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들을 가장 대규모로 모아놓은 빅데이터에도 지식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빅데이터는 상관성을 조사하는 데 사용된다. 상관성이란 A가 발생하면 흔히 B도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상관성은 인과관계,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가장 원시적인 지식의 형태다. 그것은 그렇다. 왜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은 파악하기다. 빅데이터는 이렇게 사유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은 그렇다‘에 만족한다. - P11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만드는 폭력적 힘이 있다. 전면적인 같게-만들기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소멸을 낳는다. 의미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돈만으로부터는 의미도 정체성도 생기지 않는다. 같은 것의 폭력으로서의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정보와 소통과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타자, 단독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의 부정성을 파괴한다. 같은 것이 같은 것과 만나는 지점에서 세계적인 것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 P21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일반적인 교환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단독적인 것을 쓸어 없앤다. 테러리즘은 세계적인 것에 맞서는 단독적인 것의 테러다. 어떤 교환도 거부하는 죽음은 단독적인 것 그 자체다. 죽음은 테러리즘과 함께 시스템 속으로 난폭하게 침입한다. 시스템 안에서 삶은 생산과 성과로 전체화된다. 죽음은 생산의 종말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죽음 예찬과 삶을 그저 삶으로서 무조건 연장하려고만 하는 오늘날의 건강 히스테리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너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라는 알카에다의 구호는 바로 이런 체계적인 연관을 지적하고 있다. - P22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엄청난 불의를 낳고 있다. 착취와 배제는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신자유주의는 체제비판적인 혹은 체제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달갑지 않은 인물들로 확인하고 배제하는 "반옵티콘banopticon," 즉 추방의 옵티콘을 구축한다. 판옵티콘은 훈육을 위해 작동하지만, 반옵티콘은 안전을 위해 작동한다. 서양의 복지 지역 안에서조차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철폐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뤼스토우는 이미 신자유주의적 시장법칙에만 맡겨지면 사회는 반인간적으로 변하고, 사회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산출하는 "생명정치"로 신자유주의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를 이 생명정치로 교정하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에 좌우되는 대중이 생겨날 것이며, 이들은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세력들에 쉽게 포섭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로 바뀐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외국인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오로도 표현된다. 두려움의 사회와 증오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 P24

돈은 정체성을 매개해주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정체성을 대체할 수는 있다. 돈은 적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안전하고 평안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돈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정체성도, 안전도 없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상상적인 것으로, 예컨대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해주는 국수주의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적을 발명해낸다. 그 한 예가 이슬람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의미를 제공해주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 상상적인 경로를 통해 면역성을 구축한다. 자신에 대한 걱정이 무의식적으로 적에 대한 갈망을 일깨운다. 적은 상상적인 형태 속에서도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적은 우리 자신의 문제가 형태화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척도를, 나 자신의 경계를, 나 자신의 형태를 획득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상상적인 것은 현실 속의 결핍을 보충해준다. 테러리스트들 안에도 상상적인 것이 내재한다. 세계적인 것은 현실적인 폭력을 야기하는 상상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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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atopos, (옮긴이) 장소가 없는, 무소적인)라고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아토포스로서의 타자는 언어를 뒤흔든다. 그에 관하여, 그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수식어는 틀리고, 고통스러우며, 서투르고, 민망하다 [......]." 부단히 동일화시키는 오늘의 문화는 아토포스의 부정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바로 아토포스적 타자에 대한 경험 자체가 사라져버린 까닭에,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하며 이로써 모든 것을 동일자로 평준화한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타자성과 반대로 일종의 긍정성이다.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 P18

