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주관적 시뮬레이션 과정에 의거하고 있다는 견해가 옳다면 인간의 이 능력이 고도로 발달한 것은 진화의 결과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 진화 과정에서 가공적인 상상상의 경험에 의하여 준비된 것이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짐에 있어 그 유효성ㅡ즉 그것이 뒤에까지 살아남는 가치다ㅡ이 도태에 의해 시험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먼 조상의 중추신경계에 깃들여 있던 시뮬레이션의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가 도달한 상태에까지 발전한 것은 구체적 경험에 의하여 확인된 인간의 적절한 표상 능력과 확실한 예견 능력에 의한 것이다. 아우스트랄란트로푸스나 피테칸트로푸스 나아가서는 크로마뇽인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가, 그들이 다룰 수 있는 무기로 표(표범) 사냥이라도 나갈 경우에 주관적 모시 장치에 틀림이 있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조로부터 계승한 선천적 논리 장치는 우리를 기만하는 일 없이 우리가 우주의 사상을 ‘이해‘하며ㅡ 즉 이들 사상을 표상적인 언어로 기술하며ㅡ 예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보 요소가 시뮬레이트에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의해서 끊임없이 풍부해지는 예측 장치인 시뮬레이트는 발견과 창조의 장치이기도 하다. 그 주관적인 작용의 논리를 분석함으로써 객관적 논리의 규칙을 정식화하기도 하고 수학과 같은 새로운 상징적 도구를 창조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대사상가는 인간에 의해 창조된 수학이라는 존재가 조금도 경험의 힘을 입지 않고 자연을 그처럼 충실히 표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실제로 각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에는 조금도 힘입고 있지 않지만 부지런히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힘든 경험으로 단련된 시뮬레이트에 모든 것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방법에 따라서 논리와 경험을 조직적으로 조립하고 있을 때에 실은 우리 조상들의 경험의 일체와 현실의 경험과를 조립시키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 P197

이원론적 환상과 정신의 존재
여기에 경계선이 있는 것이며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것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것을 넘어설 때까지는 우리의 활동 속에서 이원론이 계속 진실을 유지하는 것이다. 뇌라는 관념과 정신이라는 관념과는 17세기의 인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실제 생활 체험 속에서 구별되고 있다. 객관적 분석에 의해서 우리 속에 있는 피상적인 이원론이 환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이원론은 우리의 존재 자체와 실로 밀접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주관을 명백히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하려 하거나 그것 없이 감정적·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하여도 도로에 그치고 말 것이다. 도대체 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누가 정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영혼 속에 비물질적인 ‘실체‘를 인정한다는 환상을 단념하는 일은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전적·문화적 유산과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개인적 경험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풍부함·측량할 수 없는 깊이 등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산과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라는 존재, 즉 자기에 대한 유일무이하며 반박할 여지가 없는 증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 P199

중요한 점은, 지금까지 수십만 년 동안에 걸쳐서 문화적 진화가 신체상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모든 동물의 경우 이상으로 인간의 경우에도 ㅡ 인간의 무한하며 고도한 자율성 때문에 ㅡ 행동이야말로 도태의 압력을 방향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이 주로 자동적이었던 단계를 지나 문화적으로 된 뒤로는 문화적 특징 자체가 유전 정보의 진화에 대하여 압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시기까지의 일이며, 그 후로는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그것과 유전 정보의 진화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 P204

