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년간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신비의 영역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생기론자가 어떤 추측을 할 수 있는 넓은 영역이라고는 이제 주관성ㅡ즉 의식자체ㅡ의 분야 이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P50

인간 중심주의의 환상
이러한 오류의 원천에는 물론 인간 중심주의의 환상이 있다. 태양중심설[지동설], 관성의 개념, 객관성의 원리 등만으로는 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신기루를 없애 버릴 수 없었다. 진화론은 처음에 이 환상을 소멸시키기는커녕, 인간은 전우주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기대되었던 우주 전체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실체를 부여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신은 마침내 죽게 되고 그 대신 이 새롭고 장대한 신기루가 출현하였다. 그 이후로 ‘과학‘의 궁극적인 계획은, 소수의 원리에 입각하고 생물권과 인간을 포함한 실재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통일적인 이론을 엮어내게 될 것이다. 19세기의 과학주의적 진보주의는 바로 이 의기양양한 확신에 의해서 길러진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은 이 통일 이론을 이미 만들어낸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엥겔스가 열역학 제2법칙을 부인하기에 이른 것은 그 법칙이 인간과 인간의 사상이 우주ㅓ적 진보의 필연적 소산이라는 확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연의 변증법》의 서론에서 그것을 부인하고, 또 이 문제에 대하여 열렬한 우주론적 예언을 전개하고 있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그 예언에서 인류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각하는 두뇌‘에 대하여 영겁회귀를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인류의 가장 낡은 신화로의 회귀다.(주: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즉 어떤 방식으로ㅡ어떤 방식인지 명료히 하는 일은 미래의 학자들의 임무가 될 것이다ㅡ공간으로 방사된 열은 필연적으로 다른 운동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또한 그 운동 밑에서 다시 응축하여 활성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죽은 태양이 백열 상태의 성운으로 재전화하는 것을 막는 본질적인 장애가 소멸한다."
"그러나 이 순환 현상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달성될 경우에 그 빈도가 아무리 많더라도, 또 그 엄격함이 아무리 가차없는 것일지라도, 생겨나서는 다시 죽는 태양과 지구의 수가 몇백만이 될지라도, 어떤 태양계 속에서 비록 하나의 혹성상에서만일지라도, 유기체의 생명이 생기는 조건이 갖추어지기 위해서 아무리 긴 세월이 필요할지라도, 먼저 무수히 많은 유기체가 생기고 또 사라진 뒤가 아니면, 그 속에서 사고력을 구비한 두뇌를 가진 동물이 출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또 자신의 생명에 호적한 조건을 찾아낸 것도 일순, 잠시 후에는 그들도 가차없이 전멸되어 버린다 할지라도ㅡ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다. 즉 물질은 그 모든 변화를 통해서 영원히 동일한 그대로며, 그 속성의 어느 하나가 상실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물질이 그 자체의 최고의 개화인 사고하는 정신을 비정(非情)의 필연성으로써 어느 날엔가 지구상에서 근절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물질은 똑같은 필연성으로써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대에 사고하는 두뇌를 재생시키고야 말 것이다."ㅡ(엥겔스, 《자연 변증법》, 보티첼리 역, 파리, 에디션 소설사간, 1952년, pp.45~46) - P64

생물권ㅡ제1원리에서 연역되지 않는 독특한 발생
진화론에 접목된 이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의 신기루가 소멸하는 데는 이것 또한 20세기 후반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가 있다고 믿는다. 즉 어떤 보편적 이론이ㅡ비록 그것이 다른 분야에서는 아무리 완전한 성공을 거둘지라도ㅡ 생물권의 구조와 그 진화를 제1원리에서 연역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 포함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이 명제는 애매하게 보일지도 모르므로 그 점을 명확히 해 보자. 보편적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요컨대 상대론도 양자이론도 소립자이론도 포섭함이 마땅할 것이다. 몇 개의 초기 조건을 정식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 이론은 ‘우주‘의 일반적 진화를 예상하는 우주론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라플라스나 그의 뒤를 이은 19세기의 과학과 ‘유물론‘ 철학이 믿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러한 예상들은 통계학적인 것밖에는 될 수 없다. 아마도 이 이론 속에는 원소의 주기율도 포함될는지 모르나 이 이론으로는 원소 존재의 확률을 각각 결정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이론이 만들어지면 은하계나 태양계 같은 물체의 출현은 예상할 수 있겠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그 제(諸)원리에서 어떤 물체, 어떤 사건, 어떤 특수 현상ㅡ안드로메다 성운이든, 금성이든, 에베레스트 산이든, 지난 밤의 뇌우든ㅡ의 존재의 필연성을 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 이론은 유별(類別)된 물체나 사건 등의 존재나 성질 또는 상호 관계를 예견할 수는 있어도 개별적인 물체나 사건의 존재 또는 특별한 성질 등을 예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 P66

