갇혀 있던 태고의 화성 대기가 밖으로 방출되는 극적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심지어는 화성판 조니 애플시드(미국의 과수 개척자. 후세 사람들을 위해 미국 각지를 다니면서 사과씨를 뿌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과씨와 묘목을 나눠 주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ㅡ옮긴이)를 상상할 수 있다. 화성의 애플시드는 인간이거나 로봇일 수 있다. 화성의 애플시드가 미래 인류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얼어붙은 극지의 황무지를 종횡무진으로 휩쓸고 다니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이러한 작업을 일반적으로 지구화라고 부른다. 외계 행성의 환경을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바꾸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온실 효과와 반사도의 변화를 통해서 지구의 기온을 약 1도 정도 교란시켰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속도로 화석 연료를 소비하고 산림과 초지를 파괴한다면, 불과 한두 세기 안에 지구의 기온은 1도 이상 더 변할 것이다. 이런 지구의 환경 변화와 함께 다른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할 때 화성이 적정 수준으로 지구화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마 수백 년에서 수천 년에 불과할 것이다. 훨씬 기술이 진보된 미래에는 화성의 대기압을 증가시키고 물을 액체 상태로 존재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극관에서 녹아 내리는 물을 따뜻한 적도 지대로 운송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할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운하망 건설이다.
운하들의 거대한 연결망을 통하여 지표면과 그 아래에서 녹은 얼음을 적도 지방으로 수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상은 100년도 채 못 되는 가까운 과거에 퍼시벌 로웰이 화성에서 실제로 진행 중이라고 착각했던 바로 그 생각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로웰과 월리스 모두 화성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물 부족을 들었다. 운하 연결망이 구성된다면 물 부족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화성에서의 인간 거주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로웰은 극히 어려운 시상 조건에서 관측했다. 로웰이 화성과의 평생에 걸친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스키아파렐리 같은 사람들도 운하 비슷한 것들을 관측한 적이 있다. 스키아파렐리는 그것을 가냘픈 홈이라는 뜻으로 "카날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로웰은 그것을 행성을 대규모로 개조하고 있는 지적 생명의 흔적으로 해석했다. 인간은 감정이 연루되면 스스로를 기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웃 행성에 지성을 갖춘 존재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보다 더 인간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없지 않겠는가?
이 시점에서 나는 굳이 로웰의 생각에 큰 무게를 실어 주고 싶다. 그의 생각을 나는 하나의 훌륭한 예언으로 간주하고 싶기 때문이다. 로웰의 운하망은 정녕 화성인이 건설한 것이 될 터이다. 화성인이 없으니 로웰의 생각이 틀린 것이라고 당신은 나무라겠지만, 이 틀린 생각마저 나는 하나의 정확한 예언이라고 믿고 싶다. 언젠가 화성의 지구화가 실현된다면 화성에 영구 정착해서 화성인이 된 인간들이 거대한 운하망을 건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바로 우리가 로웰의 화성인인 것이다. - P269

275-6 처음에 섬사람들은 자기네가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다른 데 어디엔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라도, 망망대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외부 세계와의 교역 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들은 선박을 발명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달로 갈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발명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 현재 우리 주위에 이런 탐험을 감행해 줄 드레이크 선장도 콜럼버스도 없고, 공중을 헤쳐 나갈 여행편을 발명해 줄 다이달로스도 없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진리의 아버지인 시간은 우리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밝혀 주었던 것처럼 현재 우리가 알고자 갈구하나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 후손에게 드러내 보일 것이다.
- 존 윌킨스, 『달세계의 발견』, 1638년 - P275

