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따뜻한 봄날, 6학년생 51명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5일 동안 자진해서 끔찍한 환경을 겪어 보기로 결정했다. 2012년에 아름다운 샌 버너디노산으로 캠핑을 가서 밤에는 산장에서 잠을 청하고, 낮에는 나침반과 지도를 이용해 등산을 하며 여러 새를 직접 관찰하고 활쏘기 연습을 하면서, 여행기간 내내 디지털 기기 없이 지내보기로 했다. 즉 휴대폰, 태블릿 피씨, 컴퓨터, 음악 재생기기, 게임기, 텔레비전이 없는 5일을 보냈던 것이다. 그 학생들은 방과 후에 날마다 평균 4.5시간씩 휴대폰 메시지를 보내고, 텔레비전을 보고, 비디오 게임을 즐기던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심리학자들은 영상 화면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5일을 보낸 경험이 학생들의 비언어적인 감정 신호를 인식하는 능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관찰했다. 앞서 1장에서 살펴본 대로 일부 얼굴 표정은 컴퓨터가 오히려 인간보다 더 잘 읽어낸다는 사실이 이미 확인되었는데, 왜 굳이 사람들이 감정을 얼마나 잘 알아차리느냐를 더 자세히 알아보려 했을까? 다름 아니라 표정이나 비언어적인 신호를 알아채는 능력은 인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비언어적 신호는 사실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우리는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 톤뿐 아니라 시선 교환,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자세, 거리 등을 즉각적으로 감지한다. 그러면 상대도 비슷한 반응으로 반응을 한다. 혹여 소매 업체에서 고객의 기분을 파악하려고 할 때 감정을 읽는 컴퓨터를 사용하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외 대부분의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컴퓨터가 파악한 상대방의 감정 분석 자료를 읽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반응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인간에게는 그런 신호를 자동적으로 그 즉시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서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곧바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런 능력이 발달하면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감정 신호를 능숙하게 파악하는 사람은 학교 성적이 더 좋고, 사회적인 상황에서 불안감을 덜 느끼며, 또래들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이 뭔가 의미 있는 현상을 찾아보던 참이었으므로, 디지털 기기 없는 5일이 학생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 사람은 보통 경험을 통해 비언어적 감정 신호를 읽는 방법을 배운다. 수십 년간의 연구들은 아이들이 부모, 형제, 또래와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그런 능력을 키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매일 평균 4.5시간씩 디지털 기기 화면을 들여다보느라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할 시간이 대폰 줄어들었다. 그런 시간 중에는 문자를 주고받는 등 상호작용에 할애되는 시간도 있지만, 그런 상호작용에는 얼굴 표정, 시선, 목소리 톤, 몸짓언어 등이 전혀 반영되지 않으므로 비언어적 감정 신호 습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심리학자들은 학생들이 캠프를 떠나기 전과 후에 기초적인 두 가지 테스트를 시작했다. 첫 번째로 사람들 얼굴이 찍힌 사진을 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유추하도록 했다. 두 번쨰로는 배우들이 여러 장면을 연기하는 비디오를 음소거 상태에서 보여주고 극중 인물의 감정 상태를 맞춰 보도록 했다. 검사 결과가 어땠을지는 쉽게 예측이 간다. 5일 동안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경험한 이후 학생들은 사람의 감정을 전보다 훨씬 잘 이해했다. 이 결과는 모든 통계적 유의도 검사 결과 적합성이 인정됐다. - P94

가치를 전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존중하라. ‘예‘, ‘아니요‘로 대답할 수 있는 의례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다. 환자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하라. 그리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보다는 말하고 싶은 것을 먼저 꺼내라. 환자들의 생각, 기대, 두려움이 무엇인지 물어라. 깊이 생각하며 듣고, 들은 내용을 토대로 반응하고, 실제적인 사실뿐 아니라 환자의 감정도 꼭 고려하라. 진단내용을 평범한 언어로 전달하고, 환자가 관심을 갖는 측면에서 설명하라. 그러고 나서 환자와 대화를 통해 어떤 수순을 밟을지를 결정하라. 부아시는 이렇게 말한다.
"의사들 대부분은 의례적인 달변을 늘어놓아요. 그런데 그런 습관은 버려야 합니다. 환자와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혼자 독백을 해서는 안 되지요." - P140

