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년간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신비의 영역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생기론자가 어떤 추측을 할 수 있는 넓은 영역이라고는 이제 주관성ㅡ즉 의식자체ㅡ의 분야 이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P50

인간 중심주의의 환상
이러한 오류의 원천에는 물론 인간 중심주의의 환상이 있다. 태양중심설[지동설], 관성의 개념, 객관성의 원리 등만으로는 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신기루를 없애 버릴 수 없었다. 진화론은 처음에 이 환상을 소멸시키기는커녕, 인간은 전우주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기대되었던 우주 전체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실체를 부여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신은 마침내 죽게 되고 그 대신 이 새롭고 장대한 신기루가 출현하였다. 그 이후로 ‘과학‘의 궁극적인 계획은, 소수의 원리에 입각하고 생물권과 인간을 포함한 실재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통일적인 이론을 엮어내게 될 것이다. 19세기의 과학주의적 진보주의는 바로 이 의기양양한 확신에 의해서 길러진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은 이 통일 이론을 이미 만들어낸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엥겔스가 열역학 제2법칙을 부인하기에 이른 것은 그 법칙이 인간과 인간의 사상이 우주ㅓ적 진보의 필연적 소산이라는 확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연의 변증법》의 서론에서 그것을 부인하고, 또 이 문제에 대하여 열렬한 우주론적 예언을 전개하고 있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그 예언에서 인류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각하는 두뇌‘에 대하여 영겁회귀를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인류의 가장 낡은 신화로의 회귀다.(주: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즉 어떤 방식으로ㅡ어떤 방식인지 명료히 하는 일은 미래의 학자들의 임무가 될 것이다ㅡ공간으로 방사된 열은 필연적으로 다른 운동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또한 그 운동 밑에서 다시 응축하여 활성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죽은 태양이 백열 상태의 성운으로 재전화하는 것을 막는 본질적인 장애가 소멸한다."
"그러나 이 순환 현상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달성될 경우에 그 빈도가 아무리 많더라도, 또 그 엄격함이 아무리 가차없는 것일지라도, 생겨나서는 다시 죽는 태양과 지구의 수가 몇백만이 될지라도, 어떤 태양계 속에서 비록 하나의 혹성상에서만일지라도, 유기체의 생명이 생기는 조건이 갖추어지기 위해서 아무리 긴 세월이 필요할지라도, 먼저 무수히 많은 유기체가 생기고 또 사라진 뒤가 아니면, 그 속에서 사고력을 구비한 두뇌를 가진 동물이 출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또 자신의 생명에 호적한 조건을 찾아낸 것도 일순, 잠시 후에는 그들도 가차없이 전멸되어 버린다 할지라도ㅡ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다. 즉 물질은 그 모든 변화를 통해서 영원히 동일한 그대로며, 그 속성의 어느 하나가 상실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물질이 그 자체의 최고의 개화인 사고하는 정신을 비정(非情)의 필연성으로써 어느 날엔가 지구상에서 근절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물질은 똑같은 필연성으로써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대에 사고하는 두뇌를 재생시키고야 말 것이다."ㅡ(엥겔스, 《자연 변증법》, 보티첼리 역, 파리, 에디션 소설사간, 1952년, pp.45~46) - P64

생물권ㅡ제1원리에서 연역되지 않는 독특한 발생
진화론에 접목된 이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의 신기루가 소멸하는 데는 이것 또한 20세기 후반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가 있다고 믿는다. 즉 어떤 보편적 이론이ㅡ비록 그것이 다른 분야에서는 아무리 완전한 성공을 거둘지라도ㅡ 생물권의 구조와 그 진화를 제1원리에서 연역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 포함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이 명제는 애매하게 보일지도 모르므로 그 점을 명확히 해 보자. 보편적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요컨대 상대론도 양자이론도 소립자이론도 포섭함이 마땅할 것이다. 몇 개의 초기 조건을 정식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 이론은 ‘우주‘의 일반적 진화를 예상하는 우주론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라플라스나 그의 뒤를 이은 19세기의 과학과 ‘유물론‘ 철학이 믿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러한 예상들은 통계학적인 것밖에는 될 수 없다. 아마도 이 이론 속에는 원소의 주기율도 포함될는지 모르나 이 이론으로는 원소 존재의 확률을 각각 결정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이론이 만들어지면 은하계나 태양계 같은 물체의 출현은 예상할 수 있겠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그 제(諸)원리에서 어떤 물체, 어떤 사건, 어떤 특수 현상ㅡ안드로메다 성운이든, 금성이든, 에베레스트 산이든, 지난 밤의 뇌우든ㅡ의 존재의 필연성을 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 이론은 유별(類別)된 물체나 사건 등의 존재나 성질 또는 상호 관계를 예견할 수는 있어도 개별적인 물체나 사건의 존재 또는 특별한 성질 등을 예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 P66

