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케플러는 『꿈』을 통해서 지구의 자전이 가능한 일이고 멋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임을 알리려고 애썼다. "다수가 그른 길을 걷지 않는 한, ...... 나 역시 다수의 편에 서고 싶다. 그 까닭에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과학을 설명해 주려고 무진 애를 쓰는 바이다." - P148

150-1 달에서는 낮과 밤이 매우 길기 때문에 "달에는 추위와 더위가 양극으로 치달으며 일교차가 매우 크다. 따라서 달의 기후 조건은 대단히 난폭하다."라고 케플러는 달의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케플러의 달나라 상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케플러는 달에 대기권이 있다고 믿다고 믿었고 바다와 생물도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케플러는 달의 운석공을 가리키며 이 때문에 달 표면이 "마마를 앓은 곰보 아이의 얼굴처럼 심하게 얽었다."라고 했는데, 그 분화구의 기원에 대한 케플러의 관점이 꽤 흥미롭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분화구는 솟구쳐 나온 지형이라기보다 움푹 파인 구덩이의 형태이다. 케플러는 자기 스스로 달을 관측하여, 분화구 둘레를 에워싸는 성벽 비슷한 지형과 분화구 중앙에 비죽이 솟은 산봉우리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정한 기하학적 형태의 원에서 볼 수 있는 고도의 질서는 오직 지성을 갖춘 생물의 존재로만 그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케플러는 추론했다. 그렇지만 거대한 암석이 하늘에서 떨어지면 지면이 국부적으로 폭발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물질이 튕겨 나가며 거의 완벽한 대칭 구조의 원형 구덩이가 파인다. 달과 여러 고체 행성들에서 볼 수 있는 대다수의 분화구도 실제로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케플러는 그 대신 "이성적 능력으로 이렇게 움푹한 지형을 달 표면에 건설할 수 있는 종족의 존재"를 추론했던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이 종족은 개체 수가 대단히 많아 이 구덩이를 파는 무리, 저 구덩이를 건설하는 무리가 따로 있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토록 거대한 건설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케플러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만리장성을 구체적인 반증 사례로 들었다.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이 실은 오늘날 지구를 선회하는 인공 위성에서 식별할 수 있는 지구의 유일한 거대 지형지물이기는 하다. 기하학적 질서의 배후에서 지적 생물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다는 생각은 평생 동안 케플러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중심 사상이었다. 달의 분화구에 대한 케플러의 주장은, 훗날 화성의 운하 논쟁으로 이어진다. 외계에서 생명을 탐색하려는 시도가 망원경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당대 최고의 이론가에서 비롯됐다는 점도 현대를 사는 우리가 꼭 한번 짚고 넘어갈 문제이다. - P150

151-2 그의 작품 『꿈』은 부분적으로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은 튀코 브라헤를 찾아간다. 또 그에게는 약 장사를 하는 부모가 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혼령과 악마들과 어울려 지내는데, 결국에는 그 악령 중의 하나가 주인공에게 달나라로 여행할 수단을 제공한다. 케플러는 "비록 오감으로 인지 가능한 세계에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도, 우리에게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꿈』을 읽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케플러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며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케플러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또 30년 전쟁 당시 공상 과학 소설이라는 장르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케플러의 책은 그의 어머니가 마녀라는 증거물로 채용됐던 것이다.
케플러는 자신도 여러 가지 개인적 문제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서둘러 뷔르템베르크로 달려갔다. 갈릴레오가 가톨릭 감옥에 갇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흔넷의 그의 노모도 사슬에 묶여 개신교의 감옥에 갇힌 채 고문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마녀 누명을 쓰게 된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모친이 주문을 외워 뷔르템베르크 주민들을 크고 작은 병에 걸리게 했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케플러도 주민들이 걸린 질병 등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적 원인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의 조사와 연구는 성공적이었다. 케플러의 전 생애가 그러했듯이 이 경우에도 우리는 미신과 싸워 이긴 한 위대한 이성의 승리를 목격하게 된다. 케플러의 모친은 추방당했고 만일 뷔르템베르크로 돌아올 경우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관대한‘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케플러의 열성적인 변호의 덕분이었던지 뷔르템베르크 공작은 미미한 증거를 가지고 마녀 재판을 여는 일을 금지시켰다. - P151

152 전쟁의 북새통에서 케플러는 재정 지원처를 거의 모두 상실했다. 그의 말년은 돈을 빌고 후원자를 구하러 다니는 동동걸음으로 채워졌다. 전에 루돌프 2세에게 했던 것처럼, 그는 바렌슈타인 대공을 위해 별점을 쳐 주었고, 바렌슈타인 대공이 지배하는 슐레지엔 지방의 한 마을인 사간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케플러가 스스로 지은 비문을 읽어 보자. "어제는 하늘을 재더니, 오늘 나는 어둠을 재고 있다. 나는 뜻을 하늘로 뻗쳤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 그러나 30년 전쟁으로 그의 묘마저 사라졌다. 오늘날 케플러의 묘비가 다시 세워진다면 그의 과학적 용기를 기리는 뜻에서 이런 문장을 새겨넣으면 어떨까. "그는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 P152

