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어둠은 드물지 않게 매혹을 발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은 더 많은 기쁨을 생산하기 위해 은유를 동원하여 성서를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들은 비유의 외투로 덮인다. 경건한 신념으로 탐구하는 인간의 이성이 계속 훈련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들이 벗겨져 공개적으로 제시될 때 무가치하게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다른 곳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드러내놓고 명백하게 말해진 것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워진다. 너무나 새로워져서, 그것을 숨겨진 상태에서 밖으로 끄집어낼 때 달콤한 맛이 날 정도다.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숨겨두는 것은 배움의 열의를 가진 사람들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것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이를테면 자기한테 감추어져 있는 것을 더 뜨겁게 동경하며, 그렇게 동경하던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만큼 더 큰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비유의 외투는 말을 에로틱하게 만든다. 비유의 외투는 말을 갈망의 대상으로 고양시킨다. 말은 비유의 옷을 입었을 떄 더욱 유혹적이 된다. 감추어져 있다는 부정적 특성은 해석학을 에로티즘으로 만든다. 발견과 해독은 벗기는 쾌감을 일으킨다. 반면 정보는 적나라하다. 벌거벗은 말은 매력을 상실하고 평범해진다. 비밀의 해석학은 투명성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폐기해야만 하는 악마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술, 다시 말해 설사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뭔가 깊이를 창출하는 문화적 기술이다. - P46

투명성은 아름다움의 매체가 아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미는 가리는 것과 가려지는 것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은 베일도 아니고, 가려진 대상 자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베일 속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 대상은 베일이 걷히고 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궁극적으로 베일을 본질로 하는 저 대상을 다르게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즉 비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ㅡ옮긴이). 오직 아름다움만이 가림과 가려짐 속에서 본질적이고, 아름다움 외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의 신적인 존재 근거는 비밀에 있다. 미는 필연적으로 베일과 가림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노출시킬 수 없는 것이다. 가려진 것은 오직 가려져 있을 때만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다. 폭로는 가려진 것을 없애버린다. 따라서 벌거벗은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으로도 가리지 않은 채 벌거벗은 상태에서 본질적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인간의 벗은 몸 속에서 모든 미를 뛰어넘은 어떤 존재, 즉 숭고한 것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모든 형상을 뛰어넘는 어떤 작품, 즉 창조주의 작품이다." 오직 어떤 형식이나 형상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 반면 숭고한 것은 형식이나 형상이 없는 벌거벗음이며, 여기에는 미를 구성하는 비밀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숭고함은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하지만 피조물로서의 벌거벗음은 전혀 포르노적이지 않다. 그것은 참으로 숭고하며 창조주의 업적을 환기한다. 칸트 역시 모든 재현,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대상에 대해 숭고하다고 말한다. 숭고함은 상상력을 초월한다. - P48

포르노적으로 자기를 전시하며 맞은편 상대를 향해 "교태를 부리는" 얼굴만큼 숭고함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 - P51

에로틱한 암시는 지시적이지 않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에로틱한 유혹의 힘은 "타자 자신에게조차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게 될 어떤 것에 관한 예감, 내가 결코 알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의 봉인 속에서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타자의 어떤 부분"과의 유희 속에서 발휘된다. 포르노적인 것은 매력적이지도 않고 암시적이지도 않다. 포르노적인 것은 전염시키고 자극할 뿐이다. 여기에는 유혹을 위해 필요한 거리가 없는 것이다. 에로틱한 매력에는 박탈의 부정성이 필수적이다. - P56

