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유혹이란, 본질을 말하자면 다정다감한 언행으로 상대방의 상상력을 자극해 내가 품은 호감(심리적 호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호감)을 그 사람이 확신하도록 촉진하는 행위다. 상대방을 조종해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유혹은 상대방에게서 매력을 발견하고 그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선물이다. 상대에게 기분 좋은 유혹을 하려면 분명히 모순되어 보이는 다음 세 가지를 차례차례 설득시켜야 한다. 당신과 섹스를 해보면 좋겠다. 당신과 섹스를 하지는 않겠다. 당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어서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분 좋은 유혹은 섹스가 함의하는 중요한 진실을 (불순한 의도 없이) 이용하는 행위다. 섹스에서 가장 즐거운 요소를 꼽으라고 하면, 몸을 섞는 행위 자체보다는 그 행위에 담긴 수용인 경우가 많다. 아무 꾸밈 없이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 나를 상대방이 있는 그대로 수용할 만큼 좋아한다는 확신이 생기면 기꺼이 자기를 내어놓고 일상의 품위를 벗어던지게 된다. 처음으로 상대방의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된다거나 몹시 무례하고 저속한 말을 해달라는 상대방의 요구에 응할 때 느끼는 쾌감은 대부분 상대를 능숙하게 애무하는 행위보다도 상대방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안도감에서 비롯한다. 착한 바람둥이는 이 수용의 개념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시간을 안겨주지 못할까봐 걱정할 일이 없다. 식사를 하는 중에도, 또 요리를 하는 주방에서도 그리 길지 않은 대화만으로도 우리가 섹스에서 느끼는 가슴 뭉클하고 황홀한 경험을 얼마든지 상대방에게 선사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P101
착한 바람둥이는 세상이 좀 더 성숙하게 움직일 때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그런 세상에서 어떤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 암시한다. 유혹은 실제 성관계의 서곡이라는, 융통성 없고 노골적인 공식에 매이지 않게 되면 유혹을 받은 사람도 이후 섹스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의 의도를 왜곡할 일이 없다. 그러면 자기혐오에 빠지는 일 없이 처음과 똑같이 품위를 지키며 상대가 제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자기 모습 중에서 어떤 점이 괜찮고 흥미로운지 상기시켜줄 사람이 필요하다. 유혹을 주고받는 시간은 서로의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이 실제 성관계로 이어져야만 정당하다고 고집한다면 다양한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차단하게 된다. 유혹을 올바로 이해할 때 이 시간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엄청난 장벽을 뛰어넘는 시간이 된다. 정치적 신념도,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지위도, 결혼 여부도, 성적 취향도, 나이(물론, 분명하게 알려야 되지만) 차이도 불문하고 서로에게 만족을 주는 시간이 될 수 있다. 26세의 기업 변호사와 52세의 구멍가게 주인도, 청소부와 최고경영자도 유혹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와는 매우 동떨어진 영역에 있는 타인을 상상하고 사유하며 서로의 매력을 발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면 그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가장 본질적이고 흥미로운 질문이자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이다. - P103
나에게 착한 거짓말을 한 사람의 상세한 변론을 듣고 있자면, 그 사람이 나를 아랫사람 다루듯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으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짓을 했든 상관없으니 상대방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감정이 진실을 소화하는 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따금 거짓을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에게 이따금 거짓을 말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을 말했다는 사실을 절대 알게 되지 않기를 조용히 소망하자. - P112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혼란스럽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명쾌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자신의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하고 싶은 상대방의 욕구를 대화 중에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경청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제를 분석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얼마나 신바람이 났는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기대에 부풀어 있는지 그저 표현을 달리하며 반복 진술할 뿐이다. 이때 맞은편에 앉아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상대방은 화자가 미처 보지 못한 문제의 본질을 발견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P115
잘 들어주는 사람은 대화 중에 상대방의 말이 모호해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상대를 책망하지도 보채지도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보편타당한 문제로 보기 때문에 진정한 친구라면 선명하게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는다. 자꾸 짜증이 치솟거나 혹은 가슴이 설렐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마음을 들여다보지만, 그저 언저리에 머물 뿐 그 핵심에 이르지 못하기 일쑤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이럴 때 문제를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더 깊이 문제를 들여다보라고 옆에서 격려하는 일이 얼마나 유익한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섣부르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사람보다는 그저 "더 얘기해줘"라는 마법 같은 한마디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 P116
잘 들어주는 사람은 훈계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아무리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도 여간해서는 깜짝 놀라거나 경악할 일이 없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우리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욕망을 말해도 이들은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없다. 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가 무시당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아무리 우울하고 괴로워도 남에게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이 낙오자나 변태 같은 기분이 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기 때문이다. - P119