우리는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점점 강화되어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리비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주체성에 투입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 속을 철벅거리며 나아가다가, 결국 그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 P19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여버린 상태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이때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를 확인해주는 거울로 전락한다. 이러한 인정의 논리는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를 자신의 에고 속에 더 깊이 파묻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성공 우울증이 발생한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 P20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가 아니라 기획하는 프로젝트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빛을 탕감받고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채무의 위기뿐만 아니라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한다. - P31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없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에로스에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타자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질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이질성을 절대적으로 원초적인 에로스의 관계 속에서, 즉 할 수 있음으로 번역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에로스의 이러한 관계를 실패로 규정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답은 그렇다이다. 만약 우리가 흔히 에로스의 묘사에 사용되는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에로스적인 것을 ‘붙잡다‘ ‘가지다‘ ‘알다‘와 같은 말로 규정하려 한다면 말이다. 에로스 속에 그런 것은 전혀 없다. 혹은 에로스는 그 모든 것의 실패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가지다‘ ‘알다‘ ‘붙잡다‘는 모두 할 수 있음의 동의어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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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 없음. 사랑하는 자의 특별한 감수성은 그를 쉽게 상처 입는 존재로 만든다. 가장 깊숙한 내면까지 가장 쉽게 상처를 입는다." - P53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는 본다는 것을 상처로 묘사한다.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 내 자아의 미지의 영역 속으로 침범하도록 온전히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기를 배우는 것은 전혀 적극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은 과정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버려두기 혹은 어떤 사건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말한다. "나는 보기를 배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고, 평소에는 언제나 종착지였던 곳에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던 내면을 가지고 있다. 지금 모든 것이 거기로 간다.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 P54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미는 도덕과 개성을 표현할 때만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개성의 미가 섹시함에 밀려나고 있다. "19세기에는 중산층 여성들이 섹스어필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때 매력적이라고 여겨졌다. 아룸다움은 육체적이자 정신적인 속성으로 이해되었다. [......] 성적인 매력 그 자체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이 기준은 미뿐만 아니라 도덕적 개성과도 분리되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성과 심리적인 특성들을 궁극적으로 섹시함에 종속시킨다. - P73

성적 매력을 몸의 평가기준으로 삼는 것은 해방의 논리만을 일면적으로 좇지 않는다. 몸의 상업화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미용산업은 몸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고,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몸을 착취한다. 소비와 섹시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적인 매력을 근거로 하는 자아는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소비문화는 미를 점점 더 자극과 흥분의 도식에 종속시킨다. 미의 이상은 소비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미의 추가적 가치는 모조리 제거된다. 미는 매끄러워지고, 소비에 종속된다. - P74

섹시함은 도덕미나 개성미에 대립한다. 도덕과 덕성 혹은 개성은 특별한 시간성을 갖고 있다. 이것들은 지속성, 견고성, 불변성에 기초한다. 개성은 원래 낙인찍힌 기호,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의미한다. 불변성이 개성의 주요한 특성이다. 카를 슈미트는 어떠한 고정된 표시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을 개성이 없는 요소라고 불렀다. "바다에는 [......] 어떠한 선도 견고하게 새길 수 없다. [......] 바다는 근원적 의미에서의 개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개성은 ‘심다, 새기다, 인각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diarassein에서 유래되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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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의 이완 역시 노동력의 재충전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일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 P5

진리는 그 자체로 이미 시간 현상이다. 진리는 지속적인 영원한 현재의 반영인 것이다. - P26

경험 또한 시간적 확장, 여러 시간 지평의 착종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의 주체에게 과거는 단순히 사라지거나 버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현재, 그의 자기 이해를 형성하는 요소로서 남아 있다. 작별은 한때 있었던 자의 현존을 희석시키지 않는다. 그의 현존은 작별을 통해 오히려 더욱 깊어질 수 있다. 떠나간 것은 경험의 현재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으며, 오히려 경험의 현재와 뒤얽힌 채로 남아 있다. 또한 경험의 주체는 앞으로 올 것에 대해, 예측불허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스스로를 열어두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그저 일해서 시간을 조금씩 갚아가는 노동자로 굳어져버릴 것이다. 그는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노동과정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반면 경험의 주체는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한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거처는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 사이에 있다. - P26