276-278 1979년 7월 9일 보이저 2호라는 이름의 로봇과 목성권의 회우가 이루어졌다. 행성 간 공간을 항해하기 시작한 지 거의 2년 만의 사건이었다. 조립에 들어간 개별 부품의 개수만 수백만 개에 이르는 대단히 복잡한 기능의 이 우주선이 그 먼 거리를 아무 탈 없이 무사히 항해해 낸 것이다. 하나의 부품에 이상이 발생한다면 다른 것이 그 부품의 역할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도록,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부품을 여러 개씩 중복 조립한 덕을 단단히 본 것이다. 보이저 2호는 총질량이 0.9톤이고 전체 크기가 큰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이다.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태양계의 외곽 지대를 탐험하는 것이 이 우주선의 임무였기 때문에 보이저 2호는 다른 우주선들과는 달리 태양의 빛 에너지를 동력원으로 직접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이저 2호는 추진력을 태양전지 대신 소형의 자체 핵 발전소에서 공급받도록 했다. 플루토늄 펠릿의 방사능 붕괴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이 핵 발전소는 수백 와트의 발전 용량을 자랑한다. 우주선 중심부에는 3대의 통합 컴퓨터와 함께 온도 제어 시스템과 같은 자체 유지용 설비들이 탑재돼 있다. 지구에서 보내는 명령을 수신하고 탐사 결과들을 지구로 송신하는 일은 지름 3.7미터의 접시형 안테나의 몫이다. 우주선이 고속으로 항해하는 동안 주사 플랫폼이 목성과 목성의 위성을 계속해서 추적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과학 장비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플랫폼 위에 설치돼 있다. 주요 과학 장비에는 자외선 분광 측정기, 적외선 분광 측정기, 하전 입자 검출기, 자기장 측정기, 목성 전파 수신기 등이 포함돼 있다. 보이저 계획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장비는 두 대의 텔레비전 카메라로서 이것들이 태양계 외곽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행성들의 생생한 모습을 수만 장의 화상에 담아 우리에게 전해 준 장본인이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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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흥미 있는 일로는, 775년 당시의 횡단면을 돌이켜보아도 세계 지도상에 나타나는 사회의 수가 오늘날과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사회가 형성하는 문화 지도는 우리 서유럽 사회가 처음 출현한 이래 오늘날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 뒤의 생존 경쟁에서 서유럽 사회는 같은 시대의 다른 사회를 궁지로 몰아 그 경제적·정치적 세력의 그물 속에 넣어 버렸지만, 이들 사회의 고유문화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들 사회는 거센 압박에서도 여전히 그 정신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 P22

27 사실 제국이 멸망했는데도 교회가 살아남은 것은, 교회가 민중을 지도하고 민중의 충성심을 얻은 데 비해, 제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어느 쪽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은 교회는 마침내 거기에서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 P27

29-30 헬라스 사회와 서유럽 사회를 ‘부자관계‘라고 인정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징조를, 다른 ‘어버이‘ 사회를 발견하기 전에 지적해 두자.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요람지 또는 발상지가 선행 사회의 발상지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낡은 사회가 마주한 최전선이 새로운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다른 경우에도 비슷한 이동이 있는 것으로 예상하고 착수해야 한다. - P29

39 그리고 또한 이 중국에 있어서도 고대 그리스 사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몇 세기 동안의 동란기는 조금 앞서 일어난 해체 작용으로부터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죽은 뒤에 일어난 군국주의의 불길은 마침내는 스스로를 불태워 버렸는데, 공자가 인생철학을 펴기 이전에 이미 이 불길은 점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의 현세적인 처세 철학과 노자의 현세 초월적인 무위의 가르침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역사의 성장이 이미 멈췄음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 P39

64-5 1873년에 프리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문명 생활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들의 대부분은, 서로 다른 나라들이 그 발명을 처음으로 필요에 의해 또한 일정한 사회적 진보의 단계에 도달할 때마다 시공간을 달리하여 몇 차례고 되풀이되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인쇄술은 중국과 중세 유럽에서 각기 독립해서 발명되었고, 또 고대 로마에서도 본질적으로 같은 과정이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음이 잘 알려져 있다. 다만 갖가지 간단한 목적에 손쉽게 사용되었던 그 과정을 누군가 나서서 그것을 서적의 복제에 응용하여 큰 진보를 이룩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쇄술의 경우와 같은 일이 문자의 경우에도 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으나, 또 한 가지 전혀 다른 종류의 기술에서도 예를 들 수가 있다. 이집트나 그리스·이탈리아·브리튼 제도의 초기 건축물 유적이나 중앙아메리카의 페허화한 도시에서 가장 낡은 건축의 유적을 비교해 보면, 아치와 돔의 위대한 발명이 인류의 기술사에 있어 한 번만이 아니라 전파 없이 몇 번이고 이루어졌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문명생활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중요한 기술의 대부분ㅡ맷돌의 사용, 활의 사용, 말 길들이기, 통나무배를 파는 법 등ㅡ이 멀리 떨어진 때와 장소에서 몇 번이고 반복 발견된 일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치 제도도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제도에 있어서도 시간과 장소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되풀이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 제도를 요구하는 상황이 서로 멀리 떨어진 때와 장소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한 인류학자도 이와 같은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인간의 사상과 관습의 유사점은, 어디서나 인간의 두뇌 구조는 유사하기 때문에 인간정신의 성질도 유사하다는 데에 있다. 이 두뇌기관의 구조와 신경 작용이 인류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나 대체로 동일하듯이 정신도 일정한 보편적인 특성·능력·행동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 두뇌 작용의 유사성은, 예를 들면 19세기에 다윈과 러셀 월리스(영국의 박물학자·사회사상가. 1823~1913)가 같은 자료로 연구 활동을 해서 동시에 진화론에 도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 이에 따라 같은 시대에 동일한 발명 또는 발견에 대해 우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고 나타나는 수많은 사례들이 설명된다. 인류의 공통된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유사한 정신 작용ㅡ그 자료는 단편적이며, 지력은 유치하고, 결과는 모호하지만ㅡ에 의해 토테미즘이나 족외혼인제(에크소가미), 수많은 정죄의식과 같은 신앙이나 제도가 가장 멀리 떨어진 민족이나 지역 곳곳에 출현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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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인생 100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이라도 100만 년이라는 긴 세월에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20세기에도 아주 기이한 자연 현상이 몇 건 일어났다.
그중의 하나가 1908년 6월 30일 이른 아침 중앙시베리아의 한 오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날 거대한 불덩어리 하나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이 목격됐다. 그것이 지평선에 닿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약 2,000제곱킬로미터의 숲이 모두 납작하게 밀렸고, 낙하 지점 가까이에 있던 수천 그루의 나무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그때 대기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지구를 두 바퀴나 돌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틀 동안은 미세한 고체 티끌 입자들이 대기 중에 하도 많이 떠돌아 다녀서 폭발 지점에서 무려 1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런던에서도 한밤중에 신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온 하늘이 산란광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의 제정 러시아 정부는 그런 사소한 일을 한가하게 조사할 여력이 없었다. 멀고 먼 시베리아의 오지, 미개한 퉁구스 족이 사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현지의 상황을 조사하고 현장의 증언을 청취하기 위해서 파견된 정부 조사단이 도착한 것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10년이 지난 후였다. 그들이 조사 현장에서 가져온 증언의 일부를 들어 보자.

