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울 것이요,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울 것이다.

공구는 여기에서 두 가지 공부 방법, 즉 ‘배움’과 ‘생각함’(思)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일어나는 문제를 걱정하여 그 둘의 조화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 없이 선생이나 선 141 배들이 알려 주는 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스스로 그것을 검토하거나 반성해 보지 않는다면, 표면적인 사실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면의 원리는 알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기 멋대로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기만 하고 선생이나 선배들이 이미 이루어 놓은 성과들을 간과한다면, 완전히 독불장군이 되어서 자기만 옳다고 하는 옹고집 주관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배들의 성과를 ‘배우고’ 또 그것을 ‘검토하는’ 두 과정은 반드시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궁극적으로 그 둘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면, 역시 ‘배움’이 먼저이고 중요하다. 그래서 공구는 "내 일찍이 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밤새 잠도 자지 않고서 생각을 했었는데,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러니 역시 생각만 하느니 차라리 배우는 것이 낫다"고 말했던 것이다. 배우지 않는다면 무엇을 검토할 수 있겠는가? 계발은 자극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배움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 P140

옛날에는 어른을 찾아뵐 때 반드시 폐백을 드렸다. 그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폐백이 바로 ‘말린 육포 열 개를 바치는’ 것이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공구는 일단 학생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기만 하면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경제적인 문제나 형식적인 문제는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배움을 추구하는 열망이나 자세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공구가 학생에게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늘 목마른 듯 배움을 갈망하고, 배운 것을 익히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 스스로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야만 가르침을 주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도움을 주려고 해도 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선가에서 전해 오는 고사 ‘줄탁동시’가 바로 이런 의미이기도 하다. 병아리가 안에서 달걀을 부수고 나오려고 몸부림을 칠 때 어미 닭이 밖에서 한 번 쪼아 주면 달걀이 쫙 갈라지는 것처럼, 먼저 학생이 간절하게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애를 써야만 선생이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학생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선생은 단지 그를 계발시킬 뿐이다. - P158

선생과 학생이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중요 원칙은 ‘중용’과 ‘인재시교’이다. 먼저 중용이란 양 끝단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음을 뜻하며, 그래서 다른 말로 그 시기에 적절함을 뜻하는 ‘시중’이라고도 한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공구의 유명한 명제가 바로 이런 중용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다. 그리고 공구는 이런 중용의 원리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너무 진취적인 학생은 좀 자숙하도록 유도하고 너무 위축되는 학생은 좀 더 적극적일 수 있도록 지도했다. 그래서 "자로가 ‘들으면 곧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구는 ‘부형이 계신데 어떻게 들었다고 곧바로 그것을 실행하겠는가?’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염유가 ‘들으면 곧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구는 ‘들으면 곧바로 실행해야지’라고 대답했다. 공서화가 ‘…… 제가 의문이 생겨서 감히 묻습니다’라고 하자, 공구는 161 ‘염유는 물러나기에 나아가게 한 것이요, 자로는 다른 사람을 아우르기에 물러나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훌륭한 선생의 특징이자 참으로 어려운 교육방법이 바로 이런 ‘인재시교’가 아닐 수 없다. - P160

세 사람이 길을 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 선생이 있다. 그 훌륭한 점을 골라 따르고 좋지 못한 점은 가려내어 (그와 같은 나의) 잘못을 고친다.​ - P161

