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져진 직업의 길을 선택하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결코 젊지 않은 젊은이들……. 이들 모두가 대체로, 현재의 내 처지에서는 그다지 쓸 만한 일을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 바로 거기에 난관이 있었다. 늙고 병든 사람들과 소심한 이들은 나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질병과 불의의 사고와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위험으로 가득 찬 것이며(위험에 대해 노심초사하지 않는다면 무슨 위험이 있단 말인가?) 신중한 사람이라면 마을 의사 B박사가 즉각 달려올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를 선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185

내게는 하등동물의 본능 같은 것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인정이 더 늘거나 지혜로워진 것도 아니면서도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낚시를 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전혀 낚시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황야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다시 본격적인 낚시꾼이나 사냥꾼이 되고자 할 것임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선과 다른 모든 육식에는 본질적으로 불결한 면이 있다. 나는 집안일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매일매일 말쑥하고 보기 좋은 모양을 갖추고 집 안에서 온갖 악취와 보기 흉한 물건들을 치우려는 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노고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요리를 제공받는 신사인 동시에 정육점 주인이며, 주방 일꾼이자 조리사였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경험에서 나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내 경우 육식에 대한 실질적인 반론은 그 불결함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잡아서 창자를 빼내고 조리하여 먹었음에도 본질적인 면에서 허기를 채워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얻는 것에 비해 대가가 너무 컸다. 약간의 빵이나 감자 몇 알을 먹더라도 그 정도의 허기는 감출 수 있을 것이고 수고와 불결함은 훨씬 적을 것이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오랫동안 육식이나 차, 커피 등을 그다지 즐겨 먹지 않았다. 그런 음식들에 무슨 해로운 영향이 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내 상상력에 그다지 유쾌하게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식에 대한 반감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모든 면에서 검소한 삶과 식단이 보다 아름다워 보였으며, 비록 정말 그렇게 하지는 못했더라도 내 상상력을 만족시킬 정도는 노력했다. 보다 높은 정신 능력 또는 시적 능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육식을 삼갈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절제하려 할 것이다. 커비와 스펜스 같은 곤충학자의 다음 진술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성충 상태에서 음식물 섭취 기관을 갖추고도 전혀 쓰지 않는 곤충들이 있다. 성충 상태의 거의 모든 곤충이 유충 때보다 훨씬 적은 음식을 섭취한다는 일반론을 도출할 수 있다. 식욕이 왕성한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고 게걸스러운 구더기가 파리가 되면" 꿀이나 다른 감미로운 음료 한두 방울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나비의 날개 아래쪽에 붙은 복부는 유충 때를 상징하고 있다. 이 복부 때문에 나비는 다른 종에게 먹힐 운명을 자초한다. 유충 상태의 인간 역시 대식가이다. 국민 전체가 그런 상태에 처한 경우도 있는데, 그들은 공상이나 상상력이 결여된 국민으로서, 그 방대한 복부가 그들의 실상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 P263

어째서 상상력이 살코기나 지방분과 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은 불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나로서는 그런 불일치 자체에 만족할 뿐이다. 인간이 육식동물이라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까? 실제로 인간은 대부분 다른 동물들을 먹이로 삼음으로써 삶을 영위할 능력도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딱한 일이다(토끼를 덫으로 잡거나 새끼양을 도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보다 순결하고 위생적인 식사를 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인류의 은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실제 경험이 어떻든 나는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육식을 버리게 될 운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은 미개인 부족이 보다 개화된 부족과의 접촉을 통해 서로 잡아먹는 일을 버리게 된 일만큼이나 확실하다.
만약 자신의 정신에서 나오는 극히 희미하면서도 끊임없는 참된 제안에 귀를 기울여 보면 그것이 자기를 어떤 극단으로, 아니 심지어 광기로까지 이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결의와 믿음이 쌓이게 되면서 자신의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건전한 사람이 생각하는 아주 미약하면서도 확고한 반론은 결국 인류의 주장과 관습도 이기게 될 것이다. 자신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은 오도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육체가 쇠약해진다 해도 후회할 만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보다 높은 원칙에 부합한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낮과 밤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리하여 삶이 꽃과 향기로운 풀처럼 방향을 내뿜고 보다 탄력있고 별처럼 빛나며 불멸의 것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것이다. 그때에는 모든 자연이 축복일 것이며 당신 또한 시시각각 자신을 축복할 이유가 생긴다. 가장 큰 이득과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는 일은 그만큼 드물다. 우리는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는 이내 그것들을 잊어버린다. 그것들은 지고의 실체다. 아마도 가장 경이롭고 진실된 사실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코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거두는 참된 수확물은 아침이나 저녁의 색조처럼 만져 볼 수도, 형언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내 손에 떨어진 별이며 내 손에 잡힌 무지개의 한 부분이다. - P265

