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양상의 덕이 항상 진정한 덕은 아니다
군주가 앞에서 말한 것들 중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성품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면, 그야말로 가장 칭송받을 만하며, 모든 사람들이 이를 기꺼이 인정할 것이라는 점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갖추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게다가 인간의 상황이란 그러한 성품들을 전적으로 발휘하는 미덕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신중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권력기반을 파괴할 정도의 악덕으로 인해서 악명을 떨치는 것을 피하고, 또 정치적으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악덕일지라도 가급적 피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후자의 악덕은 별다른 불안을 느끼지 않고 즐겨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덕 없이는 권력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때에는 그 악덕으로 인해서 악명을 떨치는 것도 개의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신중하게 고려할 때, 일견 미덕으로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는 반면, 일견 악덕으로 보이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번영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 P110

칭송과 비난을 받을 만한 덕과 악덕
사람들을, 특히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군주들을 논할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성품을 가졌다고 칭송받거나 비난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즉 어떤 사람은 인심이 후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인색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베푸는 사람과 탐욕적인 사람, 잔인한 사람과 자비로운 사람, 신의가 없는 사람과 충직한 사람, 여성적이고 유약한 사람과 단호하고 기백이 있는 사람, 붙임성이 있는 사람과 오만한 사람, 호색적인 사람과 절제하는 사람, 강직한 사람과 교활한 사람, 유연한 사람과 완고한 사람, 진지한 사람과 경솔한 사람, 경건한 사람과 신앙심이 없는 사람 등으로 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P110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런데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더 나은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제 견해는 사랑도 느끼게 하고 동시에 두려움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둘 다 얻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굳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저는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 일반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즉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고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습니다. 당신이 은혜를 베푸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온갖 충성을 바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막상 그럴 필요가 별로 없을 때, 사람들은 당신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자신의 소유물, 생명 그리고 자식마저도 바칠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정작 그러한 것들을 필요로 할 때면, 그들은 등을 돌립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그들의 약속을 믿고 다른 대책을 소홀히 한 군주는 몰락을 자초할 뿐입니다. 위대하고 고상한 정신을 통하지 않고, 물질적 대가를 주고 얻은 우정은 소유될 수 없으며, 정작 필요할 때 사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에 덜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감사의 관계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생기면 언제나 그 감사의 상호관계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항상 효과적인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실패하는 경우가 결코 없습니다. - P118

미움을 피하는 방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비록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하도록 해야 합니다. 미움을 받지 않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군주가 시민과 신민들의 재산과 그들의 부녀자들에게 손을 대는 일을 삼가면 항상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처형이 필요하더라도, 적절한 명분과 명백한 이유가 있을 때로 국한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타인의 재산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재산을 몰수할 명분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약탈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군주는 항상 타인의 재산을 빼앗을 핑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목숨을 앗을 이유나 핑계는 훨씬 더 드물고, 또 쉽게 사라져 버립니다. - P119

다수는 외양에 따라서 판단한다
따라서 군주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앞에서 이야기한 다섯 가지 성품들로 가득 차 있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를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지극히 자비롭고 신의가 있으며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경건한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경건한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손으로 만져보고 판단하기보다는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볼 수는 있지만,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밖으로 드러낸 외양을 볼 수 있는 반면에 당신이 진실로 어떤 사람인가를 직접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수는 군주의 위엄에 의해서 지지되는 대다수의 견해에 감히 도전하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에 관해서, 특히 직접 설명을 들을 기회가 없는 군주의 행동에 관해서 보통 인간들은 결과에만 주목합니다.
군주가 전쟁에서 이기고 국가를 보존하면, 그 수단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항상 명예롭고 찬양받을 만한 것으로 판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외양과 결과에 감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보통 사람들일 뿐입니다. 대다수와 정부가 하나가 될 때 소수는 고립되기 마련입니다. 이름을 굳이 밝히지는 않겠지만, 우리 시대의 한 군주는 실상 평화와 신의에 적대적이면서도, 입으로는 항상 이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를 말 그대로 실천에 옮겼더라면, 그는 자신의 명성이나 권력을 잃었을 것이며, 그것도 여러 번 잃었을 것입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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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8-17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흥미롭게 읽은 책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배우게 해 줍니다.^^

