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볼 때, 가시적인 사물들은 어둠이나 침묵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가시적인 것, 즉 외설적인 것 속에서 휘발되어버린다." - P32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 - P34

투명사회는 쾌락에 대해 적대적인 사회이다. 인간적 쾌락의 경제 내부에서 쾌락과 투명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리비도의 경제는 투명성을 알지 못한다. 비밀과 베일과 은폐와 같은 부정적 요소야말로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강화한다. 그래서 유혹자는 가면과 환상, 가상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투명성의 강제는 쾌락의 놀이 공간을 파괴한다. 명백성은 유혹 대신 절차만을 허용한다. 하지만 유혹자는 돌아가는 길, 갈라진 길, 미로처럼 꼬인 길을 걸어간다. 그는 다의적인 기호를 동원한다. "유혹은 흔히 다의적 약호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서양 문화에서 원형적인 유혹자들은 특정한 의미의 비도덕성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유혹자들은 다의적인 언어를 구사하는데, 이는 그들이 진지함과 대칭성의 규범에 대해 아무런 구속력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실천 양식은 투명성을 요구하고 다의성의 포기를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최대의 계약적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고, 유혹의 수사적, 감정적 후광을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다의성과 양가성, 비밀과 수수께끼의 유희는 에로틱한 긴장을 고조시킨다. 투명성과 명백성은 에로스의 종언을 초래할 것이다. 즉 포르노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투명사회가 동시에 포르노사회이기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투명성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상호 폭로전을 부추기는 ‘포스트프라이버시‘의 관행 역시 쾌락에 대해서는 오직 파괴적 작용만 할 뿐이다. - P38

리비도 경제는 권력경제적 논리를 따른다. 왜 인간에게는 권력을 행사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푸코는 쾌락경제에 관한 언급으로 답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울수록 다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만큼 더 크다는 것이다. 이때 게임이 더 불확실해질수록, 그리고 타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게임의 방식이 더 다채로워질수록 쾌락도 그만큼 더 증대된다. 전략 게임에서 불투명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대단히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권력도 하나의 전략 게임이다. 그래서 권력은 열린 공간에서 작용한다. "권력이란 전략 게임이다. 사람들은 권력이 악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연애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사태가 정반대로 뒤집힐 수 있는 일종의 불확실한 전략 게임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정열과 성적 쾌락의 일부이다." - P43

계략은 정언명령에 의해 이끌린 행동보다 더 효과적이고 덜 폭력적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계략은 폭력보다 더 낫다." 계략은 주변을 둘러보고 그때그때 상황 속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더 유연하고 더 많은 융통성을 발휘한다. 계략은 정언명령보다 더 잘 본다. 반면 정언명령은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다. 폭력은 계략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 그리하여 폭력은 더 큰 ‘명백성‘을 낳는다. 니체는 여기서 완벽한 조명과 통제의 사회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보다 자유로운 삶의 형식을 옹호한다. 그것은 대칭성과 동등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계약 사상이나 교환 경제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도 자유롭다. - P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