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는 종종 가장 감미롭고 다감하며 순수하고 힘을 북돋워 주는 교제를 자연 속의 대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는데, 그건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는 가엾은 사람이나 몹시 우울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 속에 살면서 평온한 감각을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란 있을 수 없다. 건강하고 순결한 이의 귀에는 폭풍도 이올리안의 음악 소리로 들리리라. 소박하고도 용기 있는 사람을 천박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 데도 없다. 내가 계절과의 우정을 즐기는 동안 그 어떤 것도 삶을 짐스럽게 만들 수는 없으리라. 오늘 콩밭에 물을 주는 이슬비로 나는 집 안에 박혀 있었음에도 결코 따분하다거나 우울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비록 비 때문에 콩밭을 매지는 못했지만 그건 잡초를 뽑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만일 비가 계속 내려서 땅에 묻은 씨앗이 썩고 저지대에 심은 감자를 버리게 된다 해도, 그 비는 고지대의 풀에는 유익하며 풀에 유익하다면 내게도 좋은 것이리라. - P158

사람들은 종종 내게, "그곳에서 외로우시겠군요. 특히 눈이나 비가 오는 날과 밤이면 사람이 가까이 있었으면 하실 테죠?" 하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ㅡ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주 속의 점 하나일 뿐이오. 우리가 가진 도구로는 도무지 폭을 알 길 없는 저 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주민이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는 것 같소? 그러니 어째서 내가 외롭다고 느껴야 하오? 우리 행성이 은하수에 있기라도 하단 말이오? 당신이 방금 던진 질문은 내가 보기엔 그다지 중요한 질문 같지 않구려. 사람을 동료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외롭게 만드는 건 대체 어떤 공간이겠소? 나는 아무리 두 다리로 애를 써봤자 두 마음이 서로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살고 싶어하는 것이 뭐겠소? 분명 많은 사람들 곁은 아닐 거요. 역이나 우체국, 술집, 공회당, 학교, 식품점,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비콘 힐이나 파이브 포인츠 같은 곳도 아닐 것이오. 그보다는 버드나무가 물가에 서서 그쪽으로 뿌리를 뻗듯이 모든 경험에서 볼 때 생명을 분출하는 영구적인 원천 가까이에 있고 싶어할 거요. 그곳이 어디인가는 각자의 본성에 따라 다를 테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곳에다 자신의 지하광을 팔 거요……. - P161

나는 보다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는 일이 유익함을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상대라도 함께 있으면 이내 싫증이 나고 좋아하는 감정도 식게 마련이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고독만큼 상대하기 좋은 친구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대부분 방에 박혀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섞일 때 훨씬 더 외로움을 느낀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늘 혼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독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북적거리는 교실에서라도 정말로 공부에 전념하는 학생이라면 사막의 탁발승만큼이나 격리된 셈이다. 농부는 하루 종일 혼자서 들이나 숲에서 김을 매거나 나무를 베며 지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데 그것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온 농부는 방 안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기지 못하고, ‘사람들을 볼’ 수 있고 기분전환을 할 만한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온종일 혼자 지낸 데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학생이 어떻게 밤이든 낮이든 집에 혼자 있으면서 권태와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 건지 의아해한다. 농부는 학생이 집 안에 있더라도 농부가 그렇듯 자신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자신의 숲에서 나무를 베고 있는 것임을, 그리고 비록 좀더 응결된 형태이긴 해도 역시 농부처럼 기분전환과 교제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 P163

그의 내면에는 아주 작은 것이긴 해도 어떤 긍정적인 창의성이 엿보였으니, 나는 종종 그가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는 것을 관찰 끝에 알아냈다. 그런 현상은 아주 희귀한 것이어서 그것을 관찰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10마일을 걸을 용의가 있다. 그의 경우는 갖가지 사회제도를 재창조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종종 주저하며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지는 못했으나 그는 언제나 배후에 그럴싸한 사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고라는 것이 너무도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삶에 묻혀 있어서, 비록 한낱 학식만 갖춘 인산의 사고보다 더 유망한 것이긴 해도 다른 사람에게 발표할 만큼 성숙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신분에 평생 무식한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더라도 인생의 최하층에 비범한 인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거나, 또는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의 생각은 비록 어둡고 탁할지 몰라도 월든 호수만큼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 P182