이른 아침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이었다. 천막 안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 천막과 함께 갑자기 공중으로 떠올랐다. 땅바닥에 떨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가족 모두가 경미한 타박상을 입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크리나와 이반은 정신을 잃은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들이 정신을 차릴 즈음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주위의 나무들이 온통 불에 타고 있었으며, 숲의 태반이 파괴돼 있었다.

나는 그때 바노바라의 무역 사무소 앞에 집을 갖고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짚 앞 베란다에 앉아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무로 만든 통에 테두리를 두르려고 막 도끼를 집어 들었을 때, ...... 갑자기 하늘이 둘로 쪼개지고, 숲 위로 높이 타오르는 불빛이 북쪽 하늘로 넓게 번지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내 웃옷에 불이 붙은 듯한 열기를 느꼈다. ...... 상의를 벗어 던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꽝 하는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아주 큰 무엇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베란다에서 약 6미터 정도 떨어진 땅 위로 튕겨 나가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내가 뛰어와서 나를 오두막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돌이 쏟아지는 듯한, 아니면 총을 쏘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땅이 흔들렸다. 나는 머리를 감싸고 땅에 엎드렸다. 머리가 돌에 맞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늘이 쪼개질 때, 대포에서 나올 법한 뜨거운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와 오두막을 쓸고 지나갔다. 땅바닥에는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아침을 먹으려고 쟁기 옆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대포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내 말이 그 소리에 놀라서 땅에 펄썩 주저앉았다. 북쪽 숲 위로는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가문비나무 숲이 다 쓰러지고 있었다. 나는 폭풍이 온다고 생각했고 쟁기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두 손으로 쟁기를 움켜쥐었다. 바람이 아주 강해서 땅 위의 흙을 휘몰아 갔으며, 폭풍은 앙가라의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만들었다. 내 땅이 언덕배기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요란한 소리에 말들이 어찌나 놀라던지, 어떤 놈은 쟁기를 질질 끌면서 이리저리 도망다녔고, 어떤 녀석은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굉음이 들렸을 때 넋이 나간 채 가슴에 성호를 긋는 목수들이 보였고, 세 번째 충격음이 터지자 목수들이 건물에서 나무토막이 쌓인 곳으로 떨어졌다. 너무 큰 충격으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있어서 안심시켜 주느라고 나는 그들을 달래야 했다. 우리는 결국 일거리를 내버려 둔 채 마을로 돌아왔다. 두려움에 떨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거리에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느라고 모두들 자기가 겪은 상황을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밭에 있었다. 말 한 마리는 쟁기에 이미 붙들어 맸고, 나머지 한 마리마저 막 매려던 참이었는데, 오른쪽에서 총소리가 한 방 크게 들렸다. 내가 즉시 돌아서 보니, 하늘에 길쭉한 물체가 불길에 싸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앞쪽의 머리 부분이 꼬리 부분보다 훨씬 넓었고 색깔은 대낮에 보는 불과 같았다. 크기는 태양보다 여러 배 컸지만 밝기는 태양보다 덜 밝아서 맨눈으로 쳐다볼 수 있었다. 불길 뒤로 먼지처럼 보이는 것이 따랐다. 가장자리를 빙 둘러가며 먼지 구름이 작게 피었고 지나간 자리에 푸르스름한 연기가 감돌았다. ...... 불길이 사라지자마자 꽝꽝 하는 소리가 총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고 땅이 흔들렸으며 판잣집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나는 그때 칸 강변에서 양모를 빨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놀란 새의 파닥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강물이 급작스럽게 불어 수위가 높아졌다. 그 뒤에 날카롭고 큰 소리가 한 번 들렸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일하던 사람 중 하나가 놀라서 물에 빠졌다.

