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건 또 있다. 공동체 안에는 왜 그 같은 지혜가 없는 것일까? 『동의보감』을 리라이팅하면서도 밝혔듯이, 공동체는 몸과 몸이 직접 부딪히는 현장이다. 몸에 관한 앎, 운명에 대한 지혜가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헌데 왜 공동체는 명분과 이념…… 그리고 논리적 공통성만 있으면 된다고 간주하는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정서적 균열과 관련되어 있다. 감정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없 13 다. 많은 경우, 명분과 논리는 감정의 ‘얼굴마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감정들의 어울림과 맞섬이 사람들의 동선과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곧 인생이고 운명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야말로 운명에 관한 비전이 꼭 필요한 장소가 아닐까? 하나 더. 우리가 배운 그 많은 지식과 정보는 왜 이런 식의 예지력이나 운명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 화려한 언설들은 인생의 결정적 국면에선 어쩜 이리도 쓸모가 없는 것일까?
내친 김에 하나 더. 만약 그것이 그토록 ‘유용한’ 것이라면 우리는 왜 그걸 직접!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 P12

다른 한편, 소위 진보적 진영에선 이런 앎에 대해 원초적으로 터부시한다. 비과학적 숙명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어떤 점에서 보면 진보주의가 동양전통사상에 대해선 가장 오리엔탈리즘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역학뿐 아니라 유학이나 불교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물론/관념론이라는 이분법적 틀로 사상사를 구획하는 패턴이 여전히 지배적인 것이다. 헌데, 그렇다면 진보의 영역에는 운명이라는 키워드가 불필요한가? 진보단체들이 부딪히는 가장 28 큰 장벽은 더 이상 권력의 탄압이 아니다. 공동체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틈’이다. 뇌과학적으로 보더라도 감정을 주관하는 뇌는 변연계(Limbic System)다. 변연계는 호모 사피엔스 이후 발달한 신피질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형성된 구피질에 속한다.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국가간 전쟁처럼 거창한 일을 수행할 때도 ‘빈정’이 상하는 바람에 어느 한쪽에 치명타를 안겨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 역시 좋게 말하면 사랑싸움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감정게임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감정의 회로가 운명 혹은 팔자의 키를 잡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출된다. 예컨대 사회를 바꾸기 위해 공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을 한다면 마땅히 그의 내면도 평온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아주 많은 이들이 박탈감과 우울증에 시달린다. 어떤 활동가의 고백이다.

80년대엔 학생운동을 했고, 90년대에 졸업하면서 노동운동을, 중년이 되어선 환경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생협활동을 하고 있어요. 쉬지 않고 운동을 해왔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과 친밀감이 생기질 않을까요? 마음은 늘 급하거나 우울하고…… 몸에는 늘 병을 달고 살아요.

이런 식으로 운동의 가치와 명분이 자신의 몸, 그리고 삶의 현장 29 과 동떨어져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간극을 메우려고 더더욱 헌신적으로 활동을 조직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조증과 울증이 반복된다. 아울러 내적 충만감이나 존중감 또한 점점 더 무너져 간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아프다. 활동과 일상, 명분과 현장, 이 사이에 대체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이 간극을 통찰하지 못하면 진보든 혁명이든 별무소용이다. 그때의 진보나 혁명은 오직 물질적 분배, 제도적 서비스, 시스템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아니, 그 이전에 단체와 조직은 진화하는데,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불행해진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운동단체들은 이런 문제들과 직접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이건 여성운동이건 실무적 투쟁이 중심이지 인생과 자연, 몸과 우주에 대한 공부를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마치 그것은 노동자나 여성들, 기타 소수자들과는 무관한 것인 양. 또 그런 것을 하면 마치 정치적 의식이 퇴행하기라도 하는 듯이. - P27