요컨대 이들 후성적 과정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다분자로 되는 복잡한 구조체의 유기적인 전체성은 구성 요소의 구조 속에 각각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구성 요소들이 집합하여야만 비로소 개시되고 현재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추진하여 가면, 전성론자와 후성론자 사이의 오랜 논쟁은 무의미한 입씨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미 완성된 구조는 그러한 형태로는 전에 그 어떤 곳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구조의 설계도는 그 구성요소 자체 속에 존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외부로부터 아무런 개입도 받지 않고, 새로운 정보를 주입하는 일도 없이 자율적이며 자발적인 방식으로 현현화되는 것이다. 어떤 구조가 후성적으로 조립된다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개시인 것이다. - P116

오늘날 모든 종류의 생물에서 추출된 수많은 단백질 중의 아미노산 배열 순서는 수백 종이 알려져 있다. 이 배열 순서의 데이터와 현대적 분석과 계산 수단의 도움을 빌려서 비교 검토해서 이제 일반적 법칙을 연역할 수 있다ㅡ그것은 우연이라는 법칙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2백 개의 아미노산 잔기를 포함하는 한 개의 단백질 속에서 199개의 아미노산 잔기의 배열 순서를 정확히 알고 있어도, 아직 분석에 의해서 동정되지 않은 나머지 1개의 아미노산 잔기의 성질을 예측할 수 있는 이론적 또는 경험적 규칙은 하나도 세울 수가 없다. 그 의미에서 이 구조들은 ‘우연‘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폴리펩티드 중의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가 ‘우연‘이라고 말한대도 ㅡ그 점을 강조하여야 하겠는데ㅡ 그것은 무슨 무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실을 명확히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면 폴리펩티드 속에서, 어떤 아미노산 잔기 다음에 다른 어떤 아미노산 잔기가 계속되는 평균적 빈도는 단백질 일반에 대해서 이 두 아미노산 잔기가 각각 포함되는 평균적 빈도의 쌓임과 같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예증할 수도 있다. 한 장 한 장에 아미노산의 이름을 하나씩 기입한 카드로 트럼프놀이를 한다고 하자. 그리고 카드 2백 장이 한 묶음으로 되어 있으며 그 묶음 속의 각종 카드의 장수는 단백질 중의 각 아미노산의 평균 함유율에 비례된다고 하자. 카드를 끊은 다음에 여러 가지 배열이 우연히 얻어질 것인데, 그것은 자연의 폴리펩티드 속에서 실제로 관찰되는 배열과 조금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의미에서는 단백질의 1차 구조의 어느 것을 보아도 그것은 이용될 수 있는 20종의 아미노산 잔기에서 우연히 선택된 산물처럼 보이지만, 다시 한 번 똑같이 중요한 의미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현재 보여지는 이 배열이 전혀 우연히 합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한편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와 똑같은 순서가 거의 틀림없이 특정한 단백질의 모든 분자 속에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군의 단백질 분자 중의 아미노산 배열 순서를 화학 분석으로 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각 단백질의 ‘우연‘한 아미노산 배열 순서는 각 생물과 각 세포의 각 세대마다 그 구조의 불변성을 확실히 유지하기 위한 매우 정확도가 높은 기구에 의해서 실제로 수천 번이고 수백만 번이고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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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적 종교는 신에 대한 숭배에 초점을 맞춘다. 인본주의적 종교는 인간, 좀 더 정확하게는 호모 사피엔스를 숭배한다. 인본주의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특유의 신성한 성질이 있고 이 성질은 다른 모든 동물이나 다른 모든 현상의 성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믿음이다. 인본주의자는 호모 사피엔스 고유의 성질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그것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최고의 선은 호모 사피엔스의 선이다. 나머지 세상 전부와 여타의 모든 존재는 오로지 이 종을 위하여 존재한다.
모든 인본주의자는 인간성을 숭배하지만 그에 대한 정의는 각기 다르다. 기독교의 경쟁 분파들이 신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인본주의는 ‘인간성humanity’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세 개의 경쟁 분파로 나뉘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성의 신성한 성질은 모든 개별 사피엔스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와 마주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ㅡ인간성의 목소리ㅡ를 들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 P327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인간을 신성시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일신론적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개인의 자유롭고 신성한 본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롭고 영원한 개인의 영혼을 믿었던 전통 기독교에서 직접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런데 영원한 영혼과 창조주 하느님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자유주의자로서 사피엔스 개개인이 뭐 그리 특별한지를 설명하기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진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신성하게 보는 것은 개별 인간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부자가 가난한 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 P328