이 놀라운 현상을 우리는 퉁구스카 사건Tunguska Event이라고 부른다. - P164

169-70 만일 이와 같은 규모의 충돌이 오늘 다시 발생한다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그것을 핵폭발로 오인할 소지가 다분하다. 혜성 충돌의 결과가 메가톤 급의 핵폭탄이 폭발할 때 볼 수 있는 상황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 치솟는 불덩이의 규모며 버섯구름의 출현은 물론이고 그 모양까지 똑같다. 단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혜성의 경우 감마선의 방출과 방사능 낙진이 없다는 점이다. 큼직한 혜성 조각과 지구가 충돌할 확률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건이 전혀 안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자연에서 반드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 현상이 핵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괴이한 시나리오이기는 하지만 한번 들어 보도록 하자. 과거 45억 년의 역사를 통해서 수백만 개의 혜성들이 지구와 충돌해 왔듯이, 작은 혜성 하나가 지구와 충돌하는 사건이 오늘 발생한다면, 현대 지구 문명은 그 사건에 즉각적으로 잘못 반응하여 핵전쟁을 일으키고는 자기 파멸로 치달을지도 모른다. 이 시나리오의 개연성은 혜성 충돌로 일어나는 현상이 핵폭발과 유사하다는 사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혜성 자체의 구조, 지구와 혜성 충돌 가능성 그리고 그 충돌이 가져올 자연 재해의 내역과 규모 등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깊게 연구해 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려할 만한 사건이 한 번 있었다. 1979년 9월 22일 미국의 벨라 인공 위성이 남대서양과 서인도양 근방을 날다가 강렬한 불빛이 두 번 번쩍거리는 것을 감지했다. 사람들은 이 섬광의 발생 원인으로 우선 핵실험을 꼽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이스라엘이 TNT 2,000톤 규모, 즉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핵폭탄의 6분의 1 수준의 소형 핵무기를 비밀리에 시험하는 중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국제 정치에 미칠 심각한 영향을 세계 도처에서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섬광의 원인이 애초부터 핵무기가 아니라 소행성이나 혜성 조각의 충돌로 밝혀졌더라면 그 사건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공군기가 섬광이 검출된 지역의 상공을 비행하면서 실제로 방사능을 측정해 본 결과, 그 어떤 방사능도 검출되지 않았다. 결국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세계는 이 사건을 통해서 확실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즉 지구와 근접 천체의 충돌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는다면, 현대 지구 문명이 엉뚱한 이유 때문에 핵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 P169

170-1 혜성은 대부분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문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얼음‘이라는 표현은 순수하게 물로 된 얼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 메탄, 암모니아 등의 혼합물이 결빙된 것을 총체적으로 얼음이라고 지칭한다. - P170

181 태양계의 형성 초기에는 생성 중이던 행성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서 긴 타원형 궤도를 그리며 서로 엇갈리는 궤도를 돌던 행성들은 충돌하여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원형 궤도를 돌던 원시 행성들은 살아남아 점점 크게 자랄 수 있었다. 현재의 행성들은 충돌이라는 자연 선택의 과정에서 살아남은 것들이다. 초기의 파국적 충돌을 모두 이겨내고 이제 우리 태양계는 중년의 안정기에 들어선 것이다. - P181

183 지구와 작은 헤성 조각이 충돌하면 퉁구스카 사건과 같은 폭발이 일어나는데, 이런 사건은 대략 1,000년에 한 번꼴로 발생한다. 그러나 핼리 혜성과 같이 지름이 대략 20킬로미터 수준에 이르는, 비교적 커다란 혜성과 충돌할 확률은 기껏해야 10억년에 한 번꼴이다. - P183

195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제시한 것만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제시한 가설들 중에도 훗날 틀렸다고 밝혀지는 것이 많다. 그러나 과학은 자기 검증을 생명으로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벨리코프스키 건의 가장 서글픈 면은 그 가설이 틀렸다거나 그가 이미 입증된 사실을 간과해서가 아니라, 자칭 과학자라는 몇몇 이들이 벨리코프스키의 작업을 억압하려 했던 데에 있다. 과학은 자유로운 탐구 정신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자유로운 탐구가 곧 과학의 목적이다. 어떤 가설이든 그것이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 가설이 지니는 장점을 잘 따져 봐 주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을 억압하는 일은 종교나 정치에서는 흔히 있을 지 모르겠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이런 자세의 과학이라면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누가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할지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자기 검증을 철저히 해야 한다. - P195