바르트는 사진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한다. 첫번째 요소를 그는 "스투디움 studium"이라고 부른다. 탐구해야 할 광대한 정보들의 영역과 "시름없는 소망, 방향 없는 관심, 일관성 없는 기호ㅡ좋다/싫다ㅡ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스투디움은 ‘사랑하다‘가 아니라 ‘좋아하다‘의 범주에 들어간다. ‘좋아요/싫어요‘가 스투디움의 판단 형식이다. 스투디움에서 격렬함이나 열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두번째 요소인 "푼크툼 punctum"은 "스투디움"을 깨뜨린다. 그것은 호감이 아니라 어떤 상처, 격한 감동, 당혹감을 낳는다. 단조로운 사진은 푼크툼이 없는 사진이다. 그것은 스투디움의 대상일 뿐이다. "보도 사진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사진에 속한다(단조로운 사진이 반드시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미지들 중에는 푼크툼이 없다. 충격은 있을지언정ㅡ평범한 것도 충격을 일으킬 수 있다ㅡ당혹감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울부짖는‘ 사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진도 상처를 입히지는 못한다. 이와 같은 보도 사진들은 (한눈에) 분류되고 정리된다. 그 이상은 아니다." 푼크툼은 연속적인 정보들의 행렬을 단시킨다. 그것은 균열, 단층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푼크툼은 극도의 강렬함과 응축의 장소이며, 그 속에는 뭔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내재한다. 푼크툼에는 스투디움에 특징적인 투명성과 명백성이 전혀 없다. "무엇인지 이름을 대지 못하는 무능함은 내적인 불안의 확실한 징표다. [......] 작용은 느껴지지만 작용이 나타나는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것에는 기호도 이름도 없다. 그것은 꿰뚫고 들어오지만 나의 내면 어딘가 불특정한 지대에 내려앉는다. [......]"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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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과잉소통은 침묵과 고동의 자유 공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이 자유 공간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실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있다. 과잉소통은 자신 안에 침묵을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는 언어를 억압한다. 언어는 정적으로부터 생겨난다. 정적이 없으면 언어는 이미 소음이다. 첼란에 따르면 문학에는 "침묵을 향한 강한 성향"이 내재한다. 소통의 소음은 경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적 원리로서의 자연은 경청의 근본적인 수동성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 앞에서 히페리온은 거듭 말한다. ‘내 모든 존재가 침묵하고 경청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침묵하는 존재는 실제로 ‘응시‘가 아니라 ‘경청‘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이다." - P97

문학과 예술은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은 문학과 예술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첼란은 「자오선」연설에서 문학을 분명하게 타자와 연결시킨다. "[……] 어떤 타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더 나아가 아마도 전적인 타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 예로부터 시의 희망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어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그 만남의 비밀 속에서, 상대를 앞에 두고서 비로소 생겨난다. "시는 하나의 타자에게 가고자 하고, 이 타자를 필요로 하며, 상대를 필요로 한다. 시는 타자를 찾아가고, 타자에게 말을 건다.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에게는 모든 사물, 모든 인간이 타자의 형상이다."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도 상대다. 시는 어떤 사물을 호출하고, 이 사물을 그 다름 속에서 만나며, 사물과 대화하는 관계를 맺는다. 시에게는 모든 것들이 너로 나타난다. - P98

오늘날의 지각과 소통에서는 타자의 현존으로서의 상대가 점점 더 사라진다. 갈수록 상대는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전락한다. 모든 관심이 에고에 집중된다. 지각을 탈거울화시키는 것, 상대와 타인과 타자를 향해 지각을 여는 것은 분명 예술과 문학의 과제다. 현재 정치와 경제는 관심을 에고로 이끈다. 이런 관심은 자기생산에 기여한다. 그것은 점점 더 타자로부터 유리되어 에고로 흘러간다. 오늘날 우리는 관심을 둘러싸고 가차 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서로에게 우리는 관심을 얻으려고 싸우는 쇼윈도들이다. - P99

첼란의 관심 시학은 오늘날의 관심 경제와 대립한다. 그의 관심 시학은 오로지 타자에만 집중한다. "여기서 카프카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말브랑슈의 말을 재인용하겠습니다. ‘관심은 영혼의 자연적인 기도다.‘" 영혼은 언제나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영혼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 영혼은 타자, 전적인 타자를 향해 기도하는 호출이다. 레비나스도 관심을 타자의 호출을 전제로 하는 "더 많은 의식"이라고 보았다.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타자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관심의 경제가 관심의 시학과 관심의 윤리학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관심의 경제는 타자에 대한 배반을 추동시키고, 자아의 시간을 전면화한다. 이에 반해 관심의 시학은 타자에 고유한, 가장 고유한 시간을, 타자의 시간을 발견한다. 관심의 시학은 "그것, 즉 타자에 가장 고유한 것이 함께 말하게 한다. 타자의 시간 말이다." - P99

