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깃들자 우리는 모두 밤새도록 빗장이 걸리는 옥사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서 우리의 옥사로 돌아오는 일은 내겐 언제나 괴로운 일이었다. 옥사는 유지로 만든 양초가 희미하게 비추고 있고, 숨막힐 듯한 무거운 냄새로 가득 찬, 길고 좁고 후텁지근한 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내가 이곳에서 10여 년을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평상 위에 나의 몫이란 세 장의 판자뿐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나의 모든 공간이었다. 이 방 안의 평상에만도 30명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겨울에는 일찍 빗장을 지르는 까닭에 모두들 잠들 때까지 네 시간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웅성거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웃음, 욕설, 쇠사슬소리, 악취와 그을음, 삭발한 머리들과 낙인 찍힌 얼굴들, 남루한 의복, 이 모든 것이 욕설과 혹평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렇다, 인간은 불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 P25

더욱이 여기에는 어떤 표면적인 겸손, 말하자면, 관등상의 어떤 조용한 달관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파멸한 민초인 우리들은.> 그들은 말했다. <자유의 세상에서 살 수 없으니, 이제 푸른 거리는 그만 하고, 줄이나 잘 서세>, <어머니와 아버지 말씀 듣지 않았으니, 이제 북가죽소리나 들으세>, <금실 잣기가 싫다더니, 이제 망치로 돌이나 깨야 하는구나>. 모두들 이따금씩 교훈이나 일상적인 속담과 경구의 형식을 빌어 이렇게 말하곤 했지만, 결코 심각한 생각에서 말하는 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말뿐이었다. 과연 그들 중의 한 명이라도 자기의 죄를 마음속 깊이 새기는 사람이 있었을까? 만일 유형수가 아닌 어떤 다른 사람에게 죄수들의 범죄를 비난하도록 해본다면(비록 러시아적인 정신에서 죄수를 비난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죄수들의 욕설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얼마나 욕설의 명수들인지! - P31

이미 말했지만, 몇 해가 흐르는 동안에 나는 이러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그마한 참회의 징후나, 자신의 죄에 대한 고통스러운 생각들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대부분이 마음속으로 자기가 완전히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허세, 악질적인 예들, 대담성, 잘못된 수치감이 그 원인이긴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누가 이 파멸해 가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헤아려 그들에게 숨겨져 있는 모든 세상의 비밀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몇 해 동안에 누군가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들 내부의 고독과 고통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특징을 포착하고 이해하고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것은 결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 범죄라는 것은 이미 준비되고 주어진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할 수가 없을 듯싶다. 범죄의 철학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좀 어려운 것이다. 물론, 감옥이나 강제 노동과 같은 제도가 범죄자를 교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범죄자를 벌하고, 평온한 사회를 향후에 있을 죄인의 음모로부터 안전하게 할 뿐이다. 감옥의 죄수에게 가장 힘든 강제 노동은 오히려 증오와 금지된 향락에 대한 욕망과 무서운 경솔함을 부추기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고 단호히 확신컨대, 그 유명한 독방 제도도 단지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며 표면적인 목적만을 달성할 뿐이다. 이 제도는 사람에게서 생명의 즙을 짜내고 영혼을 소진케 하여 영혼을 나약하고 놀라게 만든 다음, 반쯤 미치광이가 된 바싹 마른 미라를 교화와 참회의 본보기로 보여 주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사회에 대항했던 죄수는 사회를 증오하고, 거의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잘못한 것은 사회라고 여긴다. 더욱이 그는 이미 사회로부터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자신은 거의 정화되었고 빚을 갚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마침내 죄수가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판단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듯 모든 가능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면 누구나,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가능한 법률에 따라, 세상의 태초에서부터 두말할 것도 없는 범죄로 간주되며,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을 그때까지도 그렇게 간주될 수 있는 범죄가 존재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가장 무섭고 가장 자연에 거스른 행위와 가장 터무니없는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어린애처럼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참지 못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곳은 감옥뿐이다. - P35

돈과 담배는 괴혈병과 그 밖의 다른 질병으로부터 죄수들을 구해주었다. 일도 그들을 범죄로부터 구해 주었다. 일이 없었다면, 죄수들은 유리병 속의 거미처럼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 - P39