196-7 사이 사진 중) 여기에서는 DNA 나선을 볼 수 있는데, 나선 가닥 각각에 원자들이 대략 4,000개씩 늘어서 있다. DNA 분자 하나에서 나선 가닥은 대략 1억번 휘감아 돈다. 그러므로 DNA 분자 하나는 약 1000억 개 정도의 원자로 구성돼 있다.1000억은 전형적인 은하 하나에 속한 별들의 총수와 엇비슷한 수이다. - P196

198 자외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호박벌과 광전 소자는 자외선을 능히 감지할 수 있다. 세상은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고 넓다. - P198

199-200 1844년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영원히 미지로 남겨져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식의 예를 찾고 있었다. 그는 별과 행성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자신이 찾던 완벽한 사례라고 생각했다. 별에 직접 가 볼 수도 없고 시료를 채취할 수도 없으니 별의 구성 성분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콩트가 죽은 지 겨우 3년 후에 스펙트럼으로부터 화학 성분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P199

236-7 하지만 지구상의 세균 중에는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종류가 상당수 있다. 그 밖에도 온도가 너무 떨어지면 일시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는 종류, 자외선을 피해 자갈이나 얇은 모래층 밑으로 숨는 종류 등도 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액체 상태의 물이 소량이라도 존재하면 세균들이 실제로 번식하기도 했다. 지구의 세균이 화성의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 화성에 세균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화성에서 훨씬 더 잘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가 보기부터 해야 한다.
(구)소련은 무인 행성 탐사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했다. 1년이나 2년에 한 번씩 최소한의 에너지로 화성이나 금성으로 우주선을 발사할 수 있는 시기가 지구에 찾아온다. 행성들의 상대 위치와 케플러의 법칙과 뉴턴의 물리학만 알면 그 시기를 계산할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이후 (구)소련은 그런 기회를 거의 놓치지 않고 그때마다 우주 탐사선을 발사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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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케플러는 『꿈』을 통해서 지구의 자전이 가능한 일이고 멋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임을 알리려고 애썼다. "다수가 그른 길을 걷지 않는 한, ...... 나 역시 다수의 편에 서고 싶다. 그 까닭에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과학을 설명해 주려고 무진 애를 쓰는 바이다." - P148

150-1 달에서는 낮과 밤이 매우 길기 때문에 "달에는 추위와 더위가 양극으로 치달으며 일교차가 매우 크다. 따라서 달의 기후 조건은 대단히 난폭하다."라고 케플러는 달의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케플러의 달나라 상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케플러는 달에 대기권이 있다고 믿다고 믿었고 바다와 생물도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케플러는 달의 운석공을 가리키며 이 때문에 달 표면이 "마마를 앓은 곰보 아이의 얼굴처럼 심하게 얽었다."라고 했는데, 그 분화구의 기원에 대한 케플러의 관점이 꽤 흥미롭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분화구는 솟구쳐 나온 지형이라기보다 움푹 파인 구덩이의 형태이다. 케플러는 자기 스스로 달을 관측하여, 분화구 둘레를 에워싸는 성벽 비슷한 지형과 분화구 중앙에 비죽이 솟은 산봉우리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정한 기하학적 형태의 원에서 볼 수 있는 고도의 질서는 오직 지성을 갖춘 생물의 존재로만 그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케플러는 추론했다. 그렇지만 거대한 암석이 하늘에서 떨어지면 지면이 국부적으로 폭발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물질이 튕겨 나가며 거의 완벽한 대칭 구조의 원형 구덩이가 파인다. 달과 여러 고체 행성들에서 볼 수 있는 대다수의 분화구도 실제로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케플러는 그 대신 "이성적 능력으로 이렇게 움푹한 지형을 달 표면에 건설할 수 있는 종족의 존재"를 추론했던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이 종족은 개체 수가 대단히 많아 이 구덩이를 파는 무리, 저 구덩이를 건설하는 무리가 따로 있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토록 거대한 건설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케플러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만리장성을 구체적인 반증 사례로 들었다.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이 실은 오늘날 지구를 선회하는 인공 위성에서 식별할 수 있는 지구의 유일한 거대 지형지물이기는 하다. 기하학적 질서의 배후에서 지적 생물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다는 생각은 평생 동안 케플러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중심 사상이었다. 달의 분화구에 대한 케플러의 주장은, 훗날 화성의 운하 논쟁으로 이어진다. 외계에서 생명을 탐색하려는 시도가 망원경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당대 최고의 이론가에서 비롯됐다는 점도 현대를 사는 우리가 꼭 한번 짚고 넘어갈 문제이다. - P150

