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조급성의 시대는 "영화적" 사회, 즉 시각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대이다. 이 시대는 "사물들의 영화적 흐름"이 이루어질 때까지 가속화된다. 시간은 단순히 현재들의 연속으로 해체된다. 조급함의 시대는 향기가 없는 시대이다. 시간의 향기는 지속성의 현상이다. - P81
"즉각적인 향락"은 아름다울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아름다움은 "한참 뒤에야" 다른 것의 빛 속에서, 귀중한 추억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기 떄문이다. 아름다움은 지속성에, 사색적 종합에 의존한다. 순간적인 광휘나 자극이 아니라 사물들의 잔광, 사물들의 여운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물들의 영화적 흐름"은 아름다움의 시간성이 아니다. 조급성의 시대, 점적인 현재들의 영화적 연속은 아름다움과 진리에 접근하지 못한다. 사색적인 머무름, 금욕적인 자제 속에서 사물은 그 아름다움을, 그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그 정수의 구성 성분은 잔광을 발하는 시간의 침전물이다. - P84
존재의 신비 속에 참여하는 "최소한의 아니마"란 궁극적으로 가장 단순한 모나드의 영혼, 어떤 의식도, 어떤 정신도 거느리지 못하는 무성적 영혼이다. 그것은 오직 두 가지 상태만을 알 뿐이다. 공포와 희열, 죽음의 위협에 대한 경악과 거기서 벗어났다는 안도나 기쁨. 후자를 기쁨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기쁨은 의식 활동의 성과이기 때문이다. - P92
중국에서는 향인香印이라고 불리는 향시계가 19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유럽인들은 향인을 20세기 중반까지도 보통 향꽂이인 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향불의 연기로 시간을 잰다는 생각, 더 나아가서 시간이 향기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관념 자체가 아마도 낯선 것이었으리라. 이 시계가 향인이라고 불린 이유는 향으로 이루어져 태울 수 있게 된 부분이 도장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향인에 대해 좌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도장 문자와 같은 형태의 문양이 나무에 새겨져 있는데, 주연이 진행되는 동안 또는 부처 상 앞에서 그 속에 들어 있는 향이 타들어가면서 모양이 드러난다." 향인은 불이 다 타면 완전한 문양이 드러나도록 한붓그리기가 가능한 형태를 취한다. 주로 문자의 본이 담겨 있는 틀에 향 가루를 채워 넣는다. 그 틀을 들어 올리면 향으로 된 글자 모양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한 글자일 수도 있고(‘福‘ 자인 경우가 많다), 여러 글자일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하나의 공안公案(공안은 선사가 제자들에게 정신적 훈련을 위해 제시해주는 매우 압축적인, 종종 수수께끼 같은 경구를 말한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내가 나의 꽃들을 얻기 전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이것은 어떤 향인에 새겨져 있는 수수께끼 같은 공안이다. 인장의 가운데 있는 꽃 그림은 "나의 꽃들"이라는 단어를 대체한다. 향인 자체도 자두꽃 모양을 하고 있다. 불을 붙이면 불꽃이 인장에 새겨진 글자들을 한자 한자 따라 돌아다니며, 정확히 말하면 태워가며, 마치 글씨를 써가는 것처럼 보인다. 향인은 원래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진 향시계 장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향으로 만들어진 도장은 화려한 장식의 통에 담겨 있고, 바람을 막아주는 덮개에는 다시 글자나 다른 상징적 이미지의 구멍이 나 있다. 통에는 철학적인 혹은 시적인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시계 전체가 향기로운 단어와 그림으로 에워싸여 있는 것이다. 새겨져 있는 시의 충만한 의미가 벌써 향기를 발산한다. 덮개에 꽃 모양의 구멍이 나 있는 어느 향인은 통의 한쪽 면에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그대 꽃을 보라 그대 대나무를 들어라 그대의 마음 평화로워지리 그대의 괴로움 씻어지리 바닥은 향기로운 음악을 태우고 그대는 가지리라......
시간 측정 수단으로서 향은 많은 점에서 물이나 모래와 구별된다. 향기가 나는 시간은 흐르거나 새어나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향냄새가 공간을 채운다. 향기는 시간을 공간화하고, 그리하여 시간에 지속성의 인상을 준다. 물론 불꽃이 계속해서 향을 재로 만들어버리기는 한다. 하지만 재도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재는 글자의 형태로 머물러 있다. 그리하여 향으로 된 인장은 재가 되어서도 그 의미를 전혀 잃어버리지 않는다. 재를 남기며 계속 전진하는 불꽃이 환기할 수도 있는 무상성은 지속성의 느낌에 자리를 내준다. 향인은 정말로 향기를 발산한다. 향냄새는 시간의 향기를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도 이 중국 시계는 대단히 정교하다. 향인은 흘러가지도, 새어나가지도 않는 시간의 향기로운 분위기 속에서 때를 알려준다.