어느 날, 온순하고 지능이 모자라는 한 빈민이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종종 그가 들판에서 소 떼와 그 자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 있거나 통에 앉은 채 울타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내게 자기도 나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겸손이라는 것을 훨씬 능가하거나 아니면 한참 미달하는 극도의 단순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내게 말하기를, 자신은 "지능에 결함이 있다"고 했다. 그건 그가 쓴 표현이었다. 하느님이 원래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남들만큼 자신을 걱정해 준다고도 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전 언제나 그랬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이에요. 한 번도 정신이 온전한 적이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 같지 않았죠. 전 머리에 문제가 있어요. 그건 하느님의 뜻일 테죠." 그리곤 자기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는 내겐 몹시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나는 이처럼 유망한 바탕을 지닌 사람을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한 모든 말은 너무나 소박하고 진지하고 진실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스스로를 낮춘 그 비율만큼이나 고귀해 보였다. 나는 처음엔 몰랐지만, 그것이야말로 현명한 처신에서 우러난 결과였다. 지능이 떨어지는 이 가엾은 친구가 마련해준 진실과 정직을 기반으로 하면 우리의 교제도 현자들 간의 교제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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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우리가 웅변가의 유창한 언변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하더라도 가장 고귀한 문어는 대부분의 경우 덧없는 구어의 저 멀리 훨씬 위쪽에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별이 가득한 하늘이 구름 저편에 있는 것과 같다. 별들이 있으면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천문학자들은 끊임없이 별들을 설명하고 관찰한다. 문어는 우리가 매일같이 나누는 말이나 덧없는 숨결과 같은 무의식적인 발산물이 아니다. 광장의 웅변이라는 것은 대부분 서재에서 볼 때는 한낱 수사에 불과하다. 웅변가는 한순간의 행사에 떠오르는 영감에 몸을 맡기고 눈앞에 있는 군중을 향해, 요컨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을 한다. 그에 반해 작가는 보다 평온한 삶이 그의 행사인 셈이고 웅변가를 자극하는 사건이나 군중은 오히려 그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 뿐이며, 인류의 지성과 치유를 위해,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시대를 가리지 않고 말을 거는 사람이다. - P123

책은 세계의 소중한 재산이며 세대와 민족의 온당한 유산이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그곳 선반에는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서적들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게 마련이다. 책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지만, 그것이 독자를 계발시키고 고무시키는 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책의 저자들은 어느 사회에서든 자연스럽고도 매혹적인 엘리트로서, 왕이나 황제 이상으로 인류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책을 경멸하는 무식한 장사꾼이 모험심과 근면함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여유와 자립을 성취하여 부와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면, 마침내 어쩔 수 없이 더욱 높고 그러면서도 아직 다가갈 수 없는 지성과 천재의 사회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그럴수록 자신의 불완전한 교양과 자신이 소유한 부가 얼마나 공허하고 불충분한 것인지를 통감한다. 이때 그는 뛰어난 판단력으로 자식들에게 자신이 그토록 결핍을 느꼈던 지적 교양을 마련해 주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결국 그는 한 가문의 창시자가 되는 것이다. - P12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신의 삶에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지금까지의 기적을 설명하고 새로운 기적을 보여줄 책이 우리를 위해 어딘가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어딘가에 표현돼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를 혼란케 하고 어리둥절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과거의 모든 현자들도 직면한 적이 있었다. 어느 한 문제도 빠지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현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삶으로 그 문제들에 해답을 주었다. 나아가서 우리는 책에서 지혜와 더불어 관대함도 배우게 될 것이다. 콩코드 교외 농장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은(그는 제2의 탄생과 독특한 종교적 체험을 거쳐 자신의 신앙에 따라 말없는 엄숙함과 배타성을 신조로 삼게 된 사람인데)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천 년 전 조로아스터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걷고 똑같은 체험을 했지만, 그럼에도 현명한 그는 그 일이 보편적인 것임을 깨닫고 그에 따라 이웃을 대하고 하나의 종교를 창시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용살이를 하는 그로 하여금 겸손하게 조로아스터와 벗삼도록 하면 어떨까? 그리고 모든 위인들의 관대한 감화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도 알도록 해주면 어떨까? 그래서 ‘우리 교회’라는 말은 아예 떼어 버리도록 하면 어떨까? - P130