나는 감옥에서, 몸집은 아주 거대하지만 어떻게 그가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얌전하고, 조용하며, 온화한 한 죄수를 알고 있었다. 그는 감옥에 들어와 사는 동안 내내 한번도 남과 다툰 적이 없을 만큼 악의가 없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서부의 국경에서 밀수를 하다가 잡혀 왔는데, 여기서도 참지를 못하고 술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는 몇 차례나 징벌을 당했고, 그가 또 얼마나 매를 무서워했는지! 사실 술을 몰래 들여오는 일 자체는 그에게 하찮은 수입을 올려 줄 따름이었고, 이를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은 오로지 극단 주인일 뿐이었다. 이 기인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는 아낙네들처럼 울기를 잘 했고, 벌을 받고 난 뒤에는 수차례나 밀매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용기를 내서 그는 한 달 내내 자기를 이겨 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자제를 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었다……. 이 사람 덕분에 감옥에서도 술은 궁핍하지 않았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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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호흡을 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유지하려 애썼다.
"좋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지내게 됐으니까,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게 어떨까요."
그때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어쩐지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똑바로 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고 턱이 약한 경련으로 씰룩거렸다.
"그냥…… 다른 사람과 같이 보내기에는 굉장히 긴 시간이라서요. 하루 종일이니까." 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하시고 싶은 일이나, 좋아하시는 걸 좀 말씀해주시면 제가……."
이번엔 정적이 고통스러웠다. 찔끔찔끔 기어드는 내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고 두 손을 어디 둬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트리나의, 그 애 특유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공중으로 휘발되어 사라져버렸다. - P57

처음 2주 동안 나는 월 트레이너를 아주 가까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옛날의 자신과 한 군데도 닮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장발로 방치하고 수염도 턱을 다 덮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었다. 육체적 피로, 아니면 꾸준한 심신의 불편(네이선은 그 몸이 편할 날은 거의 없다고 했다) 탓인지 회색 눈가에는 잔주름이 져 있었다. 눈에는 세상에서 늘 몇 걸음 떨어져 살아가는 사람 특유의 공허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가끔 그게 방어기제 때문일까 생각했다. 그가 삶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믿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 P64

발소리가 들리기에 나는 마치 방금 들어온 것처럼 땔감 바구니 위로 허리를 굽혔다.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알리샤가 내 앞에 나타났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목 멘 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말없이 화장실이 있는 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녀가 내 얼굴을 매섭게 노려보는 걸로 봐서 아마 내 감정이 얼굴에다 드러난 모양이다. 감정을 숨기는 데는 항상 젬병이었다.
"그쪽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난 노력했어요. 정말로 노력했다고요. 몇 달 동안이나. 하지만 그가 나를 밀쳐냈단 말이에요." 턱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격분한 얼굴이었다. "그이는 진심으로 내가 여기 있는 걸 싫어했어요. 아주 명확하게 의사를 표명했다고요."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사실 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에요." 한참 있다가 내가 말했다.
우리 둘 다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이봐요,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도움받기를 싫어하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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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짝짓기가 일단 끝나고 나면 커플이 유지될 만한 명백한 필연성은 없다. 이는 확실히 대부분의 포유동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동물행동학 연구가 전체적으로 보여주듯이 포유동물은 대부분 짝짓기 후에 재빨리 갈라진다. 대체로 함께 모여 살아가는 영장류의 경우에도 이성애가 사회조직의 밑바탕에 어떤 형태로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은 당최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 생식은 이성애적이지만, 사회생활은 지배, 경쟁, 협력, 그리고 제법 엄밀한 기능성에 따라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대개의 경우 이성애 커플은 집단의 조직을 위한 기본 세포가 아니고 새끼의 교육에 필요하지도 않다. 따라서 이성애는 동물사회를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원리가 아님이 분명하다. 아마 발정기 동안 개체들을 하나의 성에서 다른 성 쪽으로 몰아가는 일종의 ‘본능‘이 있을 텐데, 물론 이 행동은 이성애적이다. 그러나 사실 이성애를 토대로 사회를 건설한 동물은 정확히 인간밖에 없다.

