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유학자들의 순진함이요, 유학이론의 허점이자 비애이다. 그런데 송명 이후의 유학, 즉 주자학이니 양명학이니 혹은 퇴계학이니 율곡학이니, 모두 무엇을 말하는가? ‘격물궁리’나 ‘거경궁리’만을 외친다. 그냥 계속 순진하게 ‘수기’하면 ‘안인’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게다가 더욱 심각하게도, 유학의 최종 목표인 ‘안인’ ‘외왕’은 거의 도외시했다. 이것은 도교와 불교의 나쁜 영향이 아닐 수 없다. ‘수기’와 ‘내성’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외부세계를 간과하게 만들고, 마침내 객관적 학문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동아시아 사회가 서구 열강의 먹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일본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학문적 수준이 매우 낮아서 오히려 서구의 학문을 쉽게 받아들였고(전통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했으니까!), 그 결과로 객관적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 P54

안연과 자로가 공구를 모시고 있었다. 공구가 "너희들의 꿈을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떠냐?" 하고 물었다. 자로는 "친구들과 수레와 말 그리고 옷을 함께 쓰고 입다가 망가져도 섭섭해 하지 57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안연은 "장점을 자랑하지 않고 공로를 과장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자로가 "선생님의 꿈을 듣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다. 공구는 "노인들을 편안하게 하고 친구들이 믿게 하며 젊은이들을 품어 주고 싶다"고 대답했다. - P56

이런 문제는 사실 예의 올바른 기준을 묻는 것이다. 공구는 이런 문제를 고려했을까? 당연히 고려했다. 공구는 철학자 아닌가! 철학자는 사상가와 다르다. 사상가는 단지 어떤 특정한 분야에 깊이 있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철학자는 전 우주로부터 구체적인 인생에 이르기까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와 사상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철학자인 공구가 제시한 기준이란 바로 ‘의義’이다. - P83

위의 기사는 학자들 사이에서 내재덕성으로서의 ‘인’의 근거를 찾는 중요한 내용으로 인식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런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 ‘마음의 편안함 여부’가 바로 도덕 실천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구가 재아에게 마음이 편안하냐고 물었던 것이다. - P132

두 번째 기사는 또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직함이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구는 이를 부정하고 부모자식 간의 정감을 우선시했다. 언뜻 보기에 그의 이런 태도는 결코 정직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듯하다. 오히려 ‘패거리 문화’를 조장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법률에서도 ‘불고지죄’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바로 직계가족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아버지가 실수로 혹은 어쩔 수 없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범죄사실을 고발할 것인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범죄는 용납될 수 없겠지만, 아버지와 같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이는 ‘인지상정’에 의한 ‘불편한 마음’ 때문에 고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음에 정직한 것이지, 그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고 고발하는 것이 정직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구는 정직함으로 원수를 갚아야 하며, 부모님의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공구의 유학은 기본적으로 ‘인지상정’에 근거하여 ‘불편한 마음’을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학문이다. 효제 또한 이런 ‘인지상정’과 ‘불편한 마음’의 제거에 근거한다. 물론, ‘인지상정’에 근거한 원리들은 여러 가지 보조적인 장치들이 반드시 구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하기도 싫은 ‘패거리 문화’가 재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지상정’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입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지만, 지나치게 전문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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