우리는 평생을 놀라우리만큼 도덕적으로 지낸다. 덕과 악덕 사이에는 한시도 휴전이 없다. 선은 결코 손해 볼 수 없는 유일한 투자다. 온 세상에 울려퍼지는 하프의 음악에서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바로 선에 대한 집요한 추구다. 그 하프는 우주의 법칙을 권하며 돌아다니는 우주 보험사의 행상이며 우리가 행하는 약간의 선이 우리가 치른 유일한 보험금인 셈이다. 젊은이도 나이가 들면서 결국에는 냉담해지지만 우주의 법칙은 냉담해지는 법이 없고 영원토록 가장 예민한 사람의 편에 선다. 책망하는 산들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 소리는 분명 있으니까.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는 가엾은 인간이다. 하프의 줄을 건드리거나 손을 멈출 때마다 언제나 우리는 그 매혹적인 도덕의 선율에 사로잡힌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소음도 멀리 떨어져서 들으면 우리의 천박한 삶을 풍자하는 당당하고도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릴 수 있다.
우리는 몸 속에, 우리의 보다 높은 본성이 잠들수록 깨어나는 짐승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 짐승은 파충류 같고 관능적이며, 건강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몸 속에 들어 있는 기생충들이 그렇듯이 어쩌면 완전히 내쫓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짐승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놈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놈은 나름대로 건강하며, 따라서 우리는 건강할 수는 있지만 순결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언젠가 하얗고 멀쩡한 이빨이 달린 돼지의 아래턱을 주웠는데, 그 뼈는 정신적인 것과 명확히 구분되는 동물적 건강과 힘이 존재함을 암시해 주었다. 이놈은 절제와 순결이 아닌 다른 방식에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맹자는,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극히 하찮은 데 있다. 소인은 그것을 곧 잃고 말지만 군자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지닌다"고 했다.
우리가 순결에 이를 경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내게 순결을 가르쳐 줄 정도로 현명한 이가 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찾아 나설 것이다. 베다에 의하면 "우리의 정열과 육체의 외적 감각을 다스리는 힘, 그리고 선행은 정신이 신에게 접근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라고 한다. 그런데 정신은 얼마 동안 육신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통제할 수 있고 외적으로 볼 때 더할 나위 없이 천박한 관능이라도 순결과 헌신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생식력은 우리가 해이해져 있을 때에 우리를 방탕하고 불결하게 만들며 우리가 절제할 때는 기력과 영감을 북돋워 준다. 순결함은 인간의 꽃이다. 이른바 재능이나 영웅적 행위, 신성함 같은 것들도 순결의 밑에 맺히는 여러 가지 열매일 뿐이다. 순결의 수로가 열릴 때 비로소 인간은 곧장 신에게로 흘러가게 된다. 순결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불순함은 우리를 파멸시킨다. 매일같이 내면의 짐승이 죽어가고 있으며 신성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자신과 굳게 맺어져 있는 열등하고 동물 같은 본성 때문에 수치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파우니나 사티로스 같은 신 혹은 반신이며 짐승과 결합된 신성이며 욕망의 동물이다. 요컨대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는 치욕스러운 것이다.