뵈브 당통은 우정을 친구보다 훨씬 더 존중한다. 이 점에서 그는 대중의 감탄을 받을 만하다. 그는 복음서를 걸고 자신의 마지막 날까지 기를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다. 이 맹세는 무조건적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정은 친구를 초월한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것과는 반대로, 사실은 남색이 언제나 교회가 규정한 주요 범죄이지는 않았다. 12세기까지 참회의 규정에는 남색이 그다지 언급되지 않았거나, 당시 이 행위에 대해 정해진 형벌은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남색은 마땅히 화형에 처해야 할 죄악 중의 죄악은 아닐망정 주요한 침해로 간주되었다.

첫째, 서양에서 이성애 문화와 심지어 이성애에 대한 예찬은 12세기에 출현하는데, 이는 뒤비와 르고프 그리고 몇몇 다른 이가 막연하게 예감한 바이지만, 그들에게 이성애는 필시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이성애를 문제화하지 않았다.
둘째, 이성애 문화는 동성사회성의 문화를 대체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사들의 성적 관습이 무엇이건 그들의 수많은 저항을 야기하는데, 이 저항은 여러 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괄목할 만한 것으로 실재하게 된다.
셋째, 이 새로운 이성애 문화에서는 두 가지 현상, 즉 한편으로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남색에 대한 정죄가 병존하면서 상관관계를 맺기 마련인데, 전자는 허울일 뿐이고 후자는 종교에서나 세속에서나 갈수록 더 비난받는다는 점에서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이 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16세기에 궁정풍의 문학은 빈번히 패러디되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예는 <돈키호테>이다. 사랑의 책들로 인해 멍해지고 궁정풍의 몽상에 절은 이 늙은이는 상상의 애인, 매우 유명한 토보소의 둘치네아를 찾아 떠난다. 누구라도 이보다 이성애 문화에 더 충실한 주인공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활력은 기본적으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구성하는 남성 커플로부터 생겨나고, 많은 점에서 그들은 팡타그뤼엘과 파뉘르주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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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가 말한 "신경증 환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는 타자에 대한 관계를 자신의 관계로 가져올 수 있는 권력/힘이 결핍되어 있다. 이러한 가져옴, 자신으로의 전환이 권력의 핵심이다. - P110

니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해지라고 요구한다. 그에 따르면 삶은 "기본적으로 타자와 약자를 전유하고, 상처 입히고, 위압하고, 억누르고, 그들에게 자기 형태를 강요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가장 부드럽게 말하더라도 착취"이다. 착취는 "타락하거나 불완전한 원시 사회"에 있지 않다. "유기체의 근본 기능"인 착취는 "생명의 본질"에 속한다. 그것은 "삶의 의지 그 자체인 권력 의지의 결과"이다. 모든 살아 있는 육체는 "성장하고, 주변을 장악하고, 자라나며, 몸무게를 늘리려 한다." 그것은 "어떤 도덕이나 비도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육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 바로 권력 의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P170

정의로운 자는 늘 너무 빨리 오는 자신의 판단을 보류한다. 그런 판단은 그 자체로 이미 타자에 대한 배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보기 드문 금욕, 타자를 판단하지 않고 그에 대해 생각하기를 주저하는 것. 이는 결코 소소하지 않은 휴머니티의 표지다." 자신에 대한 확신과 타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유동적으로 열어두고, 듣고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판단, 곧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제하는 자는 정의를 행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늘 타자를 위하는 것보다 먼저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 자체로부터는 개별적인 자제가 나올 수 없다. 권력에는 망설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서 권력은 타자를 판단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은 판단과 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 P174

