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케이스 스터디 3 재다신약: 욕망의 레이스

돈과 ‘운명’, 그 생극의 드라마

2011년, SBS에서 <마이더스>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제목에서 보듯 부(돈)를 둘러싼 불꽃튀는 승부가 주 내용이었는데, 엄청난 돈을 주무르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심리와 논리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서 나름 열심히 챙겨 보았다. 예상대로 속고 속이고 뒤통수 치고...... 참으로 저속한 이합집산을 거듭했는데, 그렇게 지지고 볶다가 마침내 한쪽이 승리하면 자축파티를 하는데, 그 파티의 형식이 아주 흥미로웠다.

먼저, 고급 룸살롱에서 폭탄주를 진탕만탕 마신다.

다음 머리에 넥타이를 두르고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른다.

드라마에선 생략되었지만 그다음 수순은 안 봐도 알 것 같다.

아마 화려한 성접대가 이어질 것이다.

폭탄주-노래방-성적 쾌락. 이것이 그 피 말리는 ‘쩐의 전쟁‘을 치른 이후에 받는 거의 유일한 휴식이자 보상이었다. 거의 유일하다고 단정하는 이유는 평소에는 늘상 전시 체제라 잠시도 쉴 틈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불을 다루는 사람들의 삶은 1.긴장과 스릴의 일상화 2.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술-노래-섹스‘의 삼종세트로 이루어진 셈이다.

동의보감식으로 말하면 이 모든 과정은 전부 화(불)기운을 끌어올리는 것들이다.

화기가 항진되면 가장 먼저 신장에 저장되어 있는 ‘정‘(진액)을 말려버린다.

‘수승화강‘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은 올라가고 불은 내려가야 몸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다는 의미다.

한의학과 양생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면 반대로 화기가 올라가고 수기가 쫄아들면? 신진대사에 치명적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런 상태를 장기간 지속하면 각종 질병에 노출되는 건 물론 정력과 수명이 줄어든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시대 남성들의 정자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평균 수명은 늘었다지만 암과 치매, 당뇨와 뇌졸중 등 각종 불치병들은 점점 더 세를 넓혀 가고 있다. 결국 우리 시대는 돈과 생명의 정기를 맞거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참 궁금했다.

부자들은 저런 삶의 패턴을 진짜로 행복하다고 여길까?

또 과연 저 정도 삶을 위해서 저렇게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걸까?

아, 물론 고급주택에 고급 승용차, 해외여행에 명품쇼핑 등등의 물질적 풍요가 수반되긴 할 것이다.

글쎄? 과연 그게 더 좋은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쾌락지수야 다소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쾌락은 종류와 대상이 뭐든 ‘화기‘를 소진할 뿐 존재의 충만감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오히려 쾌락 지수가 높아질수록 정신적 공허함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부자들일수록 각종 신경증에 더 많이 노출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만약 부가 행복과 자유의 원천이라면 부자들은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더 지혜로워야 한다. 형제 간의 우애와 효성이 지극해야 하고, 나눔과 배려의 정신도 충만해야 한다.

어이가 없다고? 그런 부자가 어디 있느냐고?

그런 사람이 어떻게 부자가 되느냐고? 그렇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혜와 우애, 효성과 배려 같은 덕성을 가진 부자는 실로 드물다는 걸.

그런 덕성을 가진 사람은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그 말은 부자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왠고 하니, 이 우주에는 지혜도 없고 나눔의 기쁨도 모르면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단연코!

그렇다면 참 이상하다. 불을 통해 행복하기는커녕 생명의 정기를 빼앗길 뿐더러 정신적으로도 공허감만 커지는데 대체 왜 저토록 돈에 집착하는 것일까?

돈을 엄청 만지기는 하는데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이건 대체 어떤 팔자 탓인가? 명리학적으로 보면, 재다신약이 바로 그것이다. 재다신약이란 재성은 많은데 그러다 보니 일간이 아주 신약해진 팔자를 의미한다.

재성이 많으면 재물이 콸콸콸 들어와서 참, 좋은 팔자일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가? 일간이 약해서 재물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당하지 못하는 재물은 재앙이다.

그 제물은 삶을 잠식하고 존재를 붕괴시킨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돈은 그저 무성의 숫자가 아니다.

돈에는 무수한 인연들이 들러붙어 있다.

더구나 지금은 자본주의, 그 중에서 금융자본의 시대가 아닌가. 천문학적 단위의 돈들이 신기록처럼 떴다 사라졌다 하고 있다. 하여,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들 돈을 인생의 유일한 가치로 삼고 있다.

바야흐로 재성을 ‘존재의 축‘으로 삼는 시대인 것이다. 다시 복습하면, 존재의 축은 일간이다.

일간이 극하는 것이 재성이다.

식상이라는 상생의 운동을 거친 다음 재성이라는 유형의 자산이 구축된다고 했다. ㅡ식상생재.

하지만, 금융자본은 식상의 단계를 생략한 채 곧장 재성으로 건너뛴다. 증권이든 부동산이든 거액의 돈이 오가는 현장에는 노동과 생산이 없다.

실제로 현물 시장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숫자 놀음을 할 뿐이다. 집을 수없이 팔고 샀지만 그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증권거래소에 매일같이 출근하지만 그 주식이 어떤 현장에서 산출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숫자놀음이기 때문에 정말로 노름과 비슷해진다.

한탕주의, 대박, 로또, 급등 등의 낱말들이 말해주듯,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액의 돈들이 똬리를 틀게 된다. 재성의 부피가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일간은 점점 더 왜소해져 간다.

결국 존재의 축이 점점 무게 중심을 재성 쪽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본디 일간은 재성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재성이 점점 비대해지면 역주행이 일어난다.

재성이 오히려 일간을 뒤흔드는 격이다. 예를 들어, 물은 불을 극한다. 하지만 불이 너무 거세면 물로는 절대 진압이 안 된다.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진다 수극화에서 화모수로. 이와 비슷한 이치다. 이것이 재다신약이라는 팔자가 대세를 이루게 된 과정이다.

금융자본주의는 모두에게 이 리듬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체제다. 즉, 재다신약의 팔자가 아닌 사람들도 이런 팔자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재성이 극대화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럼 재성이 많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과다는 고립과 다를 바 없다. 하나의 오행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당연히 팔자의 모든 힘이 그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예컨대, 식상을 쓰지 못하니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미국의 월가나 여의도 증권맨들이 햄버거,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돈이 많다고 식상에 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억대 연봉인데 의식주의 수준에선 노숙자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뭣하는가?

그걸 누릴 시간도, 체력도 없는데. 또 재성에 집중하니 관성이 꽉 막혔다.

관성은 단지 출세와 승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리더십과 인복도 거기에 해당한다. 관성의 기운을 터득하려면 가장 먼저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사람들과 같이 일과 활동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

그러면 돈은 저절로 이 관계와 활동 속으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각양각색의 좌충우돌을 겪게 된다. 이걸 절대 피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맞서고 헤쳐 나가다 보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이 펼쳐진다.

이것이 재성과 관성이 통하는 길이다. 이 길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재성은 일복이기도 하다.

출세는 하는데 인복은 점점 희박해지고 그러면 거의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린다.

결국 연봉은 올라가지만 몸과 마음은 한없이 피로해지는 운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가장 먼저 몸이 무너진다.

재다신약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재물이 들어오면 건강을 잃는 것이다. 과로사 아니면 우울증 혹은 자살충동, 기타 등등. 들은 이야기지만, 한 벤처 사업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500억 대박을 치고 승승장구하다가 50도 안 된 나이에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이런 것이 돈과 운명이 펼치는 한판 승부다. 이 생극의 드라마는 어떤 픽션보다도 극적이고 또 치명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또 가족 관계가 파탄날 수 있는데,

특히 아버지와의 극심한 갈등 아니면 (남성의 경우) 성적 추문이 수반될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익혔듯이 재성은 육친상 아버지이자 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듯이 큰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집안이 쑥밭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재성은 성욕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 특히 남성에게는 따라서 재성이 활성화되면 당연히 성욕도 항진된다.

그런 점에서 ‘쩐의 전쟁‘과 ‘술-노래-섹스‘ 삼종세트는 찰떡궁합인 셈이다.

또 관성이 막혔으니 인성으로 가는 길은 실로 험난하다. 더구나 재성은 인성을 극하는 관계 아닌가.

재성이 넘친다는 건 인성에겐 치명타다. 이것은 평생 재물을 일구었지만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배움이 없으면 상생이 없다.