153 일생 동안 병약했고 스스로를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라 생각했고 걸핏하면 남과 다투었으며 성격이 비사교적인 데다가 죽는 날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아이작 뉴턴이지만, 그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제일가는 과학의 천재였을 것이다. - P153

153-4 뉴턴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비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는 못 참아 했다. 예를 들어, 빛이 "물질인가, 아니면 현상인가?", 또는 "인력이 어떻게 진공을 가로질러 작용할 수 있는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진작부터 뉴턴은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의 통상적 가르침이 성경의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의 전기 작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렇게 썼다.
뉴턴은 마이모니데스 학파의 유대교적 유일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와 같은 신념에 도달한 것은, 이른바 합리주의적 또는 회의주의적 사고를 거쳐서가 아니라, 전부 권위 있다는 고대 문헌들의 해석을 통해서였다. 뉴턴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밝혀진 사료 중에서 삼위일체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설을 후세 사람들이 거짓으로 덧붙여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계시로 밝혀진 신이 세 가지 위격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의 신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이신 유일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할 생각이었기에 뉴턴은 평생토록 이 비밀을 지키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뉴턴도 그 시대를 풍미하던 미신을 완전히 멀리 하지 못했고 신비주의와도 자주 접촉했다. 사실상, 뉴턴이 지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도 상당 부분 이 같은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의 대립과 긴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1663년 스투어브리지에서 박람회가 열렸다. 당시 스무 살이던 뉴턴은 그곳에서 "안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궁금해서" 점성술 책 한 권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는 그 책을 읽다가 도면을 하나 이해하지 못해 계속 읽어 나갈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가 삼각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각법에 관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그 책의 기하학적 논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구해다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에 뉴턴은 미적분학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 P153

154-5 학생 시절 뉴턴은 빛에 큰 관심이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태양에 빠져들었다. 뉴턴은 거울에 비친 태양의 상을 들여다보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기를 몇 시간, 곧 내 두 눈은 아무리 밝은 물체를 본다 해도 태양 말고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쓰거나 읽기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내리 사흘 동안 어두운 방에 문을 닫아걸고 들어가 지내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태양을 상상하는 일만은 그만두느라고 무척 고생을 했다. 왜냐면 어둠 속에서도 태양 생각만 하면, 즉시 태양의 형상이 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 P154

155-6 1666년 스물세 살의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이 됐을 때 흑사병이 돌았다. 그래서 뉴턴은 자신이 태어난 외딴 고향 마을 울즈소프에 내려가서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고 1년의 세월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 뉴턴은 그 1년 동안에 미분과 적분을 발명하고 빛의 기본 성질을 알아냈으며 만유인력 법칙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이와 비슷했던 해를 하나 더 찾는다면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기적의 해"라 불렀던 1905년뿐이다. 누군가 뉴턴에게 어떻게 그리 놀라운 발견들을 많이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것들을 그냥 생각하면서 해냈습니다."라고 아무 참고도 되지 않을 답을 했다고 한다. 그의 업적이 얼마나 뛰어났는가 하면, 젊은 뉴턴이 대학으로 되돌아온 지 5년이 지나자 그의 스승이었던 아이작 배로 교수가 수학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 그 자리를 뉴턴에게 넘겨줄 정도였다.
다음은 뉴턴의 하인이 40대 중반의 뉴턴을 묘사한 글이다.
저는 그분이 오락이나 기분 전환을 목적으로 바람을 쏘이러 말을 타고 나간다거나, 산보를 한다거나, 아니면 볼링을 친다거나, 또는 이러저러한 운동 하나 하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연구에 쓰지 않은 시간은 모두 내다 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하셨기에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분이 연구에 얼마나 열심이셨는지 방을 비우는 적이 없었고, 있다면 오로지 학기 중 강의할 때뿐이었습니다. 그분의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은 얼마 없었고, 강의를 들어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이해하는 학생이 없으니 그분의 강의는 벽에다 대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 P155

157 유감스럽게도 뉴턴은 그의 걸작, 『프린키피아』에 자신이 케플러에게 진 빚을 언급하지 않았다. 케플러는 뉴턴의 감사를 백 번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하는 데 케플러의 공헌이 지대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1686년 에드먼드 핼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뉴턴은 자신이 발견한 중력 법칙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약 20년 전쯤에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에서부터 이 관계를 추론해 낼 수 있었다네." - P157

164 한 개인이 평생 동안 겪게 되는 자연재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해야 태풍 정도가 고작이니, 우리는 지구에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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