각주47) 이러한 경계 없는 친절함은 교환 원리에 근거한 소통적 친절함과도 대립된다. 소통적 "기술"로서의 친절함은 "자신의 견해나 기대의 표현을 적절한 순간이 올 때까지 미룰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순간까지의 시간은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채워진다." 소통적 친절함은 "타자의 자기묘사를 보장하면서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기대를 배치하는 원리"에 의해 이끌어진다. 체계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소통적 친절함은 "형식적 체계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데 기여한다. 타자가 좋은 모습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한, 다시 말해 그 타자의 자기묘사가 성공하도록 해주는 체계는 ‘친절하다.‘ ‘친절한 자‘는 "타자가 드러내고 싶어 하는 모습대로 그를 대해주는" 사람이다. 전략으로서의 친절함이란 "A가 파트너인 B가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B 또한 A에게 그런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태도이다". 따라서 기술로서의 소통적 친절함이란 비대칭적 구조가 아니다. 친절한 자는 자기 자신의 기대나 견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소통적 교환의 장에 내놓을 적절한 순간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타자로 하여금 성공적인 자기묘사를 하도록 도와주는 수동적 혹은 능동적인 듣기는 자신의 묘사를 위한 우회로인 것이다. 따라서 소통적 친절함이란 결국 자기배려로 담지되는 교환 행위이다. - P177

"환대. 환대의 풍습이 갖는 의미는 타인의 마음 안에 깃들어 있는 적의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이 타인을 더 이상 적으로 느끼지 않을 때 환대는 줄어든다. 악의적인 전제가 강할수록 환대도 거창해진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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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애자와 게이 및 레즈비언은 커밍아웃 과정에 있어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그 원인이 될 수 있는 무성애 발달의 독특한 특성 몇 가지를 살펴보자. 그 중 하나는 ‘무성애‘라는 분류와 정체성이 새로운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무성애 정체성은 매우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다. 무성애 공동체는 그 성격상 두루 흩어져 있다. 그리고 무성애자들은 다양한 집단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런 특성들로 인해 무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이 늦어질 수 있다. 내가 만난 한 무성애 여성은 20대까지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최근까지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해할 만하다. 즉 동일시할 집단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 개인이 커밍아웃을 비롯한 정체성 형성 과정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자신이 게이라면 먼저 스스로를 ‘게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커밍아웃의 필수적 선행 요건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결국 필요한 것은, 일원으로서 동일시할 수 있고 커밍아웃할 수 있는 인식 가능한 명칭이 있는 집단이다. 아주 최근까지도 조직적이고 사회적으로 인식 가능한 무성애자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게이 혹은 레즈비언은 30년 이상의 오랜 기간에 걸쳐 서구 사회에서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존재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게이 혹은 레즈비언들이 인생의 후반기까지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모르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동성에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성적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성애자 젊은이들에 비해 게이 혹은 레즈비언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얻고 있다. - P162

이런 사례와는 별도로, 섹스의 광기에 관한 나의 입장을 지지하는 과학적인 연구가 있다. 실제 조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섹스에 몰두할 때 인간의 인지 기능이 현저히 훼손된다는 증거가 제기되었다. 심지어 성행위에 몰입한 상태가 아닐 때마저도, 섹스를 상상하기만 해도 인간의 인지 기능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옷을 완전히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성을 사진을 통해 보기만 해도 성행위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혈기 왕성한 이성애 남성은 미래를 잘 계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의 가능성이 줄어든다. 말하자면 그들은 미래를 ‘가볍게 무시한다.‘ 그러므로 성적으로 충만한 순간을 맛본 뒤에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현실성이 더 떨어지게 된다. 남성들은 본능적으로 짝짓기 가능성을 생각하기에, 비록 이상형의 여성과 결코 만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망 없는 비현실적인 소망일지라도, 남자들은 ‘짝짓기 순간‘에 과도하게 집중함으로써 ‘미래는 아무려면 어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연구자들은 매력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실제로 짝짓기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뇌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뇌는 짝짓기와 연결되는 신경 중추를 자극하면서, 보다 더 이성적이고 계획 지향적인 신경 중추를 닫아 버린다. 인간의 뇌는 수 만 년 동안 진화해 왔지만 그에 관한 사진은 당연히 없었다. 그래서 눈앞에 놓인 이차원적인 이미지는 석기 시대 인간의 마음을 속임으로써 실제로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것과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두 가지의 비합리성이 존재한다. 첫째, 사진을 보고 그것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반응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남성들이여, 진짜 여성은 눈부신 모습으로 당신의 침실로 들어오지 않는다. 둘째, 섹스의 가능성을 보고 미래를 무시한다. 그러므로 남성들의 반응은 이중적이고 비합리적이다. - P182