이분법의 종말 개와 늑대의 시간

"신새벽 뒷골목에 /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80년대를 풍미했던 절창, 「타는 목마름으로」의 첫소절이다. 신새벽은 ‘아직 동트지 않은’, 밤과 아침 사이의 시간이다. 어둠이 더 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헷갈리는’ 시간은 아니다. 이제 곧 밤이 가고 아침이 올 테니까.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이루어질 테니까. 선과 악, 혁명과 반동, 역사와 심판,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자명한 시절, 그것이 김지하의 ‘신새벽’이었다. 마침내 신새벽이 지나고 동이 터올랐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이 트면서 동시에 운무가 피어오를 줄은.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ㅡ이것이 소위 근대적(혹은 진보적) 시간관이다. 지구는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동일한 날씨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똑같은 밤도 동일한 낮도 없었던 셈이다. 겨울과 봄도 마찬가지. 우리가 겪는 밤이 어떤 리듬으로 흘러가는지, 우리의 겨울이 어떤 강밀도를 가지고 있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유를 위한 지도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이 담론의 배치 속에선 인간만이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의 주인은 오직 인간이고, 자연·동물·기후·바 33 람 따위는 다 엑스트라일 뿐이다. 이런 인간중심주의의 장에선 아이러니와 농담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장하고 엄숙한 테제와 그 실현을 향한 전진만이 있을 뿐! 그 사유의 길이 곧 이분법이다.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생과 사 등 수많은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에 종속되어 버린다. 하여, 이분법은 선명하다. 하지만 그만큼 빈곤하다. "이분법도 그 자체의 불행한 도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능한 모든 의견이 일직선상에 배열되고 그 양극단에 두 가지 반대 의견이 놓여 있다는 도식이다." 물론 대안이 없는 건 아니다. "그 직선의 중간에 해당하는 위치, 즉 ‘황금의 중용’을 취"하여 "어딘지 불안스러운 중간에" 던져지는 것이 최선이다. 말이 좋아서 황금이지 실제론 아슬아슬한 중간, 사이비 균형에 불과하다. "나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하나의 직선상에 배치하고, 양극단에 해당하는 입장 대신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그 사이의 중간밖에 없다는 식의 모든 개념적 도식을 단호하게 거부한다."(스티븐 제이 굴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김동광 옮김, 경문북스, 2004, 66쪽) 물론 이분법에 대한 저항은 어렵다. 너무 오랫동안 이분법에 길들여져 있었던 탓이리라. 박노해의 시 「시대고독」은 바로 이런 시대적 징후에 대한 음울한 진단이다.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한 시대의 악이
한 계급에 집약되어 있던 시절의 투쟁은
얼마나 힘겹고 다행인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과 악이 자명하던 시절의 결단은
얼마나 슬프고 충만한 시대였던가

세계의 악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시대
선악의 경계가 증발되어 버린 시대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이 경쟁하는 시대
합법화된 민주화 시대의 저항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구조화된 삶의 고통이 전 지구에 걸쳐
정교한 시스템으로 일상에 연결되어 작동되는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

옳음도 거짓도 다수결로 작동되는 시대
진리는 누구의 말에서나 반짝이지만
그것을 살고 실천할 주체가 증발되어 버린 시대
혁명의 전위마저 씨가 말라가는
이 고독한 저항의 시대는

ㅡ박노해, 「시대고독」전문(全文) - P32

그렇다! 바야흐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는, 혹은 개와 늑대를 구별하기 어려운 저물녘의 어스름. 개와 늑대만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차이조차 그렇게 선명하지 않은 시간대다. 거의 모든 사건들엔 진(眞)과 망(妄)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겹쳐 있다. 그것은 분명 굴드의 표현대로 양극단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어설픈 타협으로는 불가능한 지대다. 인간이라는 주체, 계급적 적대감이 무너지면서 선악시비의 자명함이 사라져 버린 탓이다. 그렇다면, 이 운무 속에서의 길찾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운무: 雲霧 명사 구름과 안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 - P35

