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많은 사람이 마음의 공허를 느낀다. 아파한다. 중심을 잡지 못한다. 세상이 마음을 안정되게 내버려두지도 않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도 어렵다. 단지 요즘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일용생활의 풍족함이 커졌음에도 왜 마음의 평안은 찾아오지 않는가? 마음은 내적인 안정과 외적인 정돈을 함께 요구하기 때문이다.
유교는 내성 외왕을 추구한다. 내적인 안정과 외적인 정돈을 함께 추구한다. 내적인 안정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외적인 요소도 정돈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외적인 정돈이 내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 둘은 함께 필요하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종교는 내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철학은 외적인 정돈을 요구한다. 이 책은 내적인 안정을 위한 유교의 방안을 소개한다. - P9

철학이 제시하는 외적 정돈의 방안은 시대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반면에, 종교가 제시하는 내적 안정의 방안은 시대가 변화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컨대 AD 4세기 이후 전개된 유식 불교에서는 마음의 4분설을 제시하여 수행의 지침을 제시했는데, 그 의의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대상도 마음이 지어낸 것으로 본다면, 마음은 대상과 주관(대상의식)으로 이분된다. 그런데 주관에는 반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반성을 위해서는 매번의 경험을 저장하여 반성될 수 있게 하는 의식도 있어야 할 것이다. 철학에서는 그것을 통각이라고도 하고 자기의식이라고도 한다. 이리 보면, 마음은 대상, 대상의식, 자기의식, 반성의식으로 나눠진다. 유식 불교가 말하는 4분된 마음, 곧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을 필자는 각기 대상, 대상의식, 자기의식, 반성의식으로 이해한다. 번뇌 10 망상은 기억이라는 반성의식에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반성의식을 어떻게 작동시키는가에 따라 번뇌 망상의 제거와 마음의 안정이 가능할 수 있다. 필자는 불교의 수행론이나 유교의 수양론이 마음의 안정을 위한 반성의식의 작동에 관한 논의로 본다.
현대의 명상가들은 마음을 4분화하지는 않지만 의식을 4단계로 구분하고는 있다. 예컨대 자기가 화를 내는 것을 모르고 화를 내는 단계, 자기가 화난 것을 알아차리면서도 화를 내는 단계, 자기가 화난 것을 알면서 화를 억제하는 단계, 화를 내지도 않지만 화를 내는지의 여부를 알아차리지도 않는 단계가 그것이다. 이 각각의 단계를 명상가들은 무의식적 무능, 의식적 무능, 의식적 유능, 무의식적 유능이라고 표현하는데, 필자는 그것들을 심4분을 염두에 두고 무반성적 무능, 반성적 무능, 반성적 유능, 무반성적 유능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반성적 무능이나 반성적 무능의 단계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명상을 한다는 것은 마음 안정의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고, 이것은 반성적 유능을 위한 훈련에 착수하는 것이다. 반성적 유능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무반성적 유능의 단계에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이유교의 용어로 성인(聖人)과 현자(賢者)이고, 의상 법사의 말로는 십불(十佛)이자 보현(普賢)이고 대인(大人)이다. - P9

1절 유교 수양론의 특성

유교의 수양론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 존심양성)는 말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선한 마음을 보존하여 선한 본성을 함양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선한 마음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수시로 반성하면서 선한 마음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마음의 내적 성찰(內省, 내성)이다. 자기 마음의 성찰을 통해 선한 마음을 보존하고 선한 본성을 함양한다는 것은 성현이 되는 길이 자기 자신에게 있고 자기 밖에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일의 잘잘못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않고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서 구한다‘(反求諸己, 반구제기)는 자세를 갖게 해준다.
유교에서 보는 이상적인 사람, 곧 안으로는 성인의 마음을 갖추고 있고,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보여주는 사람(內聖外王, 내성외왕)이 되기 위해서는 ‘내적 성찰‘과 ‘반구제기‘가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
『불교와 유학』의 저자인 라이용하이(賴永海)는 불교와의 비교 측면에서 ‘존심양성‘을 ‘수심양성‘(修心養性)이라고 표현하면서, 수심양성의 기본원칙이 ‘내성‘과 ‘반구제기‘라고 지적하고 있다.
19 "수심양성(修心養性)의 방법에 대하여 유가에서는 상당히 정비된 이론 체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이론 체계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특징은 바로 주관적인 내성(內省)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 점은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로부터 대단히 중시되었다. 공자는 단지 ‘안으로 살펴 꺼릴 것이 없는데, 무엇이 걱정이며 무엇이 두렵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자신에 대하여 그는 ‘나는 하루에 세 번 내 자신을 반성한다‘라고 하였다. 다른 측면으로 공자는 자주 제자들에게 ‘인을 행함에 자기로부터 말미암는다"라고 가르쳐,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유가의 수양이론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유가의 두 번째 성인인 맹자 및 수많은 유학자들은 모두 반구제기(反求諸己)를 대단히 중시하여 그를 수심양성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으로 삼는다. 따라서 유가의 수양이론 가운데 수많은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모두 이러한 기본원칙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의 마음을 성찰하거나 잘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구하는 일은 성실함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다. 성실함의 중요성은 맹자, 순자, 자사가 거듭하여 강조하였다. 관련 내용들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맹자: "그런 까닭에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함을 생각함(思誠)은 인간의 도이다. 지극히 성실하면서 감동시키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 20 고, 성실하지 않으면서 감동시킬 수는 없다."