타자를 너로서 호출하는 것에는 위험이 없지 않다. 우리는 타자의 다름과 낯섦에 자신을 내맡길 각오를 해야 한다. 타자의 "너-계기"에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다. 그것은 "우리를 잡아채 위험한 극단으로 몰아가고, 검증된 연관을 느슨하게 풀고, 만족보다는 의문을 더 많이 남겨놓으며, 안전을 뒤흔들고, 그래서 섬뜩하고, 그래서 불가결하다." 오늘날의 소통은 타자로부터 너-계기를 제거하고, 타자를 "그것Es"으로, 즉 같은 것으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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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변화가 풍부해야 충만한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충만도 굳건한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충만한 시간이란 곧 지속의 시간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는 반복도 굳이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속성이 붕괴된 후에야 반복은 반복으로서 의식되고 문젯거리로 떠오른다. 그리하여 모든 일상적 반복의 형식이 혁명가 당통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되는 것이다. - P129

시간은 지속성을, 장구함을, 느림을 잃어버린다. 시간이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것, 자극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텅 빈 간격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권태는 필연적으로 "놀라운 것, 거듭하여 갑자기 새롭게 휘몰아치는 것, ‘충격적인 것‘ 을 향한 중독"을 수반한다. 충만한 지속성은 "한시도 쉴 줄 모르고 계속되는 기발한 활동"에 밀려난다. 하이데거는 더 이상 행동을 향한 결단을 깊은 권태의 대척점에 두지 않는다. 그는 이제 "결연한 시선"이 긴 것, 느린 것을 보기에는 너무 근시여서 긴 시간의 향기를 느낄 줄 모른다는 것,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나게 한 주된 원인이라는 것,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는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는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P134

후기의 하이데거는 행위의 강조를 철회하고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옹호한다. 그것의 이름은 "느긋함"이다. 느긋함은 결연한 행동에 맞서는 "맞쉼"으로서,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 속에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머뭇거림" "수줍음" "자제" 등도 행위의 완전히 장악당한 삶에 있다.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 삶의 이면이다. 강박적인 활동주의는 권태를 지탱해준다. 깊은 권태의 저주는 활동적 삶이 그 위기의 끝자락에서 사색적 삶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색적 삶을 위해 봉사하게 될 때 풀릴 것이다. - P135

바로 테오레인, 진리에 대한 사색적 고찰로서의 사유가 한가로움의 바탕을 이룬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한가로움을 활동하지 않는 수동성과 구별한다. "한가로움 속에서 기쁨을 주는 것은 짐을 벗어버린 나태함이 아니다. 기쁨은 진리의 탐구나 발굴에서 온다." "진리의 인식을 향한 노력"은 "자랑스러운 한가로움"에 속한다. 오히려 한가로울 능력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나태의 징표이다. 한가로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과 비슷하기는커녕 그것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한가로움은 기분 전환이 아니라 집중을 돕는다. 머무름은 감각의 집중을 전제한다. - P141

프로테스탄티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과 구원을 결합한다. 일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킨다. 일은 삶의 목표가 된다. 막스 베버는 경건주의자 친첸도르프Zinzendorf(1700-1760)를 인용한다. "그저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면 인간은 괴로움에 빠지거나 죽고 말 것이다." 시간 낭비는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다. 불필요하게 오래 자는 것도 단죄의 대상이다. 시간의 경제학과 구원의 경제학이 서로 뒤얽힌다. 캘빈주의자인 백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날마다 더욱 조심하라. 그러면 가지고 있는 금과 은도 전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헛된 오락, 옷치장, 잡담, 쓸데없는 모임, 잠,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시간을 빼앗아가는 유혹으로 작용할 기미가 보이면, 이에 맞추어 경계심을 강화시켜라."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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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술작품이나 풍경 앞에서 전율할 때가 있다. 그것의 아우라를 느낀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느끼게 될 것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이런 매혹적인 것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에서 아우라를 느끼는 순간은 동시에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나리자가 아니어도 좋다. 주변의 작은 것에서도 아우라를 느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무더운 여름 하늘 위를 떠가는 구름에서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에서도, 아니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에서도,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 - P226