나는 평온히 앉아 있다ㅡ향인을 태우면서, 향인은 잣나무, 삼나무의 향기로 방을 채운다. 향이 다 타고 나면, 또렷한 그림이 떠오른다. 비석에 새겨진 글귀 위의 푸른 이끼처럼.
향은 잣나무와 삼나무의 향기로 공간을 채운다. 향기로운 공간이 시인의 마음을 평온하고 평화롭게 만든다. 재 또한 무상성을 환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글씨를 더 또렷하게 부각시키는 "푸른 이끼"다. 잣나무와 삼나무의 향기 속에서 시간은 가만히 서 있다. "또렷한 그림"이 된 시간은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그림의 틀 속에 넣어진 채, 새어나가지 않는다. 시간은 향기 속에, 그 한동안의 머뭇거림 속에 붙들려 있다.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구름도 다양한 형상으로 지각된다. 온정균은 다음과 같이 쓴다.
꿈속에서처럼 나비들이 나타나네, 용처럼 꿈틀거리고 빙글 도는가 하면, 새 같기도 하고, 봉황 같기도 하고, 봄의 벌레 같기도 하고, 가을의 뱀 같기도 하네.
온갖 형상이 만들어지며 시간을 한 폭의 그림으로 응고시킨다. 시간은 공간이 된다. 봄과 가을의 병존도 시간을 멈춰 서게 한다. 시간의 정물화가 나타난다. 시인 이청조에게 향인의 연기구름은 깊은 지속의 감정을 전하는 옛글처럼 보인다.
부풀어 오르는 비단 같은, 물결치는 구름 모양의 연기가, 타버릴 향의 마지막 재로 고대의 문장을 쓰네. 나의 소중한 단지에는 온기가 머뭇머뭇 남아 있고, 바깥뜰의 연못 달빛은 벌써 사라졌건만.
이것은 지속성에 관한 시다. 뜰의 연못에 비치던 달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재는 완전히 식지 않았다. 향을 품은 단지는 여전히 온기를 발산하고 있다. 온기는 지속된다. 이 한동안의 머뭇거림이 시인을 행복하게 한다. 시인 해진은 피어오르는 향인의 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향인에서 나오는 연기로 향기로운 오후가 흘러갔음을 아네.
시인은 여기서 아름다운 오후가 지나갔음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시간은 각자 고유의 향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왜 오후가 지나가는 것이 아쉽겠는가? 오후의 향기 뒤에는 저녁의 좋은 냄새가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밤은 또 그만의 고유한 향기를 발산한다. 이러한 시간의 향기들은 서사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이들은 선후관계로 짜여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
봄의 백화, 가을의 다르 여름의 서늘한 바람, 겨울의 눈. 정신에 쓸데없는 일이 매달려 있지 않다면 그게 바로 사람에게 좋은 때라네.
좋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비워낸 정신이다. 바로 이러한 비움이 정신을 욕망에서 해방하고 시간에 깊이를 준다. 시간의 깊이는 모든 순간을 온 존재와, 그 향기로운 영원성과 결합한다. 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 P94
하이데거의 사유는 예시의 선택이나 운, 발음, 어원과 같은 언어적 특수성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층위에서 그의 사유 속에 들어가보면 해체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는 심각한 취약성이 드러난다. "항아리Krug"라는 예는 무엇보다 그 언어적 특성 덕택에, 이를테면 Kanne(주전자)보다 사물의 이론 또는 사물의 신학을 예증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하다. 이미 발음의 측면에서 (마지막에 폐쇄자음과 중간에 폐모음을 가진) "Krug"은 (하나의 개모음에다가 마지막에 모음이 하나 더 추가된) "Kanne"에 없는 폐쇄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폐쇄성 덕택에 "Krug"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공기를 먿게 한다. 게다가 Kanne의 어원(라틴어 canna, 즉 수로)은 Krug과는 반대로 멈춤이가 붙들기Halt를 암시하지 못한다. 이 단어는 오히려 흐름, 흘러감을 연상시킨다. 언어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형태의 측면에서도 Krug은 위쪽으로 가면서 가늘어지기 때문에 Kanne보다 더 닫혀 있는 느낌을 준다. ‘volle Kanne‘와 같은 관용구(본래 ‘가득 찬 주전자‘ 라는 뜻으로 ‘전력을 다하여‘ ‘전속력으로‘등의 숙어적 의미를 지닌다)도 이 단어가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에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사색적 평정과 느긋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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