역사상 모든 지점은 교차로다.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로 밟아온 길은 하나의 갈래였지만, 여기에서부터 미래로는 무수히 많은 갈래의 길이 나 있다. 이 중 일부는 더 넓고 평탄하며 이정표도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될 가능성도 더 크지만, 때때로 역사는 또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ㅡ예상을 벗어나서 움직인다.
4세기가 시작할 무렵 로마 제국 앞에는 다양한 종교적 선택의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다. 제국은 전통적인 다채로운 다신교를 고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내란으로 갈기갈기 찢겼던 지난 세기를 돌아보면서 분명한 교리를 지닌 단일 종교를 믿으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제국을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당대에 있었던 수많은 종교 중 하나를 국교로 삼을 수 있었다. 마니교, 미트라교, 이시스교나 키벨레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심지어 불교도 선택할 수 있었다. - P337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지리적, 생물학적, 경제적 힘은 제약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제약 속에서도 어떤 결정론적 법칙에도 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놀라운 일이 전개될 여지는 매우 많다.
이런 결론은 역사가 결정론적이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결정론은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국민국가에 살며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경제를 조직하고 인권을 열렬하게 신봉하는 것은 역사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결정론적이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권이 우연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없고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level two’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만일 우리가 내일의 석유 가격을 1백 퍼센트 정확히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 가격은 예측에 즉각 반응할 것이고, 해당 예측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가격이 배럴당 90달러인데 내일은 1백 달러가 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옳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예측한다면 어떻게 될까? 거래인들은 그 예측에 따른 이익을 보기 위해 급히 매입 주문을 낼 것이고, 그 결과 가격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배럴당 1백 달러로 치솟을 것이다. 그러면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도 모른다. - P340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가령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하면, 인종의 계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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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제 대답은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비난하는 가족과 친지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볼까요?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경우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좋지 않을 겁니다. 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바꾸기 싫은데 남들이라고 바꾸고 싶겠습니까?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인격체이며 독립해서 활동하는 정보 처리 주체입니다. 이해관계, 경험, 학습, 개인적 성향에 따라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며 똑같은 정보도 다르게 처리합니다. 이미 지니고 있는 인식과 가치관에 잘 들어맞는 정보는 쉽게 수용하지만 날카롭게 충돌하는 정보는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뇌에 ‘폐쇄적 자기 강화 메커니즘’이 있다는 말, 혹시 들어 보셨나요?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믿고 있는 것과 다른 사실, 다른 이론, 다른 해석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이나 글로 남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죠. 사람은 스스로 바꾸고 싶을 때만 생각을 바꿉니다.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열다섯 살이 넘어 뇌가 이미 다 자란 사람은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대화하는 것뿐입니다. 강요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무시하지도 말고, 그 사람의 견해는 그것대로 존중하면서 그와는 다른 견해를 말과 글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남이 내 말을 듣고 곧바로 생각을 바꿀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조각이라도 그 사람의 뇌리에 남아서, 지금 가진 생각에 대해 지극히 사소한 의심이라도 품을 수 있게 한다면 그 대화는 성공한 겁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납니다. 자신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지만, 바꿀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죠. - P95