사람들이 긴밀하게 협력 작업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심지어 극도의 행복감까지 느껴진다는 증거는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단순한 활동만으로도 몸에서 오피오이드(아편 비슷한 작용을 하는 합성 진통, 마취제-옮긴이)가 분비된다. 가장 유능한 팀의 특성을 이해할 때 참고할 더 확실하고 중요한 사실로,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원들은 그런 활동이 팀의 성과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협조적인 자세와 관용, 그리고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타적으로 대하겠다는 더 큰 의지"같은 사회적인 성향을 촉진한다고 설명한다. 연구원들은 "그룹 활동에서 비롯된 엔돌핀은 그러므로…. 사회적인 집단을 결합시키는 데 일조한다"고 덧붙인다. - P213

컴퓨터가 쓴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평가할지 한번 상상해보라. 컴퓨터가 복잡한 데이터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내면 대단히 좋게 평가하고, 재미있는 글이라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이야기의 위력을 최대한 이용하려 든다면(사람들을 움직여 변화시키려 한다면) 글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 글의 진실성에 0점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 P231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답은 간단하다. 바로 옥시토신이다. 우리가 주효하다고 여기는 이야기들은 뇌의 다양한 영역에 강렬한 감정적 영향을 미치는 옥시토신이라는 화학물질을 분비시킨다. 이야기가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의 선구자인 클레어몬트 대학원 대학교의 폴 J. 자크는, "옥시토신은 사람들을 더 신뢰할 만하고, 관대하고, 너그럽고, 동정심 있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사랑과 성적인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옥시토신은 ‘사랑의 호르몬‘이나 ‘결속의 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다. 자크는 옥시토신이 주위의 사회적 신호에 더 민감해지도록 만들어서, 도움이 필요한 듯 보이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적인 분자‘라고 부른다. 자크는 "그러므로 옥시토신은 공감을 관장하는 신경화합물질"이라고 설명한다. 옥시토신은 좋은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뇌하수체가 자극되면서 분비되는 강력한 물질이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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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일을 절반 이상 하지 않으면, 아내가 한바탕 난리를 칩니다. 저는 아내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내 신경이 완전히 균형을 잃고 극도로 날카로워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어떻게든 내 몫의 집안일을 해내려고 합니다. 가끔 내가 혹사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최악의 상황일 때는 자극을 너무 많이 받아서 주변 세상과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져버린 기분이 듭니다. 그럴 때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영원히 휴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차라리 직장에서 혼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게 훨신 편한 것 같아요. 그러나 그건 아주 짧은 평안이죠. 아내는 내가 집에서 일을 하든지 아니면 직장으로 아이들을 데려가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 카스퍼, 35세 - P27

민감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세 번째 결혼에서 영혼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정말 지루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둘 다 운전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냅니다. 함께 있어도 대화를 별로 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래도 서로의 존재를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나 자신도 잘 몰랐던 나의 내면에 대해 아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 에곤, 62세 - P29

남들보다 민감한 당신은 불쾌한 소리나 모습, 냄새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걸러낼 수 없는 인풋 때문에 자주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스러워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남들은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소리가 당신에게는 신경 시스템의 균형을 깨뜨리는, 극도로 거슬리는 소음으로 감지될 것이다. - P33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 속에 갈등 요소가 있을 때 견디기 힘들어한다. 언쟁이 벌어지는 상황은 그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긴장감이 감도는 자리에 있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은 뛰어난 감정 이입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남을 돌보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 P36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민감한 사람들은 감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서 탈진하기 쉽다. 그런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가끔 내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은 성능이 뛰어난 안테나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명확하게 감지한다.
나도 가끔 신경 시스템 안으로 인풋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안테나를 묶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차라리 귀가 안 들리거나, 눈이 안 보이거나, 말을 할 수 없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은 단지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을 뿐이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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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라는 말이 일상에서 사용되면 항상 인간의 측면에서 소유의 대상이 되는 존재자와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시내에 송어가 있습니다‘라는 말은 송어의 단순한 ‘존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 강조에 앞서 그리고 그런 강조와 함께 시내의 특징이 말로 표현됩니다. 시내는 송어의 시내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시내는 낚시를 위한 특별한 시내가 됩니다. 그러니까 ‘있습니다‘를 직접적으로 사용할 때는 이미 인간과 맺는 관계가 고려됩니다. 이런 관계는 일반적으로 처분 가능한 것과의 관계이고, 인간의 측면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과의 관계입니다." - P108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는 정착한 사람을 위한 책으로, 즉 집의 관리와 유지에 관한 책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편은 경제[가계]적 실존을 묘사합니다. 거기서 플라톤이 시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동시에 방랑과 변신에 대한 비판입니다. "성스럽고" "우아하고" "친절한" 시인은 "지혜롭기 떄문에 자기를 다양한 형태로 보여줄 수 있고, 만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그런 시인이 국가로 들어오는 것을 막습니다. 플라톤은 시인이 국가 외부에서 방랑하게 합니다. 많은 선사의 커다란 웃음도 플라톤에게 몹시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시인이 웃음을 묘사하는 것을 급지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웃음은 "격렬한 변화"를 야기합니다. 그렇게 변화하면서 사람들은 자기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 P128