베텔게우스 2023-08-17 22:29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몇 년간 틈틈히 메모해 둔 문장들을 올해부터 매일 조금씩 서재에 올리고 있습니다. 군주론이 아마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네요... ㅎㅎ

2023-08-18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18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의 비밀을 아는 한 가지 방법, 절망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힘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그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게 해서 그를 사물, 우리의 사물, 우리의 소유물로 바꿔놓는 힘으로부터 생기는 방법이다. - P52

여론이나 예측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이 자신의 판단을 무효화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는 것, 자신의 확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자신의 확신을 고수하는 것,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곤란과 좌절과 슬픔을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 될 부당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극복해야 할 도전으로 받아들이려면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앙과 용기의 훈련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첫 단계는 어디서 언제 신앙을 상실하는가에 주목하고, 신앙의 상실을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서 우리가 비겁한 태도로 행동하는가, 또한 어떻게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배반하는 경우 언제나 약해지며, 우리가 약해지면 점점 더 새로운 배반을 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또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도, 비록 대체로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181

칸트는 양심의 소리를 천부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사회적인 요구가 내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양심의 지배는 외적 권위의 지배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양심의 명령을 자기 자신의 명령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적 권위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 경우에 죄책감을 품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명령을 어긴 사람은 평생에 걸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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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인들이 용병으로부터 겪은 수난
베네치아인들의 발전사를 보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군대로, 곧 귀족과 무장한 인민들이 아주 능숙하고 용맹스럽게 전쟁에 임했을 때에(즉 그들이 이탈리아 본토에서 전쟁을 하기 전에), 그 나라는 안전했고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본토에서 전쟁을 하게 되자마자 그들은 그들의 용맹을 포기하고 이탈리아의 전쟁 관습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내륙의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용병대장들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병합된 영토가 아직 많지 않았고 베네치아인들의 명성이 아주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카르마뇰라의 통솔하에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그들의 과오는 명백해졌습니다. 그들은 (그의 통솔하에 밀라노 공작을 격파했기 때문에) 그가 매우 유능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만, 반면에 그가 전쟁을 마지못해 수행하고 있다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그 자신이 승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계속 고용해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병합된 영토를 잃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그를 해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P92

원군으로부터 겪은 근래의 위험한 사례들
원군이란 당신이 외부의 강력한 통치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당신을 돕고 지켜주기 위해서 파견된 군대인데, 이 또한 용병처럼 무익한 군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군은 최근에 교황 율리우스에 의해서 이용된 적이 있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용병부대가 페라라 전투에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스페인의 페르난도 왕에게 자신을 도울 군대를 파견하게 함으로써 원군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원군은 그 자체로서는 유능하고 효과적이지만, 원군에 의지하는 자에게는 거의 항상 유해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패배하면 당신은 몰락할 것이고, 그들이 승리하면 당신은 그들의 처분에 맡겨지기 때문입니다. - P97

과거 위인들의 모방
지적인 훈련을 위해서 군주는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데, 특히 위인들의 행적을 조명하기 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들이 전쟁을 수행한 방법을 터득하며, 실패를 피하고 정복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들의 승리와 패배의 원인을 고찰하고, 무엇보다도 우선 위대한 인물들을 모방해야 합니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 역시 찬양과 영광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그들의 선배들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킬레스를 모방했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모방했으며, 스키피오는 키로스를 모방했다고 이야기되는 것처럼 항상 선배들의 행적을 자신들의 모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크세노폰이 저술한 키로스의 생애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키피오의 생애와 행적을 고려할 때, 크세노폰의 저작에 기록된 대로 키로스를 모방함으로써 스키피오가 영광을 성취하는 데에 얼마나 커다란 도움을 받았는지, 그리고 스키피오의 성적인 절제, 친절함, 예의바름, 관후함이 얼마나 많이 키로스의 성품을 모방함으로써 얻은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 P107