지혜와 유머, 우애와 효성 등은 추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해주는 상생의 기운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성이 지나치면 거기에 함몰되지만, 인성이 막히면 나를 충전할 백그라운드가 없게 된다.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디디듯‘ 위태롭기 그지없다.

부자들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그럼, 이런 팔자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명리학적으로는 아주 간단하다.

먼저 곧바로 재성으로 가지 말고 식상의 단계를 거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워밍업을 충분히 한 다음에 재성을 일구라는 것이다. 먹고 떠들고 끼를 발휘하고...... 이런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면서 돈을 벌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쉽사리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 다음엔 앞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당연히 재성을 관성으로 터주어야 한다. 재물은 고이면 위험하다.

무수한 인연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에너지장이 실로 엄청나다.

그것을 가두어 두면 언제 어떻게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사회적 관계 안으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단순한 기부보다는 증여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삶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 관성의 핵심인 까닭이다.

관성이 충만해지면 인성의 문은 저절로 열리게 되어 있다.

타자를 만나고 새로운 활동이 구성되면 인성, 곧 배움의 열정은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법이다.

멜로의 화신

재다신약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가 하나 더 있다. 재성은 육친상 아버지 혹은 (남성에겐) 부인이나 애인에 해당한다고 했다.

따라서 재성이 비대하다는 건 아버지와 아내의 자리가 몹시 크다는 뜻이다. 예전엔 가문 내에서 양자로 입양되는 일이 많았으니 생부와 양부를 동시에 모셔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처첩제가 통용되던 시대이니 처첩이 여럿인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의 집안에 양자로 간다는 건 매우 드문 일일뿐더러 우리 시대는 일부일처제를 신앙처럼 떠받들고 있다. 그럼 대체 어떤 양상이 펼쳐질까?

먼저 남성의 경우. 재다신약인 사람은 직장엘 들어가도 차분히 돈을 벌기보다는 주식이나 펀드, 기타 돈과 관련된 일을 쉬지 않고 벌인다.

당연히 돈과 관련된 사건 사고가 그치질 않는다. 아울러 남성에게 돈과 애로스는 동반자다. 돈을 움직이는 기운과 에로스가 함께 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다신약의 운을 가진 남성은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남자는 다 그런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어법이 단순해서 그저 "이뻐~"만 외쳐 대지만 실제로는 남자들마다 꿍꿍이가 다 다르다. 미모의 기준 자체도 각양각색일뿐더러 무게중심이 튼실한 남자는 절대 미모와 몸매를 짝짓기의 척도로 삼지 않는다.

사실 예쁜 여자를 밝히는 경우는 그 대상에 대한 연모라기보다 내부에 꿈틀거리는 ‘도화살‘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라고 할 수 있다(단지 바람기가 있다고 해서 추문에 휘말리는 건 아니다. 많은 여성 편력을 하면서도 절대 휘둘리지 않는 남성들도 간혹 있다. 예를 들면 조르바 같은 경우!

그건 재다신약이 아니다). 그래서 여자가 생기면 항상 스캔들에 연루되고 그러다 보면 재물이 줄줄 샐뿐더러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 재다신약은 원초적으로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재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부자지간은 상극이 되기 마련이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곤경을 겪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유산을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지거나. 멜로 드라마의 흔한 공식, 재벌 2세가 가난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면(혹은 혼외정사를 벌이게 되면) 아버지가 극심하게 반대하다가 뒷목을 잡고 쓰러진다.

요컨대, 남자의 팔자에서 ‘재물-여자-아버지‘는 하나의 계열이다.

당연히 관성에도 치명적이다. 만약 이런 남자가 공직에 있으면 반드시 스캔들로 인한 송사를 겪게 되어 있다. 제비족이 관운이 있기는 어렵고, 관성이 발달한 남자가 여자에게 친절하기는 불가능하다.

인기와 리더십은 전혀 다른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멜로의 주인공들은 재다신약의 대표적 케이스에 해당한다. 그런 캐릭터의 경우, 일단 사랑을 하면 뭔가 장애가 생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랑과 장애가 동시적으로 리듬을 타는 것으로, 이건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기제다. 멜로의 판타지를 낳는 건 사랑 자체가 아니다. 사랑에 수반되는 ‘생고생‘이다.

솔직히 말하면 사랑을 원하는 것인지 생고생을 원하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 갈 정도로 둘은 뒤엉켜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랑과 ‘죽음충동‘이 혼동되고, 사랑이 삶을 질식시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전도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몸도 마음도 괴로운 상태에 빠지는 것, 이건 결코 아름답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팔자가 ‘꼬인‘ 케이스다. 굳이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상대를 찾아 헤매는 격이라고나 할까. 혹은 몸과 마음을 스스로 괴롭히기 위해 어떤 대상을 선택하는 것인지도.

따라서 사랑을 "한다"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질투, 분노, 광기, 변덕 같은 힘들에 끌려다니게 된다. 그 힘들이 바로 나의 능력을 갉아먹는 수동촉발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힘들에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감정들에 붙들려서는 안 된다. 붙들리면 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힘들보다 더 강한 긍정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중에서)

요컨대, 사랑은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다니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능동적 활동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멜로의 주인공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정의와 가장 먼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사랑이란 자신의 결핍감과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걸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은 없다. 그러니 괴로움이 끊임없이 이어질밖에.

짧은 쾌락과 긴 괴로움, 이것이 멜로의 주인공들이 밟아가는 보편적 코스다.

명리학적으론 재성에 사로잡힌 인생이다. 존재 자체가 재성으로 가득 차 있으니 다음 마디로 넘어갈 수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는 그 지독한 사슬을 끝내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멜로의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는 ‘운명의 덫‘에 걸렸다고 안타까워하지만 그 모든 것을 불러들이는 건 사실 자기 자신이다.

사랑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계속 인연을 만드는데, 그러기 위해선 사랑을 둘러싼 사건사고가 그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기껏 죽을 힘을 다해 그 늪에서 벗어난 뒤에도 다시 또 그런 대상에 꽂힌다. 그런 사랑을 해야만 ‘미친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사랑이라기보다 중독이라고 해야 맞다. 사랑의 격정을 느끼는 순간을 지속·반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 더 많이, 더 세게......

평범한 수준의 감정으로는 직성이 안 풀린다.

그러자면 장애가 없는 사람하고는 불가능하다. 평온하고 덤덤한 것은 사랑이 아니니까. 유년기의 상처도 있어야 하고, 계층 간의 격차도 심해야 하고, 주변관계도 복잡해서 방해꾼도 엄청 많아야 하고, 당연히 삼각·사각으로 꼬여야 하고.

음모와 배신, 사기와 거짓말 등등 온갖 협잡이 자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의 파토스가 강렬해지니까. 사랑의 짜릿함을 확인할 기회가 많아지니까.

어디서 많이 본 증상 같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돈에 대한 ‘중독증‘과 동일하다. 돈에 대한 욕망 또한 이런 레이스를 밟는다.

다다익선에 긴장의 일상화, 쾌락의 증식 등등. 팔자에서 돈 문제와 에로스를 오버랩시킨 건 이런 점에서 실로 적확하다. 최근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재벌 2세, 3세인 이유도 이런 맥락의 소산이다. 경제적 격차가 벌어질수록 그만큼 더 멜로의 파토스를 만끽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드라마의 문법은 이렇다 치고 그럼, 현실에선 어떨까? 이런 패턴을 지닌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처음엔 아주 황홀하다. 지극 정성으로 아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유통기한이 짧다. 순식간에 다른 대상을 향해 떠나 버린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예쁘다는 게 꼭 좋은 전략은 아니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재다신약일 경우가 많고 그런 남자는 결코 하나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왜? 세상에는 예쁜 여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남성의 경우는 처음 대시를 하고 상대를 손에 넣을 듯 말 듯한 상황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아무리 예쁘다 한들 이런 욕망의 패턴을 만족시켜 줄 도리가 없다.

그래서 아주 역설적인 말이지만 예쁠수록! 버림받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이런 함정에 곧잘 빠지곤 한다 이런 남자와 사랑을 할 때는 여성들이 훨씬 강건해져야 한다.

여성의 재다신약일 경우는 좀 다르다. 재성이 강하면 일단 일복이 억수로 많다. 엄청 벌어도 또 누군가 털어간다. 그것이 아버지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다.

차라리 벌지 않으면 털릴 일도 없다. 그런데 재주가 많으니 또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재물이 일을 낳고 일이 또 제물을 낳는데, 재물이 모이기보다는 계속 여기저기로 흘러간다.

재다신약인 남성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여성한테 끌리듯이, 재다신약의 여성은 재물을 일구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고 할 수 있다.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리라.