역학은 어느 한 종교에 부속되는 것이 아니라네. 특별히 공자가 주역을 많이 공부하여 그 원리를 도덕적인 면에서 강조하였을 뿐이지. 공자뿐만 아니라 유·불·선이 다 역학 원리를 응용한 것이네. 주역은 대략 5,000여 년 전 하도와 낙서라는 천출적(天出的)인 원리를 토대로 하여 우주 창조의 근본 원리와 삼라만상이 변화생멸 44 하는 현묘한 진리를 논리적, 수리적, 또는 추상적으로 이야기한 자연과학적 철학이네. (한규성, 『역학원리강화』, 예문지, 1997, 25~27쪽)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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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의 음양으로는 양적이지만 오행적으로는 음적인 사주는 예를 들어 어떤 일을 할 때 매우 빠르고 동적으로 현장에 적응하는 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음적인 금수의 성향으로 인해 조용해지고 정적인 태도로 바뀐다. 간지의 음양으로는 음적이지만 오행적으로 양적인 사주는 현장에선 좀 느리고 조용한 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목화의 역동적인 성향이 드러나면서 거침없고 빠른 태도로 변한다. - P95

같은 오행이 이렇게 많은 점수를 차지할 때는 이 기운을 좀 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행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불균형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음양오행은 순환과 흐름의 유동성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에 따라 길흉을 따진다. 부족한 것보다 넘치는 것이 더 문제다. 이 해당 오행은 평생의 화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P100

화의 열정은 적극적으로 현장을 지배하려고 하며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해 에너지를 강렬하게 사용한다. 그런 양기의 발산력 때문에 다른 오행보다 열정이 더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열정이 대체로 목화 기운에서 발산되는 에너지로 상징되는 것도 양적(陽的) 발산 때문이다. 그런데 열정은 말 그대로 애정을 불태워 열을 발산하는 일이다. 열기는 위로 올라가 자신감을 고양시키고 좀더 항진되면 다혈질적인 성격을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그것은 몸 안의 정기를 태워서 생기는 에너지이므로, 열정은 늘 기운의 소모를 불러온다. 그래서일까. 화기운이 강한 사람은 찐하게 불태워 일하고 나서 픽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 양적으로 항진되면, 그 발화가 강렬할수록 시간 감각이 무너지고 음적인 수렴과 통찰력이 약해진다. 그래서 속도와 강도를 잘 제어하지 못하고 체력이 다하도록 밀어붙이는 것이다. - P114

하지만 분별하고 개념화하려는 시도들은 자칫 강압적이고 배타적인 계몽의 덫에 걸리기 쉽다. 분류는 매우 자의적인 것이다. 그 중에서 계절과 밤낮 등 자연현상과 같은 과학적 분절은 비교적 주관적 편견이 들어갈 여지가 적다. 그러나 선과 악, 좌파와 우파, 로맨스와 불륜을 나누는 것은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기 힘들다. 푸코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는 ‘분할과 배척’의 원리가 존재한다. 자의적인 분류가 권력을 가지면 그 분류에 따라 윤리와 상식이 한정되고, 기준에 합당한 담론 외에는 배척된다. 화의 속성은 이런 딜레마에 빠질 우려가 있다. 화기운이 강한 사람은 명쾌하게 분류하고 분류된 공식을 당당하게 지켜 낸다. 하지만 그 경계를 신앙적으로 고착화시키면 자칫 경솔하고 교만한 정답(?)을 습관처럼 남발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을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다. 결국 관계가 틀어지고 상처만 남는다.

예(禮)를 화의 속성으로 해석할 때에도 그러한 이중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자는 제후들이 무력을 바탕으로 왕을 자칭하고 나섰던 대혼란기를 무도(無道)의 세계라고 규정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仁)을 내면적 근거로, 예를 형식적 질서로 삼았다. 여기서 예라는 덕목은 혼란과 갈등의 어둠을 밝혀 줄 하나의 빛이다. 그러나 다 116 른 제가(諸家)들이 유가를 비판할 때 반드시 근거로 들었던 것도 바로 ‘예’이다. 예컨대 묵가는 유가의 상례(喪禮) 문화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산 사람의 활동을 해치는 유해한 풍습이라고 비난하며, 가벼운 장례를 장려했다. 이처럼 예는 질서와 인습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화의 속성도 이와 비슷하다. 화기운이 강한 사람은 대체로 사람들을 잘 환대한다. 모르는 사람에게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예를 잘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 안의 질서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 환대는 끝난다. 레비나스는 초대한 손님만 받아들이는 것은 환대가 아니라고 했다. 조건적 환대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의 연장일 뿐, 거기에는 타자도 환대도 없다는 것이다. 화기운은 빛을 닮았기 때문에 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미덕도 지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용의 과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려 자기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거나 배제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그래서 화기운이 강한 사람은 두루 친하지만 정작 서로에게 스며들어 마음을 나눌 상대는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 안의 질서와 윤리의 매뉴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예가 묵은 풍습으로 변하는 경우이며, 타자에게 자기 동일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것을 환대라 할 수는 없다. - P115