저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가진 종(種)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불신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이성과 욕망을 다 가진 존재입니다. 욕망은 아름답고 또한 추악합니다. 이성은 고결하지만 때로 나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빛나는 선과 끔찍한 악을 다 저지릅니다. 저는 인간의 사악함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악함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여서 악한 사람 자신도 스스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회악이 생기면 그 원인을 나쁜 사람한테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악이 악한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 P101

지금까지 여러 직업을 거쳤고, 서로 다른 자기소개서를 숱하게 써 본 사람으로서 자기소개서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노파심에서, 뱀다리가 될지도 모를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면 조금은 비굴해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누구에겐가 잘 보이고 싶어서 애쓰는 모습 말입니다. 나는 남들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고 똑같이 귀한 소우주(小宇宙)인데 누구에겐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버둥거리다니,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 들어!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좋은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하면서 존엄을 잃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독립해서 살아가는 철학적 주체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군집(群集)’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며 운명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서로 서로 잘 보여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누군가에게 자기를 제대로 소개하려고 애쓰는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빌며! - P126

독서는 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그 사람이 펼치는 논리, 그 사람이 표현한 감정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평가와 비판은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글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평가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이입해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 자기 자신의 시선과 감정으로 그 간접 경험을 반추해 보는 작업이 비판적 독해라는 말이지요. - P153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죠. 설사 다 읽을 수 있다 해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으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귀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의미도 없고요. 행복하게 살려면 나하고 잘 맞는 사람, 통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해야 합니다. 맞지 않는 사람과 다투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으니까요. 같은 이치로 내게 재미있는 책,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감동받는 책을 읽으면서 사는 게 최선입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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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한대의 자연력, 광활하고 거대한 지형, 잔해가 깔린 해변, 살아 있거나 썩어 가고 있는 나무로 가득한 황야, 뇌운, 3주 동안 계속 내려 홍수를 일으키는 장마를 보고 충전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경계가 침범당하고 우리가 결코 발길을 들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생명체가 자유로이 풀을 뜯고 있는 광경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혐오감을 일으키고 언짢게 만드는 썩은 고기를 독수리가 뜯어먹고 건강과 힘을 얻는 광경을 보면 기분이 나아진다. 집으로 가는 길옆 움푹 패인 땅에 말 시체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종종 다른 길로 가야 했다. 특히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밤이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 광경은 자연의 강한 식욕과 침범할 수 없는 건강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해주었으며, 그것이 내겐 보상인 셈이었다. 나는 자연이 그토록 생명으로 충만하여 수많은 생명체가 희생되고 서로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차라리 기분 좋았다. 왜가리가 먹어치우는 올챙이라든가 길에서 마차에 친 거북과 두꺼비 등등 연약한 유기체가 과육처럼 그토록 평온하게 으스러뜨려질 수 있다는 사실말이다. 때로는 그 살과 피를 비가 씻어주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고를 당할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거기에 설명될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만유의 순결함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독은 결코 유해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상처도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동정이란 근거가 없는 감정일 뿐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이어야만 한다. 그에 대한 변명은 진부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 P386

그러나 우리는 호기심 많은 승객들이 그러하듯 좀더 자주 우리가 탄 배의 고물 난간 너머를 내다봐야 하며, 뱃밥이나 만들고 있는 멍청한 선원들처럼 항해해서는 안 된다. 지구의 반대편은 우리가 편지를 보내는 이의 고향일 뿐이다. 우리의 항해는 대권항해일 뿐이며 의사는 피부병에 대한 처방을 해줄 뿐이다. 기린을 사냥하러 남아프리카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지만, 그가 쫓고자 하는 것은 기린이 아니다. 사람이 기린을 얼마 동안이나 쫓아다니며 사냥하겠는가? 도요새와 멧도요 역시 좋은 사냥감이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자기 자신을 사냥하는 편이 훨씬 더 고귀한 사냥일 것 같다.