"마음속에 자신의 짐승이 있을 곳을 마련해 주고
그 숲을 개척한 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
말이나 염소, 이리 등 모든 짐승을 마음대로 부리면서도
스스로 다른 모든 것의 나귀 노릇을 하지 않는 자는!
그렇지 못한 인간은 돼지 치는 자일 뿐 아니라
돼지들을 사납게 날뛰게 함으로써
그들을 더 못되게 만드는 악마나 다름없는 자다."

​ 모든 관능은 비록 갖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더라도 실은 하나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순결 역시 그러하다. 육욕이라는 면에서는 음식을 먹든 마시든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든 잠을 자든 매한가지다. 이것들은 하나의 욕망이므로, 어떤 사람이 얼마나 육욕적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들 중에서 하나만 보면 된다. 불순한 인간은 서나 앉으나 순결할 수가 없다. 그 파충류는 자기 굴의 한쪽 입구가 공격받으면 다른 쪽 입구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순결을 원한다면 절제해야 한다. 대체 순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자신이 순결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덕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귀로 들은 소문에 따라 말할 뿐이다. 노력하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나온다. 나태에서는 무지와 관능이 나올 뿐이다. 학생에게 있어서 관능이란 정신의 게으른 습관이다. 불순한 인간은 대체로 게으른 인간이며, 난롯가에 앉아 있는 인간, 해가 떴는데도 엎어져 있는 인간, 피곤하지 않은데도 쉬고 있는 인간이다. 불순함과 모든 죄악을 피하려면 마구간 청소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일하라. - P268

그러나 피리의 선율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과는 다른 천체로부터 울려오면서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어떤 기능들을 작동시키라고 제안했다. 그 선율은 부드럽게 그가 살고 있는 거리와 마을과 국가를 없애버렸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째서 찬란한 삶이 가능한데도 이곳에 머물며 그토록 뼈빠지게 일하며 살고 있는 거지? 저 별들은 여기만이 아닌 다른 들판 위에서도 반짝이고 있는데 말이야. - 하지만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 그쪽으로 자리를 옮긴단 말인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금욕 생활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 정신을 육체 속으로 내려보내 그 육체를 구원하며, 자신을 더욱 존중한다는 것뿐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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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종종 가장 감미롭고 다감하며 순수하고 힘을 북돋워 주는 교제를 자연 속의 대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는데, 그건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는 가엾은 사람이나 몹시 우울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 속에 살면서 평온한 감각을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란 있을 수 없다. 건강하고 순결한 이의 귀에는 폭풍도 이올리안의 음악 소리로 들리리라. 소박하고도 용기 있는 사람을 천박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 데도 없다. 내가 계절과의 우정을 즐기는 동안 그 어떤 것도 삶을 짐스럽게 만들 수는 없으리라. 오늘 콩밭에 물을 주는 이슬비로 나는 집 안에 박혀 있었음에도 결코 따분하다거나 우울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비록 비 때문에 콩밭을 매지는 못했지만 그건 잡초를 뽑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만일 비가 계속 내려서 땅에 묻은 씨앗이 썩고 저지대에 심은 감자를 버리게 된다 해도, 그 비는 고지대의 풀에는 유익하며 풀에 유익하다면 내게도 좋은 것이리라. - P158

사람들은 종종 내게, "그곳에서 외로우시겠군요. 특히 눈이나 비가 오는 날과 밤이면 사람이 가까이 있었으면 하실 테죠?" 하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ㅡ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주 속의 점 하나일 뿐이오. 우리가 가진 도구로는 도무지 폭을 알 길 없는 저 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주민이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는 것 같소? 그러니 어째서 내가 외롭다고 느껴야 하오? 우리 행성이 은하수에 있기라도 하단 말이오? 당신이 방금 던진 질문은 내가 보기엔 그다지 중요한 질문 같지 않구려. 사람을 동료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외롭게 만드는 건 대체 어떤 공간이겠소? 나는 아무리 두 다리로 애를 써봤자 두 마음이 서로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살고 싶어하는 것이 뭐겠소? 분명 많은 사람들 곁은 아닐 거요. 역이나 우체국, 술집, 공회당, 학교, 식품점,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비콘 힐이나 파이브 포인츠 같은 곳도 아닐 것이오. 그보다는 버드나무가 물가에 서서 그쪽으로 뿌리를 뻗듯이 모든 경험에서 볼 때 생명을 분출하는 영구적인 원천 가까이에 있고 싶어할 거요. 그곳이 어디인가는 각자의 본성에 따라 다를 테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곳에다 자신의 지하광을 팔 거요……. - P161