나는 삶의 여백을 아낀다. 여름날 아침에는 습관이 된 목욕을 마친 후 해뜰녘부터 정오까지 볕 잘 드는 문간에 앉아 소나무와 히코리나무, 옻나무에 둘러싸여 평온한 고독과 정적 속에서 몽사에 잠기곤 했다. 새들이 지저귀며 소리 없이 집 안을 날아다녔다. 그러다 서쪽 창으로 햇빛이 들거나 큰길을 지나는 여행자의 마차 소리에 문득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이런 계절이면 나는 하룻밤 사이에 크는 옥수수만큼이나 쑥쑥 자랐으며, 손으로 어떤 노동을 했을 때보다도 훨씬 훌륭한 시간이었다. 그것은 내 삶에서 공제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여느 때의 할당량을 훨씬 초과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동양인들이 명상에 잠기느라 일을 하지 않는 참뜻을 이해했다. - P135

그 다음으로 스페인 산 생가죽이 실려 있는데, 그 꼬리는 소들이 스페니시 메인의 대초원을 질주할 때의 모양 그대로 위를 향해 구부러져 있다. 요컨대 이것은 모든 고집의 표본으로서, 타고난 모든 악덕이 얼마나 고치기 힘든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자리에서 고백컨대,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누군가의 진정한 성품을 알게 됐을 경우 현재의 상태에서 더 좋은 것으로든 나쁜 것으로든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동양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개의 꼬리를 불에 구워 눌러놓고 끈으로 칭칭 감아놓는 일을 12년 동안 반복하더라도 원래의 형태를 유지할 것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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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라니! 시간이 흘러도 결코 낡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그것보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위나라의 재상 거백옥은 공자에게 사람을 보내 근황을 알아보게 했다. 공자가 그 사자를 가까이 앉히고 이렇게 물었다. "그대의 주인은 뭘 하고 계시오?" 사자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제 주인님은 자신의 허물을 줄이고자 하시지만 그 일이 끝이 없나이다." 사자가 가고 나자 그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사자로구나! 정말 훌륭한 사자로다!" - P113

우리 뉴잉글랜드 주민들이 이처럼 비천한 삶을 영위하는 것 역시 우리의 눈이 사물의 표면을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실재일 거라고 생각한다. 만일 오직 사실만을 볼 줄 아는 누군가가 있어 마을 안을 돌아다닌다면 마을의 물방아둑은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이 우리에게 자신이 본 사실을 알려 준다 해도 우리는 그가 말하는 물방아둑이 어디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공회당이나 군청, 구치소, 상점, 집들을 보고 진정한 눈으로 응시할 경우 그것들이 무엇처럼 보일지를 말해 보라. 그러면 그것들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것들 모두가 산산조각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가 멀리 있다고, 천체의 바깥이나 가장 먼 별의 저편, 아담 이전에 있었거나 최후의 인간 이후에나 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영원에는 뭔가 참되고 숭고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지금 이곳이다. 하느님 자신도 현재라는 순간에 완결되는 것이며 그 어느 시대에도 지금보다 더 거룩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 흠씬 젖어듦으로써만 숭고하고 고귀한 것을 파악할 수가 있다. 우주는 끊임없이 또한 유순하게 우리의 생각에 응답해 준다. 우리가 빠르게 가든 느리게 가든 언제나 우리의 길은 마련돼 있다. 그렇다면 생각하면서 삶을 영위하도록 하자. 어떤 시인이나 예술가의 구상이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해서 후손이 완성시킬 수 없을 정도였던 적은 없었다. - P115

이제 차분하게 자리를 잡고 일을 하면서 두 발을 의견, 선입견, 전통, 망상, 허상 따위의 진흙밭 깊숙이 집어넣자. 파리와 런던, 뉴욕과 보스턴과 콩코드, 교회와 국가, 시와 철학과 종교를 통틀어 이 지구를 덮고 있는 그 퇴적물들 속으로. 그러다 보면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단한 바닥에 이르러, 바로 여기가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나서 지지점이 생겼을 때 홍수와 서리와 불 밑에 벽이나 국가를 세울 만한 자리를, 가로등 기둥이나 측량기를 세울 만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하자. 나일강 수위를 재기 위한 측량기가 아니라 진실을 측량하기 위한 계기를 말이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이 기만과 겉치레의 홍수가 얼마나 범람했던지를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만약 당신이 똑바로 서서 사실을 대면하면 흡사 언월도(偃月刀)라도 되듯 그 사실의 양면에 번쩍이는 햇살을 보게 될 것이며, 그 예리한 날이 당신의 심장과 골수를 자르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행복하게 지상에서의 운명을 마치게 될 것이다. 삶이 됐든 죽음이 됐든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오로지 진실뿐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 죽어 가고 있는 거라면 목구멍 안에서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을 테고 임종의 싸늘함도 느낄 수 있으리라. 우리가 살아 있는 거라면 부지런히 할 일을 하도록 하자. - P116