"그대의 눈을 내면으로 돌려 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곳을 보게 되리라. 그곳을 여행하라,
그리하여 자신의 우주에 통달하라."

아프리카는 무엇을 표상하며, 서부는 무엇을 표상하는가? 우리 자신의 내면은 해도에 하얀 공백으로 있지 않은가? 발견하고 보면 그것 역시 저 해안처럼 시커멓게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우리가 찾으려는 것이 나일 강과 니제르 강, 미시시피 강의 수원일까? 아니면 이 대륙의 서북항로일까? 과연 그런 것들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일까? 프랭클린만이 길을 잃어 아내가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니는 유일한 인간일까? 그린넬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나 알고 있을까?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강과 바다를 찾아다니는 멍고 파크나 루이스와 클라크, 프로비셔가 될 일이다.
자신의 극지방을 탐험하라. 필요하다면 식량으로 고기 통조림을 한 배 가득 싣고 가되 빈 깡통은 표지가 될 수 있도록 높이 쌓으라. 고기 통조림이 그저 고기를 보존하려고 발명된 것일까? 아니다. 차라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완전한 신대륙과 신세계를 찾아나설 콜럼버스가 되어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 항로를 열라. 사람은 누구나 왕국의 군주이며, 그 앞에서는 러시아 황제의 제국도 한낱 소국, 얼음 위에 솟은 조그만 얼음덩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존경할 줄 모르는 인간이 애국자가 되어 소(小)를 위해 대(大)를 희생시키는 일도 왕왕 벌어지고 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무덤을 만들 땅은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육신에 활력을 넣어 줄 정신에는 아무런 공감도 하지 못한다. 애국심이란 그런 자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구더기에 다름아니다. 그처럼 큰 비용을 들여 화려하게 출항했던 남해 탐험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의미는 단지 정신세계에도 대륙과 바다가 있다는 사실(인간은 누구나 그 정신세계 속에 있는 지협이거나 조그만 만일 뿐이지만, 아직 그 자신이 탐험하지 않은 땅이다), 그리고 각자의 바다, 각자의 대서양과 태평양을 탐험하기보다는 추위와 폭풍과 식인종들과 싸우며 정부의 배를 타고 500명의 선단을 이끌고 수천 마일을 항해하는 편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데 불과하다. - P391

나는 숲에 처음 들어갈 때만큼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숲을 떠났다. 그때 내게는 아직 살아야 할 몇 개의 삶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하나의 삶에 그 이상 많은 시간을 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또 부지불식간에 어느 특정한 길 하나에 들어서서 스스로의 걸음으로 그 길을 다져놓는 것인지 놀라울 정도다. 숲에서 산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내 집 문에서 호숫가까지 내 발걸음으로 길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 길을 밟은 지 벌써 5, 6년이 지났음에도 그 길은 여전히 선명하기만 하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그 길로 접어들어서 그 길이 지금처럼 남아 있도록 거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표면은 부드럽기 때문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다. 그리고 그 점은 마음이 가는 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세상의 큰길은 얼마나 닳고 부스러졌으며, 또 전통과 순응의 바퀴자국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나는 선실 여행보다는 세상의 돛대 앞, 그 갑판 위에 서기를 원했는데, 그 자리에서라면 산 속의 달빛도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배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경험에 의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웠다. 즉, 사람이 자신이 꿈꾸는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면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일은 받아들이고, 어떤 일은 내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게 된다. 요컨대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위와 그의 내부에 확립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의 법칙이 확대되면서 보다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하게 해석됨으로써 보다 높은 존재의 질서에 대한 허락을 받고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삶을 단순화하는 데 비례하여 삼라만상의 법칙은 덜 복잡해질 것이며, 고독도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며 약점도 약점이 아니게 된다. 설혹 공중누각을 세운다 해도 그 일은 헛된 수고가 되지 않는데, 누각이란 것은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아래 기초만 만들면 되는 것이다. - P394