현대 사회와 유전적 쇠퇴의 위험
현대 사회의 심층에서 이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거기에는 도태가 폐절되어 버리고 없다. 이 도태에는 다윈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스러운‘ 것은 이미 하나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사회 속에서 도태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적자 생존‘이라는 사실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현대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아이를 늘림으로써 ‘적자‘가 유전적으로 생존한다는 사실에 도태가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능, 양심, 용기, 상상력 등은 확실히 현대 사회에 있어서 여전히 성공의 요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 성공의 요인이지 유전적 성공의 요인은 아니다. 그런데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유전적 성공뿐이다. 그러나 전혀 반대로 되어버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통계에 의하면 지능 지수(혹은 문화 수준)와 부부 사이의 아이들의 평균 인수와의 상관 관계는 마이너스다. 똑같은 통계가 한편으로는 부부의 지능 지수 사이에 높은 플러스의 상관 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가장 높은 유전적 포텐셜이 엘리트 쪽으로 흡수되고 그 엘리트는 상대적으로 자손을 만드는 일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선진적인‘ 사회에 있어서도 신체적으로나 지적인 면에서나 부적자의 배제는 자동적이며 가혹한 것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춘기의 연령까지 살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들 유전적 장애자의 대부분이 자손을 만들 수 있는 연령까지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종의 쇠퇴 ㅡ자연 도태가 없어지면 쇠퇴는 불가피하다ㅡ를 지켜온 기구가 지식과 사회 윤리의 발달 덕분에 매우 중대한 결함을 지닌 경우 이외에는 거의 작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상의 위험은 흔히 지적되어 온 것인데, 이에 대하여 분자 유전학의 최근의 진보는 기대할 수 있는 구제책을 때때로 제기하고 있다. 이 환상은 일부의 학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으로,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약간의 유전적 결함을 일시적으로 호전시킬 수는 있을 테지만, 단지 침해를 입은 개인에 관한 것에 불과하며 자손에 대해서까지는 불가능하다. 현대 분자유전학은 유전적 유산에 작용하여 새로운 특징을 추가하거나 유전적 ‘초인‘을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희망의 공허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전 정보의 미시적 스케일은, 지금으로서는 ㅡ아마도 영구히ㅡ 그러한 조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상 과학적인 환상을 잠시 덮어둔다면 인류를 ‘개량하는‘ 유일한 수단은 다만 깊이 생각한 다음에 엄격한 도태를 실행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러한 수단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선진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비도태 또는 역도태라는 상태가 지배적인데, 이것이 위험을 수반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위험이 매우 중대하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일 뿐이다. 10 내지 15세대, 즉 수세기 후의 일이라 하여두자.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와는 또 다른 절실하고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 P204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구 폭발이나 자연 환경의 파괴 또는 메가톤급의 핵의 위협이 아니고 훨씬 심각하며 중대한 질환, 즉 영혼의 질환에 대한 것이다. 관념 구성상의 진화 속에서 일어날 최대의 전기가 이 질환을 만들고 그것을 악화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3세기 동안에 걸쳐 지식이 굉장히 발달하여 온 결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또 자기와 우주와의 관계에 대하여 수만 년 동안 깊이 뿌리박고 있던 개념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마음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영혼의 질환이라든지 메가톤의 위력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어떤 단순한 사상에서 생겨난 것이다. 즉 자연은 객관적인 것이고 참다운 지식은 논리와 경험을 조직적으로 맞춤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사상이다. 사상의 왕국 안에서도 이만큼 단순하고 또 명석한 사상이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지 10만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백일하에 나타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예컨대 중국 문명과 같은 몇 개의 최고 문명이 이 사상을 모르고 지내오다가 서구로부터 처음으로 배웠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또한 그 서구에 있어서도 이 사상은 실용 위주의 기계 공학 속에 밀폐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마침내 두꺼운 껍질을 깨치고 풀려 나오기까지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에서 갈릴레이, 데카르트, 베이컨까지의 2천5백여 년 간의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은 어찌된 일일까? 이 모든 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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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돌보는 능력과 더불어 창의성 또한 자동화가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다. 요즘은 음악을 파는 데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아이튠스 스토어에서 음악을 직접 내려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와 뮤지션, 가수, DJ는 여전히 피와 살로 된 인간이어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능성 중에서 선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의 창의성에 의존한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어떤 일자리도 자동화의 위협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안전한 상태로 남아 있지는 못할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 예술은 보통 인간의 감정과 결부돼 있다. 우리는 예술가의 역할이 우리 내부의 정신적 힘들을 연결하는 것이고, 예술의 모든 목적은 우리를 서로 간의 감정으로 연결하거나 우리 내면에 어떤 새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다 보니, 예술을 평가할 때도 그것이 청중에게 미치는 감정적 영향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예술이 인간의 감정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을 때, 외부 알고리즘이 인간의 감정을 셰익스피어나 프리다 칼로, 혹은 비욘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조종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 P52