나는 보다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는 일이 유익함을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상대라도 함께 있으면 이내 싫증이 나고 좋아하는 감정도 식게 마련이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고독만큼 상대하기 좋은 친구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대부분 방에 박혀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섞일 때 훨씬 더 외로움을 느낀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늘 혼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독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북적거리는 교실에서라도 정말로 공부에 전념하는 학생이라면 사막의 탁발승만큼이나 격리된 셈이다. 농부는 하루 종일 혼자서 들이나 숲에서 김을 매거나 나무를 베며 지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데 그것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온 농부는 방 안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기지 못하고, ‘사람들을 볼’ 수 있고 기분전환을 할 만한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온종일 혼자 지낸 데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학생이 어떻게 밤이든 낮이든 집에 혼자 있으면서 권태와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 건지 의아해한다. 농부는 학생이 집 안에 있더라도 농부가 그렇듯 자신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자신의 숲에서 나무를 베고 있는 것임을, 그리고 비록 좀더 응결된 형태이긴 해도 역시 농부처럼 기분전환과 교제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 P163

그의 내면에는 아주 작은 것이긴 해도 어떤 긍정적인 창의성이 엿보였으니, 나는 종종 그가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는 것을 관찰 끝에 알아냈다. 그런 현상은 아주 희귀한 것이어서 그것을 관찰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10마일을 걸을 용의가 있다. 그의 경우는 갖가지 사회제도를 재창조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종종 주저하며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지는 못했으나 그는 언제나 배후에 그럴싸한 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고라는 것이 너무도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삶에 묻혀 있어서, 비록 한낱 학식만 갖춘 인산의 사고보다 더 유망한 것이긴 해도 다른 사람에게 발표할 만큼 성숙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신분에 평생 무식한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더라도 인생의 최하층에 비범한 인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거나, 또는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의 생각은 비록 어둡고 탁할지 몰라도 월든 호수만큼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 P182

어느 날, 온순하고 지능이 모자라는 한 빈민이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종종 그가 들판에서 소 떼와 그 자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 있거나 통에 앉은 채 울타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내게 자기도 나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겸손이라는 것을 훨씬 능가하거나 아니면 한참 미달하는 극도의 단순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내게 말하기를, 자신은 "지능에 결함이 있다"고 했다. 그건 그가 쓴 표현이었다. 하느님이 원래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남들만큼 자신을 걱정해 준다고도 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전 언제나 그랬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이에요. 한 번도 정신이 온전한 적이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 같지 않았죠. 전 머리에 문제가 있어요. 그건 하느님의 뜻일 테죠." 그리곤 자기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는 내겐 몹시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나는 이처럼 유망한 바탕을 지닌 사람을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한 모든 말은 너무나 소박하고 진지하고 진실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스스로를 낮춘 그 비율만큼이나 고귀해 보였다. 나는 처음엔 몰랐지만, 그것이야말로 현명한 처신에서 우러난 결과였다. 지능이 떨어지는 이 가엾은 친구가 마련해준 진실과 정직을 기반으로 하면 우리의 교제도 현자들 간의 교제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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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우리가 웅변가의 유창한 언변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하더라도 가장 고귀한 문어는 대부분의 경우 덧없는 구어의 저 멀리 훨씬 위쪽에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별이 가득한 하늘이 구름 저편에 있는 것과 같다. 별들이 있으면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천문학자들은 끊임없이 별들을 설명하고 관찰한다. 문어는 우리가 매일같이 나누는 말이나 덧없는 숨결과 같은 무의식적인 발산물이 아니다. 광장의 웅변이라는 것은 대부분 서재에서 볼 때는 한낱 수사에 불과하다. 웅변가는 한순간의 행사에 떠오르는 영감에 몸을 맡기고 눈앞에 있는 군중을 향해, 요컨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을 한다. 그에 반해 작가는 보다 평온한 삶이 그의 행사인 셈이고 웅변가를 자극하는 사건이나 군중은 오히려 그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 뿐이며, 인류의 지성과 치유를 위해,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시대를 가리지 않고 말을 거는 사람이다. - P123