순자: "군자가 마음을 기르는 것은 성실함(誠)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성실함에 이르게 되면 일이 없음이다. 오직 어짊(仁)을 지키며 오직 의로움(義)을 행한다."

자사: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하려는(誠之) 것은 인간의 도이다."

자사: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본성(性)이라 하고, [본성에]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지는 것을 교(敎)라 한다. 성실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실해진다."

내적 성찰과 반구제기를 통해 성실함에 이르는 것에 대해, 라이용하이는 그것이 천도에 도달하는 것이자 천인합일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誠)은 성인(聖人)의 본성의 근원적인 도덕규범으로 바로 ‘천도‘(天道)이다. 그리고 이른바 ‘사성‘(思誠, 성실을 생각함), ‘성지‘(誠之, 성실하려고 함), ‘명성‘(明誠,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짐)은 바로 내적인 성찰의 노 21 력이다. 유가에서는 이러한 주관적인 내성(內省)의 노력을 통하여 사람들이 ‘마음‘(心)과 ‘성‘(性)으로부터 천도에 도달하고, 그에 따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중용』(中庸)에서 ‘오직 천하에 성(誠)이 지극해야 능히 본성을 다한다. 능히 그 본성을 다하면 [...] 가히 천지의 화육을 도우며, 가히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함께 한다‘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이로부터 전통 유가의 수행방법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상노선 및 그 최고 경계는 바로 심성의 내적인 성찰을 통하여 천도‘에 도달하고, 나아가 ‘천인합일‘을 실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필자는 이 책에서 천인합일의 방법과 경지를 ‘명상‘과 ‘명상이 실현하는 마음의 경지‘라는 관점에서 해설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천인합일을 목표로 하는 유교 수양의 3영역은 대체로 미발 공부, 이발 공부, 격물치지이다. 이 세 영역은 불교의 수행 공부의 세 영역과 상통한다고 말해진다. 라이용하이는 이정(二程: 정명도와 정이천)의 공부의 3영역을 불교의 삼학에 비교하고 있다:

"후기 선종의 ‘공안‘(公案, 선문답), ‘기봉‘(機鋒, 언변의 날카로움) 등에 대하여 이정(二程)은 또한 자못 반감을 지녔는데, ‘비록 내심을 바로 함에 경건함이 있으나, 방외(方外, 외부를 바로 잡음)로써 의(義)가 없기 때문에 말라빠지거나 방자함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교의 수행법에 있어서 이정은 찬양하고 동의하였다. 그들의 치학(治學)과 수양의 세 가지, 즉 ‘정좌‘(靜坐), ‘용경‘(用敬), ‘치지‘(致知)는 어떤 의의 상에서 불교의 ‘계‘(戒), 22 ‘정‘(定), ‘혜‘(慧) 삼학(三學)에서 유도해낸 것이다."