요컨대 이들 후성적 과정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다분자로 되는 복잡한 구조체의 유기적인 전체성은 구성 요소의 구조 속에 각각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구성 요소들이 집합하여야만 비로소 개시되고 현재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추진하여 가면, 전성론자와 후성론자 사이의 오랜 논쟁은 무의미한 입씨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미 완성된 구조는 그러한 형태로는 전에 그 어떤 곳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구조의 설계도는 그 구성요소 자체 속에 존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외부로부터 아무런 개입도 받지 않고, 새로운 정보를 주입하는 일도 없이 자율적이며 자발적인 방식으로 현현화되는 것이다. 어떤 구조가 후성적으로 조립된다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개시인 것이다. - P116

오늘날 모든 종류의 생물에서 추출된 수많은 단백질 중의 아미노산 배열 순서는 수백 종이 알려져 있다. 이 배열 순서의 데이터와 현대적 분석과 계산 수단의 도움을 빌려서 비교 검토해서 이제 일반적 법칙을 연역할 수 있다ㅡ그것은 우연이라는 법칙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2백 개의 아미노산 잔기를 포함하는 한 개의 단백질 속에서 199개의 아미노산 잔기의 배열 순서를 정확히 알고 있어도, 아직 분석에 의해서 동정되지 않은 나머지 1개의 아미노산 잔기의 성질을 예측할 수 있는 이론적 또는 경험적 규칙은 하나도 세울 수가 없다. 그 의미에서 이 구조들은 ‘우연‘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폴리펩티드 중의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가 ‘우연‘이라고 말한대도 ㅡ그 점을 강조하여야 하겠는데ㅡ 그것은 무슨 무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실을 명확히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면 폴리펩티드 속에서, 어떤 아미노산 잔기 다음에 다른 어떤 아미노산 잔기가 계속되는 평균적 빈도는 단백질 일반에 대해서 이 두 아미노산 잔기가 각각 포함되는 평균적 빈도의 쌓임과 같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예증할 수도 있다. 한 장 한 장에 아미노산의 이름을 하나씩 기입한 카드로 트럼프놀이를 한다고 하자. 그리고 카드 2백 장이 한 묶음으로 되어 있으며 그 묶음 속의 각종 카드의 장수는 단백질 중의 각 아미노산의 평균 함유율에 비례된다고 하자. 카드를 끊은 다음에 여러 가지 배열이 우연히 얻어질 것인데, 그것은 자연의 폴리펩티드 속에서 실제로 관찰되는 배열과 조금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의미에서는 단백질의 1차 구조의 어느 것을 보아도 그것은 이용될 수 있는 20종의 아미노산 잔기에서 우연히 선택된 산물처럼 보이지만, 다시 한 번 똑같이 중요한 의미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현재 보여지는 이 배열이 전혀 우연히 합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한편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와 똑같은 순서가 거의 틀림없이 특정한 단백질의 모든 분자 속에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군의 단백질 분자 중의 아미노산 배열 순서를 화학 분석으로 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각 단백질의 ‘우연‘한 아미노산 배열 순서는 각 생물과 각 세포의 각 세대마다 그 구조의 불변성을 확실히 유지하기 위한 매우 정확도가 높은 기구에 의해서 실제로 수천 번이고 수백만 번이고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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