산업자본은 기본적으로 시간적 차이, 즉 유행을 만들면서 이윤을 얻는 체계이다. 이 점에서 산업자본은 미리 주어진 공간적 차이를 이용하여 이윤을 얻으려는 상업자본과는 질적으로 다른 논리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한다. 가령 동대문 패션타운에서의 옷 가격과 춘천 의류 매장에서의 옷 가격 사이에 차이가 난다면, 상업자본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 동대문에서 5만원에 사서 춘천에서 7만 원에 팔면, 2만 원이란 이윤이 남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상업자본이 이용한다는 공간적 차이는 단순한 공간적 차이라기보다 가격 차이가 나는 공간적 차이인 셈이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달리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기려고 한다. 가령 핸드폰을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서 기존의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떄에만 산업자본은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산업자본은 상업자본보다 더 탁월한 이윤 획득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상업자본이 이미 존재하는 공간적 차이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지만, 산업자본은 스스로 유행을 만들어서 시간적 차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상업자본의 이윤 추구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만약 가격 차이가 나는 공간들이 사라진다면, 상업자본의 이윤 추구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산업자본의 이윤 추구는 논리적으로 한계가 없다. 새로운 유행, 혹은 시간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P230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본 것이다. 유행은 소비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오타르가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산업자본의 생리였다. ‘새로운‘ 상품을 내놓아 기존 상품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하는 매커니즘을 산업자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업자본이 기존의 가치나 통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우리 인간은 드디어 ‘새로움‘ 혹은 ‘낡음‘과 관련된 시간의식을 얻게 된 셈이다. - P231

1997년 외환 위기 때 정부는 비겁한 짓을 했다. 경제 위기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마치 우리 국민들이 낭비와 사치를 일삼았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국민들이 자신의 무분별한 소비를 반성하면서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나 혹은 장롱에 들어 있던 금붙이를 아낌없이 내놓았다. 심지어 정부 조직을 중심으로 ‘아나바다‘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꾸어 쓰고 다시 쓰자‘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을 일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자신이 벌어들인 돈으로 자신이 만든 상품을 활기차게 구매할 경우에만 유지되는 체제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이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베버는 자본주의 번성의 원인을 금욕적인 태도와 정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부와 자본가들이 이 책을 놓칠 리가 없었다. - P233

이 책에서 베버는 서양에서 유독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된 원인을 해명하려고 했다. 마침내 그는 선언한다. 프로테스탄티즘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금욕 정신이야말로 서양에서만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된 주된 원인이라고 말이다.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현세의 삶은 심판의 대상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도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사후의 심판 그리고 심판 이후의 영원한 삶이다. 그들이 육체적 삶이 아닌 정신적 삶을 지향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사후의 삶은 육체적인 쾌락과 무관한 정신의 삶인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육체적 욕망이나 쾌락 추구를 사탄의 유혹이라고 저주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것이 베버가 주목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였다.
베버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직업을 일종의 소명, 즉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로 간주한다. 이런 생각은 직업을 뜻하는 ‘vocation‘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에는 ‘직업‘이라는 의미와 함께 ‘소명‘, 즉 ‘신의 부르심‘이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에게 있어 직업은 천직, 하늘로부터 유래한 임무라는 발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천직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양분되었다. 그렇지만 두 계급 사이에는 갈등의 요소가 있을 수 없다. 자본가나 노동자는 모두 자신의 역할을 하나의 소명으로서, 다시 말해 ‘금욕적‘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급이 ‘소비‘ 부분을 억제하고 ‘생산‘ 부분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비‘란 곧 현세의 육체적 쾌락을 도모하는 것으로, 금욕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을 통해 발생한 이윤을 소비로 탕진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는 이윤을 다시 생산 부분에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생산성을 계속 높이게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발달과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베버의 진단이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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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적인 도덕률은 듣기에는 고상하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한 본연의 소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 P39

"만약 당신이 지금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 끔찍한 해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 P64

"나는 더 이상 내면에 간직한 진실과 상반되는 외면을 가장하며 살지 않으리라. 나는 더 이상 불완전한 사람인 척하며 살지 않으리라." - P69

하지만 모든 여행은 정직하게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세상의 절실한 요구를 만나는 어떤 지점으로 스스로를 이끌어 준다. - P72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은 일과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난 일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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