책은 세계의 소중한 재산이며 세대와 민족의 온당한 유산이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그곳 선반에는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서적들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게 마련이다. 책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지만, 그것이 독자를 계발시키고 고무시키는 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책의 저자들은 어느 사회에서든 자연스럽고도 매혹적인 엘리트로서, 왕이나 황제 이상으로 인류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책을 경멸하는 무식한 장사꾼이 모험심과 근면함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여유와 자립을 성취하여 부와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면, 마침내 어쩔 수 없이 더욱 높고 그러면서도 아직 다가갈 수 없는 지성과 천재의 사회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그럴수록 자신의 불완전한 교양과 자신이 소유한 부가 얼마나 공허하고 불충분한 것인지를 통감한다. 이때 그는 뛰어난 판단력으로 자식들에게 자신이 그토록 결핍을 느꼈던 지적 교양을 마련해 주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결국 그는 한 가문의 창시자가 되는 것이다. - P12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신의 삶에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지금까지의 기적을 설명하고 새로운 기적을 보여줄 책이 우리를 위해 어딘가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어딘가에 표현돼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를 혼란케 하고 어리둥절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과거의 모든 현자들도 직면한 적이 있었다. 어느 한 문제도 빠지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현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삶으로 그 문제들에 해답을 주었다. 나아가서 우리는 책에서 지혜와 더불어 관대함도 배우게 될 것이다. 콩코드 교외 농장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은(그는 제2의 탄생과 독특한 종교적 체험을 거쳐 자신의 신앙에 따라 말없는 엄숙함과 배타성을 신조로 삼게 된 사람인데)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천 년 전 조로아스터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걷고 똑같은 체험을 했지만, 그럼에도 현명한 그는 그 일이 보편적인 것임을 깨닫고 그에 따라 이웃을 대하고 하나의 종교를 창시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용살이를 하는 그로 하여금 겸손하게 조로아스터와 벗삼도록 하면 어떨까? 그리고 모든 위인들의 관대한 감화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도 알도록 해주면 어떨까? 그래서 ‘우리 교회’라는 말은 아예 떼어 버리도록 하면 어떨까? - P130

나는 삶의 여백을 아낀다. 여름날 아침에는 습관이 된 목욕을 마친 후 해뜰녘부터 정오까지 볕 잘 드는 문간에 앉아 소나무와 히코리나무, 옻나무에 둘러싸여 평온한 고독과 정적 속에서 몽사에 잠기곤 했다. 새들이 지저귀며 소리 없이 집 안을 날아다녔다. 그러다 서쪽 창으로 햇빛이 들거나 큰길을 지나는 여행자의 마차 소리에 문득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이런 계절이면 나는 하룻밤 사이에 크는 옥수수만큼이나 쑥쑥 자랐으며, 손으로 어떤 노동을 했을 때보다도 훨씬 훌륭한 시간이었다. 그것은 내 삶에서 공제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여느 때의 할당량을 훨씬 초과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동양인들이 명상에 잠기느라 일을 하지 않는 참뜻을 이해했다. - P135