"큰 죽음"은 모르스 뮈싀카와 비슷한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습니다. 죽을 때 영혼의 "모든 욕구"가 사라진다고 에크하르트는 가르치긴 합니다. 그러나 더 높은 영역에서 영혼의 욕구는 반복됩니다. "신 안에서 죽는" 것은 무한에 대한 욕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신적인 죽음"을 맞는 영혼은 신과 완전히 결합합니다. 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죽지 않습니다." 고결한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 에크하르트가 드는 예는 존재의 특징인 욕망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애벌레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벽을 따라 기어오릅니다. 그렇게 고귀한 것이 존재입니다." 신 안에서 죽을 때는 아무것도 사라져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의 [교환]경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신 안에서 죽는 것과 함께 갑니다. "자연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 대가로) 더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 자연이 (이미) 이런 일을 행하면, 신은 더 많이 행합니다. 신은 결코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 대가로) 더 좋은 것을 줄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신이 우리를 [현재의] 삶보다 더 좋은 존재 속으로 옮기도록 신 안에서 죽는 것을 우리는 찬미합니다. [...]" 더 나아가 신 안에서 죽는 것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도취에 빠지게 합니다. 신비로운 죽음은 내면성 자체를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면성은 "신성"의 무한한 내면성 속으로 거두어지거나, 그 속에서 빛나게 됩니다. 신성은 "자기 자신 속에서 떠다니고", "자기 자신 말고는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살지 않습니다". - P152

도오와 점원[당나라 선승, 도오의 제자]은 위로의 말을 전하기 위해 집[상가]으로 갔습니다. 점원은 관을 두드리며 "그가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도오는 "나는 그가 살아 있다고도 말하지 않고, 그가 죽었다고도 말하지 않겠네"라고 답했습니다. 점원은 "왜 스승님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도오는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네"라고 답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기로 했고 절을 향한 길에 올랐습니다. 점원은 "존경하는 스승님, 그것을 저에게 빨리 말해주십시오! 스승님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저는 존경하는 스승님을 결국 때려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도오는 "때리고 싶으면 떄리게!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겠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점원은 도오를 한 대 때렸습니다. 그 뒤에 도오가 변신한 [*즉 죽은] 후에 점원은 석상[당나라 선승, 도오의 제자]에게 와서 지금 이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석상은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점원은 단번에 꺠달았습니다. - P154