그래서 어찌 보면 가장 고생스러운 팔자라고도 할 수 있다 돈을 많이 벌거나 만질 가능성도 많지만 그만큼 정기신의 소진도 많다.

‘성공의 희생양‘이라는 말은 그래서 명리상으로는 형용모순이 아니다.

연예인들의 삶이 여기에 아주 가깝다. 연예인들도 처음엔 춤과 노래, 연기를 그 자체로 즐기고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 ‘자발적 불꽃‘은 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 노래와 춤, 연기는 다 ‘노동‘으로 전화된다. 나 같은 평범한 팬의 입장에서 보자면 연예인보다 힘든 직업도 없어 보인다.

드라마를 찍으려면 겨울에 여름을, 여름엔 겨울을 연출해야 한다.

밤을 새는 건 다반사고 철인 3종 경기 버금가는 고난도의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특히 댄스가수들의 경우, 그토록 과격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다니, 의학적으로 보자면 근육과 관절에는 치명적이다. 좀 과장에서 말해보면, 인류 역사상 어떤 노예도 저렇게 과격한 노동을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미천하다 해도 밤에는 일단 잤기 때문이다. 불이 귀했던 탓에 야간 노동을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요즘 잘 나가는 연예인들은 하루 2, 3시간도 자지 못한다.

겉보기엔 건강해 보이지만 뼈는 중년처럼 노화되었고, 이명에 안구건조증, 공황장애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 더 무서운 건 그렇게 강도 높은 노동을 감내해도 대중의 욕망은 어디로 ‘튈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관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열광적 환호가 순식간에 증오의 돌팔매로 바뀐다. 하지만 이건 지극히 당연하다. 인간이 즐기는 모든 쾌락에는 커다란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이 슬픔과 마주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중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욕망의 ‘파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걸 대책 없이 따라가다가는 결국 인정욕망에 의해 삶 전체가 잠식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재다신약의 비극에 다름 아니다. 재성은 소유를 향한 집착 혹은 집중력이다. 재성이 많으면 당연히 재주가 많다.

어떤 일을 해도 마무리를 하는 야물딱진 성격일 테니 말이다. 대신 그만큼 소유욕도 강할 것이다. 정재가 발달하면 다소 인색하거나 깍쟁이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는 거의 모든 재능을 화폐화 하기 때문에 재성만 쓸 경우 존재 전체가 화폐의 속성을 닮아 버린다. 모든 가치를 먹어 치우는 단 하나의 척도로서의 화폐!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오직 교환의 차원에서만 쓰려고 들고, 그래서 몸은 한없이 경직되게 된다.

따라서 이럴 경우, 앞에서 강조했듯이 이 넘치는 재성을 반드시 관성으로 터주어야 한다. 나의 스톡을 사회적 조건으로 소통시켜 주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인디언 추장의 자격은 선물과 증여의 달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관성은 낯선 관계망에 들어감으로써 전혀 다른 내가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래서 여성이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건 새로운 세계와의 마주침을 의미하고, 남성에게는 자식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관성도 다 재성처럼 쓴다는 게 문제다. 에로스를 자본화하는 흐름이 워낙 강고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남성이 여성을 재물로 간주했지만, 요즘은 여성도 남성을 제물로 환원한다. 그래서 상품을 구매할 때와 거의 차이가 없다.

관성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재성의 연장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재성이 ‘특권화‘되면서 관성의 리듬에도 상당한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여 관성이 작동하는 사회적 배치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 P204

팁으로 ‘재성을 관성으로 터주는’ 몇 가지 비책을 덧붙인다.

첫째, 회사를 공동체적 관계로 바꿔야 한다. 우리 시대에 회사나 공장 등 작업장은 경쟁과 암투가 벌어지는 격전지로 간주된다. 회 225 사/공동체를 적대적으로 나누어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정당한가? 근대 이전에는 작업장에서 배움과 밥과 인생을 동시에 해결했다. 정글 혹은 격전지로 바뀐 건 교환의 법칙이 지배하면서부터다. 자본주의 사회라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숙명론이다. 전쟁터와 포로수용소 같은 곳에서도 우정과 연대는 가능하다. 심지어 지옥에서도 그렇다고 나는 확신한다. 하물며 직장에서야. 생각해 보라. 정규직을 가지면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장에서 보내야 한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만나는 사람이 곧 나다! 그런데 그들을 오직 라이벌이나 적으로만 여긴다면 그건 무엇보다 자신의 운명을 소외시키는 일에 다름아니다. 양생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정기의 소모가 너무 크다. 매일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끼리 서로 ‘밀당’을 해야 한다면 그것처럼 피곤한 일도 없다. 사람에겐 오직 사람만이 필요하다. 돈을 버는 것도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작업장이건 일단 몸을 담고 있는 한 거기에서 공동체적 연대감과 의리를 배워야 한다. 스승과 벗을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스승과 벗이 없는 인생이란 그 어떤 금액의 돈으로도 결코 보상받을 수 없음을 꼭 되새길 필요가 있다. - P224

언뜻 보면 인의예지신이 다 그게 그거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금기운이 용신인 경우는 의(義)를 체득해야 하는데, 의로움이란 옳고 그름을 날카롭게 분별하는 덕목이다. 이게 필요하다는 말은 평소의 행동거지에 맺고 끊음이 불분명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말투에서 발걸음까지 매사를 또박또박 표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애를 써야 252 한다. 주변을 늘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편이다. 이 정도만 해도 응용할 사항이 넘친다. 그 다음엔 이걸 몸에 착! 달라붙게 해야 한다. 몸이 바뀌면 인생도 바뀐다. 그래서 ‘보면 안다’고 하는 것이다. - P251

흔한 통념과는 달리 공동체에선 사건사고가 그치지 않는다. 팔자들이 원색적으로 난무하기 때문일 터이다. 해마다 겨울이면 연례행사처럼 터지는 연애사건들도 하나같이 블록버스터 감이다. 연예인들의 스캔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세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정의 태풍이 휘몰아친다. 거기에 휩쓸리다 보면 공동체가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아무리 기이한 사건일지라도 거기에는 배움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기다림의 지혜를 터득하기로 작정했다. 태 254 풍이 지나갈 때까지, 사건의 맨살이 드러날 때까지, 번뇌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배치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헌데,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또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사건들이 또 우리를 맞아준다. 와우~ 덕분에 공동체에선 고독과 소외를 느낄 틈이 없다. 지루하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생극의 파노라마 속에서 삶의 진면목을 대면할 수 있는 것, 기다림과 끈기를 훈련할 수 있는 것, 권태와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 이보다 더 좋은 용신이 있을까.

세존께서 싹끼야족의 마을에 계실 때였다. 존자 아난다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훌륭한 벗과 사귀는 것, 훌륭한 친구와 사귀는 것, 훌륭한 도반과 사귀는 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세존께서 답하셨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훌륭한 벗과 사귀는 것, 훌륭한 친구와 사귀는 것, 훌륭한 도반과 사귀는 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 아난다여, …… (그것은)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닦고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익히는 것이다." (전재성 역저,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 한 권으로 읽는 쌍윳따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335~336쪽)