151-2 그의 작품 『꿈』은 부분적으로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은 튀코 브라헤를 찾아간다. 또 그에게는 약 장사를 하는 부모가 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혼령과 악마들과 어울려 지내는데, 결국에는 그 악령 중의 하나가 주인공에게 달나라로 여행할 수단을 제공한다. 케플러는 "비록 오감으로 인지 가능한 세계에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도, 우리에게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꿈』을 읽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케플러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며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케플러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또 30년 전쟁 당시 공상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케플러의 책은 그의 어머니가 마녀라는 증거물로 채용됐던 것이다.
케플러는 자신도 여러 가지 개인적 문제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서둘러 뷔르템베르크로 달려갔다. 갈릴레오가 가톨릭 감옥에 갇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흔넷의 그의 노모도 사슬에 묶여 개신교의 감옥에 갇힌 채 고문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마녀 누명을 쓰게 된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모친이 주문을 외워 뷔르템베르크 주민들을 크고 작은 병에 걸리게 했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케플러도 주민들이 걸린 질병 등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적 원인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의 조사와 연구는 성공적이었다. 케플러의 전 생애가 그러했듯이 이 경우에도 우리는 미신과 싸워 이긴 한 위대한 이성의 승리를 목격하게 된다. 케플러의 모친은 추방당했고 만일 뷔르템베르크로 돌아올 경우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관대한‘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케플러의 열성적인 변호의 덕분이었던지 뷔르템베르크 공작은 미미한 증거를 가지고 마녀 재판을 여는 일을 금지시켰다. - P151

152 전쟁의 북새통에서 케플러는 재정 지원처를 거의 모두 상실했다. 그의 말년은 돈을 빌고 후원자를 구하러 다니는 동동걸음으로 채워졌다. 전에 루돌프 2세에게 했던 것처럼, 그는 바렌슈타인 대공을 위해 별점을 쳐 주었고, 바렌슈타인 대공이 지배하는 슐레지엔 지방의 한 마을인 사간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케플러가 스스로 지은 비문을 읽어 보자. "어제는 하늘을 재더니, 오늘 나는 어둠을 재고 있다. 나는 뜻을 하늘로 뻗쳤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 그러나 30년 전쟁으로 그의 묘마저 사라졌다. 오늘날 케플러의 묘비가 다시 세워진다면 그의 과학적 용기를 기리는 뜻에서 이런 문장을 새겨넣으면 어떨까. "그는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 P152

153 일생 동안 병약했고 스스로를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라 생각했고 걸핏하면 남과 다투었으며 성격이 비사교적인 데다가 죽는 날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아이작 뉴턴이지만, 그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제일가는 과학의 천재였을 것이다. - P153

153-4 뉴턴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비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는 못 참아 했다. 예를 들어, 빛이 "물질인가, 아니면 현상인가?", 또는 "인력이 어떻게 진공을 가로질러 작용할 수 있는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진작부터 뉴턴은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의 통상적 가르침이 성경의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의 전기 작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렇게 썼다.
뉴턴은 마이모니데스 학파의 유대교적 유일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와 같은 신념에 도달한 것은, 이른바 합리주의적 또는 회의주의적 사고를 거쳐서가 아니라, 전부 권위 있다는 고대 문헌들의 해석을 통해서였다. 뉴턴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밝혀진 사료 중에서 삼위일체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설을 후세 사람들이 거짓으로 덧붙여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계시로 밝혀진 신이 세 가지 위격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의 신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이신 유일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할 생각이었기에 뉴턴은 평생토록 이 비밀을 지키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뉴턴도 그 시대를 풍미하던 미신을 완전히 멀리 하지 못했고 신비주의와도 자주 접촉했다. 사실상, 뉴턴이 지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도 상당 부분 이 같은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의 대립과 긴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1663년 스투어브리지에서 박람회가 열렸다. 당시 스무 살이던 뉴턴은 그곳에서 "안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궁금해서" 점성술 책 한 권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는 그 책을 읽다가 도면을 하나 이해하지 못해 계속 읽어 나갈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가 삼각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각법에 관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그 책의 기하학적 논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구해다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에 뉴턴은 미적분학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 P153

154-5 학생 시절 뉴턴은 빛에 큰 관심이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태양에 빠져들었다. 뉴턴은 거울에 비친 태양의 상을 들여다보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기를 몇 시간, 곧 내 두 눈은 아무리 밝은 물체를 본다 해도 태양 말고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쓰거나 읽기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내리 사흘 동안 어두운 방에 문을 닫아걸고 들어가 지내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태양을 상상하는 일만은 그만두느라고 무척 고생을 했다. 왜냐면 어둠 속에서도 태양 생각만 하면, 즉시 태양의 형상이 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 P154