여기서 라이용하이는 불교의 삼학을 이정의 공부영역에만 비교하고 있지만, 이정의 사상을 계승한 주자의 공부영역이나 육상산의 사상을 계승한 양명의 공부영역도 역시 불교의 삼학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수양론도 역시 불교 수행론의 영향 아래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주자와 양명에게 있어서 수양의 3영역이 명상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해설하게 될 것이다.
유교 수양론이 불교 수행론과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불교 수행론은 대체로 여래선, 조사선, 분등선(分燈禪)으로 분류된다. 통상적으로 여래선은 인도의 깨달음을 얻은 많은 각자(覺者)들의 선법(禪法)과 달마의 선법을 지칭하고, 조사선은 남종 6조 혜능의 선법을 지칭하고, 분등선은 혜능 이후 분화되어 전개된 선종의 5개 종파(五宗)의 선법을 총괄하는 말이다. 이런 3종의 선이 각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유교 수양론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3종선의 특색을 개괄하기 위해 먼저 중국 선종의 대표적인 선사들의 어록을 중심으로 중국 선불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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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형의 만족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추구하는 우 32 리의 마음에는 물론 괴로움도 있지만, 기쁨과 희망도 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건강하게 살려 애쓰며 결국은 늙을 것을 알면서도 꿈을 꾼다. 불완전한 삶 속에서도 우리는 기쁠 수 있고, 쓰레기가 가득한 바닷가에서도 아름다운 석양을 보며 감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완벽한 만족을 기다리느라 지금 있는 희망을 버리는 경우가 꽤 많다.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나서 진짜 행복하게 살려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빨강머리 앤과 다이애나 사이 같은 진정한 우정을 꿈꾸면서도 가꾸어야하는 관계들은 소홀히 하고, 예상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완벽한 어떤 것이 아니라면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삶의 여러 부분에서 단절을 선택하고 산다면, 고통스럽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지루하고, 우울하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된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완벽한 관계를 찾기보다 싸울 수도 있는 관계를 권한다. 괴롭겠지만, 불편하겠지만, 어쩌면 바라던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겠지만, 갈등을 포함하는 관계를 통해서 고립에서 나와 현실을 직시하고, 내 삶에 있는 불만족을 통과해서 살아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마찰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실망을 무릅쓴다는 것이기도 하 33 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고,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한다. 인간은 결코 희망을 놓지 못하는 존재라서 그렇다.
예상되는 고통을 피하느라 단절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지속되는 작은 고통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화를 못 내니 일상적으로 짜증을 낸다든가, 애도를 하지 못하니 그대신 멍해지고 무감각해진다든가, 부부가 갈등을 직면하지 못하니 점점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한다든가, 성폭력의 고통을 덮어두는 대신 몸의 감각이 없어진다든가 하는 식이다. 우리는 때때로 정말 중요한 결정을 피하고 싶어서 해야만 하는 것을 뒤로 미루기도 하고, 본질적인 싸움은 피하고 빙빙 도는 싸움을 지루하게 오랫동안 반복하고는 한다. 시스템을 바꿀 만한 큰 싸움은 피하고 시스템 안에서 소소한 싸움을 계속 하거나, 삶을 행복하게 할 변화를 만드는 대신 불행한 삶의 구조 속에서 순간의 소소한 기쁨을 찾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은 지금 우리 사회의 특징인 것 같다. 경기가 안 좋을수록 명품 가방 소비는 줄지만 명품 지갑 소비는 늘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외식은 안 하지만 비싼 케이크 집에는 간다. 더 이상 혁명이 없고 전복이 없는 시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매우 개인적이고 매우 순간적인 대응만 있는 시대 말이다. 진짜 고통, 진짜 괴로움, 진짜 아픔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둘러싼 34 세상은 물론 자기의 내면과 단절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 되었다. 두렵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하는 감정을 느끼는 대신 얼굴을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에 파묻는다든지 일이나 음식이나 운동에 중독이 되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그리고 얼마나 쉬운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우울과 고립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더많은 심리 치료가 아니다. 심리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삶의 문제와 갈등이 물론 있지만, 일반적인 삶의 고통이 심리 치료의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어떤 고통은 치료가 아니라 감당을 해야 하고, 분석을 받을 것이 아니라 애도를 해야 하며, 치료사가 아니라 친구와 나누어야 한다. 심리 치료가 도움이 되는 이유는 치료사에게 받는 진정어린 관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역할을 소수의 심리 치료사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면 어떨까?
우리는 바라건 바라지 않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작용을 한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 가까운 거리 때문에 개입이 가능하고, 사랑할 수 있고, 상처를 입거나 입힐 수 있다. 즉 싸울 수 있는 거리의 관계이다. 그리고 우울과 절망을 치유할 수 있는 관계 또한 싸움이 가능한 사정거리 안의 관계이다. 물론 관계의 단절이 필요한 때가 있다. 관계를 포기하는 것을 각오하고라도 자기의 존엄성을 지키기 35 위해서 관계를 깨야 할 때도 생긴다. 그러나 그 순간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도 싸움은 필요하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반복적인 싸움으로 인한 지겨움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정성을 들여서 싸워보기를 제안한다. - P31

그들의 경험 또한 사실일진대 인터넷 매체와 SNS를 통해 관계를 맺는 것이 걱정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은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쭉 온몸으로 감각하는 동물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이 사이보그가 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우리는 포옹의 따스함으로 위로를 받고, 함께 어루만지고 호흡을 주고받으면서 감정 조절 능력을 배우고, 시각만이 아니라 촉각과 청각 등 여러 감각으로 세상을 경험하며, 언어뿐만 아니라 몸으로 하는 비언어로도 타인과 소통한다. 인터넷과 스크린으로 접촉 없이 만나는 관계와 달리, 진짜 접촉하는 관계는 만나고 부딪치고 찔리느라 불편하다. 그리고 그러한 불편함으로 인해 자신과 상대를 알아가고 38 성장하게 된다.
감각하는 몸, 소통하는 몸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만남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며, 그 안에 무수한 밀물과 썰물도 있고, 다가감과 멀어짐도 있다. 접촉하고 개입하는 관계에서는 서로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주 부딪치고 건드려지기도 하지만 또한 쓰다듬기도 하고 보드랍게 안기도 한다. - P37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칭찬으로 고래를 춤추게 해야 할까? 고래가 춤을 춘다는 것은 동물원에서 사육된 고래에게나 해당하는 사항이고, 야생의 고래는 누가 칭찬을 한다고 해서 춤을 추지 않는다. 이른바 ‘X세대‘라고 불리는 대략 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모에게 칭찬을 들어보지 못해 서러운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자신들이 부모가 되어 자녀를 키우면서는 ‘잘한다‘ ‘훌륭하다‘ ‘멋있다‘ 심지어 ‘너는 완벽해‘ 같은말들로 끊임없이 칭찬을 해서 아이들을 ‘춤추는 고래‘로 키웠다. - P38