사람들이 자신을 예술과 연결하는 것은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가령, 페이스북이 당신에 관해 아는 모든 정보를 기반으로 맞춤식 예술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놀라우면서도 다소 불길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당신의 남자 친구가 떠났을 때 페이스북은 아델이나 앨라리스 모리셋의 가슴을 아프게 한 미지의 사람보다는 특정한 그 망할 자식에 관한 맞춤 노래로 당신을 달래줄 것이다. 그 곡은 심지어 당신이 그와 맺은 관계에서 겪은 실제 일들까지 떠올리게 해줄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 P56

인간의 생화학 체계만 알면 위대한 예술이 나올까? 답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렸다. 만일 아름다움이 실제로는 청중의 귀에 있다면, 그리고 고객이 언제나 옳다면, 생체측정 알고리즘은 역사상 최고의 예술을 생산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예술이 인간의 감정보다 더 깊은 무엇에 관한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생화학적 진동 너머의 진실을 표현해야 한다면, 생체측정 알고리즘은 그리 뛰어난 예술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점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인간 예술가도 사정은 같다. 단지 예술 시장에 진입해서 많은 인간 작곡가와 연주자를 대체하는 것이 목표라면, 알고리즘은 곧장 차이코프스키를 추월할 필요는 없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능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 P57

예술에서 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전통적인 일자리 다수가 사라지면 새로운 인간 일자리의 창출로 상쇄될 것이다. 알려진 질병을 진단하고 익숙한 치료를 관장하는 데 집중하는 일반 의사들은 AI 의사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신약이나 수술 절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사와 연구소 조교에게 훨씬 더 많은 돈을 지급해야 할 것이다.
AI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인간 일자리 창출을 도울 수 있다. 인간은 AI와 경쟁하는 대신 AI를 정비하고 활용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드론이 인간 비행사를 대체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정비와 원격 조종, 데이터 분석, 사이버 보안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많이 생겨났다. 미군의 경우 무인기 프레데터나 리퍼 드론 한 대를 시리아 상공으로 날려보내는 데 30명이 필요한데, 그렇게 수집해 온 정보를 분석하는 데는 최소 80명이 더 필요하다. 2015년 미 공군은 이 직무를 맡을 숙련자가 부족해, 무인 항공기 운용 인력 부족이라는 역설적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2050년 고용 시장은 인간-AI의 경쟁보다는 상호 협력이 두드러진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경찰부터 은행 업무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AI가 한 팀을 이루면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IBM의 체스 프로그램인 딥 블루가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은 후에도 인간이 체스를 그만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AI 트레이너 덕분에 인간 체스 챔피언은 실력이 유례없이 좋아졌고, 잠시나마 ‘켄타우로스‘로 알려진 인간-AI 팀이 체스에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했다. 마찬가지로 AI는 인간이 사상 최고의 형사, 은행원, 군인으로 단장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일자리는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그런 일자리를 실제로 메울 사람을 재교육하기보다 아예 새로운 인간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더 쉬운 일로 판명될 수 있다. 이전에 자동화 물결이 밀려들었을 때, 사람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기계적인 직업을 또 다른 비슷한 수준의 일로 바꿀 수 있었다. 1920년 농업이 기계화하면서 해고된 농장의 일꾼들은 트랙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새 일을 찾을 수 있었다. 1980년 공장 노동자는 실직하더라도 슈퍼마켓의 현금출납원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직업 변화가 가능했다. 농장에서 공장으로, 다시 공장에서 슈퍼마켓으로 옮겨가는 데는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 P58