근면함은 운명의 신을 물리칠 수 있다
현명한 군주라면 항상 이와 같이 행동하며, 평화시에도 결코 나태하지 않고,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부지런히 자신의 입지를 강화함으로써 역경에 처할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 결과 운명이 변하더라도 그는 운명에 맞설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 P108

윤리적 공상과 엄연한 현실
이제 군주가 자신의 신민들 및 동맹들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마땅한가를 고찰하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많은 논자들이 이 주제를 논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제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다른 사람들이 제안한 원칙들과 특히 이 문제에 관해서 크게 다르기 때문에, 제가 건방지다고 생각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용한 것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행하지 않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의 몰락은 불가피합니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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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명이었다고 들었다. 20만 명이 갔다가 해방 후 돌아온 숫자가 고작 2만 명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자신이 20만 명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2만 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 놀랐다. 20만 명 중 2만 명이면 10분의 1이었다. 말하자면 열 명 중 한 명……. 그녀는 자신의 셈이 틀렸지 싶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서 돌아왔을까 싶다. - P125

열세 살이던 그녀는 어느새 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 7년 동안 그녀의 키는 손가락 두 마디밖에 자라지 않았다. 7년 전 함께 만주 위안소에 왔던 소녀들 중 그곳을 떠나지 않은 소녀는 그녀와 애순, 둘뿐이었다. 분선도 어느 날 오토상을 따라 그곳을 떠났다. 언제까지나 잊지 말자며 실과 바늘과 물감으로 왼손 손목 위에 문신을 새겼던 연순과 해금도 뿔뿔이 흩어졌다.
7년 전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리던 열차에 타고 있던 소녀들 중 가장 어리던 그녀는 제법 나이가 든 축에 속했다.
오토상은 소녀 둘을 더 데리고 왔다. 그중 하나는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 먹은 소녀는, 7년 전 대구역에서 열차에 오르던 그녀의 환영도 함께 데리고 왔다. 검정 광목 저고리에 깡똥하고 얄궂은 바지를 입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애기가 어쩌다 이런 델 다 왔을까?" 영순이 소녀에게 말했다. 열여섯 살이 된 영순의 손에서는 담배가 타들고 있었다.
"왔으니 할 수 없지. 팔자려니 하고 사는 수밖에……."
영순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매운 담배연기가 영순의 얼굴을 지우면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하는 소녀들에게 일본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사다코다."
사다코가 한옥 언니의 이름이라는 걸 깜빡하고는. 606호 주사를 맞고 늘어져 있던 한옥 언니가 트림을 하다 말고 경기하듯 떨었다. - P138

살아 있는 증인이 있는데,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까, 눈물이 나고 기가 막히고 감감해서…….
김학순 그 여자는 그래서 자신이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신문기사 군데군데 붉은색 펜으로 밑줄이 쳐져 있다. 그녀는 신문지 쪼가리를 집어 들고 붉은색 펜으로 밑줄 친 부분들을 소리 내 읽기 시작한다. 한 문장을 연달아 읽지 못하고, 언 동태를 토막 내듯 끊어가면서 읽는다.

오직 나 홀몸이니

거칠 것도 없고

그 모진 삶 속에서

하느님이 오늘까지 살려둔 것은

이를 위해 살려둔 것.

죽어버리면 그만일 나 같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

왜 나는 남과 같이 떳떳하게 세상을 못 살아왔는지.

내가 피해자요.

그 여자를 따라 위안부였던 여자들이 하나둘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 P143

내가 아는 이는 시집갔다가 남편에게 매독균을 옮기는 바람에 들통이 나 쫓겨났잖아. 얼마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멀쩡하게 살다가 마흔 안짝에 정신병이 왔잖아. 그런데 글쎄 정신병원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오라고 하더래. 그래서 갔더니 의사가 어머니만 남고 다른 가족들은 다 나가라고 하더니 혹시 매독 앓은 적 있냐고 묻더라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나왔다지 뭐야. 매독이 그렇게 무서운 거더라구. 그이도 참 안됐지. 본의 아니게 아들 인생까지 망쳐놓은 셈이지 뭐야. 아들이 정신병원에서 나오기는 했는데 가끔 발작을 하는가봐. 의사가 얘기했을 리 없는데 아들이 에미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고는 하나봐. 더러운 개구녕에서 나와서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구.
그 심정이 어땠을까? …… 내가 날마다 두통약을 한 알 먹는데 그날은 두 알을 먹었어.
신고하고 더 쓸쓸해졌어. 과거가 알려지면 조카들 시집가는 데 지장 있으니 그냥 조용히 지내라고 큰언니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뿌리치고 신고를 했더니, 언니하고 조카들이 발길을 뚝 끊더라구.
94년 정월부터 보조금 탔어. - P146

