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모든 국민이 연줄 부패를 끊어줄 수 있는 지도자를 원하는 건 아니다. 이미 자신의 삶이 그 연줄 부패라는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걸 "부패"라고 부르지 않는다. "정"이라고 부른다. 연줄 부패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도 면책될 수는 없다. 우리 편과 반대편으로 나뉘어 편 가르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편엔 무한대로 관대하고 반대편엔 무한대로 엄격하다. 우리 편이 엄청나게 잘못한 일이라도 반대편이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금세 우리 편의 총화 단결을 부르짖으며 그 엄청난 잘못을 땅에 묻어버릴 뿐만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순교자나 영웅으로 만들어버린다. - P139

공지영의 생각을 지지한 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소수라는 게 다행이다. 이 소수는 스토리 상상력이 풍부한 동시에 엄청나게 착한 순정파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 공지영도 그래서 부엉이바위를 지지했을 것이다. 하긴 정치에선 늘 순정파가 문제다. 미국의 당파 싸움을 다룬 어느 책을 보니, 타협을 거부해 싸움을 격화시키는 주범으로 이 순정파를 지목했다. 그럴 법하다. 순정파는 누군가를 신화로 만들면 그 신화에 반하는 그 어떤 비평이나 비판도 참아내질 못함으로써 정치를 종교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신화는 현실 세계에 뛰어들지 않는 게 좋다. - P151

앞서 소개한 김상민의 새치기론은 표면상으론 그럴듯하긴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기득권 의식이다. 정치라는 물에서 오래 고생한 사람이 높은 자리도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몇몇 유권자들은 그 물이 담긴 통을 가리켜 ‘똥통‘이라고 하지 않는가? 똥과는 먼 삶을 살아온 사람이 똥을 치우기 위해 남들을 제치고 스스로 똥통에 뛰어드는 걸 가리켜 새치기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될 건 없지만 어째 좀 이상하다. 나도 드라마나 영화의 언더도그 스토리를 엄청 좋아하긴 하는데, 김상민처럼 그걸 곧장 현실 세계에 대입하는 건 좀 거시기 하다는 생각이 든다. - P151

"안철수는 안보와 성장의 두 축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박정희 패러다임‘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선언의 상징이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이 2012년 2월 5일에 출간된 『정치의 몰락』에서 한 말이다. 그는 "안철수 현상의 이면에는 문명사적인 변화가 있어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 이전 지식의 위계질서는 이제 물구나무를 섰어요. 맨 밑바닥에 신학이 있고, 그 위에 철학, 그 위에 과학 그리고 맨 위에는 놀랍게도 기술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그리고 안철수 같은 기술자들이 부와 명예 그리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힘을 갖고 있어요. 신학의 경우, 지배력은 고사하고 자기 영역을 방어하기도 힘겹습니다.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오랜 세월동안 축적한 경험이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세계화와 정보화로 환경 자체가 바뀌었는데, 어떻게 과거의 환경에 기반을 둔 경험이 문제 해결의 기준이 될 수 있겠어요? 당장 집에서 새로 나온 가전제품의 조작 방법을 습득하는 순서는 정확히 나이순과 반대잖아요."
그렇다. 탁월한 안목이다. 디지털 기술의 단절성은 본질적으로 아날로그형인 경험과 경륜을 조롱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구사 능력이 사용자의 나이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이 그 점을 드라마틱하게 입증하고 있다. 일상적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어른이 아이에게 배워야 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독특한 ‘빨리빨리 문화‘로 세계에서 가장 속도를 숭배하고 구현해 온 한국 사회는 늙음을 사회 진보에 역행하는 악덕으로 여기게 됐다. 지난 19대 총선 또한 늙음을 조롱하는 잔치판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선거 때만 추파를 받을 뿐 평소엔 취업 전쟁의 어두운 그늘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위로나마 갈구했지만, 위로는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젊은 세대의 디지털 경험을 이끌어온 안철수가 위로와 비전을 주는 멘토로 나서면서 디지털 혁명은 정치사회 분야에까지 그 손길을 뻗치게 된 건 아닐까?
스티브 잡스가 출현하기 전에는 기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간극이 매우 컸다. 기술 회사는 창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직관적 사고의 가치도 몰랐는데, 음악, 그림, 영상, 컴퓨터를 모두 사랑한 잡스는 기술을 개발하려면 직관과 창의성이 필요하고 예술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면 현실적 규율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했다. 그는 이렇듯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었기에 융합 시대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 P181

사실 이 점에선 진보 언론 또한 성찰이 필요하다. 진보 언론은 정의에 집착한 나머지 미래의 비전 제시에서 보수 언론에 떨어진다. 진보 언론이 미래의 비전을 이야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마저 경제는 쏙 빼놓고 갈 때가 많다. 경제를 보수 진영에 넘겨주고 어찌 한국 사회를 이끌고 갈 수 있을까?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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