벗과 친구와 도반, 이것은 가족삼각형 안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세존의 말은 이것이 불가피한 대안이 아니라 가장 성스러운 길이라는 것. 이 길은 다른 게 아니라 돈과 가족이라는 가치에서 벗어나야 255 하고 몸의 안일함을 벗어나야 하고, 정신적 의존성을 벗어나야 한다. 한마디로 지혜를 갈고닦는 수행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또 제빵왕 김탁구가 보여 주었듯이 이 길 위에서는 반드시 스승과 도반을 만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배움과 만남은 같은 율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고로, 지혜와 공동체는 하나다! 지혜와 공동체가 오버랩되는 순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리듬과 강밀도로 살아가게 된다. 하여, 이보다 더 좋은 개운의 기술은 없다!
팁 하나. 일간이 뭐건, 사주팔자가 어떤 격과 형식을 가졌건 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취해야 하는, 또 취할 수 있는 보편적 용신이 있다. 약속과 청소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시공간과 몸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또 말과 행을 일치시킨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약속을 지키는 건 소통의 핵심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서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명리학적으로는 식상이 관성을 극하는 코스가 아니라, 재성을 통해 관성을 북돋아 주는 코스를 밟는 것이다. 비겁-식상-재성-관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쓸데없는 잉여를 쌓아 두지 않는 것이다. 몸 안에 잉여가 쌓이면 담음이 되고 어혈이 되고 종양이 된다. 마찬가지로 동선과 관계에 찌꺼기가 쌓이면 그것이 불신과 분노, 그리고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약속을 지킨다는 건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을 청정하게 만드는 일에 해당한다. 청소가 중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유불도를 막론하고 동양의 공부법은 청소를 ‘쿵푸’(工夫)의 기초로 삼았다. 쓸고 닦고 정돈하고…… 사찰에 가보면 알겠지만 구도자들은 256 무엇보다 청소의 달인들이다. 티끌 한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하는 발우공양을 수련의 중요한 코스로 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약속과 청소,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인생역전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아니, 이 두 가지를 지키지 않고 좋은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가장 보편적이고도 가장 쉬운 용신에 해당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엔 가장 절실한 용신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식상과다의 상태에 빠져 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고,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쏘아 댄다. 말과 행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그럴수록 몸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다. 그 간극과 거리에서 탄생하는 무수한 질병과 번뇌들! 이것들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아주 간단하다. 약속을 지키는 훈련을 하면 된다. 어떤 과정을 거쳤건 일단 말로 내뱉은 일에 대해선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또 지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침묵하라! 동시에 청소를 일상화하라. 현대인들은 청소를 할 줄 모른다. 화려하고 멋진 집과 건물을 갈망하면서 정작 그런 공간을 소유하고 나면 쓰레기통처럼 취급한다. 사방에 짐을 늘어놓고 그 위에 또 새로운 상품을 쌓아 둔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만지지도 쓰지도 않는 물건들이 사방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궁전 같은 집에서 거지처럼 사는 존재들! 그러고서 위생을 따지고 질병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학교에서도 청소를 가르치지 않는다. 학부모나 청소업체가 대신해 준다. 급식을 먹을 때도 그렇다. 제멋대로 먹고 마구잡이로 버린다. 청소의 윤리, 음식에 대한 예의를 가르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공부의 생기 257 초를 배우지 못하는 학교라니, 이것은 학교가 아니다!
참, 이래서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에겐 최고의 용신이 된다. 자기 팔자가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이유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면, 다른 건 일단 제쳐 두고 먼저 점검해 보라. 내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를. 약속을 지키고 청소를 잘 하고 있는지를. 산다는 건 별 거 아니다. 시공간이 곧 나다. 시공간과 내가 조응하는 만큼이 곧 나의 일상이다. 고로, 일상의 구원은 약속과 청소로부터 온다! - P253

접속의 방법도 아주 구체적이어야 한다. 먼저 소리를 통해 내 몸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낭송과 암송이 바로 그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를 잘 몰라도 상관없다. 계속 읽다 보면 문득 뜻을 깨치기도 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뜻을 새길 수도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디지털 세대는 뭔가를 기억하기 위해 몸부림쳐 본 경험이 없다. 교육의 영역에서도 암기는 점차 사라져 간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는 명목으로. 미리 말하지만 주입식과 암기는 동일한 말이 아니다. 암기, 더 정확히 말해서 암송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탁월한 교육법이었다. 독서란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텍스트의 모든 내용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외우는 것이었다. 아니 외운다는 말은 부적합하다. 텍스트와 신체가 한몸이 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냥 몸에 착! 달라붙어 입에서 술술 나와야 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비롯하여 사서삼경, 불경과 성경 등 인류의 위대한 고전은 다 암송을 통해 구전되어 왔다. 하지만 지 262 금의 독서는 오로지 눈으로 스윽 훑는 것이고 각종 리뷰를 클릭하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생각건대, 암송은 다시금 미래적 대안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필사 또한 좋은 방법이다. 고전 속에서 깊이 촉발되는 ‘씨앗문장’들을 베껴 쓰는 것이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쓰노라면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내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장의 호흡이나 리듬도 익힐 수 있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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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상의 기호
육친 관계
여성: 자식, 할머니
남성: 장모 사위, 할머니
비겁에서 탈출, 일간의 생
활동성 : 욕망이 만나는 현장, 욕망의 표출, 표현, 예술, 쉽게 일을 벌임, 잦은 이직, 현금 유동성
미숙함 : 과정 중시, 변칙적 시도, 기발한 아이디어, 시행착오, 반조직적 일탈
식욕과 성욕 : 의식주, 먹을 복, 요식업
사유의 재구성 : 보수적
언어 : 말, 말하는 직업, 표면적인 말, 과대포장, 구설수
시작
창의력 : 미숙한 도발, 기획력, 뒷심 부족
행운 : 양날의 검
식신 vs 상관
식신 : 준비된 복, 시련에 약함 / 상관 : 반사회적, 반항적

남녀 모두 친할머니가 식상운에 속한다. (…) 남성 사주에서 배우자는 재성 자리다. 그래서 남성 사주에서 재성을 낳는 자리인 식상은 배우자를 낳은 장모가 된다. 또한 재성은 남녀 모두 아버지 운에 해당한다. 따라서 식상은 아버지를 낳은 할머니라고 볼 수도 있다. - P279

식상의 활동성이 바로 욕망의 표출과 관계가 있다. 식상이 강하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분주하게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 한다. 그것이 가구나 인테리어 등의 생활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예술 작품일 수도 있다. 생명을 낳거나 기르는 일이기도 하며 글을 쓰거나 말로써 표현되기도 하고, 여행이나 이사 등 이동의 변화로 일어나기도 한다. 특히 식상이 강한 사람은 예술적인 기질을 많이 가지고 있고, 실제로 사회에서 작가, 연주자 등의 예술가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이밖에도 쉽게 일을 벌인다거나, 잦은 이직을 시도하는 것도 식상의 활동성과 관련이 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현금 유동성이 활동성에 속할 것이다. 사업에서는 현금이 돌아야 일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 P280

비겁에서 시작된 욕망은 식상이라는 현장과 만나고 재성으로 이어져 결과를 낸다. 이 스텝에서 보자면 식상은 과정이고 재성은 결과다. 또는 식상은 과정을 중시하고 재성은 결과를 중시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식상의 미숙함이란 아직 결과에 이르지 못한 과정으로서의 미숙함이다. 그러므로 식상의 활동성은 과정을 밟아 나가며 일어나는 상황들, 즉 아직은 미완성인 일의 과정 중에 일어나는 액션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변칙적인 시도와 기발한 아이디어의 적용, 시행착오와 반조직적 일탈 등이 포함된다. - P281

미숙함의 이미지는 욕망 중에서도 원초적인 욕망, 식욕과 성욕 등과도 연결된다. 그런 욕망은 마치 어린아이 같아서 적절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삶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상을 식욕과 성욕의 영역으로 보기도 한다. - P281

한편, 식상을 ‘성욕’으로 보는 것은 주로 여자에 해당한다. (…) 굳이 남자의 성욕은 특정한 육친에 배속하지 않는데 이는 남자의 성욕은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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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설해버려야 속이 시원해지는 화체(火體)의 기질. 화체의 성격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머리가 명석하고 투명한 성격이지만 세간생활에서는 그것이 본인에게 불이익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고스톱을 칠 때 고돌이 원단이 표에 들어오면 곧바로 얼굴 표정에 그 설렘이 반영되는 체질이라고 보면 쉽다. 화체는 도박에서 좀처럼 돈을 따기 어려운 체질이기도 하다. - P196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통찰이다. 점의 궁극적 관심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에 있다. 자기를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신탁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술객 도사들이 빠지는 함정이 이 통찰의 부족이다. 다른 사람 점은 잘 보아주는데 정작 자신의 점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뻔한 함정에 빠지 210 곤 한다. 이 약점을 방지하기 위해 술사들은 크로스 체크를 하기도 한다. 서로 상대방의 팔자를 보아주는 방법이다. 인간은 상대방의 눈에 든 티끌은 밝게 보지만 자신의 대들보 같은 허물은 못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고난도의 고행을 겪어야만 얻어지는 경지이지 함부로 얻을 수 있는 급수가 아니다. 박 도사가 말년에 빠졌던 함정도 바로 자기 자신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천하의 박 도사도 자기를 아는 데는 실패했다. 자기를 안다고 장담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계율과 스승이 필요하다. 스스로 계율에 의지해 자신을 점검해보고, 스승으로부터 끊임없는 경책을 받아야만 스스로 반성할 수 있다. 박 도사의 일생을 보면서 왠지 델포이 신전의 기둥이 자꾸 생각난다. ‘너 자신을 알라’를 음미하면서 불교의 ‘나는 없다’라는 무아(無我)의 법문을 연상하는 것은 현학적인 취미인가. - P209

