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속에 자본주의 정신이 예표되어 있다고 본다. 금욕주의는 축적의 강박으로도 나타나며, 이는 자본의 형성으로 귀결된다. 재산을 가지고 안장 편안히 쉬는 것, 부를 향유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오직 더 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만 우리는 신의 마음에 들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 따라서 엄청난 힘으로 분방한 부의 향유를 억압한다. 소비, 특히 사치품의 소비가 옥죄어진다. 반면 이러한 금욕주의는 심리적 효과 면에서 재화 획득을 전통 윤리의 부정적 시선에서 해방시켰다. 그것은 이윤 추구의 욕망을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 그것을 신이 원하는 것으로까지 간주함으로써 거기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 P145

세속화는 구원의 경제학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구원의 경제학은 근대 자본주의 속에 계속 살아 있다. 거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돈 모으기는 단순히 물질적 탐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축적 강박의 바탕에는 구원의 추구가 깔려 있다.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투자하고 투기하는 것이다. 이때 구원의 내용은 다양하다. 응고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끝없이 쌓아올림으로써 제한된 삶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부리고 싶은 소망도 있지만, 또한 권력욕도 확대와 축적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재산이라는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재산을 뜻하는 독일어 Vermogen은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ㅡ역자). 자본으로서의 재산이 증가함에 따라 능력도 증대된다. 마르크스에게도 화폐는 탈소여화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즉 피투성을 폐지하고 이를 기투성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전능하다. 화폐는 사실로서 주어진 것의 전반적 해체를 초래한다. 추조차 화폐를 통해 폐기된다. "화폐를 통해서 내게 있는 것,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것, 즉 화폐가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나, 화폐의 소유자 자신이다. 화폐의 힘이 큰 만큼, 내 힘도 크다. 화폐의 속성은 나의ㅡ화폐 소유자의ㅡ속성이며 본질적 힘이다. 나인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따라서 결코 나의 개성을 통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추하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미녀를 살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추하지 않다. 왜냐하면 추의 작용,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추의 힘이 화폐를 통해서 제거되기 떄문이다." - P146

"산업Industrie"이라는 단어는 근면을 의미하는 ‘industria‘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영어에서 ‘industry‘는 여전히 근면, 부지런함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예컨대 "Industrial School"은 청소년 교화 기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업화Industrialisierung는 세계의 기계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근면한 인간으로의 훈육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산업화는 기계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화를 통해서 시간과 노동의 경제학적 원리에 따라 인간의 행태를 육체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최적화하라는 명령도 도입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768년에 필립 페터 구덴이 발표한 한 논문의 제목은 주목할 만하다. "산업 정책, 또는 주민의 근면성을 장려하기 위한 수단에 관한 고찰." - P147

기계화로서의 산업화는 인간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에 동화시키려 한다. 산업화의 명령은 기계의 박자에 맞게 인간을 개조하라는 시간경제학적 명령이다. 산업화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삶은 기계의 작업과정에, 기계의 기능 방식에 근접해간다. 노동에 의해 지배당하는 삶은 활동적 삶, 그것도 사색적 삶에서 완전히 차단된 삶이다. 그런데 사색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은 일하는 동물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의 작업과정과 유사해진 인간의 삶은 오직 쉬는 시간, 일이 없는 막간, 일의 피로에서 회복하여 다시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에 몸 바치기 위해 필요한 시간밖에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긴장 이완‘이나 ‘마음 끄기‘는 일에 치우친 삶을 바로잡아주는 균형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연습은 무엇보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노동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 P148

한나 아렌트는 노동사회의 궁극적 목적이 삶의 필수적 요구라는 "족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 노동사회는 일이 삶의 필수적 요구에서 떨어져나와 자기 목적으로 독립한 사회, 그리하여 일이 절대적인 지위에 이른 사회이다. 일의 지배는 너무나 완벽해져서 노동 시간 바깥에는 오직 때우고 죽여야 할 시간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일의 전면적 지배는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삶의 기획을 몰아낸다. 이제는 정신조차 일을 하도록 강요당한다. ‘정신노동‘은 강제의 공식이다. 사실 노동하는 정신이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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