처음 이 책을 쓰기로 계획할 당시, 나는 이 작업이 끝난 후의 후련함을 기대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편집이 다 되어가는 이 순간에도 후련함은 거의 느끼지 못하겠고, 오히려 약간의 가슴 답답함을 느낀다. 왜일까?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나는 공자철학의 핵심에 대해 최선의 설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가슴의 답답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첫째, 내 스스로 고백했듯이 유학의 순진함 혹은 비애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내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연구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나뿐만이 아니라 현재까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그 해결책이 온전히 제시된 적이 없다. 정말 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둘째, 기실 이 225 런 유학 내부의 문제는 20세기에 대만과 홍콩에서 주로 활동하던 소위 ‘현대신유가’라는 중국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신외왕’으로 파악되고 그 해결이 모색되던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현대신유가’가 해결해야 했던 문제였고 또한 그들의 임무이기도 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그리고 우리 즉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심각하게 논의될 철학문제가 아니다. 철학이란 자신의 문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본적인 작업이지 않겠는가? 물론 위에서 말한 유학의 문제도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현대신유가’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같은 정도의 강도로 절박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말 그대로 유비쿼터스의 시대, 그리고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에 따라 이제 우리의 문제는 스피디한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정황들까지 온전히 파악하고 판단하며 평가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세기의 숙제도 아직 풀지 못했는데, 지금의 숙제는 더욱 무겁기만 하다.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답답하다고 느끼기 때문 226 에, 우리는 분명 그 답답함을 벗어나려 노력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는 도반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함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다음에 다시 독자들과 만나게 될 때에는 더 이상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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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 작은 일이라도, 자신을 칭찬하세요. 이럴 때 속으로 ‘이 정도가 뭐라고 칭찬을 하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걸 가지고‘라고 평가절하하는 말이 들려올 겁니다. 그렇더라도 ‘아니야! 작은 일도 인정받을 가치가 있어‘라고 강하게 자신에게 말해줘야 합니다.
신념은, 타인과 하는 대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변화한답니다. (...) ‘잘못했구나. 다음에 다르게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요. - P65

누구나 공동체에 처음 들어갈 때는 어색함과 불편함이 있지요. - P66

자신의 신념을 반드시 바꾸려고 하기보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가를 깊이 인식하고 그런 삶을 위해 작은 노력이라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 P67

혼자서 밥도 먹어보고, 혼자 영화도 보고, 혼자 산책도 하고, 혼자 작은 물건을 살지 말지 결정하는 연습을 통해 이 신념을 녹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 그리고 해낼 때마다 큰 소리로 말해봅니다. "재연아, 참 잘했어. 수고했어. 멋져"라고 말입니다. 대화의 힘은, 눈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할 때 더욱 커집니다. 거울을 보고 스스로 하나씩 할 때마다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해보세요. 자존감은 일상에서 성취하는 작은 것들의 누적을 통해 이루어짐을 꼭 기억하세요. 응원합니다. - P69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라 도전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패할 것 같은 신념은, 이 신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에서 그 회복이 시작됩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성공했거나 잘 마친 것들을 모두 써보는 것입니다.
(...) 30등이었다가 25등 하는 것도 성공입니다.
(...) 도전 앞에서 도망치려는 행동이 있었을 뿐, 그리고 과거의 그런 경험에서 학습한 수치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 P72

이유에 대한 설명을 변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들어보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도 스스로 용서해주는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먼저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해보세요. 책임을 지는 것과 처벌을 받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처벌보다 행동에 대한 건강한 책임을 지도록 방법을 함께 논의해보고 용서와 화해를 배워가 보세요. 이 부분은 앞으로 우리가 연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처벌의 신념은 너무 딱딱하고 메말라서 외롭습니다. - P84