잠자는 사람은 오히려 유희하는 자, 방랑하는 자이며 시간의 지배자이기도 하다. "잠자는 사람은 시간의 경과를, 세월과 여러 세계의 질서를 제 둘레에 둥그렇게 펼쳐놓는다." 때때로 혼돈과 착란도 일어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일도 파국적인 종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항상 "착한 확실성의 천사"가 와서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 한밤중에 깨어나면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 순간에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 하지만 차츰 기억이 찾아왔다. [......] 마치 스스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허무에서 나를 건져주려 위에서 내려오는 구원자처럼. 1초 만에 나는 수세기의 문명을 건너고, 석유 등잔과 풀어진 셔츠의 희미한 이미지에서 서서히 나의 자아가 그 본래의 모습대로 새로이 만들어졌다." - P30

"혁명Revolution"이라는 개념 또한 원래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혁명도 물론 과정이기는 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귀환과 반복의 측면이 없지 않다. 원래 레볼루치오revolutio는 별의 운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이 역사에 적용되면서 한정된 수의 지배 형태들이 순환적으로 반복됨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역사의 진행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하나의 원환으로 엮인다. 전진이 아니라 반복이 역사의 진행을 규정한다. 게다가 인간은 자유로운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시간에 대해 자유롭기보다는 내던져진 입장에 처해 있다. 혁명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별들의 운행 법칙에 종속되어 있듯이 혁명에 종속되어 있다. 시간은 자연적 상수들에 의해 형성된다. 시간은 소여, 즉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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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을 가두고 있는 담벼락으로 "유일한 것, 완전한 것, 자기 충족적인 것, 그리고 불멸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고 상정된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이라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니체는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가 망치로 부수겠다고 선언한 담벼락을 기독교의 신에 한정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 신은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회구조는 영원히 바뀔 수 없다는 생각도 인간을 체념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담벼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가로막고 길들이려는 담벼락을 파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제 ‘영원회귀‘에 대한 니체의 육성을 직접 들어볼 순서이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P22

이렇게 반문하면서 니체는 영원불멸의 세계관이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그렇지만 영원불멸을 추구하려는 시도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안하지 않는다면, 니체의 진단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니체가 제안한 ‘영원회귀‘의 세계관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영원회귀가 영원불멸의 세계관을 붕괴시킬 정도로 강력하지 않다면,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과거 전통에 대한 투정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활을 걸고 제안한 ‘영원회귀‘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이다. 10만 년 주기로 모든 것이 반복된다고 해보자. 오늘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것은 10만년 전에도, 20만 년 전에도 그리고 30만 년 전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었던 것이며, 10만 년 뒤에도, 20만 년 뒤에도 그리고 30만 년 뒤에도 동일하게 반복될 일이다.
기독교에서는 살아 있을 때 가난과 억압을 참으라고 한다. 그러면 영원불멸한 천국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지금 고통스러운 것을 기꺼이 감내하라고 가르친다. 언젠가 진학하거나 취업하면 고통의 대가로 뿌듯한 성취감이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 직장에서는 상사나 거래처 사람에게 비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승진하거나 혹은 거래가 성사되는 단맛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통념에 따르면 순간의 고통과 비굴은 아무것도 아니다. 힘들지만 이 순간만 참고 견디면 된다. 바로 여기 이 순간은 미래의 행복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버려도 될 수단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이런 통념에 브레이크를 건다. 영원회귀의 가르침에 따르면 굴욕과 비겁으로 점철된 고통의 순간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10만 년 주기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가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리는 없다. 순간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삶이 비겁하다면 우리는 자신이 10만 년 주기로 지금까지 비겁했다는 슬픈 과거를,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10만 년 주기로 비겁하리라는 슬픈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들뢰즈는 영원회귀로 응축되는 니체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윤리적 강령으로 해석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 『차이와 반복』