태고의 친절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자기를 알리기 위한 교제용 친절과 다릅니다. 교제에서 ‘친절한‘ 말은 다른 사람이 방해받지 않은 채 자기를 비추는[조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말입니다. 교제용 친절의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태고의 친절은 자기가 없는 상태에 근거합니다. 태고의 친절은 사람들이 자기 내부를 지키거나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친절과도 다릅니다. 이런 보호용 친절과 정반대로 태고의 친절은 무한한 개방성으로부터 솟아납니다.
태고의 친절은 니체가 말하는 귀족적 친절과 전혀 다른 근원을 가집니다. 그의 책 『아침노을』에 들어 있는 다음과 같은 잠언은 생각해볼 만합니다. "다른 종류의 이웃 사랑, 흥분 잘하고, 시끄럽고,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사람은 큰 정열[을 가진 사람]과 반대됩니다. 큰 정열은 어두운 화염과 마찬가지로 내부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모든 뜨거운 열기를 모읍니다. 그런 정열을 가진 사람은 겉으로는 냉정하면서 무관심하게 보이고, 무감각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 사람은 때떄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이웃 사랑은 사교적이면서 아양을 떠는 사람의 이웃 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큰 정열을 가진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때의 친절은 온화하고, 관찰하고[사려 깊고], 태연합니다. 그 사람은 마치 자기 성의 창문으로부터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 성은 그의 요새이고, 바로 그 때문에 그의 감옥입니다. 낯설고 자유로운 것, 즉 다른 것을 바라볼 때 그는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이런 귀족적 친절을 위해서는 넘칠 듯 가득한 내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내부는 "요새"를 통해서 외부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귀족적 친절은 "창문"의 친절입니다. 창문 뒤에는 내면성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내면성은 창문이 달린 단자의 친절입니다. 이런 친절은 다른 곳에서 산책하는 온화한 관찰자의 시선의 고귀함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성" 혹은 "요새"에는 태고의 개방성이 없습니다. 성과 요새의 태연함은 자기만족과 같습니다. "통과 불가능성[무감각성]"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내부와 외부 간의 모든 차이가 제거된 태고의 친절입니다. 태고의 친절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창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집에도 성에도 거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면과 내부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떄떄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가길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바깥에 거주하거나 혹은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고의 친절은 충만한 내면성 혹은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비어 있음으로부터 솟아납니다. 그런 친절은 정처 없이 떠다니는 구름과 마찬가지로 정열을 가지지 않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친절에는 내부의 "화염[격정]"이 전혀 없습니다. 더 나아가 태고의 친절은 귀족적 ‘고귀함‘을 가리키는 장티예스[신사다운 친절]과도 다릅니다. 태고의 친절은 ‘귀족적‘이거나 ‘고귀하기‘보다는 오히려 평범합니다.
태고의 친절은 ‘선한[좋은]‘ 것보다 더 오래되었고, 모든 도덕법칙보다 더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친절은 근거[근본]가 되는 윤리적 힘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법과 규범을 넘어서 자유롭게 놀이를 하는 삶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놀이를 하는 삶으로부터 비로소 모든 도덕법칙과 모든 종교 규범이 솟아났을 것입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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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철은 선견지명에 빗대서 hindsight bias에 ‘후견지명 효과‘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쟁에서 적응을 잘하는 사람은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라는 결과가 있다고 하면 ‘당연하지! 교육을 많이 받으면 스트레스 해소 능력이 향상되고 상황 적응 능력도 높아지기 때문이지‘라고 말한다. 반대로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전쟁 적응 능력이 뛰어나다는 결과를 소개하면 ‘당연하지. 생각이 너무 많으면 힘들어. 단순한 게 최고야‘라고 말한다. 도대체 사후에는 설명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 - P46

일본의 심리학자인 고자카이 도시아키는 근대의 이상적인 자아상은 타인의 의견에 휩쓸리지 않고 자율적으로 생각해서 판단 · 행동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지만, 그런 인간은 실제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을 외부 정보에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무지한 경향이 강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어떤 행동을 한 후에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라고 자문했을 때, 개인주의적인 사람일수록 자신의 내부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 반성하고 자신의 행동에 더 강한 책임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적인 사람일수록 행동과 의식 사이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변경하기 쉽다고 한다.
그 반대도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강한 신념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일을 추진하는 데 당위 이외의 다른 변수들을 과소평가할 가능성이 높다. 행운에 의한 성공마저도 자기 자신의 신념과 열정과 결단이 옳았던 탓으로 돌리는 등 이들은 환경에 대한 통제력 착각을 더 쉽게 일으킬 수 있다. - P48