인(寅) 호랑이
공경하고 경의를 표시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초목이 땅속에서 쭉 성장해 시기를 기다리는 상태다. 고대 중국인이 공경하며 두려워했던 동물은 백수의 제왕인 호랑이(중국에는 사자가 없었다)였으므로, 호랑이에게 인을 배당했다. - P234

조선시대 선비들이 홀로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았던 수련이 신독이다. 아니면 선(禪)이나 기도를 해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해서 얼굴을 좀 더 맑게 다듬었으면 좋겠다. 시라소니는 아무 때나 사냥할 일이 아니고 필요할 때만 공격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 P273

탄허도 오대산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아마 6.25 때 좌익을 하다가 총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주변의 연배들이 그렇게 죽은 사람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주역』이나 마르크시즘이나 세상을 바꾸는 교과서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단 방법이 다를 뿐이다. 전자는 미신적(?) 방법이고, 후자는 과학적 방법이라고 주장했지만,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까 무엇이 정답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1980년대에 적극적으로 운동권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1990년대 들어와 입산수도로 방향을 돌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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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친법 팔자의 ‘오이디푸스화’

자, 이제 사주분석의 마지막 코스에 접어들었다. 아마도 운세를 본다는 건 바로 이 최종단계에 대한 해석을 뽑아 보는 것일 터이다. 십신은 팔자가 ‘사회체’,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표상들과의 마주침에서 일어나는 기운의 배치라고 했다. 여기엔 아직 주체와 대상이 없다. 기운들의 흐름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사회적 표상과 욕망의 주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주름에 주체와 대상을 부여하는 것이 ‘육친법’이다. 육친(六親)은 말 그대로 ‘패밀리’다. 나를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를 말한다. 기운이 동선을 만들고 동선이 관계를 만든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곧 동선의 편폭을 만들고, 그 동선이 기운의 배치를 구성한다. 이것이 육친법의 이론적 토대다.
예컨대, 비겁은 나의 수평적 확장이니 그것을 주체화하면 형제와 동료, 라이벌, 남편의 여자(강력한 라이벌이니 겁재 중의 겁재다^^) 등이 된다. 식신은 낳는 기운이니 여성에게는 자식이고, 남성에게는 처가 식구들 혹은 할머니 등에 해당된다(내가 할머니를 낳는다고? 이것이 우주의 아이러니다. 돌고 돌다 보면 할머니가 곧 나의 자식이 되기도 한다). 재성은 일단 아버지다. 나의 재물운을 규정하는 첫 번째 조 153 건이 아버지의 경제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성한테는 거기에 또다른 관계가 첨가된다. 바로 부인 혹은 애인이다. 아버지-여자-재물, 이것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럼 여성한테 남편이나 애인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관성이다. 나를 극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지위나 조건을 규정하는 토대에 해당한다. 혹은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는 창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 남성에게 관성이란? 바로 자식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모양이다. 자식이 웬수라는 말도. 아버지와 아들은 기본적으로 상극이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를 이겨 먹기 위해 세상에 나온 존재다. 중국이나 로마의 황제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보다 아들들이었다. 실제로 아들에게 암살당한 일인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만큼 아버지와 자식의 기운은 팽팽하다. 전자가 지나치게 세면 아들들이 맥을 못추고, 후자가 세면 아버지의 수명이 단축된다. 실제로 암살을 하지 않더라도 너무 잘난 아들을 두면 아버지는 기세가 꺾인다. 가장 극단적인 것이 자식을 낳자마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일 것이다. 비정하다고? 하지만 이게 자연의 법칙이다. 그래서 자식이 성인이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집에 있더라도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 성인의 기준은 생식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곧 이팔청춘이면 성인인 것이다. 이후에도 부모와 같이 있으면 양쪽 다 힘들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차원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다.
마지막으로 인성은 남녀 모두에게 엄마가 된다. 생명의 원천이 154 라는 의미에서 유추된 것이다. 재성은 돈, 관성은 관직,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한데, 인성이 공부운·문서운이라는 건 좀 뜨악할 것이다. 공부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충전이고, 문서는 만물을 낳아 주는 대지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게 육친으로 따지면 엄마란다. 하여, 엄마복이 있다는 건 공부운이 좋다는 뜻이 된다. 하기야 맹모삼천은 있어도 맹부삼천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픽션이건 현실에서건 홀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해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키지만 홀아버지일 경우는 일찌감치 자식을 노동현장에 내놓은 경우가 많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도 엄마들이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아빠들도 많이 ‘엄마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아빠들한테는 자식교육보다 자신의 현장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좋고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엄마와 공부가 원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원리가 이렇다면 자식교육을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다닐 게 아니라, 엄마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자식교육에 훨씬 더 효과적이다. 엄마가 잘 살면 자식의 공부운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아무튼 이제 비로소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알던 세상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이걸 물으러 역술원엘 가고, 그래서 역술원에서 주로 활용하는 영업매뉴얼도 이것이다. 실제로 적중률도 높다. 재물운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애인이 언제 생길지, 남편복이 있는지 없는지, 문서운이 있는지 없는지 등은 초식만 배워도 금방 드러난다. 너무 간 155 단해서 놀랄 지경이다. 하기사 뭔가 대단한 비의가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망상이요 무지가 아닐까. 인생사라는 것이 누구든 생로병사의 리듬을 밟아 가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품게 되는 욕망이나 비전 또한 뻔하디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팔자의 주름은 그다지 개성적이지 않다.^^ 그러니 일단 자신의 팔자엔 뭔가 특별한 흔적(복이건 화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던져 버리는 게 낫다. 헌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구?’ 여기서 그치면 아무것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다. 족집게처럼 맞히면 뭐하는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는데……. 게다가 역술가의 입장에선 정직하게 말할 수가 없다. 대개 좋은 운보다 나쁜 운이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그런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 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분노 아니면 공포다. 즉, 애꿎은 역술가한테 화풀이를 하거나 아니면 두려움에 떨면서 역술가한테 매달리거나. 그러다 보면 팔자는 더더욱 꼬일 수밖에 없다. 특히 궁합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이미 결혼을 약속했거나 뜨거운 연애중인 커플을 앉혀 놓고 살이 끼었다거나 인연이 그리 길지 않다든가 하는 말을 늘어놓겠는가. 고로 대부분 하나마나한 소리로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명리학의 담론적 배치다. 역술가(혹은 점쟁이)와 고객 사이엔 어떤 앎의 공유도 없다. 고객은 최소한의 기초도 없는 채로 자기 운명에 대한 해석을 역술가에게 맡겨 버린다. 