사주에 화기가 강하다는 것은 이런 양기의 활동력이 강렬하다는 뜻이고, 그런 강렬함은 일, 즉 사회적인 활동에 유리하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일할 기회가 많아지고, 관계와 활동 영역이 확대되며, 배짱도 생긴다.
또 활동이 많아질수록 체력은 빨리 고갈된다. 그러니 양적으로 팽창하는 만큼 음적인 수렴력은 떨어지게 된다. 마무리가 미흡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무리는 체력의 집약적 사용과 깊은 사고가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화기운을 강렬하게 쓰면 빨리 지치고 사고가 단층적이 된다. 깊은 사고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마무리도 깔끔하지 않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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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상을 소멸하기 위해 삼천배도 하고, 면벽좌선(坐禪)도 하고, 밥을 빌어먹는 구걸행도 한다. 그래도 그게 잘 없어지지 않는다. 면벽좌선 30년 했다고 하는데, 전혀 아상 소멸이 되지 않은 경우를 보기도 했다. 오히려 아상이 더 증장되어 있었다. ‘나 30년 면벽했거든!‘ 하는 자존심만 가득 차 있기가 쉽다. 그 자존심이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든다. 사업을 하면 이 자존심을 죽이는 훈련을 자동적으로 하게 된다.

방 안에는 경상 하나, 책 몇 권, 그리고 차상과 다기(茶器)만놓여 있다. 잡다한 물건이 방안에 없다. 공부가 된 사람은 방안에 물건이 별로 없는 법이다.

영발도사는 가방끈과 관련이 없다. 오히려 가방끈이 짧을수록 영발은 길다. 특히 책을 많이 본 책상물림은 절대로 영발도사가 될 수 없다. 먹물은 영발을 파괴하는독극물에 비유될 수 있다. 돼지고기와 새우젓처럼 영발과 먹물은 상극에 해당한다.

재벌 오너를 설득시키기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재벌 오너 정도 되면 그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속임수와 사기 사건, 그리고 배신당하는 경험을 겪어온 사람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너 무슨 이야기하나 어디 한 번 볼까‘, ‘어쭈구리 이 친구 제법 말발이 있네‘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수가 많다.

계룡산은 한국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산이다. 특수한 위치란 무엇인가. 무당파의 본산이란 점이다. 한국의 무당들치고 계룡산 싫어하는 사람 없다. 무당들은 모두 계룡산을 신성시한다. 왜 그런가. 먹잘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계룡산의 바위 암봉(岩峰)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백질이다. 이 단백질이야말로 계룡산의 바위 기운이라 할 수 있다. 계룡산은 거의 통바위산이다. 통바위산일수록 기가 강하다. 대구 팔공산도 온통 암산이라 기가 강한데, 접근성에서 계룡산이 더 우위에 있다. 접근성이란, 주변에 들판이 많다는 점이다. 강경, 논산, 공주 인근에는 평야가 많다. 여기에서 먹을 것이 나온다.

도사 수련이 아니더라도 평상시에 밤이 되면 어두컴컴하게 있는 것이 좋다. 너무 환하면 혼백이 쉬지를 못한다. 쉬지 못하면 정신병이 온다. 20세기는 암이 큰 병이었지만 21세기에는 정신병이 큰 병이다. 정신병은 정신이 쉬지 못해서 오는 병이다. 쉰다는 것은 곧 어두컴컴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저녁에 불을 켜지않고 컴컴하게 있는 것도 양생법의 하나다. 밝은 것만 선호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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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평생 "노력한다면 이룰 수 있어"라는 말을 많이들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분도 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정규직 일자리, 살기 좋은 보금자리, 또는 교육 수단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헬렌 레이저,
《밀레니얼은 왜 가난한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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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지(立志)의 내용은 성인과 성왕이 되려는 것이다. 즉 XY축 그림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가고자 함이 바로 입지이다. 『격몽요결』에 따르면,

