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항상 긴장하지 않고, 밝고 분명한 인식도 없는 지각에 대해서는, 그 지각기관은 마치 말이 주인을 대하듯 유순하지 못하다. 그러나 항상 긴장하고 밝고 분명한 인식이 있는 지각에 있어서는 모든 감각기관이 마치 잘 길들여진 말이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유순하다.’
「카타-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항상 긴장된 마음’이라고 하는 한 구절이 바로 요가의 실천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밝은 인식 혹은 지각은 주인에, 마음은 고삐에 비유되고 있는 것처럼, 긴장된 마음은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고삐와 같은 상태를 말한다. 고삐를 잠시라도 늦추면 말은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마는 것처럼, 마음을 잠시라도 놓지 말고 한 곳을 집중하여 항상 긴장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요가라는 말의 의미는 ‘말이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말고삐를 말뚝에 꼭 묶어 두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산란된 마음을 어떤 하나의 대상에 연결시켜서 사유하고 명상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하는 정신통일의 수행을 말하고 있다. - P273

선불교에서는 경전의 주장을 문자상의 이해로 끝나지 않고 직접 선의 수행으로 깨달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는 것이 선사상인 것이다. 즉,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견성은 각자의 마음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의 지혜와 덕성을 개발하여 각자의 생활사엥 그대로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를 생활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마조 도일이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道)’라고 단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설법은 조사선의 선불교가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심’은 몰자각적이고 경계에 집착하여 차별과 분별을 일으키는 범부심,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의 수행과 깨달음의 철저한 체험을 통하여 자각된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체의 번뇌나 분별·차별심의 미혹이 없는 본래심인 불성을 말하고 있다.
즉, 일체의 경계나 주위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범부심(凡夫心, 衆生心)이 아니라, 자각된 주체인 본래심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매몰(埋沒)되지 않고 또 걸림 없으며, 일체의 번뇌나 망념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상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일상심인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이 그대로 부처이며,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그 모든 일상생활의 매사가 그대로 진실된 도의 삶이 된다. 각자의 자각된 평상심(본래심, 불성)으로 지혜로운 삶을, 진실에 계합된 평상의 매사를 전개하는 이것이 선의 수행이며 선사상인 것이다.
자각된 평상심에서 전개되는 지혜가 붓다와 똑같은 반야의 지혜인 것이며,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인간의 평범한 일상의 모든 일을 걸림 없이 무애자재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가 다름 아닌 평상심이 도인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 P282

진리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그 진리의 세계로 가는 올바른 길을 확실히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의 갈 길과 목적지를 향해 수행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각자가 오로지 좌선의 수행에 전념하며 좌선의 한 가지를 실참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 한 가지를 중심으로 닦는 수행을 일행삼매라고도 하며, 혹은 각자의 몸으로 직접 연마하고 수행하는 것이기에 임제선사는 체구연마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행삼매의 좌선 수행과 깨달음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붓다나 조사들이 설한 불법의 세계를 자각하여 붓다의 말씀을 직접 확인하고 더 이상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을 갖게 된 자각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지금까지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통하여 알고 있던 지식적인 불교의 이해와 한계성을 각자의 수행과 체험으로 확신을 얻고, 그러한 불법의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을 얻음으로써 각자가 자기의 생활종교로 만들고 확립한 것을 말한다. 즉, 불교 정신을 직접 몸으로 갈고 닦아 깨닫고 익힌 불법을 자기화한 것이며 혈육화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깨달음은 관념적인 이해나 사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몸으로 연마하고 익힌 것이기에, 철저한 확신으로 불법의 정신이 자기의 인격과 일상적인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승화되고 전개되는 것이다.
즉, 불법의 정신이 생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이루어진 삶이 전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신·해·행·증은 불교의 가르침을 각자가 직접 믿고 수행하여 깨달아 자기의 종교로 확립하게 하는 자각적인 종교의 수행구조를 체계 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을 알기 위한 것이며, 불법을 수행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선사 도우겐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고 있다.
불도를 닦는 것은 자기를 수행하는 것이며, 자기를 수행한다는 것은 자기를 무아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를 무아로 하는 것은 자기가 만법으로 실증되는 것이며, 자기가 만법으로 실증된다는 것은 자기의 신심 및 타인의 신심까지도 모두 함께 탈락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해 갈 때 깨달음의 자취도 없어지며 그 없어진 깨달음의 자취로 오래오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불교는 진리에 대한 단순한 관념론이나 인식론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수행과 실천을 통한 체험으로 자각하여 생활의 체험과 지혜로 되살리는 것이다. - P286

인연 따라 얻고 배우고 익힌 것은 결국 때가 되고 인연이 다하면 나가고 없어지게 마련이다. 참되고 다함이 없는 무진장한 무가보의 보물은 자기의 불성으로 철저한 수행을 통한 체험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선 수행의 구조를 무문 혹은 무문관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종의 공안집인 「무문관」에서는 ‘대도에는 문이 없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 P290

사실 인간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살기는 쉬워도 단순한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행삼매의 좌선을 수행이라고 한다. 과학자가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는 일이나, 예술가가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일종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가 좌선의 한 가지 일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선 수행이다.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통해서 진리의 자각과 지혜가 체득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나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일과 행위에 전심전력하여 주관과 객관이 끊어지고 대상이 끊어진 절대적인 경지가 되도록 하는 행위가 일행삼매인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한 가지 일에 절대적인 수행으로 행한다.’라고 말한다. 즉, 지금 행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자기 자신의 힘을 다 쏟는 수행을 말한다. 선에서는 ‘대나무잎 하나하나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혹은 우리들 ‘인간의 생활에 있어 행동 하나하나, 행위 한 걸음 한 걸음에 청풍을 일으킨다.’라는 의미이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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