이런 분방한 행동은 섹스의 광적인 효과와 관련이 있다기보다 오히려 지위와 타인에 대한 무시가 권력, 신분, 나르시시즘과 손잡은 결과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부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를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이것은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다른 영역에서 규칙적으로 보여 주는 사려 깊고 떄로는 치밀한 행동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만약 다른 분야에서 경솔하게 행동한다면, 경솔하게 계획된 성관계만큼이나 자신의 커리어가 훼손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만약 명사들 혹은 상당한 권력과 지위를 갖춘 유명 인사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에 대해 ‘섹스‘보다 ‘권력‘으로 설명하는 것을 선호한다면, 특히 남성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섹스와 권력 사이의 교묘한 상호 작용 또한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일례로 남성들은 경쟁에서 이겼을 때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급상승한다. 이는 성 충동과 권력 두 가지 모두에 잠재적인 영향을 미친다. 간단히 말해 많은 남성들의 성 충동과 권력욕을 분리하는 것은 극히 힘들다. 그 반대로 권력욕에서 성 충동을 분리하는 것 또한 힘들다. 따라서 이런 스캔들에 이르게 되는 일견 비합리한 행동 이면에 놓여 있는 부분이 섹스가 아니라고는 완전히 잡아뗄 수는 없다. - P186

