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가 경멸을 받는 것은 변덕이 심하고 경박하며, 여성적이고 소심하며, 우유부단한 인물로 생각되는 경우입니다. 군주는 마치 암초를 피하듯이 경멸받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서 위엄, 용기, 진지함, 강건함을 과시해야 하며, 신민들과의 사사로운 관계에서 그가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는 이러한 평판을 유지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그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그를 기만하려고 술책을 꾸밀 엄두를 못 내게 해야 합니다. - P129

군인들의 환심을 사도록 강요당한 로마 황제들
첫째로 지적할 사실은 다른 군주국에서는 귀족의 야심과 인민의 무례함만을 염두에 두면 되었지만, 로마 황제들은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했다는 점입니다. 곧 그들은 군인들의 잔인함과 탐욕에 대처해야 했습니다. 이는 매우 힘든 문제로서 많은 황제들을 몰락시켰습니다. 군인과 인민을 동시에 만족시키기란 매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민은 평화로운 삶을 좋아하고, 그 결과 온건한 군주를 원하는 데 반해, 군인은 호전적인, 곧 오만하고 잔인하며 탐욕스러운 군주를 좋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군주가 인민을 거칠게 다루어서, 그 결과 그들의 보수가 올라가고 그들의 탐욕성과 잔인성을 만족시킬 배출구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천부적인 재질이나 경험이 부족하여) 군인과 인민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평판을 확보하지 못한 황제들은 항상 몰락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황제들은 (특히 새로 제위에 오른 황제들은) 상반되는 욕구들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군인들을 만족시키려고 애썼을 뿐, 인민이 박해를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군주는 어느 한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다수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일만큼은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 P134

중립은 적을 만든다
군주는 자신이 진정한 동맹인지 공공연한 적인지를 명확히 하면, 곧 그가 주저하지 않고 다른 군주에 반대하여 한 군주를 지지하면, 대단한 존경을 받습니다. 이 정책은 중립으로 남아 있는 것보다 항상 더 낫습니다. 만약 인접한 두 명의 강력한 군주가 전쟁을 하게 되면 궁극적인 승자는 당신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경우에나 자신의 입장을 선언하고 당당하게 전쟁에 개입하는 것이 항상 보다 더 현명한 정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선 서로 싸우는 군주들이 당신에게 위협적인 존재인 경우, 만약 당신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당신은 승자에 의해서 파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는 패자를 만족시키고 기쁘게 할 것입니다). 이 경우 당신이 무방비 상태가 되고 우방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승자는 자기가 곤경에 처했을 때 자기를 돕지 않았던 신뢰하기 어려운 자를 동맹으로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패자는 당신이 그를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공동 운명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 P154

적극적인 동맹은 친선을 획득한다
당신의 우방이 아닌 군주는 당신이 항상 중립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반면에 당신의 우방인 군주는 당신이 항상 무기를 들고 지원하기를 원합니다. 우유부단한 군주는 현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대부분 중립으로 남아 있고 싶어하는데, 이는 빈번히 파멸의 원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강력하게 지원한 쪽이 승리했다고 가정합시다. 비록 그가 강력해졌고 당신은 그의 처분에 맡겨졌지만, 그는 당신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고 둘 사이에는 우호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결코 그러한 상황에서 그토록 배은망덕하게 당신을 공격할 만큼 파렴치한 인간은 없습니다. 게다가 승자가 제멋대로 행동해도 무방할 정도로, 특히 정의롭게 행동하지 않아도 무방할 정도로 그렇게 결정적인 승리는 없습니다. 반면에 당신이 도운 군주가 패배한 경우라도 그는 당신을 보호하려고 할 것이며, 당신에게 감사를 표할 것이고 가급적 당신을 도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다시 도래할 수 있는 행운의 동반자가 됩니다. - P155