귀인 이론attribution theory을 체계화한 버나드 와이너에 따르면 귀인에는 상황적 귀인situational attribution과 기질때문귀인dispositional attribution이 있다. 어떤 사람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가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상황적 귀인, 성격 자체가 흉악하다든가 하는 기질 탓으로 돌리는 건 기질적 귀인이다(상황적 귀인은 ‘상황 귀인‘, 기질적 귀인은 ‘성향 귀인‘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선 상황적 귀인을 하는 반면, 타인에 대해선 기질적 귀인을 하는 경향이 있다. 즉, 내 문제는 ‘세상 탓‘이지만 남의 문제는 ‘사람 탓‘이라는 논리다.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 등은 197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런 성향을 ‘행위자-관찰자 편향‘으로 설명했다. ‘행위자-관찰자 비대칭‘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하자면, 내 문제는 내가 행위자이므로 내 행위에 가해진 상황적 제약에 대해 잘 아는 반면, 다른 사람의 문제는 내가 관찰자에 불과하므로 상황적 제약에 대해 알기 어려워 사람 탓을 한다는 것이다.
운전할 때는 차로의 빨간불이 길게 느껴지는 반면, 길을 걸을 때는 횡단보도의 빨간불이 길게 느껴진다거나, 다른 사람이 음악을 듣고 있는 소리는 시끄럽게 느껴지고 짜증이 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땐 그것이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다른 사람이 욕을 하는 것을 들으면 "무슨 저런 무식한 사람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내가 기분 나쁘고 화나는 일이 생길 때 욕을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 모두 내가 행위자냐 관찰자냐 하는 처지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지각을 하면 "길이 막혀서 늦었어"라고 하며 지각의 원인을 외부 세상으로 돌리지만, 타인이 지각을 하면 "분명히 늦장을 부리다가 늦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지각의 원인을 당사자 내부 문제로 돌린다. 이런 오류가 발전해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스캔들"인 이중 기준이 만들어지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승격되는 것이다. - P52

기본적 귀인 오류는 우리 삶의 기본일 정도로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롤프 도벨리는 우리 인간이 석기 시대부터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여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 귀인 오류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를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조상은 생존을 위해 집단에 속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의견을 조율하고 마음을 맞춰야 했다. 독자적인 길을 가는 사람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들이 살아남는 확률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머물며 살아남는 확률보다 적기 때문에 유전자풀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90퍼센트의 시간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데 쏟아붓고, 단 10퍼센트만 외부 상황의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 P54

우리는 자신의 부정적인 행동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상황적 · 환경적 요인으로 돌리는 반면, 자신의 긍정적인 행동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의 내부적 요인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취업에 성공하면 ‘내 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실패하면 ‘세상이 공정치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가리켜 ‘이기적 편향‘ 또는 ‘자기본위적 편향‘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고하는 방식"인데, 이는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거나 방어하려는 욕구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기본적 귀인 오류‘와 ‘행위자-관찰자 편향‘은 긍정성-부정성에 관계없이 모든 행동이나 사건에 적용되며 단지 행위자냐 관찰자냐 하는 차이에서 편향이 생겨나는 것인 반면, ‘이기적 편향‘은 행동이나 사건의 긍정성-부정성 여부에 따라 각기 다른 설명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말에 좋은 건 자기 잘난 탓으로 돌리고 나쁜 건 부모 탓 또는 세상 탓으로 돌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 또한 이기적 편향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면서 자녀의 성공을 자신이 잘 키운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이기적 편향이다. 투자자들은 이익이 나면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손실이 나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이기적 편향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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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유혹이란, 본질을 말하자면 다정다감한 언행으로 상대방의 상상력을 자극해 내가 품은 호감(심리적 호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호감)을 그 사람이 확신하도록 촉진하는 행위다. 상대방을 조종해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유혹은 상대방에게서 매력을 발견하고 그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선물이다. 상대에게 기분 좋은 유혹을 하려면 분명히 모순되어 보이는 다음 세 가지를 차례차례 설득시켜야 한다.
당신과 섹스를 해보면 좋겠다. 당신과 섹스를 하지는 않겠다. 당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어서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분 좋은 유혹은 섹스가 함의하는 중요한 진실을 (불순한 의도 없이) 이용하는 행위다. 섹스에서 가장 즐거운 요소를 꼽으라고 하면, 몸을 섞는 행위 자체보다는 그 행위에 담긴 수용인 경우가 많다. 아무 꾸밈 없이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 나를 상대방이 있는 그대로 수용할 만큼 좋아한다는 확신이 생기면 기꺼이 자기를 내어놓고 일상의 품위를 벗어던지게 된다. 처음으로 상대방의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된다거나 몹시 무례하고 저속한 말을 해달라는 상대방의 요구에 응할 때 느끼는 쾌감은 대부분 상대를 능숙하게 애무하는 행위보다도 상대방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안도감에서 비롯한다.
착한 바람둥이는 이 수용의 개념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시간을 안겨주지 못할까봐 걱정할 일이 없다. 식사를 하는 중에도, 또 요리를 하는 주방에서도 그리 길지 않은 대화만으로도 우리가 섹스에서 느끼는 가슴 뭉클하고 황홀한 경험을 얼마든지 상대방에게 선사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P101

