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한순간도 죄책감이나 불안함 없이 행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경은 인정했다. 은지의 말처럼 이경과 은지는 너무 비슷한 사람들이었고, 그 이유 때문에 빠르게 서로에게 빠져들었지만 제대로 헤엄치지 못했으며 끝까지 허우적댔다. 누구든 먼저 그 심연에서 빠져나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순간이었다. 은지와 함께했던 기언은 하루하루 떨어지는 시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흘러가버렸고, 더는 이경을 괴롭힐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갔다. - P58

"연락이 없었나요?"
그렇다고 말하려는데 입을 열 수가 없어서 이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수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도 모르게 됐어요. 이경은 속으로 말했다. 둘은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지와의 만남은 이경을 지난 시간으로 끌고 들어갔다. 수이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 번쯤은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차라리 그런 우연이 없기를 바랐다. - P59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했다. 어느 한 사람 울지도 못하고, 완성되지 못한 문장만을 조금씩 흘려보낼 뿐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후 몇 달을 보냈다. 공무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고, 공무 또한 나에게 편지나 전화를 하지 않았다. - P174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 P179

그날 밤, 여자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ㅡ혜인아, 답을 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네가 그냥 내 문자를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족해. 얼마 전에 꿈을 꿨어. 시청역 앞에서 우연히 만난 너와 함께 밤새 이야기하는 꿈을. 너와 함께 술을 마시고 네 앞에서 기타를 치고 같이 웃는 꿈을. 너와 함께 밤하늘을 보는 꿈을. 꿈 속에서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어. 꿈은 꿈일 뿐이라고, 잠에서 깬 내게 이야기했어. 그런데도 꿈속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꿈에서 깨어나서 너에게 말하고 싶어졌어.
잠자리에 누워서 혜인은 그 문자를 여러 번 읽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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