신빙성이 없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위안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리고 다니는 이들을 향해서. 몇 살 때 끌려갔는지, 누구한테 끌려갔는지, 어디로 끌려갔는지 분명히 대지를 못하니까. 고향 지명조차 제대로 모르는 데다, 학교에 다니지를 못해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던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걸 고려도 않고. 수십 년이 흘러 기억들이 토막 나고 뒤죽박죽 뒤섞여버렸다는 걸 모르고.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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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우려에서 기인했을 겁니다. 어쩌면 20세기 말에 생명과학과 뇌과학이 자연주의를 강력하게 내세우고 인간의 인격과 정신을 부정하게 되진 않을까 하는 우려 말입니다. 근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또한 자연계의 일원이며, 그 인격과 정신을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그런 자연주의적 인식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그가 기독교와 우연히 만난 근거가 됩니다. 이런 변화를 ‘포스트 세속화론적 전환’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 P210

테일러에 따르면 ‘세속성’이란 개념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국가·교회와의 분리, 즉 정치·종교와의 분리입니다. 이로 인해 종교는 사사화되지요. 또 하나는 신앙의 쇠퇴, 즉 사적 영역으로서 종교가 쇠퇴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테일러가 주목하는 세속성은 제3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조건 변화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를 쓴 의도를 이 제3의 의미인 세속성과 관련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제3의 의미에서 세속적 사회로서 검토하는 일이다. 여기서 내가 명확히 밝히고 싶은 특징이 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사회에서, 신앙을 갖는 것이 당연한 신자에게조차도 단순한 선택지에 불과한 사회로 변했다는 점이다. (중략)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이미 자명하지 않다. 그것은 선택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환경에 따라 신앙을 계속 갖기가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테일러는 이런 세속성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서양 근대의 5백 년을 분석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서기 1500년 무렵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도리어 2000년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불가피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테일러가 이 의문을 제기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표현주의 혹은 표현 혁명이라 부르는 현대의 상황입니다. 테일러에 따르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적 생활양식과 표현방식을 원리로 작동하는데, 패션으로 대표되는 소비자 중심주의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입장에서 보면 신앙은 본래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위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주의했으면 하는 건 테일러가 현대의 세속성을 설명할 때 결코 신앙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분명 표현주의의 입장에 서면 제도적 종교는 쇠퇴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과 연결된 종교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로 새로이 모색됩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를 적극적으로 좇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테일러는 《현대 종교의 다양성》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비기독교적인 종교, 특히 동양에 기원을 둔 종교가 융성했다. 뉴에이지형 종교의 모든 활동양상이나 인간주의적 경계와 영적인 것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든 견해, 혹은 영성과 치료를 결합한 모든 실천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더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전이라면 택하지 않았을 입장에 선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스스로 가톨릭 신자를 자인하면서 그 중추적 교리는 대부분 거부한다. 혹은 기독교와 불교를 조합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의 유무에 확신을 갖지 않은 채 기도한다.

이렇게 보면 테일러가 ‘세속의 시대’에서도 단순히 종교의 쇠퇴설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눈치챘겠지만 테일러의 세속화 논의는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서양 지역을 대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속화 문제를 고려하려면 세계 전체를 시야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최근 이슬람 원리주의의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면 서양에 국한된 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P212

특히 현대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전까지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고 새로운 발상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작업에 딱 들어맞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구체적 상황에만 몰두할 때는 전체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 현상과 거리를 두고 전체를 바라봐야 사물의 본질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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