하지만 정부 지원이 충분하게 제공된다 해도 수십억 명이 반복해서 자신을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정신적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인류의 상당한 비중이 고용 시장에서 밀려난다면 일-이후 사회와 일-이후 경제, 일-이후 정치를 위한 새로운 모델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그 첫걸음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정치적 모델이 앞으로 직면할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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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전의 메시지의 복제에 잘못을 일으키거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건과 그 잘못의 기능적 결과 사이에는 앞서의 예와 마찬가지로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기능적 영향은 변화를 입은 단백질의 구조와 그 실제상의 역할이라든지, 그 단백질이 일으키는 상호작용이라든지 또는 그 단백질이 촉매가 되는 반응 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들은 모두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사건 자체와도, 그 근인 또는 원인과도 전혀 무관하다.
마지막으로 불확정성을 일으키는 더욱 근본적인 원천이 미시적 레벨에 존재하는데, 이것은 물질 자체의 양자적 구조에 기인하는 것이다. 돌연변이는 그 자체로서는 미시적·양자적 사건이며 따라서 이 사건에는 불확정성 원리가 적용된다. 요컨대 그것은 본성 자체가 본질적으로 예견이 불가능한 사건인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현대의 최대 물리학자 몇 사람에게는 불확정성 원리가 전면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신이 주사위놀이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어떤 학파는 그것을 단지 조작적인 개념으로 인정하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러나 양자론을 보다 ‘정묘‘한 구조ㅡ불확정성이 남을 여지가 없는ㅡ로 바꿔놓으려는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에는 이 원리가 언젠가는 자기들의 학문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고 믿는 물리학자란 거의 없다.
아무튼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불확정성 원리가 언젠가는 포기되어야 한다 하더라도 DNA 중의 누클레오티드 배열의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결정론적 과정(그것이 아무리 완전한 것일지라도)과 단백질의 상호작용이라는 레벨에서의 영향을 일으키는 결정론적 과정 사이에는 ‘완전히 우연적인 일치‘ ㅡ앞에서 미장이와 의사의 우화로 정의한 의미에 있어서의ㅡ 밖에 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여전히 ‘본질적‘ 우연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물론 라플라스의 우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기서는 우연이라는 말의 정의조차도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의사가 미장이의 쇠망치에 맞아 죽는 것은 천지개벽 이래로 설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P149

그러한 것을 합쳐 현재의 약 삼십억에 이르는 인류는 각 세대마다 천억 내지 일조의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있다. 내가 이 숫자를 드는 이유는 어떤 생물의 유전정보가 우연히 변화하는 가능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복제기구는 매우 엄격하게 또한 열심히 자기 보존을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이다. - P157

우주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 중에서 어떤 특정한 사건이 생길 선험적인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우주는 실재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확률이(그것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거의 제로였던 사건도 확실히 일어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생명이 지구상에서 단 한 번만 출현하였다는 것과 생명이 태어나기 이전에는 출현할 확률이 거의 제로였다는 것을 긍정할 권리도, 부정할 권리도 우리에게는 없다.
이 관념은 단지 과학도로서의 생물학자에게만 불유쾌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우주 속에 실재하는 모든 것이 원초에서 미래 영겁에 걸친 필연적인 존재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관념은 그것과 상충되는 것이다. 우리는 실로 강렬한 이 숙명관에 대해서 항상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현대 과학은 일체의 내재성을 무시한다. 운명은 그것이 만들어짐에 따라서 기록되는 것이지 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생물권에서 상징적 전달이라는 논리적 체계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인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우리의 숙명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인류의 출현이라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유일무이한 사건이었으므로 우리는 일체의 인간중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생명 자체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출현도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그것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그 출현의 확률이 거의 제로였기 때문이다. 우주는 생물을 잉태하고 있지 않았으며, 생물권도 인류를 잉태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우리가 선택된 기회는 몬테카를로 도박장에서 딸 수 있는 기회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10억 프랑을 따가지고 망연히 서 있는 인간처럼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이상스러움에 당혹하고 있다 해도 조금도 놀라울 게 없다. - P183

오늘날에도 아직 일부의 동물 행동학자는 동물의 행동 제 요소는 선천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학습한 것 중의 하나며, 이 둘은 서로 다른 쪽을 배제한다는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는 로렌츠가 철저히 논증하고 있다. 경험에 의해서 습득된 요소가 행동 속에 보일 경우에도 그것은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서 습득된 것이며 이 프로그램은 선천적, 즉 유전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프로그램의 구조가 학습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학습이라는 것도 종의 유전적 유산으로서 미리 만들어진 ‘형태‘속에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유아가 말을 처음으로 익히는 과정도 이와 같이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제 7장 참고). - P192