대화 훈련을 통해 희망하는 것은 ‘자동적 생각 그만두기‘가 결코 아닙니다. ‘자동적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입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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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참고로,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는 인간이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못하고 탈선하게 만드는 교묘한 인지 전략을 8가지로 세세히 제시한다(Bandura. A., "Moral Disengagement in the Perpertration of Inhumanties",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Review, 3(3), 1999). 첫 번째, ‘도덕적 정당화‘란 악행을 선행으로 포장하는 전략이다. 실상 악행임에도 불구하고, 이 행동이 사회적 . 도덕적 .종교적 선에 이바지한다고 믿는다. 신을 위해 살육을 정당화하는 성전(聖戰)이 대표적 예이다. ‘생명이 위험한 사람을 돕는 것도 종교적 선행이지만, 나의 종교를 탄압하는 자들을 죽이는 것도 종교적 선행이다. 둘 다 신을 위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비슷한 선행이다‘와 같이 생각한다. 두 번째, ‘유리한 비교‘란 더 큰 악행과 비교하여 해당 악행의 부당성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동시에, 해당 악행을 했을 때의 이득이 그렇지 않을 때의 경우보다 클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악행의 장점은 크게 보고 단점은 작게 본다. 마스크를 버리는 일은 마스크를 홈치는 일보다는 별일 아니잖아. 그리고 마스크를 버리는 사람들이 많으면 미화원들의 일감도 넘쳐나니, 이게 일석이조 아닐까?‘와 같이 생각한다. 세 번째, ‘완곡한 표현‘은 그 악행이 갖는 폭력성이나 험오감을 감추어서, 심지어 그럴싸하고 아름답게 꾸며서 해당 악행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쟁을 ‘청소‘라고 하거나, 따돌림 가해자들이 따돌림을 ‘참교육‘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 예이다. 네 번째, ‘책임의 전가‘는 악행을 명령한 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위에서 시켰으니까‘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 ‘책임의 분산‘은 악행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책임을 분산시킴으로써 일개 개인인 자신의 책임을 축소하는 것이다. ‘마스크 버리는 게 나뿐인가? 지금 내 눈 앞에만 3개나 있는데?‘와 같이 생각한다. 여섯 번째, ‘결과에 대한 축소, 무시, 왜곡‘은 악행이 미치는 피해를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다. ‘따돌림을 당하면 우울증에 걸린다고 했지? 그런데 우울증은 감기라고도 하잖아. 감기 걸리는 게 별건가? 잘 이겨내면 되지.‘와 같이 생각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 ‘비인간화‘는 악행의 피해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음으로서, 마음 편하게 심지어 당당하게 피해자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유대인을 병원균으로 취급할 때, 가해자들은 ‘인간이 아닌 균에게‘ 가책 없이 악행을 저질렀다. 여덟 번째, ‘비난의 귀속‘은 악행의 이유를 상황이나 피해자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같이 따돌림을 하지 않으면, 내가 당할 수도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개는 찐따라서 따돌림을 당할 만해요. 원인은 걔라고요.‘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들을 미리 배운 후, 이러한 전략들에 근거한 마음의 왜곡을 알아채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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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유가 있으면 학문을 닦아라

배우는 과정에 있는 제자들은 집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오면 윗사람에게 공손해야 한다. 행동과 말이 조심스럽고 믿음이 있으며,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면서도 어진 사람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것들을 행하고도 여유가 있으면 학문을 닦아야 한다. - P36

7. 아홉 가지 생각

군자는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가 있다. 볼 때는 명확하게 보려고 생각하며, 들을 때는 또렷하게 들으려고 생각해야 한다. 따뜻한 얼굴빛을 마음에 두고 용모는 공손한 모습을 염두에 둔다. 말은 진실하기를 생각하며, 일은 경건하기를 생각하며, 의문에 대해서는 물을 것을 생각하며, 화가 날 때는 후환을 생각하며, 이익을 보면 이로운가를 생각한다. - P99

8. 군자에게 소중한 세 가지

군자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세 가지 도리가 있다. 몸을 움직일 때는 포악하거나 오만한 태도를 멀리하며, 얼굴빛을 바로잡을 때는 성실한 모습에 가깝게 하며, 말을 할 때는 비루하거나 도리에 어긋난 내용을 멀리하는 것이다. - P100

9. 몸을 수양하고 말을 실천하라

예는 절도를 뛰어넘지 않으며, 남을 공격하거나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허물없이 가까이 지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수양하고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하는 것을 ‘선한 행실‘이라고 한다. - P100

군자는 배부르게 먹으려고 하지 않으며, 편안하게 거처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일은 민첩하게, 말은 신중하게 하며 도를 체득한 사람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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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은 사람이 마음의 공허를 느낀다. 아파한다. 중심을 잡지 못한다. 세상이 마음을 안정되게 내버려두지도 않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도 어렵다. 단지 요즘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일용생활의 풍족함이 커졌음에도 왜 마음의 평안은 찾아오지 않는가? 마음은 내적인 안정과 외적인 정돈을 함께 요구하기 때문이다.
유교는 내성 외왕을 추구한다. 내적인 안정과 외적인 정돈을 함께 추구한다. 내적인 안정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외적인 요소도 정돈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외적인 정돈이 내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 둘은 함께 필요하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종교는 내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철학은 외적인 정돈을 요구한다. 이 책은 내적인 안정을 위한 유교의 방안을 소개한다. - P9