이런 식의 일방향적 관계에선 언표 자체가 극도로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팔자의 주름에는 십신이나 음양오행 등 아주 풍성한 156 흐름들이 지층화되어 있건만 언표를 구성하는 건 육친을 둘러싼 아주 ‘유치한’ 사건들밖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육친법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것은 근대 이전의 가족관계와 생활방식을 전제로 한 ‘주체화 방식’이다. 그래서 처삼촌이라든지 이종사촌, 처첩들 등 우리에겐 아주 낯선 친인척 관계도 상당수 들어 있다. 근대 이전에는 가족이라고 하면 당연히 가문 중심, 마을 중심의 친족관계를 뜻했다. 당연히 사돈의 팔촌, 이웃사촌 등이 팔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가문은 대가족일 뿐 아니라, 노비들과 하인들까지 포함된 ‘사회체’다. 거기다 당파와 학파가 결합되어 있고, 왕과 백성이라는 커다란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우리 시대의 가족은 ‘엄마ㅡ아빠ㅡ아이’라는 삼각형 구도에 갇히고 말았다. ‘국가ㅡ자본ㅡ가족’의 삼위일체의 권력구조에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회로가 결합한 결과가 바로 일부일처제를 바탕으로 한 핵가족 제도다. 근대 이전의 가문과 지금의 핵가족은 그저 스케일이 축소된 것만이 아니라 전혀 상이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가문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토지기계와 촌락공동체, 봉제사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는 ‘소셜 네트워크’등 폭넓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럴 때 십신은 자연과 공동체, 그리고 가족과 ‘나’라는 경계에 위치한다. 그래서 해석의 편폭도 아주 드넓다. 인성은 어머니이자 토지, 그리고 저 아득한 후대까지 뻗쳐야 하는 지혜와 명예 등이 포함된다. 백 년 뒤까지 이어지는 명예를 생각한다는 건 한편으론 이념적 망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떤 불리 157 한 조건에서도 결코 자신의 존재성을 포기하지 않는 원천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자식들한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제 우리 집안이 폐족이 되었으니 너희들이 학문을 할 때가 되었다."
무슨 뜻인가? 폐족이니 부귀공명을 누리기는 다 틀렸고, 이제 남은 건 오직 학문을 통해 명예를 지키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는 뜻이다. 출셋길이 꽉 막혔는데 공부는 해서 뭐해?ㅡ이것이 우리 시대의 통념이라면, 다산에겐 출셋길이 막혔으니 이젠 공부에 올인하자!는 것이 상식적 이치였다. 이것이 바로 인성운이다. 학문이 나를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 학문을 통해 나와 내 가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 인성이라는 용어는 이런 근원적 이치를 환기시켜 준다.
여성에게 있어 관성 역시 남편이자 남편이 속한 사회체이며 그것을 경영하는 능력과 연동된다. 한 여성이 혼인을 한다는 건 곧 어떤 집단 혹은 가문의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문을 비롯하여 촌락공동체와도 깊은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마을마다 정신적 지주에 해당하는 여성이 있었고, 특히 대갓집 마나님의 경우는 마을 전체의 살림과 풍속을 주재하는 CEO에 해당했다. 『임꺽정』을 한번 읽어 보시라. 조선시대 여성들이 얼마나 위풍당당한지, 그 카리스마와 배짱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관운이다. 요컨대 근대 이전의 관계에선 육친이 혈족을 뜻하는 것이면서 부락공동체와 연동되어 있었고, 동시에 대자연과 천지만물로 이 158 어져 있었다. 사돈의 팔촌, 이웃사촌, 천지신명과 토지기계 등등. 하지만 서구의 도래와 더불어 그런 식의 ‘대칭적’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말았다. 지금의 육친은 가족삼각형에 갇혀 있을뿐더러 공동체는 물론 자연과도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지독하게 ‘닫힌 구조’인 것. 자, 이렇게 사방으로 통하는 기운을 다 닫아 놓게 되면 팔자란 고작해야 자식의 성공, 아버지와 재물, 그리고 남편과 사회적 지위, 엄마와 부동산 혹은 자격증 등으로 고착되어 버린다. 왜소한, 너무나 왜소한! 니체가 근대인을 일러 ‘난쟁이’라고 부른 게 아마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한편으론 이렇게 관계망을 극도로 축소시켜 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누려야 한다는 집착은 더더욱 증폭된다. 이것이 현대인들을 지배하는 욕망의 배치다.
하지만 팔자에선 이런 구조 자체가 설정불가능한 컨셉이자 난센스다. 이미 파악했듯이, 여덟 개의 카드로 오행의 순환이 불가능할뿐더러 설령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해도 그렇게 되면 상생뿐 아니라 상극의 작용도 두드러지게 된다. 예컨대, 식상과 관성은 서로 상극이다. 육친으로 말하면, 자식과 남편은 상극이다. 또 재성은 인성을 극하는데, 이건 육친으로 풀면 아버지는 엄마와 상극이다. 결국 부부는 상극이라는 뜻. 오이디푸스 신화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남근은 재물(자본)이고 아버지다. 엄마는 토지기계고 자연이다. 아들은 노동력. 아버지를 죽이고(극을 한다), 아비는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극을 당한다). 그래서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많은 경우 자식을 낳으면 부부 사이가 멀어진다. 가족주의하에선 자식이 부모의 교량이라고 선 159 전해 대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일단 여성은 아이와의 일체감이 남편으로 향하는 성욕을 충족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남편과는 육체적으로 멀어지는 것이다. 부부 사이가 나쁠 경우 아이가 잘 생기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어쩌다 관계를 하면 아이가 덜컥 생기고 다시 남편은 밖으로 돈다. 그러면 그 여성은 자식을 키우는 것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다. 반대로 옹녀나 춘향이 같은 경우는 아이가 통 안 생긴다. 설령 생겼다 해도 자연유산되거나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식상보다는 관성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관성이 ‘센’ 여성은 아이를 낳는 것보다 여러 남자를 거느리고 그걸 통해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하는 데 더 주력하게 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 또한 사회적 욕망이 강하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해지는 편이다. 결국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주명리학의 메시지다.
물론 육친의 덕을 두루 갖춘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유지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기진맥진이다. 사주상으로 보면 일간이 지극히 신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팔자의 경우, 남들은 부러워하지만 정작 자신은 답답하고 공허하다고 느낀다. 크게 추락하지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승도 불가능한 채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 가진 다음 그걸 지키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과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한두 가지는 포기해야 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좋은 운인가? 아마 누구도 전자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임박할수록 평범하고 무난한 팔자에 자긍심을 갖는 160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그게 콤플렉스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콤플렉스가 없는 것이 콤플렉스라? 허, 이런 역설이라니!
처음, 「입구」에서 말했듯이 운명의 지도에는 역설과 아이러니 투성이다. 어떤 인위적 척도도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좋으면 저것이 어긋나고, 저것을 얻으면 이것이 사라지고. 겉이 아름다우면 속이 문드러지고, 바깥이 거칠면 속이 부드럽고. 혹은 돈이 들어오면 건강을 잃고, 권력을 가지면 사람을 잃게 되고, 사랑을 얻는 대신 친구를 버려야 하고…… 한마디로 팔자에는 온갖 가치들이 범람한다. 가치들의 범람 속에서 종국에는 가치들이 얼음 녹듯 녹아 버리는 것, 그것이 팔자의 우주적 연기법이다. 고로,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이 서로 ‘오버랩’ 되는 이 매트릭스에선 더 좋은 팔자도, 더 나쁜 팔자도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기술문명의 절정에 해당하는 시대다. 인류사에서 의식주가 이렇게 편안했던 적이 있었는가?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이 풍요를 전혀 누리질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풍요로 인해 행복하다고, 자신의 팔자가 참 좋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한다. 보다시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고 원망한다. 원초적 평등성 및 시대적 혜택 따위는 치지도외하고 오직 불만족과 불평등만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아니, 그것들을 열심히 ‘생산’하기까지 한다. 대체 왜? 눈치챘겠지만, 음양오행과 십신, 그리고 육친법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흐름을 오직 핵가족 삼각형이라는 좁은 틀에 몰아넣은 탓이다. - P152