어떤 한 관점에서 볼 때 무성애는 장애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체가 자연스러운 사물의 질서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섹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타인과 ‘그 짓‘을 하고 싶은 욕망은 모든 성적인 생명체가 다양한 형태로 추구하는 것이다. 무성애를 장애로 간주하는 이런 입장은 진화 생물학이 고안한 렌즈를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성적 매력의 결핍은 중대한 생물학적 요청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섹스는 인간 번식을 위한 수단이기에 삶의 이런 측면을 회피하는 것은 인생의 근본적인 목표인 번식을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유기체는 번식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미래 세대에게 전한다. ‘승자‘ 혹은 가장 잘 적응한 최적의 유기체는 미래 세대에게 최대의 유전자를 전달하는 자이다. 최악의 부적응 유기체는 유전자를 미래 세대에 전달하지 못하거나 최소의 유전자만 전달하는 자이다. 사람들 대다수는 복제 게임을 하거나 성적 재생산을 통해 복제를 시도한다. 따라서 재생산 수단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흥미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심사로 간주되어야 한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여기 허구적인 인물인 ‘샐리‘가 있다. 그녀는 1920년에 태어나 2000년까지 살았다. 그녀는 결혼을 했고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 두 명의 자녀가 또다시 자녀를 낳았다. 이렇게 하여 그녀의 유전자는 전통적인 방식의 이성애 관계를 통해 임신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들을 통해 미래 세대에게 전해졌다. 그녀가 이런 과정을 성취하도록 해 주는 심리적인 메커니즘 또한 상당히 전통적이다. 그녀는 남성에게 성적인 매혹과 낭만적인 매혹을 느꼈다. 그 결과 아이를 원했고 아이들을 양육할 능력이 생겼다. 따라서 전통적인 인성애 관계를 택한 그녀의 경향은 부모로서 자녀 양육 능력과 더불어, 임신과 출산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유전자를 후세대들에게 물려 줄 세 가지 도구인 세 명의 자녀를 양육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래. 잘했어, 샐리!" 혹은 보다 정확히 "잘했어. 샐리의 유전자여!"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성적 재생산을 통해 유전자를 복제하려는 경향을 가진 개인은 ‘건강한‘ 사람들이다. 이 추론에 의하면 그들은 성적으로 성공한 모든 인생 형태에 뒤따르는 자연스러운 과정에 순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이 지닌 문제점을 한 번 고려해 보자. 첫째,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이성애 생물학자들을 포함한, 자녀가 없는 많은 성애자들이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번식 그 자체의 메커니즘인 섹스를 포기하지 않았건만 그들에겐 자녀가 없다. 따라서 이 궁극적인 생물학적 요청을 참담하게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장애자이거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일까?
둘째, 진화론적인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접근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DNA 복제는 수많은 유기체에서 무성 생식으로 발생한다. 그러므로 유성 생식이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번식 과정은 아니다. 게다가 보다 단순하거나 계통 발생적인 오래된 종에서 발생하는 무성 생식은 별도로 치더라도, 유성 생식은 복잡한 종이나 최근에 진화된 종의 경우 한 가지 형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인간마저도 그렇다!
인간은 성적 재생산인 유성 생식뿐 아니라 다른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혈연 선택 과정을 통해 복제가 가능하다. 혈연 선택 과정에서의 유전자 복제는 친족이나 가까운 친척을 통해 발생한다. 우리 친척을 우리 유전자를 공유하고, 6촌보다는 남동생이나 여동생같이 혈연이 가까울수록 더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친척들이 우리의 유전자를 성적 재생산을 통해 복제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사실상 친척들의 유전자 중 일부는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혈연 선택 메커니즘은 유전자를 복제하는 대안적인 적응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유성 생식이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이 유전자 복제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유전자 복제의 혈연 선택 모델은, 왜 인간 사회에 동성애자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대답을 제공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생물학자들과 진화 심리학자들의 입장에서, 동성애자는 진화론적인 전형에 도전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들처럼 유성 생식으로 성적 번식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동성애는 여러 문화와 여러 시대에 걸쳐서 존재해 왔으며, 적어도 어느 정도는 동성애의 유전적인 토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게이 유전자‘는 어떻게 ‘이성애 유전자‘와 경쟁할 수 있었을까? 이성애 유전자는 성적 번식에 참여하는 종족 번식 집단이 있는 반면, 동성애자는 대체로 그런 집단이 없지 않을까?
다시 위의 질문을 이어가자면, 이에 대한 대답은 동성애자의 혈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게이 유전자가 동성애자의 친척들에게 나타나면, 게이 유전자는 생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화론적인 역사를 통해 번성까지 하므로, 재생산의 이점을 어느 정도 누리게 된다. 최근의 연구자들은 게이 남성들에게는 유별나게 자녀를 많이 낳는 여자 친척이 많다는 점을 알아냈다. 바로 그렇다! 그래서 게이 남성은 이성애 남성들처럼 아이를 낳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여자 자매들은 얼마든지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게이 남성의 여자 자매들과 가까운 친척들은 게이 남성의 유전자를 공급받아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현상은 게이 남성의 여자 친척들에게 재생산 이점 유형을 전달하는 게이 유전자가 있음을 암시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남성을 사랑하는‘ 유전자가 남성에게서 발견되면 그들은 게이가 될 수 있지만 그런 유전자가 여성에게서 발견되면, 그런 여성은 특히 남성을 좋아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그들이 남성과 이성애 관계를 형성하고, 자손을 많이 낳으면, 자손에게 ‘남성을 사랑하는‘ 게이 유전자를 물려주게 된다. 설령 ‘남자를 사랑하는‘ 유전자가 여자 자매에게 없다고 하더라도, ‘게이‘ 유전자는 이런 유전자를 전달하는 개인들을 이용할 수 있다. 게이 남성들은 친척의 아이들이 생존하여 재생산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자 자매의 자녀나 혹은 남자 형제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의 유전자는 성적 접촉을 통해서 복제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혈연을 통해 복제된다. 이런 메커니즘은 흥미롭게도 동성끼리 매력을 느끼는 사모아 남성들에게서 상당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과 남성의 특징을 모두 가진, 사모아 문화에서 제3의 성을 지칭하는 파아파피네Faafafine는 사모아 남성 집단이다. 그 안에서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사모아 사회는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모아 사회는 현대 서구 사회보다 인간이 더 진화할 때 발생할 법한 사회적, 가족적 관계를 훨씬 더 가깝게 밀착되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이 입증하다시피, 자연은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다양성을 유지하고 창조한다. 유전적으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생물학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전통적인 이성애 과정을 거쳐 번식하지 않는다고 하여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부적응자라고 할 수 없다. 그 말은 개인의 유전자를 복제하는 방법으로써 유성 생식 이외의 또 다른 진화적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 P195

프로이트적인 해석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의 성적 욕구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충족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대 서구의 미디어들은 성 중독자들을 사회적으로 정상인 것처럼 보여 주어 우리의 성적 기대치를 엄청나게 높여 놓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현실 사회의 섹스 생활은 그대로이지만, 상대적으로 높아진 기대치 때문에 성적인 측면에서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된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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