155-6 1666년 스물세 살의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이 됐을 때 흑사병이 돌았다. 그래서 뉴턴은 자신이 태어난 외딴 고향 마을 울즈소프에 내려가서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고 1년의 세월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 뉴턴은 그 1년 동안에 미분과 적분을 발명하고 빛의 기본 성질을 알아냈으며 만유인력 법칙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이와 비슷했던 해를 하나 더 찾는다면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기적의 해"라 불렀던 1905년뿐이다. 누군가 뉴턴에게 어떻게 그리 놀라운 발견들을 많이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것들을 그냥 생각하면서 해냈습니다."라고 아무 참고도 되지 않을 답을 했다고 한다. 그의 업적이 얼마나 뛰어났는가 하면, 젊은 뉴턴이 대학으로 되돌아온 지 5년이 지나자 그의 스승이었던 아이작 배로 교수가 수학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 그 자리를 뉴턴에게 넘겨줄 정도였다.
다음은 뉴턴의 하인이 40대 중반의 뉴턴을 묘사한 글이다.
저는 그분이 오락이나 기분 전환을 목적으로 바람을 쏘이러 말을 타고 나간다거나, 산보를 한다거나, 아니면 볼링을 친다거나, 또는 이러저러한 운동 하나 하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연구에 쓰지 않은 시간은 모두 내다 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하셨기에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분이 연구에 얼마나 열심이셨는지 방을 비우는 적이 없었고, 있다면 오로지 학기 중 강의할 때뿐이었습니다. 그분의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은 얼마 없었고, 강의를 들어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이해하는 학생이 없으니 그분의 강의는 벽에다 대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 P155

157 유감스럽게도 뉴턴은 그의 걸작, 『프린키피아』에 자신이 케플러에게 진 빚을 언급하지 않았다. 케플러는 뉴턴의 감사를 백 번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하는 데 케플러의 공헌이 지대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1686년 에드먼드 핼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뉴턴은 자신이 발견한 중력 법칙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약 20년 전쯤에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에서부터 이 관계를 추론해 낼 수 있었다네." - P157

164 한 개인이 평생 동안 겪게 되는 자연재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해야 태풍 정도가 고작이니, 우리는 지구에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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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지금까지 그 누구도 원시 지구의 기체와 물을 시험관에 함께 넣어 각종 반응을 겪게 한 다음, 거기에서 무엇인가 꼬물거리는 것이 기어나오게 한 적은 한번도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생물 중에서 가장 작다는 바이로이드만 하더라도, 1만 개 정도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 P95

97-8 우리의 눈높이를 분자 수준의 화학 반응에 맞춘다면 외계의 생명 현상도 지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외계와 지구 생물의 모습마저 서로 비슷하다고 기대하지는 말자. 지구라는 비교적 제한된 환경이 갖고 있는 동질성과 생명 현상을 지배하는 분자생물학의 유일성에도 불구하고 지구에 사는 생물들은 엄청난 다양성을 자랑한다. 지구라는 행성 하나에서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태양계를 벗어난 세계의 종과 형태에 따른 다양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외계 가축과 채소는 우리에게 익숙한 지구의 그것들과는 근본에서부터 큰 차이를 드러낼 것이다. 주어진 환경 조건에 대한 최상의 해결책은 늘 하나밖에 없을 터이므로, 모종의 수렴성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시광선 파장 대역의 빛을 이용해 사물을 보는 존재들은 두 방향에서 시야를 확보해야 거리를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도 두 개일 것이다. 그러나 진화의 긴 역사에서 볼 수 있었던 무작위성의 위력을 감안한다면 외계 생물들은 그 됨됨이로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것임에 틀림이 없다. - P97

106-7 만일 누군가가 절대 불변의 행성에 살고 있다면, 그가 할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예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과학하려는 마음이 일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또 하나 극단인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변화가 지극히 무작위적이거나 지나치게 복잡해서 생각해 봤자 별수 없는 처지라면, 그런 세상 역시 과학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두 극단의 중간 어디쯤엔가 있다. 사물의 변화가 있되 그 변화는 어떤 패턴이나 규칙을 따른다. 흔히들 만물의 변화는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고 한다. 허공에 집어 던진 막대기는 반드시 땅으로 다시 떨어지고, 서쪽 지평선 아래로 진 해는 반드시 이튿날 아침 동쪽 하늘에 다시 떠오른다.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해 보면 알아낼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이 가능하고, 과학이 밝혀낸 지식을 이용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파악할 줄 아는 지혜를 갖고 있다. 애초부터 인간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배후를 의식하며 살아왔다. 인류가 사냥을 하고 불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무언가를 생각해 보고 알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텔레비전, 영화, 라디오, 하다못해 책마저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인류는 지난날의 거의 대부분을 이런 상태로 보냈다. 우리 조상들은 달 없는 밤,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이 사그라져 깜부기불이 되면 그 주위에 앉아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 P106

123 마르틴 루터가 코페르니쿠스를 두고 한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재미가 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벼락 출세한 점성술사"라고 일컬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코페르니쿠스를 겨냥해서, "이 바보가 천문학이라는 과학을 통째로 뒤엎어 놓으려 한다. 그러나 성서에 분명히 쓰여 있듯이, 여호수아가 멈춰라 하고 명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고까지 했다. - P123

132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입의 1할을 벌금으로 물어야 하거나 그라츠에서 추방당해야 했다. 케플러는 추방을 택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나는 위선을 행하라고 배운 적이 없다. 나의 신앙은 진지한 것이다. 나의 신앙이 농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 P132