처음 배우는 사람은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성인으로서 스스로 기약해야지 털끝만큼이라도 스스로 적게 여겨 물러나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XY축 그림은 원효· 붓다의 경우와 율곡의 경우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같은 점은 두 경우가 다 사람의 모습을 설명한 점이다. 다른 점은 사람이 처해 있는 장소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이다. 율곡은 다만 관료 조직이니 향약이니의 조직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얽매인 사람이 아닌 조직 속의 사람이면서 그가 얽매여 있는 조직을 사람을 매어 두는 속박하는 조직이 안 되게 만들고자 애썼던 율곡의 XY축 그림 속의 모습을 더듬어 본다.
우선 그가 사람은 마땅히 XY축 그림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옮겨 가야 함을 강조한 글들을 이미 인용했던 『격몽요결』의 글에 더 보탠다.

사람의 용모는 못생긴 것을 변화시켜 아름답게 만들 수 없고, 사람의 체력은 약한 것을 변화시켜 강하게 만들 수 없으며, 신체는 짧은 것을 길게 만들 수 없으니 이는 이미 정해진 분수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심지(心志),
즉 마음과 뜻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것을 변화시켜 현명하게 할 수 있으니 이는 마음의 허령함은 기질(氣質)의 품부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6언(言)
인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않는다(好仁不好學).
지(知)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好知不好學).
믿음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않는다(好信不好學).
정직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않는다(好直不好學).
용맹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않는다(好勇不好學),
강(剛)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않는다(好剛不好學).

6폐(蔽)
어리석게 된다(愚).
방탕해진다(蕩).
해친다(賊).
급하게 된다(絞).
난(亂)하게 된다(亂).
광(狂)하게 된다(狂). - P240

3. 몸으로써 하는 것이 학(學)이다.

애공: 제자 중에서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
공자: 안회가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노함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데, 그는 불행히도 명이 짧아 일찍 죽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자가 없으니, 아직 학문을 좋아하는 자를 제가 못 들었습니다.(哀公問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顏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 好學者也, 「雍也」2)

나의 『논어 맹자와 행정학』 제4장 <현상학적 접근>에 나오는 노동부 공무원 공야장(公冶長)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나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한 학생들을 고급 공무원으로 특채하든지, 공무원 채용 시험에 가산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사람들에게 현대에 적합한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까지는 안 가더라도 대학에서 학교 공부만을 해서 과외의 활동이 이력에서 공란으로 돼 있는 졸업생을 기업체에서 채용하는 것은 모집의 타당도를 낮추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운동 시합 때 응원단장을 하던 학생을 회사의 판매부 직원으로 채용함이 좋을 것이다. - P242

7. 미(美)를 추구함이 학이다. 「술이(述而)」 5와 같이 학문에 대한 정열을 보인글이 「술이」 13이다. <공자께서 제(齊)나라에 계실 때에 소악(樂)을 들으시고 3개월 동안 - 이 음악을 배우는 3개월 동안 - 고기 맛을 잊고 말씀하기를 《음악을 하는 것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라고 하셨다.(子在海聞韶三月不知不圖爲樂之至於斯也, 「述而」13)> 이 글은 앞의 글과는 좀 다르다. 무엇에 몰두하는 것은 같지만 그것에 미치는 것이 음악인 점이 다르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동들에게 교육할 것이 바로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것을 연주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음악 다음에 문과니 이과니 역시 공통 과목으로는 영어를 교육하고 문과의 경우는 한문을 이과의 경우는 수학을 학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음악을 제일 먼저의 공부로 생각하나? 음악이란 「술이」 13의 주석에 나와 있듯이 진미(眞美)하고 진선(眞善)하여 여기에 더 가할 낙이 없어 사람이 외로움을 견디며 나아가기에 음악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또한 사람이 뭔가를 성취하려면 고독 속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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