어렸을 때 "너는 특별해"라는 메시지를 자주 들은 아이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실패를 겪고 "나는 어떤 점에서는 특별하고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방식으로 믿음이 교정되기도 하지만, "너는 특별해"라는 칭찬이 "나는 특별해야 해"라는 내면화된 명령이 되어 이 명령을 받들고자 노력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러한 내면의 명령이 아이 자신이 겪는 감정이나 경험에 대한 충분한 공감 없이 이루어질 때, 아이는 자기 존재를 걸고 스스로의 특별함을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자라서도 자신을 칭송해 줄 타인을 필요로 하고, 타인에게 특별하게 보이려 노력하는 동안 내면의 자아는 공허한 채로 남게 된다. 이것이 자기애는 강하지만 내면은 공허한 나르시시즘의 특성이다. - P39

흔히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는 자기애성 성격 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NPD)의 대표적인 특징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고, 타인들이 자신을 찬양하기를 바라며, 공감력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이 늘 문제가 되는것은 아니다. 발달 단계에서 아기의 유아적 자기애infantile narcissism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이며, 이는 성장하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자아존중감을 키워나가는 데 기초가 된다. 그런 면에서 어떤 심리학자들은 유아적 자기애를 건강한 나르시시즘으로 부른다. 그 반면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은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려하고 따라서 자기를 바라보는 타인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인정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한편 자신의 내적 경험은 빈 상태가 되고 자기의 불완전함이나 타인의 거부에 강한 정서적 반응을 나타낸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친구라는 특별한 관계가 사라지고 있는것과 나르시시즘이 증가하는 것이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나르시시즘의 원형인 신화 속의 나르시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기와 다른 타자로서의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거울로서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보아주고 인정해 주는 등 자신의 공허한 내면을 채워주는 사람 말이다. - P40

펀치를 날릴 수도,
끌어안을 수도 있는 관계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싸움은 피하고자 한다. 싸움은 불편한 일이고, 싸워서 기분이 별로 좋았던 기억도 없으며, 싸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 경험도 별로 없는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 싸우는가? 아니다. 참고 참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하는 방식으로 싸운다. 또는 참기를 도 닦기의 수준으로 승화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심리학 공부를 하기도 한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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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그토록 잘하고 싶으면서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몰랐고, 겨우 머리로 알게 된 후에도 아는 대로 잘 되지 않아서 상처를 주고 소중한 사람들을 삶에서 놓친 적도 많습니다. - P8

대화는 곧 나를 드러내는 일

사람의 인품은 결국 타인과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대화 태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내적인 품위를 만들 수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 품위를 훼손할 수도 있습니다. - P8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고 친구라도 화가 날 때는 있는 힘을 다해 서로를 공격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주먹질이 오가고, 상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할 말을 찾아 면전에서 뱉어냅니다. 화해하고 용서하고 미안하다고 고백할 시간은 언제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 P9

깊이 생각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되고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대화는 상대가 준 자극과 내가 상대에게 보여주는 반응 사이에 어떤 공간도 없이 습관적으로 받아치는 무의식적인 대화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자극

공간
멈춤(Pause), 호흡(Breath), 호기심(Curiosity)
선택

반응

그러나 그림처럼 만약 우리가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을때(자극)
잠시 멈추어
호흡을 고르고
곰곰이 호기심을 가지고 생각해볼 수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화(반응)를 나누고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요. - P11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 Viktor E. Frankl은 "인간의 마지막 자유의지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극과 반응 사 12 이에는 빈 공간이 있으며, 그곳에서의 선택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 오늘 힘들어"라는 상대의 말(자극)에 ‘오늘, 이 사람이 힘들었구나. 나도 오늘 힘들었는데, 우리 둘다 오늘 노곤한 하루를 보냈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이처럼 잠시만 차분하게 시간을 가지면 다른 반응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핀잔이 아니라 "당신도 힘들었구나. 나도 오늘은 참 힘들었는데, 오늘은 우리 둘 다 쉬는 시간이 필요하겠네"라고 말(반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간단한 대화만으로도 관계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데, 이렇게 대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코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상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의무적으로 떠오르는 말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대화에 대해 평소에는 깊이 고민하면서도 막상 대화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반응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우리는 내 마음속 심리적 공간에 멈춤, 호흡, 호기심을 두어 잠시 시간을 갖고 나의 말과 행동을 선택하는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나의 반응이 곧 내가 맺는 모든 관계의 질을 결정짓는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대화를 다시 연습할 이유와 가치는 충분할 것입니다. - P11

부탁드립니다

이 책은 많은 나눔 과정 - 대화 연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연습하고 싶다면,

1. 상대가 말을 할 때는
- 하던 행동은 멈추고,
- 입은 다물고,
- 눈은 상대를 봐주세요.
2. 대화 연습을 하면서 나눈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마음에만 담아 ‘침묵으로 보호‘해주세요.
3. 조언을 하고 싶을 땐 상대가 나의 조언을 ‘듣기 원하는지 묻고‘ 확인한 후에 해주세요. - P17