그러나 어떤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19세기의 위대한 경험론자는 과오가 없었다. 꿀벌의 기계적인 행동이라든지 인간 인식의 선천적인 구조라든지, 유전적 선천성도 포함하여, 생물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대마다 되풀이되는 하나하나의 개체의 경험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도상 전체에 걸친 종의 모든 조상에 의하여 축적된 경험에 유래하는 것이다. 단지 우연에서 이루어진 이 경험만이 그리고 도태에 의하여 나쁜 점이 제거된 그 무수한 시도만이 다른 기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독특한 기능에 적응한 중추신경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뇌에 관하여 말하자면 감각 세계에 대하여 생물종의 작용에 적합한 표상을 부여하고, 그 자체는 쓸모 없는 직접적인 경험의 데이터를 유효하게 분류하기 위한 구조를 제공하고, 또한 인간의 경우에는 결과를 예견하여 행동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주관적으로 경험을 모시(본떠서 시험함)하는 데 적합한 계로서 형성된 것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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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용어 하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④ ‘心學‘이라는 용어를 보자. 이 용어는 주로 ‘양명학‘을 가리키는데 쓴다. 이에 대해 주자학은 ‘理의 탐구‘를 특징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23 理學으로 불린다. 그렇지만 이 대비적 규정은 맥락적인 것이지, 자체 명확하거나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 지금 보듯이 진덕수는, 그리고 그 스승을 따라 ‘이 학문‘을 규정하는 유약우도 ‘주자학‘을 ‘心學‘으로 정위하고 있는 것을 보라, 서산 진덕수는 贊에서, 舜이 禹에게 전수한 16글자를 ‘만세 心學의 연원‘이라고 말하고 있고, 유약우 또한 "스승 진덕수의 心學이 주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수원지는 북송의 염락과 공맹의 원본유학에 두고 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물론, 지금 여기 언급된 心學이 곧 주자학의 배타적 자기정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주자학이 心學을 자신의 학문으로 적극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수련‘을 둘러싼 다양한 방법과 체계들을 가리킬 것이나, 주자학은 자신들의 체계가 그것을 새롭게 제창하고 있으며, 아울러 그 정통적 중심임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요컨대 ‘心學‘은 주자학의 자부가 깔려 있는말이다. 어쨌건 이 곡절을 감안할 때, 心學을 양명학에 독점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당해 보인다.
이 정황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心學‘이라는 이름은 양명학보다 주자학에 더 적당한 개념이 아닐까 하는··· 지금 보듯 주자학은 인심과 도심 사이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에 대한 眞積力久, 오랜 훈련을 한순간의 방심도 없이 촉구하는 점에서 진정 心學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까. 아울러 人心의 위태로움을 살피고 제어하는 克復의 길과, 자신 속의 은밀한 초월성을 보존하고 함양해나가는 두 갈래의 길을 제시하고, 그 방면의 실제 훈련을 다양하고도 치밀하게 구축해놓은 점에서도 역시 심학의 이름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양명학은 어떤가. 양명학은 마음의 내적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마음의 여러 측면을 인식론적, 정동적, 형이상학적으 24 로 각개 다차원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며, 그에 걸맞은 다면적 수행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어느 편이냐 하면, 양명학은 마음이란 오직 하나이며, 분열되지 않는 전체로 ‘이미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工夫는 이 본래의 양지, 그 빛과 힘을 유지하고 발현되도록 유의하는 일에 바쳐진다. 그 각성의 유지 하에 나와 만물은 구분되지 않고, 모종의 통일체를 형성한다. 여기 ‘마음‘은 자체 동일성을 잃고 萬物一體, 사물 속에 —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 동화된다. 요컨대 양명학에 있어 마음은 궁극적으로 문제적이지 않으며, 그렇기에 결국 心學이란 이름에 걸맞은 문제와 노력이 상세하거나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이 자체의 문제성을 잃고 사물과 일체가 되는 점에서 나는 양명학이 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양명학은 인간을 자연과 동형화시켰고, 이 점에서 오히려 物學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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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이치는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으며, 학술 사상 역시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다르지 않다. 단지 옳고 그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학문에서 억측과 편견은 용납되지 않는다. 옳으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편견이나 틀린 부분은 반드시 비판함으로써 올바른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학술상의 본말本末·주종主從·정사正邪에 대해서는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치우치고 부차적인 것을 근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올바르고 주요한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서도 안 된다. 이것은 고금을 통하여 변하지 않는 이치이다. 본말·주종·정사가 바뀌었는데 어떻게 학문의 가치를 평가하고 구별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학문의 표준을 세울 수 있겠는가?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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