철학이 제시하는 외적 정돈의 방안은 시대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반면에, 종교가 제시하는 내적 안정의 방안은 시대가 변화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컨대 AD 4세기 이후 전개된 유식 불교에서는 마음의 4분설을 제시하여 수행의 지침을 제시했는데, 그 의의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대상도 마음이 지어낸 것으로 본다면, 마음은 대상과 주관(대상의식)으로 이분된다. 그런데 주관에는 반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반성을 위해서는 매번의 경험을 저장하여 반성될 수 있게 하는 의식도 있어야 할 것이다. 철학에서는 그것을 통각이라고도 하고 자기의식이라고도 한다. 이리 보면, 마음은 대상, 대상의식, 자기의식, 반성의식으로 나눠진다. 유식 불교가 말하는 4분된 마음, 곧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을 필자는 각기 대상, 대상의식, 자기의식, 반성의식으로 이해한다. 번뇌 10 망상은 기억이라는 반성의식에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반성의식을 어떻게 작동시키는가에 따라 번뇌 망상의 제거와 마음의 안정이 가능할 수 있다. 필자는 불교의 수행론이나 유교의 수양론이 마음의 안정을 위한 반성의식의 작동에 관한 논의로 본다.
현대의 명상가들은 마음을 4분화하지는 않지만 의식을 4단계로 구분하고는 있다. 예컨대 자기가 화를 내는 것을 모르고 화를 내는 단계, 자기가 화난 것을 알아차리면서도 화를 내는 단계, 자기가 화난 것을 알면서 화를 억제하는 단계, 화를 내지도 않지만 화를 내는지의 여부를 알아차리지도 않는 단계가 그것이다. 이 각각의 단계를 명상가들은 무의식적 무능, 의식적 무능, 의식적 유능, 무의식적 유능이라고 표현하는데, 필자는 그것들을 심4분을 염두에 두고 무반성적 무능, 반성적 무능, 반성적 유능, 무반성적 유능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반성적 무능이나 반성적 무능의 단계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명상을 한다는 것은 마음 안정의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고, 이것은 반성적 유능을 위한 훈련에 착수하는 것이다. 반성적 유능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무반성적 유능의 단계에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이유교의 용어로 성인(聖人)과 현자(賢者)이고, 의상 법사의 말로는 십불(十佛)이자 보현(普賢)이고 대인(大人)이다. - P9

1절 유교 수양론의 특성

유교의 수양론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 존심양성)는 말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선한 마음을 보존하여 선한 본성을 함양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선한 마음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수시로 반성하면서 선한 마음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마음의 내적 성찰(內省, 내성)이다. 자기 마음의 성찰을 통해 선한 마음을 보존하고 선한 본성을 함양한다는 것은 성현이 되는 길이 자기 자신에게 있고 자기 밖에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일의 잘잘못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않고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서 구한다‘(反求諸己, 반구제기)는 자세를 갖게 해준다.
유교에서 보는 이상적인 사람, 곧 안으로는 성인의 마음을 갖추고 있고,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보여주는 사람(內聖外王, 내성외왕)이 되기 위해서는 ‘내적 성찰‘과 ‘반구제기‘가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
『불교와 유학』의 저자인 라이용하이(賴永海)는 불교와의 비교 측면에서 ‘존심양성‘을 ‘수심양성‘(修心養性)이라고 표현하면서, 수심양성의 기본원칙이 ‘내성‘과 ‘반구제기‘라고 지적하고 있다.
19 "수심양성(修心養性)의 방법에 대하여 유가에서는 상당히 정비된 이론 체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이론 체계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특징은 바로 주관적인 내성(內省)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 점은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로부터 대단히 중시되었다. 공자는 단지 ‘안으로 살펴 꺼릴 것이 없는데, 무엇이 걱정이며 무엇이 두렵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자신에 대하여 그는 ‘나는 하루에 세 번 내 자신을 반성한다‘라고 하였다. 다른 측면으로 공자는 자주 제자들에게 ‘인을 행함에 자기로부터 말미암는다"라고 가르쳐,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유가의 수양이론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유가의 두 번째 성인인 맹자 및 수많은 유학자들은 모두 반구제기(反求諸己)를 대단히 중시하여 그를 수심양성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으로 삼는다. 따라서 유가의 수양이론 가운데 수많은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모두 이러한 기본원칙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의 마음을 성찰하거나 잘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구하는 일은 성실함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다. 성실함의 중요성은 맹자, 순자, 자사가 거듭하여 강조하였다. 관련 내용들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맹자: "그런 까닭에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함을 생각함(思誠)은 인간의 도이다. 지극히 성실하면서 감동시키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 20 고, 성실하지 않으면서 감동시킬 수는 없다."