그 다음으로 스페인 산 생가죽이 실려 있는데, 그 꼬리는 소들이 스페니시 메인의 대초원을 질주할 때의 모양 그대로 위를 향해 구부러져 있다. 요컨대 이것은 모든 고집의 표본으로서, 타고난 모든 악덕이 얼마나 고치기 힘든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자리에서 고백컨대,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누군가의 진정한 성품을 알게 됐을 경우 현재의 상태에서 더 좋은 것으로든 나쁜 것으로든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동양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개의 꼬리를 불에 구워 눌러놓고 끈으로 칭칭 감아놓는 일을 12년 동안 반복하더라도 원래의 형태를 유지할 것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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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라니! 시간이 흘러도 결코 낡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그것보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위나라의 재상 거백옥은 공자에게 사람을 보내 근황을 알아보게 했다. 공자가 그 사자를 가까이 앉히고 이렇게 물었다. "그대의 주인은 뭘 하고 계시오?" 사자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제 주인님은 자신의 허물을 줄이고자 하시지만 그 일이 끝이 없나이다." 사자가 가고 나자 그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사자로구나! 정말 훌륭한 사자로다!" - P113

우리 뉴잉글랜드 주민들이 이처럼 비천한 삶을 영위하는 것 역시 우리의 눈이 사물의 표면을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실재일 거라고 생각한다. 만일 오직 사실만을 볼 줄 아는 누군가가 있어 마을 안을 돌아다닌다면 마을의 물방아둑은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이 우리에게 자신이 본 사실을 알려 준다 해도 우리는 그가 말하는 물방아둑이 어디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공회당이나 군청, 구치소, 상점, 집들을 보고 진정한 눈으로 응시할 경우 그것들이 무엇처럼 보일지를 말해 보라. 그러면 그것들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것들 모두가 산산조각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가 멀리 있다고, 천체의 바깥이나 가장 먼 별의 저편, 아담 이전에 있었거나 최후의 인간 이후에나 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영원에는 뭔가 참되고 숭고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지금 이곳이다. 하느님 자신도 현재라는 순간에 완결되는 것이며 그 어느 시대에도 지금보다 더 거룩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 흠씬 젖어듦으로써만 숭고하고 고귀한 것을 파악할 수가 있다. 우주는 끊임없이 또한 유순하게 우리의 생각에 응답해 준다. 우리가 빠르게 가든 느리게 가든 언제나 우리의 길은 마련돼 있다. 그렇다면 생각하면서 삶을 영위하도록 하자. 어떤 시인이나 예술가의 구상이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해서 후손이 완성시킬 수 없을 정도였던 적은 없었다. - P115

이제 차분하게 자리를 잡고 일을 하면서 두 발을 의견, 선입견, 전통, 망상, 허상 따위의 진흙밭 깊숙이 집어넣자. 파리와 런던, 뉴욕과 보스턴과 콩코드, 교회와 국가, 시와 철학과 종교를 통틀어 이 지구를 덮고 있는 그 퇴적물들 속으로. 그러다 보면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단한 바닥에 이르러, 바로 여기가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나서 지지점이 생겼을 때 홍수와 서리와 불 밑에 벽이나 국가를 세울 만한 자리를, 가로등 기둥이나 측량기를 세울 만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하자. 나일강 수위를 재기 위한 측량기가 아니라 진실을 측량하기 위한 계기를 말이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이 기만과 겉치레의 홍수가 얼마나 범람했던지를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만약 당신이 똑바로 서서 사실을 대면하면 흡사 언월도(偃月刀)라도 되듯 그 사실의 양면에 번쩍이는 햇살을 보게 될 것이며, 그 예리한 날이 당신의 심장과 골수를 자르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행복하게 지상에서의 운명을 마치게 될 것이다. 삶이 됐든 죽음이 됐든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오로지 진실뿐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죽어 가고 있는 거라면 목구멍 안에서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을 테고 임종의 싸늘함도 느낄 수 있으리라. 우리가 살아 있는 거라면 부지런히 할 일을 하도록 하자. - P116