둘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는 ‘순간적인 생각‘에서 나오게 됩니다.
대화 중에 뜻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으면 상당수가 상대의 인격을 비난하거나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 그 대화를 실패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다시는 상대와 관계를 회복할 여지를 두지 않거나 관계를 끊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혹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탓하며 우울해합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동안 이런 생각에 빠져서 오랫동안 누군가를 미워하고, 아예 관계를 끊어버린 후에 후회하거나 깊은 우울감으로 힘들어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책에서는 대화에 실패하는 이유를 나 자신의 인격에 두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우리의 ‘순간적인 생각‘에 두겠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해온 생각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나도 모르게 툭 떠오르는 생각, 즉 자동적 생각이 대화를 실패로 이끈다는 점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툭 떠오르는 자동적 생각이 말로 튀어나오면 대화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것이 반복되면 갈등은 더 깊어지게 된답니다. - P24

대화를 망치는
자동적 생각의 패턴

대화를 망치는 자동적 생각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단절의 대화 패턴‘은 ①판단 / ②비난 / ③강요, 협박 / ④비교 / ⑤당연시, 의무화 / ⑥합리화라는 여섯 가지 자동적 생각Automatic Thought에서 기인합니다. - P25

대화를 하면 할수록 좌절하는 이유는?
‘자동적 생각‘ 때문입니다.

자동적 생각

1. 판단하기
2. 비난하기
3. 강요하기
4. 비교하기
5. 당연시하기
6. 합리화하기

툭 떠오르는 자동적 생각의 여섯 가지 패턴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서로 주장하기 시작하면
그 대화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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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신경을 긁는 것부터 가슴 깊숙이 훅을 날리는것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싸웠다. 이 정도면 다 싸웠겠지 싶은데도 싸울 일이 계속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싸우면서도 관계가 나빠지기는커녕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점이다. 싸움을 통해서 해결된 것도 있지만 끝까지 해결되지 못한 것들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다. 그리고 싸움을 통해 건드려지지 않았다면 몰랐을 자신의 다른 모습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원래 계획대로라면 친구와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어야 할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싸움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친구랑 싸우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개는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거나 살면서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존중받지 못할 때 싸우고는 했다. 나는 자유로운 표현을 중요시하는 사람으로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반면, 친구는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배려를 중요하게 여기며 ‘우리‘라는 주어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우리가 싸울 때는 ‘존중‘이라든가 ‘배려‘ ‘가치‘ 같은 단어를 많이 썼지만, 정작 싸움의 이유는 함께 먹는 밥상에서 둘 다 좋아하 13 는 계란말이 반찬을 내가 다 먹어버린다거나,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거나,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놀지 않는다거나 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때로는 유치한 혹은 아예 답이 없는 것들 때문이었다. 반응에 반응을 하면서 싸움은 증폭되고, 시작은 미약했으나 결과는 늘 창대했다.
싸움을 하다 보면 언젠가 더 이상 싸우지 않는 날이 오리라 생각했으나 그런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싸움도 자꾸 하다보니 늘어서 싸움의 언어와 싸움의 기간에 효율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더 직접적인 언어를 쓰자 싸움이 간결해지고 시원해졌다. 더이상 ‘존중‘이나 ‘배려‘나 ‘가치‘ 같은 고차원적인 단어를 쓰지 않고, ‘계란말이‘와 ‘약속 시간과 ‘놀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는 결국 "너는 왜 네 맘대로만 해?" "나랑 놀기 싫어?" "내가 얼마나 착한데 나한테 그래?" 같은, 쓰기에도 민망하고 다른 사람에게옮기기에도 너무 유치한 수준으로 말하면서 싸웠다.
더군다나 여러 전통의 대화법들에서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가르치는 ‘나 전달법I statement‘("나는 ~하게 느껴")이 아니라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너 전달법you statement‘("네가 나한테 그랬잖아")을 쓰기 시작하면서 직접적이고 날것의 언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네가 그랬잖아"라는 식의 말은 평화의 언어와는 거리가 멀지만, 교묘한 남 탓을 하면서 자신은 화를 안 냈는데 상대방이 격하게 반 14 응하더라는 식의 ‘남 탓‘과 ‘책임 전가‘를 할 수 없게 했다. 누가 봐도 내 화는 나의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싸움은 쉽거나 편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터질 것 같던 답답함은 없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적인 언어로 싸우니, 싸우다가 멈추게도 되고, 서로의 모자람을 덮어주기도 하고, 알면서도 모른 척 지켜주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아가 우리가 내뱉는 언어는 물론 표정이나 태도 같은 비언어적 표현 속에 비난과 판단의 화살을 미묘하게 숨겨놓고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평화로운 사람인 양 이야기해 왔다는 사실도, 그 화살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도 차츰차츰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무죄 선함을 주장하면서 공격과 반격을 번갈아하는 동안 실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피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싸움을 통해 서로가 지키려한 정체성이 무엇이었는지를 거울삼아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니 많은 현자들이 이미 수도 없이 말했던 것, 분노를 자극하는 것과 분노의 원인은 다르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상대방으로 인해 내가 분노했다면 그건 이미 내 안에 있는것을 그가 건드린 것(즉 자극한 것)뿐이요 그가 곧 내 분노의 원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지만 내가 정말 이러고 있었다는 것을 친구가 우정을 걸고 끝까지, 끈질기게 15 싸워줘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싸우고 또 싸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관계가 성장해 갔다. 더이상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누가 이기고 졌는지, 누가 더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 덕분에 싸움은 해결을 통해 갈등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넘어서 성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 P12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 나를 속상하게 했기 때문에 그냥 화난 상태로 머물러 있고 싶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가 새롭게 가까워진 사람들을 통해서 이전에 해결하지 못한 갈등을 다시 만나고는 한다. 마치 삶이 나에게 이것을 이해하고 풀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비주의자들에 따르면 이것은 삶이 또는 신神이 내게 이번 생에서 풀라고 내준 숙제를 풀지 못해서이고, 심리학 이론에 의하면 아직 내가 해결하지 못한 이슈를 가지고 있는 유형의 사람들을 자꾸 알아보고 그들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나는 마을 친구와 싸움을 계속하면서, 이 싸움이 그 친구 한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내가 삶을 통틀어 애매하게 싸웠거나 피해온 모든 싸움을 대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 친구와의 싸움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가 싸워온 모든 사람 16 들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평등하고 가까운 위치에 있는 두 성인 사이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그 두 사람은 친구나 동료일 수도 있고 연인이나 부부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가까운 관계에서 싸움의 목표는 잘잘못을 따져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밝히거나,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 서열을 가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들 때문에 싸우는 경우도 많으며, 결국 사람을 개조할 수 없고 가족을 바꿀 수 없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만약 잘잘못을 따져서 누가 잘못을 했는지 밝히게 되더라도 관계가 편하지 않을 것이며, 가까운 사이에서 싸움이 해결된다고 해서 그것이 싸움의 끝이나 완결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살면서 서로를 자극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지 갈등 요소를 해결했다고 해서 다른 갈등 요소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며,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서 갈등이 없는 완벽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도 아니다.
싸움은 매우 불편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싫다, 불편하다는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신호만 있을 뿐, 무엇 때문에 그런 불쾌한 느낌이 드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는 자 17 신의 욕구를 뒤에 숨기고 살도록 교육받기 때문에 자신이 불편한 이유를 세세하게 모르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싸우는 과정에서 ‘하악질‘(고양이가 공격을 하기 전에 보이는 경고 신호로, 이빨을 내보이며 하악 소리를 내는 것)과 함께 불편한 마음을 일으키는 내면의 깊은 욕구가 드러나게 된다.
또 우리는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을 때조차 좋은 말을 하려고 하고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홧김에 펼쳐놓게 되는데, 대부분은 아주 유치하고 치졸하며 이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스스로 허락하지 않아서 또는 표현하지 않아서 잘 모르고 있던 내면의 깊은 바람이나 욕구가, 싸움이라는 거친 방식으로나마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욕구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고, 보살핌의 에너지로 바라봐 주면, 그 욕구는 잠시 머물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 P15