차악을 선으로 받아들여라
어떤 국가도 안전한 정책을 따르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안전한 정책을 모호하고 미심쩍은 것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물의 도리상 하나의 위험을 피하려고 하면 으레 다른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란, 다양한 위험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고, 따라야 할 올바른 대안으로 가장 해악이 작은 대안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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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유령들은 그 이후에도 쉬지 않고 인터넷, 이메일,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글래스를 발명했다. 신세대 유령들, 즉 디지털 유령들은ㅡ카프카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ㅡ더욱 탐욕스럽고, 더 뻔뻔하며, 더 시끄럽다. 디지털 매체는 실제로 "인간의 힘을 벗어나" 있지 않은가? 디지털 매체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광적인 속도로 유령을 증식시켜가지 않겠는가? 우리는 디지털 매체로 인해 실제로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만지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 P189

정보피로증후군(IFS: Information Fatigue Syndrome)은 정보의 과다에서 오는 심리 질환이다. 환자들은 분석적 능력의 저하, 주의산만증, 전반적인 불안감,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호소한다. 1996년에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이 개념을 만들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IFS는 직업상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정보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의 질병이었다. 오늘날은 모두가 IFS의 희생자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미친 듯이 늘어나는 정보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IFS의 주요 증상은 분석적 능력의 마비다. 분석적 능력이야말로 사유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다. 따라서 정보의 과다는 사유의 위축으로 귀결된다. 분석적 능력이란 곧 지각 자료에서 본질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걷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 결국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는 능력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로 인해 사물을 본질적인 부분으로 축소하는 능력에 손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다. 사유를 위해서는 구분과 선별의 부정성이 필수적이다. 사유는 언제나 배제하는 작용이다. - P196

정보피로증후군에서는 우울증에 특징적인 증상도 나타난다. 우울증은 무엇보다도 나르시시즘적인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태도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목소리의 반향밖에는 듣지 못한다. 그러한 주체는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에서밖에는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에게 세게는 자아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녹초가 되어, 자기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오늘날 사회는 점점 나르시시즘적으로 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소셜미디어는 나르시시즘적 매체다. - P198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지시체의 발산"으로 정의한다. 재현은 사진의 본질이다. 한때 존재했던 진짜 대상에서 빛줄기가 나와 필름에 자취를 남긴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실재했던 지시체의 준-물질적 흔적을 보존하며, 언제나 자신의 지시체에 "순응한다." 사진과 지시체는 동적인 세계의 한가운데서 사랑이나 죽음에 어울릴 법한 부동성의 숙명을 함께 짊어진다." 사진과 지시체는 "팔다리가 서로 묶여 있다. 시체에 묶여 고문받는 죄수처럼, 또는 영원한 교미 속에 하나가 된 양 늘 함께 헤엄치는 한 쌍의 물고기처럼." - P200

『와이어드』지의 수석 편집위원인 크리스 앤더슨은 「이론의 종말」이라는 대단히 주목할 만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이론적 모델을 완전히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마어마한 데이터의 시대에 성장한 구글 같은 기업들은 오늘날 잘못된 모델을 채택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어떤 모델을 채택할 필요 자체가 없다." 빅데이터의 분석은 행동 패턴을 알려주며, 이로써 미래의 예측까지 가능해진다. 가설적인 이론 모델은 직접적인 데이터 비교로 대체된다.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밀어낸다. 왜 그런가라는 질문은 그냥 그런 것이라는 확언 앞에서 의미를 잃어버린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분류법, 존재론을 잊어버려라. 심리학도 잊어버려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대체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그냥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정밀함으로 그것을 탐지하고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만 충분하다면 숫자가 스스로 말하기 마련이다." 이론은 하나의 구성물이며, 데이터의 결핍을 보완하는 보조 수단이다. 따라서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쓸모없어진다. 빅데이터에서 대중의 행동 패턴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디지털 심리정치는 출발한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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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시선이 결핍된 커뮤니케이션이다. 스카이프 10주년에 발표된 한 에세이의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화상 통화는 곁에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을 좀더 잘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없어지지 않으며 그 사실은 언제나 느껴진다. 어쩌면 미세한 위치의 어긋남에서 그 점은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스카이프에서는 서로 눈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모니터 속 상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상대는 우리가 약간 아래쪽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모니터 위쪽 가장자리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언제나 누구에게 바라보이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직접 대면의 멋진 특징은 사라진다. 스카이프의 시선은 비대칭적이다. 스카이프 덕택에 우리는 하루 24시간 내내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줄곧 서로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데를 보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비단 카메라의 각도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시선의 근원적인 부재, 타자의 부재에 있다. 디지털 매체는 우리에게서 점점 더 타자를 빼앗아간다. - P148