착한 바람둥이는 세상이 좀 더 성숙하게 움직일 때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그런 세상에서 어떤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 암시한다. 유혹은 실제 성관계의 서곡이라는, 융통성 없고 노골적인 공식에 매이지 않게 되면 유혹을 받은 사람도 이후 섹스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의 의도를 왜곡할 일이 없다. 그러면 자기혐오에 빠지는 일 없이 처음과 똑같이 품위를 지키며 상대가 제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자기 모습 중에서 어떤 점이 괜찮고 흥미로운지 상기시켜줄 사람이 필요하다. 유혹을 주고받는 시간은 서로의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이 실제 성관계로 이어져야만 정당하다고 고집한다면 다양한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차단하게 된다. 유혹을 올바로 이해할 때 이 시간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엄청난 장벽을 뛰어넘는 시간이 된다. 정치적 신념도,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지위도, 결혼 여부도, 성적 취향도, 나이(물론, 분명하게 알려야 되지만) 차이도 불문하고 서로에게 만족을 주는 시간이 될 수 있다. 26세의 기업 변호사와 52세의 구멍가게 주인도, 청소부와 최고경영자도 유혹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와는 매우 동떨어진 영역에 있는 타인을 상상하고 사유하며 서로의 매력을 발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면 그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가장 본질적이고 흥미로운 질문이자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이다. - P103

나에게 착한 거짓말을 한 사람의 상세한 변론을 듣고 있자면, 그 사람이 나를 아랫사람 다루듯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으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짓을 했든 상관없으니 상대방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감정이 진실을 소화하는 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따금 거짓을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에게 이따금 거짓을 말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을 말했다는 사실을 절대 알게 되지 않기를 조용히 소망하자. - P112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혼란스럽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명쾌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자신의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하고 싶은 상대방의 욕구를 대화 중에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경청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제를 분석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얼마나 신바람이 났는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기대에 부풀어 있는지 그저 표현을 달리하며 반복 진술할 뿐이다. 이때 맞은편에 앉아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상대방은 화자가 미처 보지 못한 문제의 본질을 발견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P115

잘 들어주는 사람은 대화 중에 상대방의 말이 모호해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상대를 책망하지도 보채지도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보편타당한 문제로 보기 때문에 진정한 친구라면 선명하게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는다. 자꾸 짜증이 치솟거나 혹은 가슴이 설렐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마음을 들여다보지만, 그저 언저리에 머물 뿐 그 핵심에 이르지 못하기 일쑤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이럴 때 문제를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더 깊이 문제를 들여다보라고 옆에서 격려하는 일이 얼마나 유익한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섣부르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사람보다는 그저 "더 얘기해줘"라는 마법 같은 한마디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 P116

잘 들어주는 사람은 훈계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아무리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도 여간해서는 깜짝 놀라거나 경악할 일이 없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우리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욕망을 말해도 이들은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없다. 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가 무시당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아무리 우울하고 괴로워도 남에게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이 낙오자나 변태 같은 기분이 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기 때문이다. - P119