쿠루 시에 완벽을 추구하는 한 예술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지팡이를 하나 깎을 생각을 했다. 불완전한 일에는 시간이 고려할 요인의 하나일 테지만, 완벽한 일에는 시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여긴 그는, 비록 평생 다른 일을 아무것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점에서 완벽한 지팡이를 깎고야 말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적합치 않은 재료는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는 곧 나무를 구하려 숲으로 갔다. 그가 나뭇가지를 살피며 하나하나 퇴짜를 놓는 동안 그의 친구들은 하나씩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것은 그들이 일하다 늙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았다. 그의 일사불란한 결의와 고결한 믿음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영원한 젊음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시간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은 그의 길에서 비켜서서 그 예술가를 굴복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멀리서 한숨만 짓고 있었다. 그가 모든 점에서 적당한 재료를 찾아내기 전에 쿠루 시는 고색창연한 폐허로 변했으며, 그는 그 흙무더기 위에 앉아 나무를 깎았다. 지팡이 모양이 채 갖추어지기 전에 칸다하르 왕조가 멸망했기 때문에 그는 지팡이 끝으로 모래 위에 최후의 왕족 이름을 쓰고는 다시 작업을 계속했다. 그가 지팡이를 매끄럽게 다듬었을 때 칼파는 더이상 지표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지팡이에 물미를 달고 보석 장식을 씌우기 전에 브라마는 잠을 깨었다 다시 잠들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가 마지막 손질을 가했을 때 갑자기 지팡이는 놀란 예술가의 눈앞에서 브라마의 모든 창조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났다. 그는 지팡이를 만들면서 하나씩 새로운 체계, 가득하고도 완벽하게 균형 잡힌 세계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옛날의 도시와 왕조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는 보다 아름답고 더 찬란한 도시와 왕조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기 발치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부스러기더미를 보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한 일과 지금까지 지나간 시간이란 것이 한낱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 그 시간은 브라마의 머리에서 떨어진 하나의 섬광이 인간의 머릿속에 든 부싯깃에 불을 붙이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료가 순수했고 그의 솜씨도 순수했으니, 어떻게 경이롭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으랴?
결국 우리가 어떤 일에 부여할 수 있는 외관이란 것은 진실만큼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진실만이 오래가는 법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현재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엉뚱한 자리에 있다. 우리는 무한한 충동으로 하나의 상황을 상정하고는 그 속에 자신을 집어넣기 때문에 동시에 두 가지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있어서 빠져나오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 우리는 정신이 온전할 때는 사실을, 실재하는 상황만을 염두에 둔다.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말하라. 어떠한 진실도 거짓보다 나은 법이다. 땜장이 톰 하이드는 교수대에 서자 할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이렇게 말했다. "재봉사들에게 바느질을 하기 전에 먼저 실 끝에 매듭짓기를 잊지 말도록 전해 주시오." 그의 동료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는 전해진 바가 없다. - P398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 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군대라도 그 장수의 목숨만 빼앗으면 혼란에 빠뜨릴 수 있지만,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서라도 그 생각을 빼앗을 수는 없다." 많은 감화에 자신을 굴복시켜 가면서까지 스스로를 개발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그것은 낭비일 뿐이다. 겸손은 어둠이 그렇듯이 천상의 빛을 드러내 준다. 가난과 빈약함의 어둠이 주위로 몰려드는 순간, "보라, 삼라만상이 눈앞에 전개되지 않는가!" 설혹 크로이소스의 재산이 주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목적은 여전히 똑같을 것이고, 우리의 수단 역시 본질적으로는 매한가지임을 상기해 보자. 뿐만 아니라, 가난 때문에 활동 범위가 제약되면, 그래서 가령 책이나 신문을 사서 읽을 형편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경험만을 하도록 제한받는 것뿐이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중요한 에센스를 산출할 재료를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주 빈한한 삶이야말로 가장 감미로운 삶이다. 그런 삶에서는 빈둥거릴래야 그럴 수 없다. 낮은 생활 수준에서는 높은 수준의 아량 때문에 잃는 법이 없다. 남아도는 부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것만 살 수 있다. 영혼의 필수품을 사는 데 돈은 필요 없다.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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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00퍼센트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제 경험입니다만, 글에서 본 작가와 실제로 본 작가의 모습이 아주 다른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만요. 한때 힘찬 저항시로 이름을 날렸던 어떤 시인이 실생활에서는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더군요. 섬세하고 나긋한 서정시를 썼던 작가가 알고 보니 권력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속물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작가는 평소에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글을 쓸 때만 경건해지기도 했고, 환경이 바뀌면 행동 양식도 금세 따라 변하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사람에게 복수의 ‘페르소나(인격)’가 있다고 하더군요. 감정이 크게 흔들리면 이성이 힘을 쓰지 못한다고도 하고요.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랍니다. 그러니 자신이든 타인이든, 사람에 대해서 지나친 신뢰를 보내지는 않는 게 현명하겠지요. - P40