터치스크린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타자와의 관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이 운동은 타자를 다른 존재로서 구성하는 거리를 제거한다. 우리가 그림을 직접 눌러 건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림이 이미 시선과 얼굴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툭 쳐서 타자를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우리의 거울상이 나타나게 한다. 라캉이라면 아마 터치스크린이 그림과 다르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림은 나를 타자의 시선에서 막아주는 동시에 그 시선이 드러나게 하는 스크린이기 때문이다. 반면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은 투명한 스크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터치스크린은 시선이 없다. - P149

이른바 파리 신드롬은 대체로 일본인 관광객에게 찾아오는 급성 심리 장애다. 환자는 환각, 현실감 상실, 이인증, 불안 등에 시달리며 현기증, 발한, 격렬한 심장박동과 같은 심신상관적 증세를 나타낸다. 파리 신드롬을 촉발하는 것은 일본인들이 여행 전에 파리에 대해 품은 이상적 이미지와 이 이미지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는 도시의 현실 사이의 격차다. 그렇다면 강박적으로, 거의 히스테리컬하게 사진을 찍어대는 일본인 관광객의 행태는 이미지를 통해 끔찍한 실재를 몰아내려는 무의식적인 방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진이 보여주는 이상적 이미지가 그들을 더러운 현실에서 지켜주는 것이다. - P153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착취하던 산업 시대의 기계에서 해방되었지만,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 기계의 시대에는 기계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일과 일이 아닌 것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다. 일터는 일하지 않는 공간과 확실히 떨어져 있었고, 일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일터로 가야만 했다.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경계는 완전히 철폐되었다. 디지털 기기는 노동 자체에 이동성을 부여한다. 모두가 일터를 몸에 지고 다닌다. 이동식 노동수용소를 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P163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본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는 손가락이다. 디지털 문화는 세는 손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는 세지 않는다. 셈은 포스트역사적 범주다. 트윗도 정보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지 않는다. 타임라인도 삶의 역사 또는 전기를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타임라인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다. 디지털 인간은 끊임없이 세고 계산한다는 의미에서도 손가락질하는 인간이다. 디지털은 수와 셈을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무엇보다 숫자로 세어진다. 하지만 우정은 이야기다. 디지털 시대에는 가산적인 것, 셈하기, 셀 수 있는 것이 전부가 된다. 심지어 애착과 호감도 ‘좋아요‘의 형식으로 세어진다. 서사적인 것은 급격히 의미를 상실한다. 오늘날 모든 것이 셀 수 있게 가공된다. 그래야만 성과와 효율성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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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한가운데로 뛰어듦
무엇보다도 불교인들은 문제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겪고 있는 위기상황은 불교의 가치관과 대립되는 여러 가지의 이질적인 가치관들 속에 싸여 있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 이질적인 것들이 함께 있으면서 부단히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만큼, 이것들과 정면 대응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다.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 문제를 외면 또는 회피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이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해결 방법이 아니다. 부처님은 문제를 외면하거나 피하는 것으로 해결을 삼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여 자기 속에서 남을 보고 남에게서 자기를 봄으로써 자기와 남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었다. 가령, 인생의 괴로움을 문제삼을 때도 괴로움을 피하지 않고 대결하면서 괴로움의 정체를 파악하고, 마침내는 괴로움이 꼭 괴로움만은 아니라는 경지에 이르러 괴로움과 함께 사는 것으로 열반을 삼았다. 그래서 그는 남들과 똑같이 늙고 병들어 마침내 사망했다. 