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해서 말해 보면, 요즘 과학계는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반 교양인들에게 친절히 설명하고 안내하는 저서들을 내놓고 있다. 물론 아직 충분히 친절하지 못한 것들도 있고 무리하게 자신의 주장을 확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어쨌든 그런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저서들에서 설명한 과학적 지식들이 이 세계와 사회, 그리고 인간 개개인까지 이해하는 ‘신념체계’(앎이란 기실 그렇게 믿는 것이다)를 이루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나도 크게 염려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과학이 담당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월권을 행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가치나 윤리에 관한 문제는 과학에서 다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과학을 지도할 수 있는 지침과도 같다. 그런 가치나 윤리에 관해 서양에서는 종교가, 동양에서는 철학이 주요 영역으로 다루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 특히 동양철학도들도 분발 매진하여 능력껏 교양서들을 저술해야 한다. 공부를 시작할 때 지녔던 거창한 이상과 포부가 점차 줄어들어 결국 개인적 만족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최선을 다해 저술해야 한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썼다. - P13

나는 결코 유학의 전도사가 아니다. 물론 사십대가 기울기 시작한 지금까지 유학을 학습하고, 또 한때는 진정한 유학 27 자라는 것도 되고 싶었지만, 그것이 사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21세기에 ‘공자왈’ ‘맹자왈’을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단순하다. 하나의 믿음 때문이다. 즉, 전체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문화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발휘되었을 때가 바로 인류의 발전기였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의 다양성 혹은 문화의 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구 등이 주창한 유학도 인생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우리의 세상이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정치적으로도 어느 하나의 믿음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 P26

나는 청소년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인격적으로 독립했으며, 마흔에는 판단을 함에 있어 흔들리지 않았고 쉰에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예순에는 다른 이들의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고 일흔에는 마침내 내 스스로 세상 이치와 하나가 되어 행위에 어떤 어그러짐도 없었다.

이런 경지가 누구나 나이만 먹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턱도 없다. 나름 동양학을 전공한 철학박사라는 나부 32 터도 아니다. 하나의 확실한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ㅡ공구 같은 사람만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도 어떤 잘못이 없는 경지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고 오직 도덕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완벽은 곧 자유의 경지를 의미하며(자기 마음대로 해도 괜찮으니까!),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전문적인 용어로 ‘공부工夫’가 필요하다. - P31

성인: 그의 자유와 공부
‘공부’란 한때 우리가 이소룡의 무술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쿵후’,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하는 ‘공부’, 그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 등 그 모두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 ‘공부’에 속한다. 그러나 공구와 같은 자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로 도덕적 수양을 공부로 한다. 도덕적 수양이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내가 먼저 닭살이 일어나게 되는(물론 감동적이어 33 서) 공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도덕 수양의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늘을 원망하지 말고 사람을 탓하지 말며, 아래에서 배워 위에 도달하니 나를 아는 이 하늘이로고!

이 이야기는 사실 공구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며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의역하면 이렇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책임이나 결과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하여 결국에는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 - P32

운명과 남 탓을 안 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자기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으로,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뜻이다.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줏대를 갖고 자신을 확실하게 정립한다는 의미이다. 풀어서 말해 보자. 사람에게는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운명이다. 나는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에서 1964년에 ‘상자 운자를 쓰시는 아버님’과 ‘최씨 성을 가진 어머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대체 왜 그렇게 태어났을까? 그 까닭은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고, 싫다고 바꿀 수도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재할 수 있는 측면이 아니다. 그리고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서 자라고, 그러다 늙고, 결국 죽는다. 이와 같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현상도 우리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 있어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초탈하려고, 즉 그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 공구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가 귀신이나 죽음에 관심을 갖지 않 35 았다는 것은 바로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측면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노력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바로 초탈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혹은 더 나은지에 관해서 우리는 결정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선택의 문제이다. 제발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 않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다시 돌아오자.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말은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말과 같다. 주체성이 확립되면 진정한 자아를 둘러싼 잡스런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한 운명이나 물리현상에 함몰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참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를 찾았다고 해서 곧바로 멋대로 할 수 있는, 즉 성인의 자유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공구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한다"고 말한 것이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한다." 이 말은 우선 ‘공부’를 위해서 산속으로 들어간다던지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처박혀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많은 사람이 성인하면 신선과 같은 이를 떠올리고, 신선을 학 타고 이슬 먹고 사는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인간이 동서고금 어느 시대에 존재했었을까? 절대 없다. 그냥 우리처럼 차 타고 다니고(있다면) 밥 먹고 똥 싸고, 그렇게 살 뿐이다. 다만, 도덕적인 측면에서 완벽하여 자유를 구가하는 점만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성인을 성인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완벽을 통한 자유가 바로 성인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도덕적 완벽’은 산속에서 혹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여러 도덕적 정황, 즉 사람들 간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부모님의 장남이고 내 부인의 남편이며, 내 자식들의 아버지이고 내 동생들의 형이다. 나는 이처럼 여러 관계 안에서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따른 덕목이 있다. 이것들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 완벽’이다. 맨 앞에서 공구가 귀신과 죽음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설명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엄청나게 힘겨운 일이다. 그래서 공구의 제자 중에서 가장 어리고 총명했던 증삼(증자)조차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편안해졌다고 좋아했던 것이다.
37 그런데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터득하는 이치는 결과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지만, 결코 인간세계의 도덕적인 정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아가 우주 운행의 원리와 상통하게 된다. 정말 그런가?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철학적 신념이다. 공구와 그의 후학들, 그리고 거의 모든 유학자는 전부 그런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신념은 공구보다 훨씬 앞선 고대 중국의 지식인들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에서 가장 주요하고 훌륭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었고 그래서 또한 우주의 총체적인 원리가 인간에게 입력되었는데, 그렇게 입력된 원리가 인간의 잠재된 본성(潛在性, 즉 있긴 분명히 있어서 조건만 충족되면 나타나지만 물에 잠겨 있듯 현실적으로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본성)을 이루었으며 그 잠재된 본성을 언제 어디서나 온전히 표현해 내는 이가 바로 요순과 같은 성인이다. 그런데 성인은 우리와 다른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도덕적 완벽을 이루어 자유로운 사람이다. 결국 인간에게 잠재된 본성의 내용이란 바로 도덕이며, 나아가 인간의 잠재성과 우주의 원리는 도덕을 매개로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 38 서 공구는 자신이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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