본격적으로 싸움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싸움‘이지 ‘폭력‘이 아니다. 폭력은 자신은 다치지 않고 상대방만 일방적으로 다치게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폭력은 많은 경우 힘의 불균등에서 시작한다. 공격을 당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서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는, 힘의 위치가 낮은 자에게 폭력이 가해지고, 폭력에 대한 반격으로 폭력이 더 커지고는 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문제나 갈등이 해결되어도 멈추지 않고 상대방을 끝까지 굴복시키고자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싸움‘은 두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에 해를 가할 수 없을 뿐더러, 이미 관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므로 일방적으로 한 사람만 다칠 수도 없다. 또한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항복시키는 것 19 이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펼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조정하며 갈등을 표면화해 꼬이고 얽힌 부분을 푸는 것이 목표이다.
고릴라는 자신의 영토임을 밝히기 위해서 침입자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가슴을 치며 소리를 지르지만,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면 더 이상 쫓아가 물거나 하지 않는다. 인류도 오랫동안 이렇게 싸움을 했었다고 한다. 또한 싸움을 하고 나서 입을 맞추고 털 고르기를 해주며 적극적으로 화해를 하는 침팬지처럼, 싸움은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싸움을 잘 펼칠 수만 있다면, 싸움이 서로의 의사를 조정하고, 자기 표현을 돕고, 갈등의 요소를 명료하게 하고, 관계를 증진시키는 방법으로 쓰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는 싸움을 일으키는 갈등을 넘어서는것, 즉 관계의 성장과 자기 이해이다.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화살을 들이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대가 스스로를 바라보도록 거울을 내미는 것이다. 이 거울은 들키기 싫고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아주 불편하고 거친 방식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내 안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내면 아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떼를 쓰고 있지만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 말이다.
우리는 수만 가지 이유로 싸우지만, 싸움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20 잘 들어보면,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안전하고 싶은,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또한 싸움은 자기 내면에 있는 미해결 과제와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게 하기 때문에, 서로의 가장 여린 부분을 보듬을 기회를 주기도 한다. 모든 싸움은 사랑 이야기이다. - P18