132-3 케플러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인은 지병이 있는 데다 얼마 전에 두 아이를 잃은 상태였다. 케플러에 따르면 그녀는 "바보 같고 부루퉁하고 외톨이고 침울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하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리 높은 계급의 출신은 아니었어도 시골의 상류층 집안에서 자란 여자라 남편의 가난한 직업을 몹시 경멸했다. 케플러는 또 케플러 나름대로 그녀를 나무라고는 했다. 그것과 관련해서 케플러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연구에 몰두하다가 깜빡 잊고 그녀를 또 꾸짖고는 했다. 그러나 과거 경험이 이제는 약이 되어 나는 그녀를 결코 다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내 말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 이상 나무라기보다 내 손가락을 깨무는 편이 더 낫다." - P132

133 튀코 브라헤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황금으로 만든 가짜 코를 달고 멋을 부렸는데, 진짜 코는 학창 시절 누가 수학을 더 잘하는가를 놓고 펜싱으로 결투를 하다가 잃었다고 했다. - P133

134-5 튀코 브라헤는 로젠버그 남작이 베푼 만찬에서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뒤,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기보다 예의를 차리느라" 남작 앞을 잠시도 뜨지 못하고 급한 용무를 지나치게 오랫동안 참다가 방광염에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방광염은 음식과 음주를 자제하라는 충고를 고집스레 듣지 않는 바람에 더 악화됐다. 그러나 튀코 브라헤는 숨을 거두기 전에 자신의 관측 자료를 케플러에게 물려준다고 유언했다. 그리고 "마지막 밤은 가벼운 혼수상태에서 시를 짓는 사람처럼 다음의 독백을 되풀이했다. ‘내 삶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고 하지 않게 하소서!‘" - P134

137 기원전 6세기의 피타고라스로부터 플라톤,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케플러 이전까지 살던 기독교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모두 원이 ‘완벽‘한 기하학적 도형이므로, 행성들은 마땅히 원 궤도를 따라 돌아야 한다고 믿었다. 행성들은 하늘 높이 자리 잡고 있어, 이 땅의 ‘부패‘로부터 거리가 먼,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신비와 ‘완벽‘을 겸비한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 튀코 브라헤, 코페르니쿠스도 행성이 운동하는 길은 원이라고 못박아 두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원형이 아닌 궤도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라고까지 단언했는데, 왜냐하면 "최상의 모습으로 창조된 신의 피조물을 감히 불완전하다고 여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케플러도 지구와 화성이 태양 주위를 원 궤도를 따라 돈다고 간주하고 튀코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이해하고자 고심했던 것이다. - P137

138-9 원 궤도와 실제 궤도를 분간하는 일은 우선 측정값이 정확해야 가능했고 비록 자신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 측정값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어디나 조화로운 비율이 장식처럼 박혀 빛나는 이 우주이지만, 그러한 조화의 비율도 경험적 사실에 반드시 부합해야 한다." 케플러는 여기서 원 궤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성한 기하학에 대한 그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영혼에 가해진 충격을 감수해야만 했다. 케플러는, 천문학이라는 마구간에서 원형과 나선형을 쓸어 치우자, "손수레 한가득 말똥"만 남았다고 했다. 원을 길게 늘인 달걀의 모습(타원)을 그는 이렇게 말똥에 비유했던 것이다.
결국 케플러는 원에 대한 동경이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구도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대로 과연 하나의 행성이었다. 그리고 케플러가 보기에 지구는, 전쟁, 질병, 굶주림과 온갖 불행으로 망가진, 확실히 완벽과는 아주 먼 존재였다. 이런 지구를 완벽하다고 믿었다면 나머지 행성들도 완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행성들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케플러는 고대 이래 행성이 지구처럼 불완전한 것들로 구성된 물체라고 이야기한 몇 안 되는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만일 행성이 ‘불완전‘하다면, 그 궤도 역시 불완전하지 않겠는가? 케플러는 달걀 모양 곡선을 여럿 시험해 보았다. 열심히 계산해 내려가다 산술적 실수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옳은 답인데 틀린 것으로 여겨 버렸고) 몇 달 뒤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타원의 공식을 이용하여 분석을 다시 시도했다. 그 공식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페르가의 아폴로니우스가 처음 만들어 낸 식이었다. 결과는 튀코 브라헤의 관측값과 완전히 일치했다. "자연의 진리가, 나의 거부로 쫓겨났었지만, 인정을 받고자 겉모습을 바꾸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들어왔으니...... 아, 나야말로 참으로 멍청이였구나!" - P138

147 구교도와 신교도 양편 모두 입으로는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떠들어댔지만, 실은 영토와 권력에 주렸던 이들이 종교의 광신적 측면을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했을 뿐이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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