순자: "군자가 마음을 기르는 것은 성실함(誠)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성실함에 이르게 되면 일이 없음이다. 오직 어짊(仁)을 지키며 오직 의로움(義)을 행한다."

자사: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하려는(誠之) 것은 인간의 도이다."

자사: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본성(性)이라 하고, [본성에]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지는 것을 교(敎)라 한다. 성실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실해진다."

내적 성찰과 반구제기를 통해 성실함에 이르는 것에 대해, 라이용하이는 그것이 천도에 도달하는 것이자 천인합일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誠)은 성인(聖人)의 본성의 근원적인 도덕규범으로 바로 ‘천도‘(天道)이다. 그리고 이른바 ‘사성‘(思誠, 성실을 생각함), ‘성지‘(誠之, 성실하려고 함), ‘명성‘(明誠,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짐)은 바로 내적인 성찰의 노 21 력이다. 유가에서는 이러한 주관적인 내성(內省)의 노력을 통하여 사람들이 ‘마음‘(心)과 ‘성‘(性)으로부터 천도에 도달하고, 그에 따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중용』(中庸)에서 ‘오직 천하에 성(誠)이 지극해야 능히 본성을 다한다. 능히 그 본성을 다하면 [...] 가히 천지의 화육을 도우며, 가히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함께 한다‘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이로부터 전통 유가의 수행방법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상노선 및 그 최고 경계는 바로 심성의 내적인 성찰을 통하여 천도‘에 도달하고, 나아가 ‘천인합일‘을 실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필자는 이 책에서 천인합일의 방법과 경지를 ‘명상‘과 ‘명상이 실현하는 마음의 경지‘라는 관점에서 해설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천인합일을 목표로 하는 유교 수양의 3영역은 대체로 미발 공부, 이발 공부, 격물치지이다. 이 세 영역은 불교의 수행 공부의 세 영역과 상통한다고 말해진다. 라이용하이는 이정(二程: 정명도와 정이천)의 공부의 3영역을 불교의 삼학에 비교하고 있다:

"후기 선종의 ‘공안‘(公案, 선문답), ‘기봉‘(機鋒, 언변의 날카로움) 등에 대하여 이정(二程)은 또한 자못 반감을 지녔는데, ‘비록 내심을 바로 함에 경건함이 있으나, 방외(方外, 외부를 바로 잡음)로써 의(義)가 없기 때문에 말라빠지거나 방자함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교의 수행법에 있어서 이정은 찬양하고 동의하였다. 그들의 치학(治學)과 수양의 세 가지, 즉 ‘정좌‘(靜坐), ‘용경‘(用敬), ‘치지‘(致知)는 어떤 의의 상에서 불교의 ‘계‘(戒), 22 ‘정‘(定), ‘혜‘(慧) 삼학(三學)에서 유도해낸 것이다."

여기서 라이용하이는 불교의 삼학을 이정의 공부영역에만 비교하고 있지만, 이정의 사상을 계승한 주자의 공부영역이나 육상산의 사상을 계승한 양명의 공부영역도 역시 불교의 삼학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수양론도 역시 불교 수행론의 영향 아래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주자와 양명에게 있어서 수양의 3영역이 명상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해설하게 될 것이다.
유교 수양론이 불교 수행론과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불교 수행론은 대체로 여래선, 조사선, 분등선(分燈禪)으로 분류된다. 통상적으로 여래선은 인도의 깨달음을 얻은 많은 각자(覺者)들의 선법(禪法)과 달마의 선법을 지칭하고, 조사선은 남종 6조 혜능의 선법을 지칭하고, 분등선은 혜능 이후 분화되어 전개된 선종의 5개 종파(五宗)의 선법을 총괄하는 말이다. 이런 3종의 선이 각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유교 수양론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3종선의 특색을 개괄하기 위해 먼저 중국 선종의 대표적인 선사들의 어록을 중심으로 중국 선불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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