부처님이 생로병사를 극복하는 법은 그런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불교와 다른 이질적인 가치관을 피하는 식의 해결방법을 버리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방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사실, 한국불교의 세계화란 한국의 불교인들이 이질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로 자진해서 들어간다는 의미도 들어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불교는 자본주의를 외면할 수 없으므로 오히려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신앙체계와 판이한 여러 가지 다른 종교를 많이 연구해 왔다. 그러나 불교인들 가운데 누가 그들처럼 철저하게 다른 종교를 연구했는지 모르겠다. 불교인들 역시 기독교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불교의 논리 속에서 기독교를 조화시킬 수 있는 영역은 무엇이며, 또 결코 조화시킬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가를 정면대응을 통해서 밝혀 내야 할 것이다. 마르크시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민중 불교인들의 일부는 마르크시즘과 불교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과연 마르크시즘과의 정면 대응을 통하여 조화를 시도했는가는 의문이다. 시대적인 사상의 조류에 비주체적으로 휩쓸린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인들은 불교를 둘러싸고 있는 이런 모든 것들과 정면대응을 통해서 불교의 체를 바탕으로 용의 세계를 넓혀 나가야 할 것이다. 체용 논리를 적용하면서 그것들이 지닌 문제점들을 한편으로 깨뜨리면서 갈등을 해소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불교와 자본주의, 공산주의, 기독교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고 이질적인 가치체계와 믿음체계를 가진 사람들과 21세기를 함께 염려하고 우리의 세계화를 함께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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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이 세상에 달랑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녀는 딸이 하나 있었으면 싶다.
부산에서 식모살이를 할 때 그녀를 쫓아다니던 총각이 있었다. 남자라면 몸서리가 쳐졌지만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면 그 남자와 살림이라는 걸 차려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산부인과에서 진찰을 받아보았다. 산부인과에서는 그녀에게 다른 소리는 하지 않고 자궁이 한쪽으로 돌아가서 애를 낳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자신이 만주라는 데를 다녀왔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 그녀는 총각 모르게 부산을 떠나왔다.
월경은 마흔 안 되어 끊어졌다.
월경이 끊어질 즈음 아래가 통째로 쏟아지는 것처럼 무겁고 퉁퉁 부었다. 서서 설거지를 하는 것도 힘들어 그녀는 식모 살던 집을 나왔다. 아래가 붓기 시작하면 허리를 굽히지도 펴지도 못했다. 호박도 삶아 먹고, 잉어도 고아 먹고, 한약방에서 약도 지어다 먹었지만 낫지 않았다. 기왓장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깨진 기왓장 조각을 구해다 그걸로 아랫배를 찜질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티브이에서 사람들이 싸우거나 총소리만 나도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얼른 채널을 돌렸다. 누가 노래하는 것도 시끄럽고, 노는 것도 싫고, 다 싫었다.
경산 하양에 찜질로 여자들 병을 고치는 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내려가 석 달을 있다 오기도 했다. 온돌방 바닥에 굵은 소금을 뿌린 뒤 솔잎을 푹신푹신하게 깔고 가마니를 덮었다. 그 위에 사람을 눕히고는 목부터 발끝까지 또 가마니를 덮었다. 온돌방이 절절 끓도록 하루 종일 장작을 때어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나 사람을 꺼내주었다. 찜질을 한 지 닷새째 되던 날 그녀의 몸 여기저기서 살점이 저절로 툭툭 떨어지고 고름처럼 누런 진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그 집에는 그녀 말고도 다른 여자들이 와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한 여자도 자신처럼 위안부였을 것 같다. 울산이 고향이라던 그 여자는 정작 경상도 말은 안 쓰고 서울말과 강원도 말과 일본 말을 섞어 썼다. 그 여자는 그녀에게 한탄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어려서 일본에 돈 벌러 갔다가 병신이 되어서 돌아왔다고. 남들이 볼 때는 멀쩡해 보이지만 안 아픈 데가 없다고.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만날 쫓기는 심정이야. 혼자 가만히 있다가도 심장이 벌벌벌 떨려. 그럴 때는 막걸리라도 한 사발 마셔야지 그만 딱 죽을 것 같아. 언제부턴가 막걸리가 저녁이야. 내가 길을 걸어가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때려대니까 덴뿌라공장에 다니는 여자가 그러데. 그거 울화병이라고." - P176