근대 이후, 인간이 자연과 단절되면서, 그리고 오이디푸스 안에 갇히면서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자의식 혹은 내면이 바로 그것이다. 밖으로 통하지 못하는 에너지와 힘들, 불균질한 소용돌이가 만들어 낸 협곡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협곡에 갇힌 힘들과 소용돌이는 심하게 뒤틀린다. 왜곡,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트라우마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현대인들은 계층과 조건에 무관하게 숙명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자의식과 내면이라는 공간 자체가 사건들을 ‘상처화’하는 거처인 탓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현대인들은 거의 다 상처받은 영혼들이다. 정신분석과 심리상담, 각종 치유프로그램이 만연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더 놀라운 건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기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처가 만성화되면서 어느덧 상처와 자의식, 그리고 정체성이 합체가 되어 버린 탓이다. 자본주의가 덧씌운 운명의 굴레 혹은 ‘덫’! 그 구체적 양상을 한번 탐구해 보자. - P168

아토피를 앓는 건 그래도 괜찮다. 구체적으로 몸 곳곳에 흠집이 나니까 뭔가 노력을 하게 된다. 하기에 따라 음식과 몸이 맺는 관계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쌓을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소위 ‘마음의 상처’라는 것이다. ‘마음의 아토피’라고나 할까. 너무 많은 이들이 이 병을 앓고 있다. 남녀노소,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자신을 상처받은 존재로 규정한다. 요즘 대세를 이루는 드라마 주인공들, 특히 재벌 2세들을 한번 보라. 시건방지고 재수없는 성격의 소유자지만 ‘알고 보니 상처가 있더라’가 기본 컨셉이다. 상처의 내용은 한결같다. "엄마한테 버림받았어." "아빠 때문에 엄마가 떠났어." 그리고 상처가 발견되는 순간, 갑자기 그 캐릭터는 순수하고 멋진 인물로 거듭난다. 이쯤 되면 상처가 곧 정체성이자 스펙인 셈이다. 이것이 팔자의 시대적 좌표다. 일간이 뭐건 팔자의 오행이 어떻게 되었든 일단 자신의 삶을 상처라는 심리적 기제에서 시작한다는 것. 이 점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170 우리 연구실은 지식인 공동체다 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겉보기엔 다들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중상류층에 인텔리들이라 교양수준도 높다. 또 소위 ‘정상적인’ 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삶에 대한 엄청난 불만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상처받은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아주 오랫동안 약물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상처의 유래다. 정신분석이 그렇듯이 대개 그 시원은 유년기에 있다. 심지어 뱃속의 태아 때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용은 공통적으로 ‘애정결핍’이다. 어린 시절 사랑을 못 받아서 지금 이렇게 우울하고 무기력하다고? 이런 논리는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다. 왜냐하면 삶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오래도록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좋은 기억은 물론이고, 나쁜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만약 20년, 30년이 넘도록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이제 사건 자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내가 그 기억을 떠나 보내기를 거부하는 정신의 벡터가 작동한다는 뜻이다. 그 지점을 면밀히 통찰해야 한다. 즉, ‘나는 왜 이렇게 슬픈 유년기를 보내야 했을까?’가 아니라, ‘나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그 기억을 붙들고 있을까?’ 하는. 어떤 비극도 시간이 지나면 전후좌우 맥락이 파악되는 법이다. 그걸 깨달으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가 그 기억을 계속 동일한 방식으로 곱씹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이미 그 기억은 원래의 사 171 건과는 무관한 나만의 ‘자의식’이 되어 버린다. 자의식이 공고해질수록 외부와의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아주 역설적이게도 소위 상처받은 이들일수록 그걸 빌미로(!) 타인에게 마구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특히 그 대상은 자신을 지극히 아껴 주는 엄마거나 애인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모든 관계가 왜곡되어 버린다. 자, 그럼 여기서 ‘팔자’란 무엇일까?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그 단서라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엔? 그걸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훼손시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도 팔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결국 자기 팔자는 자기가 만든다는 말이 맞지 않는가?
이어지는 또 하나의 전도. 상처라는 담론 속에서 자신은 결코 주체가 아니다. 상처를 입힌 자들만 클로즈업된다. 나는 그저 ‘당했을’ 뿐이다. 얼떨결에, 난데없이! 그렇다면 이상하다. 왜 이 상처의 서사에선 내가 무엇을 했는지가 전혀 부각되지 않는 걸까? 무섭고 약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그런 자신의 모습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왜 그토록 어리석었을까? 혹은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일까? 요컨대 상처라는 담론 안에는 자신에 대한 관찰이 놀랄 만큼 빠져 있다. 그래서 그 과거는 여전히 현재에 개입하고 미래를 창조한다. 니체는 ‘양심의 가책’ 혹은 원한감정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오래도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바가 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행해진다. ㅡ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인간의 ‘내면화’라는 것이다. 이에 의해서 인간은 172 비로소 훨씬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해 냈다. 원래는 두 개의 얇은 피부막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빈약했던 저 전체 내면세계는, 인간본능의 밖으로의 발산이 저지됨에 따라 더욱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 낡은 자유의 본능에 대해서 정치조직(국가)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구축해 놓은 저 무서운 방벽ㅡ형벌도 이러한 방벽 중의 하나이지만ㅡ은 거칠고, 자유롭고, 방랑적인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이 인간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적의, 잔인, 박해, 공격, 변혁과 파괴의 쾌락ㅡ이 모든 것이 이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인 것이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없어지고, 관습의 억누르는 듯한 협소함과 꼼꼼한 형식 속에 처박혀진 인간은 참을 길이 없어 자기 자신을 찢고, 책망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길들이기’ 위한 우리의 창살에다 몸을 부딪혀 상처투성이가 된 이 동물, 황야에의 향수에 지쳐 스스로 모험, 고문대와, 불안하고 위험한 황야에 몸을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궁핍한 동물, 이 바보, 그리움에 지치고 절망해 버린 이 죄수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이와 아울러 인류가 오늘날에도 역시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저 가장 무겁고 위험한 병도 비롯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병이다. 이것이 인간이 그의 동물적인 과거로부터 억지로 떼어낸 결과, 말하자면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생존조건 속으로 뛰어든 결과이며, 이제까지 그의 힘과 173 기쁨과 공포의 근거였던 오랜 본능에 대한 선전포고의 결과였다.(니체, 『도덕의 계보』, 93쪽)

논리와 표현은 다르지만 의역학적 관점과 매우 흡사하다. 외부와 연결되었던 다양한 채널들이 막히면서 그 힘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타자와 세상을 향해 흘러가야 할 기운이 출구가 막히자 자신을 물어뜯고 괴롭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을 빌려 말하자면, 예전에는 노권상(勞倦傷)이 많았다. 먹고 살기 위해선 매일같이 상당한 양의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칭 골병이 많이 들었다. 날씨만 흐려도 뼈마디가 쑤시고 삭신이 오글거리는…… 우리 부모님들이 일상적으로 앓던 신경통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요즘은 몸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도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조선시대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들보다도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노권상은 해결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존재는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이 편하면, 몸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쓰지 않으면 그것이 정신이라는 무형의 창고에 쌓이게 된다. 유형이 무형으로 전변하는 것이다. 여기가 참 놀라운 지점이다. 몸이 편하면 자긍심이 높아질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사람은 활동이 줄어들면 자기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 대체 왜 그럴까? 원리는 간단하다. 생명은 언제나 활동을 원한다. 움직이고 접속하고 변형되고 다시 수렴되고 등등. 그 속에서만이 자신의 ‘우주적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활 174 동지수가 낮아지면 그만큼의 물리적 압력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쌓이는 게 당연하다. 그것은 결국 자기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금융자본의 증식, 디지털의 폭주 속에서 이 내면의 부동산 또한 무한증식된다. 불필요하게 비대해지면 거기서 자랄 수 있는 것은 종양뿐이다. 마음의 종양이 바로 무수한 정신병력, 분열증 혹은 강박증, 우울증…… 포괄적으로 말하면 화병이다. 수승화강이 안 되면 불은 위로, 물은 아래로 각기 따로 놀기 시작한다. 불이 위로 치성해서 제멋대로 요동치는 것이 바로 화병이다. 골병에서 화병으로! 종기에서 광기로! 이것이 우리 시대 문명생리학적 배치다. - P169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상처가 삶을 지배한다면 그건 그 사이에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는, 다시 말해 스스로 성숙을 거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통의 심리치료는 어린 시절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다시 확인하고 치유하며 통합하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경우 자신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확신을 얻게 되지만,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이나 고통을 유발한 책임을 부모나 주위 사람에게서 찾았기 때문에 자신은 희생자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다."(『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83쪽)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덫이다. 핏줄, 더 구체적으론 일촌 관계를 떠나지 못하게 꽁꽁 묶어 두는 심리적 기제. 이렇게 묶여 버리면 남는 건 자의식의 과잉뿐이다. 생명의 에너지가 좁은 삼각형 안에 갇힐 때, 다시 말해 순환이 불가능해질 때 그 힘은 파괴적으로 분출된다. 자신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타인을 파괴하거나. 묻지마 범죄ㅡ총기난사나 방화 등ㅡ의 원천은 바로 이 지점이다. - P178