백 번을 싸워야
친구다

내가 상담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 삶에서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그러면서도 우울하거나 불안해했고 삶이 이게 다인가 싶은 허망함에 괴로워하고는 했다. 그리고 진심을 나눌 친구가 없거나 친구들과 멀어져 있는 경우가 흔했다.
치료사는 질문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대화를한다. 스승이나 멘토와는 달리 조언을 해주는 것은 우리 치료사 24 의 주된 역할이 아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세요?"라는 식으로 되돌려 물어보면서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다.
그런데 때때로 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상대방이 되묻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에헴 하고 목청을 가다듬고 나서 나름대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비법을 내놓는다. 가끔은 너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무릎을 치면서 말한다. "아,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그러면 상대방도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아,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한다. 문제의 답을 찾은 것 같아서 신나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그 좋은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내가 농담하는 줄 안다.
핸드폰 때문에 자꾸 말썽을 일으키는 자녀 문제로 상담을 온분에게 나는 "핸드폰이 안 터지는 작은 섬으로 이사 가시면 안 돼요?"라고 말하고, 유산 때문에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긴 사람에게는 "돈을 다 기부하고 모두가 가난해지면 어때요?"라고 했다. 또 인스턴트 음식만 먹는 초등학생 아들 때문에 속상하다는 분에게는 "먹을거리가 없는 인도 오지 마을 여행을 가면 문제가 해결될 거예요!"라고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제안이 씨도 안 먹히고, 내가 별로 도움 되는 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내 제안을 따라했다는 사람도 본 25 적이 없는데, 상담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점점 건강해지고 좋아진다는 점이다. 심지어 나중에 물어보면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를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좋아지는 것일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아무런 행동이나 상황의 변화가 없는데도 사람들 표정이 밝아질까? 그들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슨 좋은 일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도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상담을 받으면서 그냥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좋아졌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내담자와 친구가 되는 것은 심리 치료사에게 금기시되는 일이다. 치료사는 타인의 삶에 개입하면 안 되고 그저 들어주고 반영해 줌으로써 그 사람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돌아보게끔 도와야 한다. 치료사에게 기대게 해서도 안 되고, 관계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심어주어서도 안 된다. 또 치료사 자신이 풀지 못한 내면의 문제를 내담자에게 투사하거나 자신의 문제와 타인의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면 많은 문제들이 생기기 때문에, 내담자와 서로 친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담자와 만남이 반복되다 보면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희망을 같이 느끼게 된다. 내 경험으로는 이런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어쩌면 ‘친구‘가 될 때, 그 사람이 건강해지고는 했다.
심리학에 ‘도도새 효과라는 것이 있다. 모든 심리 요법은 각각 26 의 이론과 무관하게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는 연구 결과를 가리킨다. 우울증에는 인지 치료가 좋고, 자폐에는 음악 치료가 좋고, 정신분열증에는 무용 치료가 좋고, 아이들에게는 미술 치료가 좋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연구들을 종합하여 분석하는 메타 분석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결과는 어떤 치료 기법을 어떤 대상에게 쓰는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치료사의 철학적 관점이나 학문의 바탕이 프로이트 학파냐, 융 학파냐, 아들러 학파냐 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단지 치료사의 공감적인 태도뿐이며, 그 태도를 전달하는 방법은 무관하다는 것이다. 심리 치료가 효과가 있는 이유는 어쩌면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의 존재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사람이 꼭 치료사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내담자와 치료적 관계를 끝낼 때 자신을 계속 응원하고지지해 주는 친구를 꼭 만들라는 조언으로 마무리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 말이 내담자에게는 빈껍데기 말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진정한 친구를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이제 자기 할 일 다 했다고 손 털면서 하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울과 고립과 절망이 만연한 어두운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치료사가 아니라 친구라고 믿는다. 27 물론 친구를 갖기는 치료사를 찾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 치료사의 경우 돈으로 그의 시간과 경험을 살 수 있지만, 친구는 돈으로 살 수 없다. 친구는 정성으로 값을 치르고 마음을 열어서 기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에만 관계가 만들어지고 가까워질 수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친구 만드는 것을 정말 어렵게 하는데) 가까워지면 서로를 건드리게 된다. 그리고 누구나 정말 가까운 친구나 애인이나 부부가 되면 아마도 싸우게 될 것이다. - P23