잘 들어주는 사람은 나의 약한 모습을 보아도 이를 실패의 신호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들은 내가 위험하거나 연약한 면모를 드러내도 그 모습을 꺼리지 않고 따뜻하게 반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좌절한다. ‘나만큼 운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큼 이상한 사람이 있을까, 나만큼 능력 없는 사람은 없겠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경청하는 사람은 스스로 비정상이라고 고민하는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의 약한 모습을 고백함으로써 인간이란 본래 불완전하기 짝이 없고 알쏭달쏭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준다. - P120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책임감도 있고 논리적이며, 자기혐오나 강박증을 보이는 사람도 없고, 배우자와 자기 인생에 별 불만 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듯이 보인다.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인생이나 자아와 비교해보면 그들과 나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자아를 형성하고 나이를 먹게 되면 내 안에 심히 두렵고 참혹한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무질서하고 충동적이고 방탕한지, 얼마나 가식적이고 치사하고 불안정하고 유별난지 알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내면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 사이에 놓인 틈을 보게 되면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어째서 나는 저들과 달리 이토록 이상해졌는지, 내 삶은 어째서 이토록 힘든지, 내 성격은 왜 이토록 삐뚫어졌는지 고민에 싸인다. 다들 멀쩡한데 나만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고립감은 마음이 닫힌 사람을 만나게 되면 더욱 커진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사회 곳곳에서 만난다. 마음이 닫힌 사람이라도 처음에는 대체로 호의를 품고 사람을 대하지만, 줄곧 상대방을 예의주시하면서 혹시라도 이상한 구석이 감지되면 언제든 흠을 잡아 멀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반감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특히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면)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감추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로써 자신의 평판은 지키겠지만 마음속 깊은 데서 느끼는 고립감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무척 드물긴 해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대체로 상대방을 긍정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마음이 열린 사람‘으로 높이 평가한다. 인간이란 본래 부도덕하고 순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는 광기를 보이는 존재라고 전제하기에 이들은 누군가에게서 이상과 동떨어진 면모를 본다고 해도 깜짝 놀라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이들은 인류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든 당연히 야성적 충동에 이끌려 비도덕적인 행위도 저지르고 때로는 가슴 치고 후회할 일도 하며 살았으리라고 전제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해도 나에게 어떤 고민이 있을지 이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과 내밀한 모습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음을 이들은 순순히 인정한다. 이들이 보기에 정상적인 사람이 있다면 아직 자기가 잘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상대방이 마음에 무엇을 감추고 있을지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내면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사이에는 대부분 거대한 틈이 안전하게 놓여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대부분 현실에서는 실행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는 나 자신이나 사회 질서에도 별로 위협이 되지 않음을 이들은 잘 안다. 우리는 때로 경쟁자에게 어떻게 응수해야 속이 시원할지 궁리하고, 이것저것 다 버리고 세상과 어떻게 작별할지(그러면 세상이 이 사건을 얼마나 슬퍼할지) 계획을 세우며, 모든 문명사회의 규범을 거스르는 섬뜩한 성적 판타지를 그리며 즐겁게 지내곤 한다. 하지만 마음이 열린 사람은 이 모든 공상이 실제로 벌어질 일의 서곡이 아니라 그 대안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과는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생각들을 꺼내놓고 함께 살펴볼 수도 있고 함께 웃어넘길 수도 있다.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며 날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안전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생각이나 욕망을 누군가 앞에서 들춘다고 해서 그런 욕망이 더 나빠질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런 생각과 욕망을 잠재우고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킬 빌미가 내 안에 있다고 해서 선량함과 겸손, 자비심 같은 미덕이 동시에 공존할 가능성까지 배제하지 않는다. 이들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그랬듯이 ‘죄‘와 ‘죄인‘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들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려고 애쓴다. 우리 안에 감추어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회에서 도움을 받고, 관심을 받으며, 우정을 나눌 권리마저 영영 손실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들은 잘 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자신의 바람과는 별개로, 좋은 사람이라도 별로 착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도 자꾸 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고맙게도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누군가 저지른 악행을 접할 때도 그 사람을 혹독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이들이 관용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개선하는 방식을 놓고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냉혹한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용서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마음이 닫힌 사람도 인간의 행동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이들은 비난과 굴욕감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깨달을 때라야 비로소 변화의 길로 들어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기를 비하하는 이 감정이 매우 가혹할 수 있고, 자기 행동을 개선하는 효과도 미미하다는 데 있다. 자기를 비하하는 감정에 빠지게 되면 의지력이 심각하게 약해져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해져서 결국 영혼이 피폐해지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과 열등함에 혐오감이 생기면 사람들은 이 끔찍한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방종과 방탕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누군가의 어두운 그림자를 목격하고 나면 악감정을 드러내고 침묵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자기가 앞장서서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위로받거나 구원받을 길이 없는 세상을 구축하게 된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대다수 현대인이 이미 충분히 자기를 비판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더 격렬하고 혹독하게 그들을 정죄할 까닭이 없다. 내 안에 불순한 자아가 기거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에게 절실한 일은 용기를 가지도록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낯설고 거친 상대방 내면의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고 조언하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자기 안의 고결한 자아를 격려하고 나약한 자아를 극복하려면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이들은 모범 답안을 제시한다. 어째서 우리가 마음이 열린 사람을 친구로 두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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