그이의 낙은 책을 읽는 것이다. 이웃이 이사를 가면서 버린 세계 전집을 가져다 읽기 시작하면서 책 읽는 재미에 빠졌다. 학교 운동장도 못 밟아본 그이는 서른 살 되던 해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그이가 작은방으로 가 책을 한 권 들고 나온다.
"제목이 ‘부활’이야. 소련 사람이 쓴 소설이지. 벌써 여섯 번째 읽는 거야."
그이는 갈색 천 소파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소파 옆 탁자에 놓아두었던 돋보기를 쓰더니 조곤조곤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드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 버렸어도, 그곳에서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어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찾아들었다.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째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틈새에서도 푸른 봄빛의 싹이 돋고…… 둥우리를 만들기에 바쁜 떼까마귀와 참새와 비둘기는 새봄을 맞아 아주 즐거워 보였고……."
그이가 책에서 눈을 들더니 여자에게 말한다.
"몇십만의 인간이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드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봄빛의 싹이 돋고 새들이 찾아든다니 얼마나 황홀해. 처음에 이거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내가 원래 잘 안 울거든……."
그이는 여자를 향해 싱긋이 웃어 보이고는 계속 책을 읽는다.
"이 온갖 만불의 행복을 위해서 신이 마련해주신 세계의 아름다움……."
밤이 되자 그이는 혼자가 된다. 그이는 자주색 꽃무늬가 만발하듯 화사하게 수놓인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그이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스탠드를 켜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이의 옆으로 와서 눕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의 옆으로 와서 눕지 않는 것처럼. - P190

"영감이 열 살이나 어린 여자하고 살았는데, 일 나간 사이에 똥오줌도 못 가리는 아들을 방문 문고리에 묶어두고는 도망을 가버렸잖아요. 늦기 전에 팔자를 바꾸고 싶었겠지요. 남편은 늙었지, 아들은 천치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팔자를 고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겠지……. 아무튼 잃어버린 지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아들을 찾아서 데리고 왔는데, 그때도 말이 분분했어요. 아들을 버렸다가 뒤늦게 죄책감이 들어 되찾아 온 거라고 끝까지 우기는 사람도 있고, 잃어버렸던 게 맞나 보다 하는 사람도 있고……."
"설마 버렸을까……."
"왜요, 버렸을 수도 있지요? 버렸다가 뒤늦게 죄책감이 들어 찾아 데리고 왔을 수도……인간이 뭔 짓은 못하겠어요?"
"그렇지, 인간이……."
그녀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겨우 열세 살이던 자신을 하루아침에 만주에 데려다 놓은 것도 인간이었다. - P204

양파망이 회색 철 대문 기둥에 걸려 흔들리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새끼 고양이가 그 안에 들었다면 저렇게 가볍게 흔들릴 리 없다.
그녀는 주저하면서도 철 대문 가까이 다가가 양파망을 들여다본다. 양파망은 비었다.
누군가 양파망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새끼 고양이를 꺼내준 것이다.
누굴까? 누가 새끼 고양이를 양파망에서 꺼내 놓아주었을까? - P205

어머니가 아파 죽어간다…… 어머니가 죽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고향으로부터 두 통의 전보를 받은 분선은, 고향으로 더는 전보를 부치지 않았다.
분선은 어머니와 목화를 따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강제로 끌려왔다. 분선이 열네 살 때였다.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나를 죽여놓고 데리고 가라.
분선은 붙잡고 매달리는 어머니의 배를 헌병들이 군화 신은 발로 내리찍었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목화밭을 구르던 모습이 분선은 잊히지 않는다 했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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