자유롭지만
홀로인 그대

우리에게는 타인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존재로 살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에게 중요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와 만나고는 싶지만 참견받는 것은 싫고 개입하거나 개입받는 것도 싫다는 사람들이 요즘 들어 부쩍 늘고 있다. 어쩌면 이전 세대의 지나치게 밀착되고 개입적인 가족 관계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개입이 적은 삶을 살고 싶어 자신들이 자유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유 대신 ‘자유 + 고립‘이라는 세트 28 를 받게 되고, 그 결과 이 중에서 원치 않았던 ‘고립‘을 처리하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된다. 개입이 적은 SNS 친구를 맺거나, 사람이 많은 카페에서 혼자 있거나, 일회성 만남을 갖거나...... 여기에 맞춰 상업주의는 새로 생겨난 이들 1인 소비자를 위한 상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이것은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 사회》라는 책을 열며 쓴 첫 마디이다. 그는 이전의 규율 사회의 그늘에는 광인狂人과 범죄자가 있었다면, 지금의 성과사회에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가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내면으로 향한 분노라고 했으나, 한병철은 과잉의 시대에 발생하는 우울증은 성과 사회의 그림자라면서 그 요인 중의 하나로 유대감의 부재를 들었다. 유대감의 부재는 심리적 건강뿐만 아니라 신체의 건강에도 매우 위험하다. 건강한 노년기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인은 ‘관계‘이며, 외로움과 고립은 실제로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고, 타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고, 직장에서 승진하려 하고, 경쟁에서 이기려고는 하지만, 세상의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에서는 갈등이 생기면 너무 쉽게 그 관계를 포기해 버린다.
한 마을에서 태어나서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살다가 생애를 마감하는 예전의 공동체 사회에서는 설령 갈등이 생겼다고 해도 29 어지간해서는 그 관계를 단절하고 어디로 가버리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더 흥미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 사이를 기웃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디로 찾아 나서기도 쉽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고, 만족 가능성도 높아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 선택의 자유가 많아졌다고 해서 만족감이 커졌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되레 어딘가 더 큰 만족이 있을 것 같은 곳을 찾아 늘 헤매는 듯한 느낌이 있다. 찾고 추구하고 기대하는 목소리는 큰 데 비해 그곳에 도착하는 경험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물론 스치듯 지나간 만족의 순간들은 수도 없이 많다. 어려운 과제를 끝내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킬 때,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에 별이 촘촘히 떠 있을 때, 아침에 정성껏 내린 커피가 유난히 향기로울 때, 눈 쌓인 숲에서 새 발자국이나 노루 발자국을 따라걸을 때...… 정말 살면서 그런 순간들은 너무도 많다. 그런데 그런 순간적인 만족 말고, 정말로 완전한 만족에 머물렀던 적이 있는가?
인터넷과 SNS와 텔레비전에서는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갈망하 30 지만 갖지 못한 만족이 완결적인 만족이 있다고 자꾸 말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찾았다고도 한다. 영화와 소설과 드라마에서도 마치 주인공이나 화자가 지금 절대적인 만족감 속에 있는 것처럼 상황을 묘사한다. 드라마 속의 애인과 친구는 늘 다정하고 유쾌하며, 상대방이 말할 때 피곤하거나 지루해하지 않는다. 여행지는 늘 아름답고, 식당은 늘 맛집이며, 행복은 무지개 같고, 심지어 갈등조차도 지루하지 않고 스펙터클하다. 그리고 마치 그 순간들이 영원한 것 같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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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싸워준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 P4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화살을 들이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대가 스스로를 바라보도록 거울을 내미는 것이다.
싸움은 자기 내면에 있는 미해결 과제와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게 하고,
서로의 가장 여린 부분을 보듬을 기회를 주기도 한다.

모든 싸움은 사랑 이야기다." - P5

내가 싸움에 관한 책을 쓰다니 나로서도 의외이다. 싸움을 진짜 못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누가 큰소리로 뭐라고 하면 눈물부터 글썽글썽 맺히고, 주먹을 꽉 쥐고 할 말을 하려고 해도 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톡 쏘는 말을 듣고서도 반격을 못하다가 몇 시간 뒤에나 답답한 가슴을 치는 일이 평생 있어왔다. 벼르고 벼르다가 큰소리를 내거나, 순간 참지 못하고 욱해서 큰소리를 낼 때도 물론 있었는데, 그럴 때는 숨고르기 없이 갑작스럽게 으르렁대거나 너무 심한 말을 하고는 바로 죄책감이 들거나 부끄러워져서 두고두고 후회하고는 했다. - P9

어른이 되어 돌이켜보니 그 허전한 감정이란 싸우지 않고 경쟁 11 하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된 대신 관계의 중심에는 들어가 있지 못하는 데서 오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싸우지도 않고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깍두기‘(깍두기란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 같은 놀이를 할 때 놀이에 참여는 할 수 있지만 점수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 아이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한다. 놀이를 잘 못하는 친구나 나이가 어린 동생을 놀이에서 제외시키지 않고 ‘깍두기‘로 있는 듯 없는 듯 끼워서 같이 놀았다)가 된 것이다. - P10

바다가 가깝고 숲이 가까워서 살기로 선택한 마을에서 나는 정말 좋은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었던 마을 친구가 생기다니!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언젠가는 친구에 대한 책을 쓰리라 생각했다. 우리가 경험한 우정에 대하여 나누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우정을 알기를 바랐다. 그런데 내가 우정에 대하여 깨달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크고 작은 일들로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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