우리 자신 또는 후손을 위해 재산을 모으거나 가정이나 국가를 세우거나 명성을 얻어도 우리는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지만, 진리를 다룸에 있어서는 불멸이나 다름없으며 그 어떤 변화나 불의의 사고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고대 이집트 인이 아니면 인도인 철학자가 신의 조각상에서 베일의 한 자락을 들쳐 올렸는데, 그 떨리는 옷자락은 여전히 들려 있는 채로 남아 있으며 나는 지금도 그 철학자가 그랬듯 신선한 영광을 응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그토록 대담했던 것은 바로 그의 안에 있는 나 자신이었고, 지금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자는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옷에는 그 사이 먼지 하나 앉지 않았다. 신성이 발견된 이래로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개선하고 또 개선할 수 있는 시간은 과거나 현재, 미래가 아니다. - P120

그리스어로 호머나 아이스킬로스를 읽는 학생이라면 방탕이나 사치에 빠질 염려가 없을 텐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본뜨려 할 테고 아침나절을 그들의 저서로 신성하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설혹 우리 모국어로 인쇄된 것일지라도 이 영웅시들은 타락한 이 시대에는 죽은 말로 된 듯이 읽힐 것이다.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 같은 단어에서도 우리의 일상 용법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그 낱말이나 행 하나하나의 의미를 애써 판독해야 한다. 오늘날 번역본의 값도 더 내려가고 인쇄물도 풍부해졌지만 그렇다고 이 고대의 영웅시 작가들이 좀더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그들과 그들의 글은 예전에 그랬던 만큼이나 진기하고 유별나 보인다.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으로 고대의 언어를 몇 마디 배우기만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 언어는 거리의 진부함에서 벗어나 영원한 암시와 자극을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농부가 주워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기억해서 암송하는 것도 헛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현대의 보다 실질적인 학문을 위한 길이 되어 줄 것처럼 말하곤 하지만, 모험심에 넘치는 학생이라면 그것이 어떤 언어로 씌어지고 그 언어가 얼마나 오래된 것이든 상관없이 고전을 공부할 것이다. 고전이란 인간의 사상 중에 가장 고귀한 내용을 기록한 것에 다름아닐 테니까. 고전은 사멸되지 않은 유일한 신탁이며 가장 현대적인 질문에도 델포이나 도도나 신전조차 주지 못한 해답을 줄 것이다. 자연이 오래된 것이라 해서 자연을 공부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책을 잘 읽는 일, 다시 말해서 참된 정신으로 참된 책을 읽는 일은 숭고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관습이 존중하는 그 어떤 운동보다도 힘든 일이다. 그 일은 운동선수가 하는 것만큼 훈련을 필요로 하며, 독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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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가지를 치는 사람이 천 명이라면 악의 근원을 꺾는 이는 한 사람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 사람이 어쩌면 자신의 생활방식을 통해 그가 구하고자 하는 그 비참한 상황을 가장 열심히 더 만들어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 명의 노예를 판 수익금으로 나머지 아홉 명의 노예들에게 일요일만 자유를 주는 위선적인 노예 주인과 다를 바 없다. 또 가난한 사람에게 부엌일을 시킴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일은 자신이 하는 편이 훨씬 더 자비로운 일이 아닐까? 사람들은 수입의 10분의 1을 자선에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차라리 수입의 10분의 9를 자선에 쓰고 그 일에서 아예 손을 떼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결국 사회는 재산의 10분의 1만을 회수하는 셈이다. 이것을 재산가의 관용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사법 관리의 태만으로 봐야 할까? - P88

