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레 이 세상에 달랑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녀는 딸이 하나 있었으면 싶다.
부산에서 식모살이를 할 때 그녀를 쫓아다니던 총각이 있었다. 남자라면 몸서리가 쳐졌지만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면 그 남자와 살림이라는 걸 차려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산부인과에서 진찰을 받아보았다. 산부인과에서는 그녀에게 다른 소리는 하지 않고 자궁이 한쪽으로 돌아가서 애를 낳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자신이 만주라는 데를 다녀왔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 그녀는 총각 모르게 부산을 떠나왔다.
월경은 마흔 안 되어 끊어졌다.
월경이 끊어질 즈음 아래가 통째로 쏟아지는 것처럼 무겁고 퉁퉁 부었다. 서서 설거지를 하는 것도 힘들어 그녀는 식모 살던 집을 나왔다. 아래가 붓기 시작하면 허리를 굽히지도 펴지도 못했다. 호박도 삶아 먹고, 잉어도 고아 먹고, 한약방에서 약도 지어다 먹었지만 낫지 않았다. 기왓장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깨진 기왓장 조각을 구해다 그걸로 아랫배를 찜질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티브이에서 사람들이 싸우거나 총소리만 나도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얼른 채널을 돌렸다. 누가 노래하는 것도 시끄럽고, 노는 것도 싫고, 다 싫었다.
경산 하양에 찜질로 여자들 병을 고치는 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내려가 석 달을 있다 오기도 했다. 온돌방 바닥에 굵은 소금을 뿌린 뒤 솔잎을 푹신푹신하게 깔고 가마니를 덮었다. 그 위에 사람을 눕히고는 목부터 발끝까지 또 가마니를 덮었다. 온돌방이 절절 끓도록 하루 종일 장작을 때어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나 사람을 꺼내주었다. 찜질을 한 지 닷새째 되던 날 그녀의 몸 여기저기서 살점이 저절로 툭툭 떨어지고 고름처럼 누런 진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그 집에는 그녀 말고도 다른 여자들이 와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한 여자도 자신처럼 위안부였을 것 같다. 울산이 고향이라던 그 여자는 정작 경상도 말은 안 쓰고 서울말과 강원도 말과 일본 말을 섞어 썼다. 그 여자는 그녀에게 한탄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어려서 일본에 돈 벌러 갔다가 병신이 되어서 돌아왔다고. 남들이 볼 때는 멀쩡해 보이지만 안 아픈 데가 없다고.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만날 쫓기는 심정이야. 혼자 가만히 있다가도 심장이 벌벌벌 떨려. 그럴 때는 막걸리라도 한 사발 마셔야지 그만 딱 죽을 것 같아. 언제부턴가 막걸리가 저녁이야. 내가 길을 걸어가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때려대니까 덴뿌라공장에 다니는 여자가 그러데. 그거 울화병이라고." - P176

그이의 낙은 책을 읽는 것이다. 이웃이 이사를 가면서 버린 세계 전집을 가져다 읽기 시작하면서 책 읽는 재미에 빠졌다. 학교 운동장도 못 밟아본 그이는 서른 살 되던 해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그이가 작은방으로 가 책을 한 권 들고 나온다.
"제목이 ‘부활’이야. 소련 사람이 쓴 소설이지. 벌써 여섯 번째 읽는 거야."
그이는 갈색 천 소파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소파 옆 탁자에 놓아두었던 돋보기를 쓰더니 조곤조곤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드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 버렸어도, 그곳에서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어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찾아들었다.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째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틈새에서도 푸른 봄빛의 싹이 돋고…… 둥우리를 만들기에 바쁜 떼까마귀와 참새와 비둘기는 새봄을 맞아 아주 즐거워 보였고……."
그이가 책에서 눈을 들더니 여자에게 말한다.
"몇십만의 인간이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드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봄빛의 싹이 돋고 새들이 찾아든다니 얼마나 황홀해. 처음에 이거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내가 원래 잘 안 울거든……."
그이는 여자를 향해 싱긋이 웃어 보이고는 계속 책을 읽는다.
"이 온갖 만불의 행복을 위해서 신이 마련해주신 세계의 아름다움……."
밤이 되자 그이는 혼자가 된다. 그이는 자주색 꽃무늬가 만발하듯 화사하게 수놓인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그이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스탠드를 켜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이의 옆으로 와서 눕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의 옆으로 와서 눕지 않는 것처럼. - P190

"영감이 열 살이나 어린 여자하고 살았는데, 일 나간 사이에 똥오줌도 못 가리는 아들을 방문 문고리에 묶어두고는 도망을 가버렸잖아요. 늦기 전에 팔자를 바꾸고 싶었겠지요. 남편은 늙었지, 아들은 천치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팔자를 고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겠지……. 아무튼 잃어버린 지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아들을 찾아서 데리고 왔는데, 그때도 말이 분분했어요. 아들을 버렸다가 뒤늦게 죄책감이 들어 되찾아 온 거라고 끝까지 우기는 사람도 있고, 잃어버렸던 게 맞나 보다 하는 사람도 있고……."
"설마 버렸을까……."
"왜요, 버렸을 수도 있지요? 버렸다가 뒤늦게 죄책감이 들어 찾아 데리고 왔을 수도……인간이 뭔 짓은 못하겠어요?"
"그렇지, 인간이……."
그녀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겨우 열세 살이던 자신을 하루아침에 만주에 데려다 놓은 것도 인간이었다. - P204

양파망이 회색 철 대문 기둥에 걸려 흔들리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새끼 고양이가 그 안에 들었다면 저렇게 가볍게 흔들릴 리 없다.
그녀는 주저하면서도 철 대문 가까이 다가가 양파망을 들여다본다. 양파망은 비었다.
누군가 양파망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새끼 고양이를 꺼내준 것이다.
누굴까? 누가 새끼 고양이를 양파망에서 꺼내 놓아주었을까? - P205

어머니가 아파 죽어간다…… 어머니가 죽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고향으로부터 두 통의 전보를 받은 분선은, 고향으로 더는 전보를 부치지 않았다.
분선은 어머니와 목화를 따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강제로 끌려왔다. 분선이 열네 살 때였다.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나를 죽여놓고 데리고 가라.
분선은 붙잡고 매달리는 어머니의 배를 헌병들이 군화 신은 발로 내리찍었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목화밭을 구르던 모습이 분선은 잊히지 않는다 했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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