영원회귀를 주장한 니체는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영민한가? 우리는 자신이 과거 10만 년 전에 무엇을 했는지, 혹은 앞으로 10만 년 뒤에 무엇을 할지 전혀 모른다. 단지 지금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실행하려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10만 년 전에도 반복되었고, 그리고 10만 년 뒤에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것만을 안다. 그러니까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가두어 길들이는 담벼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P24

우선 라캉은 인간이 금지된 것만을 욕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금지된 것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금지가 없다면 욕망도 생길 수 없다는 뜻이다.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어느 공사장 외벽 한켠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들여다보지 마시오." 이 경우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니 들여다보지 말아야지"라고 가볍게 돌아서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비록 들여다보지는 않지만, 보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다시 정신분석학의 논의로 돌아가자.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은 두 살 때까지 구강기(oral stage)를 거친다고 한다. 이 시기에 유아는 자신의 입에서 가장 강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유아가 젖을 먹기 위해서만 엄마의 젖꼭지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아는 젖꼭지를 물고 빨면서 쾌감을 느낀다. 유아가 인공 젖꼭지를 물고서 행복하게 잠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엄마는 유아에게 젖꼭지를 내주지 않으려고 한다. 유아는 자신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젖꼭지가 이제는 금지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 경우 젖꼭지는 아이의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단순한 대상을 넘어선다. 한떄 쾌락을 주었던 젖꼭지가 금지되자마자, 이것은 유아에게 욕망 대상이 된다. 당연히 이 순간 유아는 욕망 주체로 탄생한다. (......) 금지된 쾌락은 잃어버린 쾌락으로서 영원히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젖꼭지를 금지당한 유아는 볼펜이나 인형을 입으로 빨거나, 자라서는 이성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볼펜이나 인형, 혹은 이성의 입술은 금지된 젖꼭지, 즉 대상a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현재 욕망하는 것은 과거 부모나 사회로부터 금지된 쾌락 대상의 아우라를 가진 것뿐이다. 현재 작동하는 우리의 욕망은 모두 과거 금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라캉이 인간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그러니까 지금 애인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유년 시절 금지된 쾌락 대상으로서 젖꼭지를 그리워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라캉이 우리에게는 생각과 삶의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머릿속에서는 애인을 사랑해서 키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젖꼭지에 대한 잃어버린 쾌락을 절망스럽게 회복하려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생각과 존재의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에게 각인된 금지를 극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욕망되는 자로서건 아니면 욕망되지 않는 자로서건 간에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정신분석의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프로이트가 밝힌 진리의 본성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 『에크리』 - P29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 P31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인물인 연극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연극이 짧기를 바란다면 짧을 것이고, 만일 길기를 바란다면 길 것이다. 만일 그가 너에게 거지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 구실조차도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절름발이를, 공직 관리를, 평범한 사람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에게 ‘작가‘는 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에 따르면 신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연기해야 할 배역들을 모두 정했다는 것이다. 그 배역에 따르면 우리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왕이 될 수도 있고, 사형수도 될 수 있고, 절름발이가 될 수도 있다. 에픽테토스는 왕이 되었다고 뻐길 것도 없고, 거지가 되었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 왕이나 거지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삶이란 연극판에 부여된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 연기를 마치면, 그러니까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모두 배역에 충실했던 배우들이었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 죽을병에 걸렸다고 슬퍼할 이유도 없다. 단지 자신이 맡은 배역이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충실하게 자신의 배역을 잘 소화하고 연극판을 떠나면 된다. 괜히 신이라는 작가에게 투덜거려서도 안 된다. "왜 저에게 이런 초라한 배역을 주었나요?" 이 말을 듣는다면 작가는 말할 것이다. "누군가 어차피 그런 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프로답게 연기에 집중해야지, 왜 아마추어처럼 투덜대는 거니?"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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