우리 자신 또는 후손을 위해 재산을 모으거나 가정이나 국가를 세우거나 명성을 얻어도 우리는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지만, 진리를 다룸에 있어서는 불멸이나 다름없으며 그 어떤 변화나 불의의 사고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고대 이집트 인이 아니면 인도인 철학자가 신의 조각상에서 베일의 한 자락을 들쳐 올렸는데, 그 떨리는 옷자락은 여전히 들려 있는 채로 남아 있으며 나는 지금도 그 철학자가 그랬듯 신선한 영광을 응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그토록 대담했던 것은 바로 그의 안에 있는 나 자신이었고, 지금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자는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옷에는 그 사이 먼지 하나 앉지 않았다. 신성이 발견된 이래로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개선하고 또 개선할 수 있는 시간은 과거나 현재, 미래가 아니다. - P120

그리스어로 호머나 아이스킬로스를 읽는 학생이라면 방탕이나 사치에 빠질 염려가 없을 텐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본뜨려 할 테고 아침나절을 그들의 저서로 신성하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설혹 우리 모국어로 인쇄된 것일지라도 이 영웅시들은 타락한 이 시대에는 죽은 말로 된 듯이 읽힐 것이다.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 같은 단어에서도 우리의 일상 용법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그 낱말이나 행 하나하나의 의미를 애써 판독해야 한다. 오늘날 번역본의 값도 더 내려가고 인쇄물도 풍부해졌지만 그렇다고 이 고대의 영웅시 작가들이 좀더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그들과 그들의 글은 예전에 그랬던 만큼이나 진기하고 유별나 보인다.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으로 고대의 언어를 몇 마디 배우기만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 언어는 거리의 진부함에서 벗어나 영원한 암시와 자극을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농부가 주워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기억해서 암송하는 것도 헛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현대의 보다 실질적인 학문을 위한 길이 되어 줄 것처럼 말하곤 하지만, 모험심에 넘치는 학생이라면 그것이 어떤 언어로 씌어지고 그 언어가 얼마나 오래된 것이든 상관없이 고전을 공부할 것이다. 고전이란 인간의 사상 중에 가장 고귀한 내용을 기록한 것에 다름아닐 테니까. 고전은 사멸되지 않은 유일한 신탁이며 가장 현대적인 질문에도 델포이나 도도나 신전조차 주지 못한 해답을 줄 것이다. 자연이 오래된 것이라 해서 자연을 공부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책을 잘 읽는 일, 다시 말해서 참된 정신으로 참된 책을 읽는 일은 숭고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관습이 존중하는 그 어떤 운동보다도 힘든 일이다. 그 일은 운동선수가 하는 것만큼 훈련을 필요로 하며, 독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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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가지를 치는 사람이 천 명이라면 악의 근원을 꺾는 이는 한 사람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 사람이 어쩌면 자신의 생활방식을 통해 그가 구하고자 하는 그 비참한 상황을 가장 열심히 더 만들어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 명의 노예를 판 수익금으로 나머지 아홉 명의 노예들에게 일요일만 자유를 주는 위선적인 노예 주인과 다를 바 없다. 또 가난한 사람에게 부엌일을 시킴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일은 자신이 하는 편이 훨씬 더 자비로운 일이 아닐까? 사람들은 수입의 10분의 1을 자선에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차라리 수입의 10분의 9를 자선에 쓰고 그 일에서 아예 손을 떼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결국 사회는 재산의 10분의 1만을 회수하는 셈이다. 이것을 재산가의 관용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사법 관리의 태만으로 봐야 할까? - P88