잘 들어주는 사람은 나의 약한 모습을 보아도 이를 실패의 신호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들은 내가 위험하거나 연약한 면모를 드러내도 그 모습을 꺼리지 않고 따뜻하게 반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좌절한다. ‘나만큼 운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큼 이상한 사람이 있을까, 나만큼 능력 없는 사람은 없겠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경청하는 사람은 스스로 비정상이라고 고민하는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의 약한 모습을 고백함으로써 인간이란 본래 불완전하기 짝이 없고 알쏭달쏭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준다. - P120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책임감도 있고 논리적이며, 자기혐오나 강박증을 보이는 사람도 없고, 배우자와 자기 인생에 별 불만 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듯이 보인다.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인생이나 자아와 비교해보면 그들과 나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자아를 형성하고 나이를 먹게 되면 내 안에 심히 두렵고 참혹한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무질서하고 충동적이고 방탕한지, 얼마나 가식적이고 치사하고 불안정하고 유별난지 알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내면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 사이에 놓인 틈을 보게 되면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어째서 나는 저들과 달리 이토록 이상해졌는지, 내 삶은 어째서 이토록 힘든지, 내 성격은 왜 이토록 삐뚫어졌는지 고민에 싸인다.
다들 멀쩡한데 나만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고립감은 마음이 닫힌 사람을 만나게 되면 더욱 커진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사회 곳곳에서 만난다. 마음이 닫힌 사람이라도 처음에는 대체로 호의를 품고 사람을 대하지만, 줄곧 상대방을 예의주시하면서 혹시라도 이상한 구석이 감지되면 언제든 흠을 잡아 멀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반감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특히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면)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감추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로써 자신의 평판은 지키겠지만 마음속 깊은 데서 느끼는 고립감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무척 드물긴 해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대체로 상대방을 긍정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마음이 열린 사람‘으로 높이 평가한다. 인간이란 본래 부도덕하고 순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는 광기를 보이는 존재라고 전제하기에 이들은 누군가에게서 이상과 동떨어진 면모를 본다고 해도 깜짝 놀라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이들은 인류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든 당연히 야성적 충동에 이끌려 비도덕적인 행위도 저지르고 때로는 가슴 치고 후회할 일도 하며 살았으리라고 전제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해도 나에게 어떤 고민이 있을지 이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과 내밀한 모습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음을 이들은 순순히 인정한다. 이들이 보기에 정상적인 사람이 있다면 아직 자기가 잘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상대방이 마음에 무엇을 감추고 있을지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내면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사이에는 대부분 거대한 틈이 안전하게 놓여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대부분 현실에서는 실행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는 나 자신이나 사회 질서에도 별로 위협이 되지 않음을 이들은 잘 안다. 우리는 때로 경쟁자에게 어떻게 응수해야 속이 시원할지 궁리하고, 이것저것 다 버리고 세상과 어떻게 작별할지(그러면 세상이 이 사건을 얼마나 슬퍼할지) 계획을 세우며, 모든 문명사회의 규범을 거스르는 섬뜩한 성적 판타지를 그리며 즐겁게 지내곤 한다. 하지만 마음이 열린 사람은 이 모든 공상이 실제로 벌어질 일의 서곡이 아니라 그 대안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과는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생각들을 꺼내놓고 함께 살펴볼 수도 있고 함께 웃어넘길 수도 있다.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며 날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안전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생각이나 욕망을 누군가 앞에서 들춘다고 해서 그런 욕망이 더 나빠질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런 생각과 욕망을 잠재우고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킬 빌미가 내 안에 있다고 해서 선량함과 겸손, 자비심 같은 미덕이 동시에 공존할 가능성까지 배제하지 않는다. 이들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그랬듯이 ‘죄‘와 ‘죄인‘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들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려고 애쓴다. 우리 안에 감추어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회에서 도움을 받고, 관심을 받으며, 우정을 나눌 권리마저 영영 손실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들은 잘 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자신의 바람과는 별개로, 좋은 사람이라도 별로 착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도 자꾸 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고맙게도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누군가 저지른 악행을 접할 때도 그 사람을 혹독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이들이 관용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개선하는 방식을 놓고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냉혹한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용서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마음이 닫힌 사람도 인간의 행동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이들은 비난과 굴욕감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깨달을 때라야 비로소 변화의 길로 들어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기를 비하하는 이 감정이 매우 가혹할 수 있고, 자기 행동을 개선하는 효과도 미미하다는 데 있다. 자기를 비하하는 감정에 빠지게 되면 의지력이 심각하게 약해져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해져서 결국 영혼이 피폐해지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과 열등함에 혐오감이 생기면 사람들은 이 끔찍한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방종과 방탕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누군가의 어두운 그림자를 목격하고 나면 악감정을 드러내고 침묵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자기가 앞장서서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위로받거나 구원받을 길이 없는 세상을 구축하게 된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대다수 현대인이 이미 충분히 자기를 비판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더 격렬하고 혹독하게 그들을 정죄할 까닭이 없다. 내 안에 불순한 자아가 기거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에게 절실한 일은 용기를 가지도록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낯설고 거친 상대방 내면의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고 조언하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자기 안의 고결한 자아를 격려하고 나약한 자아를 극복하려면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이들은 모범 답안을 제시한다. 어째서 우리가 마음이 열린 사람을 친구로 두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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