나는 자선에 의당 따라야 할 찬사를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바쳐 인류에게 축복을 안겨준 모든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기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나는 인간에게서 고결한 행위와 자비로운 마음을 가장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데, 그것들은 이를테면 인간의 줄기와 잎에 해당한다. 그 풀이 시들면 사람들은 환자를 위한 비천한 용도로, 그것도 주로 돌팔이 의사들이 애용하는 약초로 쓰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꽃과 열매다. 인간의 향기가 내게 풍겨 오기를, 그 성숙함으로 우리들의 인간 관계에 풍미를 더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인간의 선함이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행위여서는 안 되며, 그것은 늘 남아도는 것, 그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의식적이지도 않은 행위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죄를 감춰 주는 박애다. 자선가 자신이 헤어난 슬픔에 대한 기억으로 마치 공기처럼 인간을 감싸면서 그것을 연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용기를, 질병이 아니라 건강과 안정을 함께 나눠야 하며 질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저 울부짖는 소리는 남부의 어느 평원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가 빛으로 인도할 이방인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우리가 구제해야 할 저 사납고 무지막지한 인간은 누굴까? 몸이 아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심지어 복통만 일어나도(위장이야말로 동정심이 생기는 곳이니까) 그는 즉각 세상을 시정하려 들게 마련이다. 자신이 우주의 축소판인 그는 세상이 풋사과를 먹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발견이며, 그가 바로 그 발견의 장본인이다). 실제로 그의 눈에는 지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풋사과이며, 인간의 아이들이 채 익기도 전에 갉아먹을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끔찍스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즉각 과감한 박애정신을 발휘하여 에스키모 인과 파타고니아 인을 찾아내고 인구가 밀접한 인도와 중국의 촌락들을 포옹한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자선활동을 벌이고 나면(강대국들은 그런 그를 자기들 목적에 이용한다) 그의 소화불량은 낫게 되고 지구는 흡사 익어 가는 과일처럼 볼이 발그레해지며 삶은 미숙함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감미롭고 살 만한 것이 된다. 결국 내가 저지른 짓이야말로 극악무도한 행위인 셈이다. 또한 나보다 더 악한 자는 과거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P90

인간의 관습은 성자들과의 관계로 오염되고 말았다. 우리의 찬송가집은 하느님에 대한 저주와 영원한 인내의 선율을 반향하고 있다. 예언자와 구원자들조차 인간의 희망을 확립시켰다기보다는 두려움을 달래주는 데 그쳤던 것 같다.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소박하면서도 억누를 길 없는 만족감이나 하느님에 대한 기념할 만한 찬미를 기록한 내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건강이나 성공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내게 유익한 것이지만, 모든 질병과 실패는 그것이 내게 또는 내가 그것에 아무리 많은 동정을 품더라도 결국 나를 슬프게 하고 유해한 것이다. 요컨대 만약 진실로 인디언답게, 또는 식물답게, 혹은 매혹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수단을 동원해서 인류를 회복시키고자 한다면 우선 자연 그 자체처럼 소박하고 넉넉해지도록 하자. 우리의 이마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몰아내고 숨구멍마다 조금이나마 생명력을 불어넣어 보자. 가난한 자의 감독이 되려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자. - P91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숲속에 널찍하고 반들반들하게 길을 닦아 삶을 맨 안쪽까지 몰아붙인 다음 가장 비천한 상태까지 내몰아 그 삶이 정말 비천하다고 판명날 경우 삶의 모든 천박함을 있는 그대로 뽑아서 온 세상에 공표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그 삶이 숭고한 것이라면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알고 싶고 다음번 여행 때에는 그것에 대하여 진정한 얘기를 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악마의 것인지 하느님의 것인지 이상하리만큼 확신하지 못하면서 다소 성급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원토록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이승을 사는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 P108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쫓기듯이 삶을 영위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일까? 우리는 허기가 지기도 전에 벌써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아홉 바늘의 수고를 덜어 준다고 하면서 내일 아홉 바늘의 수고를 덜기 위해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정작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도저히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교회에 걸린 종줄을 몇 번 당기기만 해도 채 종이 울리기도 전에 콩코드 외곽 농장에 있던 남자든(오늘 아침만 해도 수없이 온갖 약속을 둘러대며 바쁜 시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애든 여자든 할 것 없이 모든 일을 팽개치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것은 주로 화재에서 재산을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하자면 불난 구경을 하기 위해서(왜냐하면 어차피 불이 난 이상 타버릴 테고 우리가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니까), 또는 불끄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한몫 거들기 위해서일 것이다(그 일이 제대로 된다면 말이지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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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어느 누구도 속일 수 없는 보편적인 법칙이며 철도에 관해서도 결국은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이용할 수 있도록 세계 곳곳에 철도를 까는 일은 곧 지구 표면을 평평하게 만드는 일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주식으로 자금을 모아 삽질을 계속하기만 하면 마침내 모두가 어디든 순식간에 무료로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생각하지만, 군중이 역에 몰려들고 차장이 "발차!"를 외치고 기관차의 김이 물방울로 가라앉고 나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기차에 치이는 사건이 생길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그 일은 ‘하나의 슬픈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요행히 그때까지 살아 있고 차비도 벌어놓은 사람이라면 기차를 탈 수 있을 테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신체적 탄력을 잃고 여행 의욕도 사라져 있을 것이다. 인생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도 줄어들었을 노년기에 불확실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돈을 버느라 인생의 황금기를 탕진한다는 것은, 훗날 고국으로 돌아가 시인으로 살겠다는 생각에서 먼저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가는 영국인을 연상시킨다. 그 영국인은 인도에 갈 것이 아니라 당장 다락방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 땅의 판잣집에 사는 수많은 아일랜드 인들은 놀라 외칠지 모른다. "뭐라고? 우리가 건설한 철도가 좋은 게 아니란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아니, 철도는 좋은 것이다. 비교적 좋단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들은 이보다 더 무가치한 일에 종사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동포인 여러분에게 바라건대, 지금 이렇게 땅을 파는 것보다는 좀더 나은 일에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것이다." - P63