나는 자선에 의당 따라야 할 찬사를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바쳐 인류에게 축복을 안겨준 모든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기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나는 인간에게서 고결한 행위와 자비로운 마음을 가장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데, 그것들은 이를테면 인간의 줄기와 잎에 해당한다. 그 풀이 시들면 사람들은 환자를 위한 비천한 용도로, 그것도 주로 돌팔이 의사들이 애용하는 약초로 쓰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꽃과 열매다. 인간의 향기가 내게 풍겨 오기를, 그 성숙함으로 우리들의 인간 관계에 풍미를 더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인간의 선함이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행위여서는 안 되며, 그것은 늘 남아도는 것, 그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의식적이지도 않은 행위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죄를 감춰 주는 박애다. 자선가 자신이 헤어난 슬픔에 대한 기억으로 마치 공기처럼 인간을 감싸면서 그것을 연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용기를, 질병이 아니라 건강과 안정을 함께 나눠야 하며 질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저 울부짖는 소리는 남부의 어느 평원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가 빛으로 인도할 이방인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우리가 구제해야 할 저 사납고 무지막지한 인간은 누굴까? 몸이 아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심지어 복통만 일어나도(위장이야말로 동정심이 생기는 곳이니까) 그는 즉각 세상을 시정하려 들게 마련이다. 자신이 우주의 축소판인 그는 세상이 풋사과를 먹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발견이며, 그가 바로 그 발견의 장본인이다). 실제로 그의 눈에는 지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풋사과이며, 인간의 아이들이 채 익기도 전에 갉아먹을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끔찍스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즉각 과감한 박애정신을 발휘하여 에스키모 인과 파타고니아 인을 찾아내고 인구가 밀접한 인도와 중국의 촌락들을 포옹한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자선활동을 벌이고 나면(강대국들은 그런 그를 자기들 목적에 이용한다) 그의 소화불량은 낫게 되고 지구는 흡사 익어 가는 과일처럼 볼이 발그레해지며 삶은 미숙함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감미롭고 살 만한 것이 된다. 결국 내가 저지른 짓이야말로 극악무도한 행위인 셈이다. 또한 나보다 더 악한 자는 과거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P90

인간의 관습은 성자들과의 관계로 오염되고 말았다. 우리의 찬송가집은 하느님에 대한 저주와 영원한 인내의 선율을 반향하고 있다. 예언자와 구원자들조차 인간의 희망을 확립시켰다기보다는 두려움을 달래주는 데 그쳤던 것 같다.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소박하면서도 억누를 길 없는 만족감이나 하느님에 대한 기념할 만한 찬미를 기록한 내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건강이나 성공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내게 유익한 것이지만, 모든 질병과 실패는 그것이 내게 또는 내가 그것에 아무리 많은 동정을 품더라도 결국 나를 슬프게 하고 유해한 것이다. 요컨대 만약 진실로 인디언답게, 또는 식물답게, 혹은 매혹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수단을 동원해서 인류를 회복시키고자 한다면 우선 자연 그 자체처럼 소박하고 넉넉해지도록 하자. 우리의 이마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몰아내고 숨구멍마다 조금이나마 생명력을 불어넣어 보자. 가난한 자의 감독이 되려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자. - P91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숲속에 널찍하고 반들반들하게 길을 닦아 삶을 맨 안쪽까지 몰아붙인 다음 가장 비천한 상태까지 내몰아 그 삶이 정말 비천하다고 판명날 경우 삶의 모든 천박함을 있는 그대로 뽑아서 온 세상에 공표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그 삶이 숭고한 것이라면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알고 싶고 다음번 여행 때에는 그것에 대하여 진정한 얘기를 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악마의 것인지 하느님의 것인지 이상하리만큼 확신하지 못하면서 다소 성급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원토록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이승을 사는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 P108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쫓기듯이 삶을 영위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일까? 우리는 허기가 지기도 전에 벌써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아홉 바늘의 수고를 덜어 준다고 하면서 내일 아홉 바늘의 수고를 덜기 위해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정작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도저히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교회에 걸린 종줄을 몇 번 당기기만 해도 채 종이 울리기도 전에 콩코드 외곽 농장에 있던 남자든(오늘 아침만 해도 수없이 온갖 약속을 둘러대며 바쁜 시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애든 여자든 할 것 없이 모든 일을 팽개치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것은 주로 화재에서 재산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하자면 불난 구경을 하기 위해서(왜냐하면 어차피 불이 난 이상 타버릴 테고 우리가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니까), 또는 불끄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한몫 거들기 위해서일 것이다(그 일이 제대로 된다면 말이지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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