명리의 이치를 알게 되면, 일단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보더라도 인연의 그물망 속에서 보게 된다. 인연의 그물망이란 아주 다양한 가치들의 범람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기존의 가치들이 무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족삼각형’의 정상성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자수성가한 자식의 경우, 우리는 보통 부모가 무능하거나 부모복이 없는 자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식으로 ‘성공의 서사’를 구성한다. 하지만 운명론의 차원 183 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그렇게 운이 센 자식이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가 파산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너무 기가 세고 강한 경우, 자식들이 제대로 자라기가 어렵다. 황제의 자식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크게 실연을 당했을 경우도, 그게 전적으로 상대방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보는 건 상대를 주체로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상대방도 ‘자기도 모르게’ 어떤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건은 주체나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인연조건’이 있을 뿐이다. 시절인연이 맞으면 공통의 리듬을 갖게 되지만 시절인연이 어긋나면 아무리 서로를 원한다 해도 리듬이 맞을 수가 없다. 그럴 때는 뜻밖의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게 된다. 느닷없이 감정이 솟구치기도 하고, 부질없는 갈등이 야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기 위한 관문일 뿐이다. 실제로 주변사람들의 인생을 잘 관찰해 보면 그 점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남편을 잃으면서 아주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든지, 파산을 해서 큰 괴로움을 겪었지만 그 덕분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든지 등등. 교통사고나 질병, 자살시도 등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도 아주 엉뚱한 인연을 만들어 내는 출구나 단서가 되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소위 ‘고난’이란 하나의 마디를 넘기 위해 내가 치러야 할 우주적 대가인 셈이다. 내 안의 자연, 내 안의 정기신을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씀으로써 인생 전체를 ‘리셋’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의 구도를 바꾸면 어떤 팔자든 흥미롭기 짝이 없다. 좋은 일이라 여긴 것이 나쁜 일의 단서가 되고, 억수로 재수가 없다고 여겼는데 184 그 덕분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도 하고, 머리와 재능을 타고나서 행운인 줄 알았더니 그로 인해 간난신고를 겪기도 하고 기타 등등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다채로운 천태만상에 위계나 서열을 부여할 초월적 가치 같은 건 없다. 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다채로운 역동성이 가족삼각형으로 환원되는 순간 모든 팔자는 다 한심해진다. 있으면 있어서 괴롭고, 없으면 없어서 괴롭고, 사랑이 넘쳐도 상처요, 모자라도 상처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또 상처투성이다. 여기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생역전은 불가능하다. 삼각형을 뛰어넘는 시야와 감각을 훈련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탓이다.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운명과 자의식, 그리고 트라우마가 하나로 중첩되어 버린다. 결국 남는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뿐!
주지하듯,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 아들. 오이디푸스는 이 운명을 타고났다. 그래서 이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하지만 기어코 그는 이 운명의 궤도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운명의 장난이었다고? 그렇다. 하지만 그때 운명의 소종래는 어디인가? 마치 저 먼 별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해야 맞다. 오이디푸스는 왜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는가? 신의 저주로? 악령에 의해? 오 노! 그 자신이 엄마를, 엄마에 대한 표상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 185 다. 자기 안의 에너지 장을 끝내 바꾸지 못했기에 그렇게 모질게 버림받고도 결국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는 모두 자신이 만들어 낸 것으로 전적으로, 말 그대로 100%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의 그릇된 언행이라고 나에게 인지된 것, 심지어는 잘못된 정치·경제·사회적 현상 등 눈앞에 있는 모든 문제는 자신의 안쪽에 있는 문제"(허훈, 『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90쪽)이다. 도둑의 눈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도둑으로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모든 운명의 키는 자신 안에 있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법 또한 자신에게 있다. 서양의 의성 슈바이처는 말한다. "환자는 자기 속에 자신의 의사를 모시고 있다. 환자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병원으로 치료받으러 온다. 그러므로 훌륭한 의사로서 우리가 할 일은 환자 속에 있는 의사가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21~22쪽) 병이 이럴진대 하물며 운명에 있어서랴.
엄마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근친상간’이다. 스무 살이 되어도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면 그건 유아기처럼 엄마와 신체가 연동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분명 죄다. 윤리와 도덕을 범한 죄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어긴, 삶의 차서를 어긴 죄. 따라서 그 무지와 집착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신탁이 예언한 바대로, 자신이 아비를 죽이고 엄마를 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먼 길을 떠난다. 눈을 찌른다는 건 186 더 이상 이전의 방식대로 세상을 보지 않겠다는 실존적 결단이다. 이제 엄마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세계는 붕괴되었다. 눈을 찌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세계를 떠나 보낼 수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것은 혹독한 고행이기도 하지만 새로 태어나기 위한 치열한 이니시에이션, 즉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그 고행의 절정에서 그는 마침내 빛을 찾았다. 그 빛은 자신을 구하고 세상을 구원했다. 이제 더 이상 오이디푸스는 없다. 오이디푸스로부터의 탈주ㅡ안티 오이디푸스가 탄생한 것이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오이디푸스 신화가 말해 주는 바는 인간이란 결국 출가(出家)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출가, 곧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부터 탈주할 때만이 운명의 지도를 바꾸는 길찾기가 가능하다는 것. 인류의 위대한 멘토인 부처와 공자, 예수가 다 출가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이들은 모두 국가와 계급,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더더욱 고착화되던 흐름에 맞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젖힌 멘토들이다. 그들이 걸어간 길은 다 달랐지만 공통의 지반은 하나였다. 집을 떠나라! 집을 나와 ‘길 위에’ 있을 때만이 진리와 자유를 얻을지니. 이것이 "축의 시대"(야스퍼스)를 움직인 대전제였다. 12세기 독일 출신의 신학자 휴그는 『공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①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187 자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 버린다.

② 완벽한 독서를 희망하는 자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국의 땅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노래한다. "나는 모른다. 도대체 어떤 감미로움이 사람을 고향으로 이끌어가는가? 그리고 고향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 현명한 사람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고향에 이별을 고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모든 존재는 원초적으로 출가자이자 이주민이다.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아주 우연히도 이 별에 도착했다. 부모의 몸을 잠시 빌린 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낯선 삶을 향하여,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하여. 그것만이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천지만물과 부모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다. 운명의 지도가 필요한 건 이 때문이다. 집에 머무르면서 길을 떠나지 않는 자에게 지도란 무의미하다. 길을 떠난다는 건 그 자체로 오이디푸스적 표상으로부터의 탈주에 다름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길을 떠났건만 정작 우리들은 오이디푸스에 머무르는, 아, 이 지독한 아이러니! 만약 오이디푸스가 다시 귀환한다면 그는 말하리라. 이제 그만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 탈주하라고. 거기에는 어떤 출구도, 구원도 없다고. 오직 상처뿐인 188 팔자의 굴레를 벗어나 우주적 생명력이 약동하는 길 위에 나서라고.
사주명리학의 이치 또한 마찬가지다. 육친법의 좁은 틀에 갇히지 않고 생극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별들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덫을 박차고 나오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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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친 혹은 십신

육친(六親)은 명리학에서 여섯(자신과 다섯의 오행)의 친족 또는 인맥관계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표현한 말이다. 그러니까 육친론을 통해 부모운, 배우자운, 자식운, 재물운, 학업운, 명예운 등을 살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운명론을 통해 알고 싶은 대부분의 것이 여기에 있다.
육친론에서는 일간을 중심으로 오행의 판이 짜인다. 거기서 일간과 어떤 상생·상극 관계를 맺느냐를 보고 운을 파악하는 것이다. 일단 용어부터 알아두자. 일간과 같은 오행의 육친을 비겁(比劫)이라 한다. 그리고 일간이 생하는 육친은 식상(食傷)이다. 일간이 극하는 육친은 재성(財星)이고, 일간을 극하는 육친은 관성(官星)이며, 마지막으로 일간을 생하는 육친을 인성(印星)이라 한다. 다음 페이지의 그림1처럼 육친의 자리는 항상 같은 곳이니 자리로 기억해 두기 바란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비겁은 자기 자신·형제·동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식상은 자식(여성에게만)·의식주·언어·시작 등을 뜻하며, 재성은 아내·재물·결과, 관성은 남편·조직·명예·시련, 인성은 공부·어머니·문서운 등과 관계가 있다. - P261

일간은 비겁, 식상, 재성, 관성, 인성과 별개로 구분하기 때문에 여섯 육친(六親)이 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일간은 비겁과 함께 취급하기 때문에 일간인 정화가 비겁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 P263

비겁의 기호

육친 관계
친구, 선후배, 동업자, 경쟁자, 형제·자매·남매, 부하 직원
나의 영역
우주와 연잎
자기애 : 영역 확대 욕망, 자기본위, 욕망의 발생, 변화에의 의지, 우물
자존감 : 자존심, 칭찬에 민감
고집 : 오만, 간섭과 규제에 저항
영역 내 대인 관계 : 사적 대인 관계, 이타심과 기대
미적 감각 : 호불호 명확
협력과 경쟁 관계
협력, 경쟁에 강함
재성을 극함
금전 사건 : 자금 운용의 단순화
사업 확장 : 군겁쟁재
배우자 갈등 : 허세 - P267

그러나 진정한 자기애란 자기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역의 경계를 넘는 것에서 시작된다. 멀리 달아났다고 생각하겠지만 270 결국 부처님 손바닥 위다. 여기서 부처님 손바닥이란 초월자의 아우라가 아니라 자기 한계를 말한다. 아무리 달아나도 자기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건 기존의 영역이 넓어진 것일 뿐이다. 우물을 벗어나야 하는데 우물의 사이즈를 넓히는 꼴이다. 그래서 비겁에서의 자기애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영역의 확대가 아니라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의기양양하며 더 멀리 더 넓게 확대하려는 빈곤한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P269

비겁이 순환하려면 식상과 재성, 관성, 인성이라는 타자를 만나야 한다. 타자들은 비겁을 순환 관계의 장 안으로 인도한다. 비겁이 자신의 영역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장과 만나고(식상), 마디를 넘어 결과를 맺으며(재성),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공동체적인 관계를 구성하고(관성), 배움과 수양을 통해 새로운 주체를 생성(인성)해 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 그것이 비겁이 타자를 통해 순환하는 방법이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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