나는 사람이 가축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가축이 사람의 주인이며, 가축 쪽이 사람보다 훨씬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소는 서로 일을 교환하는 것이지만, 필요한 일만 생각해 볼 때는 소가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농장이 더 넓은 것이다. 사람은 교환한 일의 일부로 6주 동안 건초 작업을 하는데 그건 결코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나라, 즉 철학자의 국가라면 가축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 같은 엄청난 실수는 범하지 않으리라. 물론 철학자의 국가는 과거에도 없었고, 조만간 생겨날 가망도 없으며, 또 그런 국가가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내게 해 줄 노동의 대가로 말이나 소를 길들여 내 집에 하숙시키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칫하면 내가 마부나 목동으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설혹 그 일에서 사회가 이득을 보는 듯이 보인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자. 한쪽의 이득이 다른 쪽에게는 손실이 되지 않는다고, 마부소년이 주인과 똑같이 만족할 이유가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어떤 공공사업을 가축의 도움 없이는 이룩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업의 영광을 소와 말과 더불어 누리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좀더 가치 있는 사업을 이룩할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이 가축의 도움을 받아 불필요하고 기교적인 일뿐 아니라 사치스럽고 무익한 일까지 하기 시작한다면, 그 중 몇몇은 소와 맞바꾼 노동을 전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가장 강한 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동물을 위해 일할 뿐 아니라 그 상징물인 외부에 있는 동물을 위해서도 일을 한다. - P66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신념과 경험 두 가지 모두에 의해, 소박하고 현명하게만 산다면 이승에서 한 사람이 먹고사는 일은 힘겨운 일이 아니라 유희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소박한 민족이 영위하는 직업이라는 것이 아직도 인위적인 민족의 경우에는 스포츠인 것과 마찬가지다. 나보다 더 쉽게 땀을 흘리는 사람이 아닌 한 꼭 이마에 땀을 흘려 가며 생계비를 벌 필요는 없다.
내가 아는 한 젊은이가 유산으로 몇 에이커의 땅을 물려받았는데, 자기는 그럴 방도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결코 누구도 내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내 생활방식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방식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이유말고도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부모나 이웃의 생활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생활방식을 신중하게 찾아서 추구하기를 바란다. 젊은이는 건축가도 농부도 선원도 될 수 있다. 다만 그가 하고 싶다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만은 없도록 하자. 선원이나 도망중인 노예가 북극성을 지표로 삼듯이 우리는 정확한 한 점을 지표로 삼을 때만 현명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평생의 길잡이로 삼기에 충분하다. 그것만 있다면 예정된 시일 안에 목표로 삼은 항구에 도착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올바른 항로를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 P83