그런데 세상에는 시비와 선악과 미추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악한 사람, 추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도 많아요. 악하지 않은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미학적 도덕적 직관 또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영구히 또는 한시적으로 잃어버린다는 것이죠. 왜 그렇게 될까요? 욕망과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감정과 충동은 선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나쁜 것, 고약한 것도 많습니다. 탐욕, 두려움, 시기심과 같은 부정적 욕망과 감정, 충동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압도하면 도덕적 미학적 직관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글 쓰는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 욕망만은 아닙니다.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와 사상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념과 종교의 교조가 도덕적 미학적 직관을 질식시키기도 하거든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역사 사례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자행한 마녀 사냥과 십자군전쟁, 유럽인들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독재와 대숙청,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북한의 우상숭배와 3대 세습, 소위 이슬람국가(IS)의 민간인 참수와 같은 어리석음과 죄악의 배후에는 그것을 정당화한 지식인의 말과 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과 글로 만든 이념과 종교의 도그마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목 졸라 죽였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 P49

예술적으로 쓰고 싶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도그마보다 자기 자신의 눈과 생각, 마음과 감정을 믿는 게 현명합니다. 저에게 진보냐고 묻는 분들, 진보적 원칙을 글쓰기에 어떻게 반영하느냐고 묻는 분들게 솔직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쓸 때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가? 문장이 정확한가? 논리에 결함이 없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인가? 독자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가? 그런 것만 살핍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하면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 근처까지라도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말입니다.
예술은 자유를 먹고 피어납니다. 돈과 권력만 사람의 생각과 감각을 얽어매는 게 아닙니다. 고정관념과 이념의 교조에 생각과 감정이 묶이면 글이 진부해집니다. 빤한 글, 지루한 글, 첫 문장만 보아도 마지막 문장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됩니다. 독창적인, 기발한, 창의적인,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내 이념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헛된 질문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씁니다. - P60

인터뷰이가 말한 그대로 실었다고는 하지만, 제가 <프레시안> 편집자였다면 당사자의 양해를 구해서 표현을 살짝 고쳤을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기사가 나갔습니다. 저는 변영주 감독의 발언 취지에 어느 정도 공감했습니다만 표현 방식은 그리 좋게 보지 않았어요. 책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저자에 대한 험담이 될 수 있는 말이니까요. 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쓰레기 같은 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쓰레기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쓴 사람을 쓰레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글과 사람은 다르거든요. 저는 제가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쓰레기 같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쓴 적이 없다고 자신하지는 못합니다. - P68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는, 운명적인 단독자입니다. 단독자의 삶은 고독합니다. 어떤 말, 어떤 글, 어떤 행동으로도 둘 이상의 단독자가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면서 교감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홉 개의 악플을 흘려보낸 끝에 정상적인 댓글 하나를 찾고 좋아합니다. 알고 지내는 사람 열 가운데 단 하나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인생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타인에 대한 기대 수준을 바닥으로 내리는 것을 현명한 처세술로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악플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악플 세례를 받은 끝에 제가 발견한 정신승리법입니다. 저는 악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악플 때문에 자기 검열을 하지도 않습니다. 제 취향대로 글을 쓰고, 제 감정과 생각을 타인과 나누면서, 제 색깔대로 살아갑니다. ‘치열한 무플’로 악플의 파도와 싸우면서!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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