그러나 그런 삶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다. 사실이지 나는 지금껏 자선사업에 그다지 관여한 적이 없음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는 바이다. 나는 일종의 의무로 몇 가지를 희생시켰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자선의 즐거움을 희생시켰다. 마을의 몇몇 가난한 가정을 돕도록 만들려고 온갖 방법으로 나를 설득하려 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면 어쩌면 심심풀이 삼아서라도 그 일에 손을 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가한 자에게는 악마가 일거리를 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 일에 관여하여 모든 면에서 내가 자립한 것만큼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에 의무를 지워볼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제안해 보기까지 했지만, 모두들 주저없이 가난한 채로 그대로 살겠노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처럼 많은 방법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 한 사람쯤 인도적인 일과는 거리가 먼 다른 일을 해도 좋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자선에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 선행이라는 일자리는 이미 만원이다. 게다가 나도 그 일이라면 꽤 해본 편인데,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일이 내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선행을 하기 위해, 또는 세상을 파멸로부터 건지기 위해 나만의 소명을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어딘가 이 세상과 비슷하면서도 거의 무한대로 더 큰 어떤 불변성이 있어 현재의 세상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일에 소질이 있다면 막을 생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양하는 이 일에 성심껏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지만 훗날 세상이 그 일을 나쁘다고 하더라도 결코 굴하지 마시오, 라고.
난 결코 내 경우가 특별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독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변명을 늘어놓을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는(이웃들이 그 일을 선한 일이라고 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그 일에 적임자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지만, 그 일이 어떤 것인지는 내 고용주가 찾아내야 할 것이다. 평범한 의미에서 내가 어떤 좋은 일을 하느냐는 내게는 논외의 일이며, 설혹 그것이 좋은 일이 된다 해도 그 대부분은 전적으로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좀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든가 친절한 마음으로 선행을 하려 들지 말고 현재 있는 그 위치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대로 시작하라고들 말한다. 만약 내가 그런 엄숙한 어조로 설교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보다는 먼저 착해지라고 말하고 싶다. 흡사 따뜻하고 자애롭던 그 빛이 점점 강해져 결국 너무 눈부시게 된 나머지 어떤 인간도 그것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궤도를 따라 세상을 돌며 선행을 하는 게 아니라(또는 새로 밝혀진 원리에 의하건대 세상이 선행을 하는 그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달이나 6등성에 자신의 불을 옮겨붙이고, 요정 로빈처럼 이집 저집 기웃거리면서 광인들을 미치게 만들고, 고기를 썩히고, 어둠을 어둡지 않게 만드는 태양은 없애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선행을 베풀어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입증하려 했던 파이톤이 하루 동안 태양의 전차를 타고 엉뚱한 길로 모는 바람에 하늘 아래에 있던 동네를 불태우고 지상을 그을렸으며 샘물이란 샘물은 모조리 말라붙게 만들고 거대한 사하라 사막을 만들어 결국 주피터가 벼락으로 그를 땅에 동댕이쳤고 태양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1년 동안 빛나지 않는 일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변질된 선(善)에서 솟는 것만큼 지독한 악취도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도 신의 경우에도 한낱 썩은 고기일 뿐이다. 만약 의식적으로 내게 선을 베풀려는 계획을 품고 내 집으로 누군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될 경우 나는 그의 선행이 내게 베푸는 결과, 즉 그 선이라는 것이 내 핏속에 섞일까 두려워 입과 코와 귀와 눈을 흙먼지로 가득 채워 질식하게 만드는 저 아라비아 사막의 건조하고 뜨거운 모래폭풍을 피하듯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날 것이다. 그건 안 될 일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악행을 당하는 것이 낫다.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추위에 떨 때 따뜻하게 해주고, 또는 수렁에 빠졌을 때 (정말 내가 수렁에 빠지는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끌어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게 선을 베푼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일은 뉴펀들랜드 종의 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자선은 인간애가 아니다. 하워드는 분명 나름대로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그 보답도 받았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가장 유복하게 살고 있을 때야말로 바로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그리고 그 경우 우리를 돕지 못한다면 그런 하워드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 또는 나와 비슷한 인간에게 진심으로 선을 베풀려고 한 자선 모임에 대해선 들어 본 적도 없다. - P85

가난한 이들에게는 설혹 그들에게는 요원한 본보기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도록 하라. 돈을 주려면 그들에게 직접 건네지 말고 당신이 그들을 위해 그 돈을 쓰도록 하라. 우리는 종종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가난한 사람이 더럽고 남루하고 추해 보이더라도 그렇게 춥고 배고픈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다. 그건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취향이며 단순히 불운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럴 때 그에게 돈을 준다면 그는 그 돈으로 누더기를 더 사 입을지도 모른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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