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사람은 주로 이기심 때문에 행동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옳은 일은 나쁜 이유 때문에 행해지며, 나쁜 일은 좋은 이유 때문에 행해진다. (중략)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타협‘은 추한 단어가 아니라 고상한 단어다. (중략)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이른바 도덕성은 대부분 특정 시점의 권력관계에서 자신이 점하고 있는 위치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각주) Saul D. Alinsky, Afterword to the Vintage Edition, Reveille for Radicals(New York: Vintage Books, 1946/1989), pp.224~225. - P110

이들이 알린스키의 운동 방식이야말로 퇴폐적이고 타락하고 물질주의적인 부르주아 가치를 전복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과 거리가 멀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자, 알린스키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원하는 게 ‘퇴폐적이고 타락하고 물질주의적인 부르주아 가치‘의 향유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가?" - P111

"인권, 민주주의, 언론 자유, 환경 등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물질 위에 설 수 있는 것이지, 물질과 무관하게 생겨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친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물질과 더불어 경쟁에 대해서도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자 나름대로 한국 진보 진영의 대표 논객 열 명을 뽑아 그들이 경쟁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확인해보자. 내가 나름대로 분석해보면 경쟁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넘어서 저주 일변도다. 물론 아름답긴 하다. 그런데 영 불편하다. 그들 역시 경쟁을 통해 그 자리에 오른 게 아닌가? 국가와 민족을 타도해야 할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할 수 없지만, 오늘날 한국이 이만큼이라도 발전한 것도 역시 경쟁의 덕을 본 게 아닌가? 보수적인 세상을 넘어서 진보적인 세상을 만들려는 시도 또한 경쟁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경쟁을 저주하는 걸까? 물론 신자유주의적 경쟁을 저주하는 것이겠지만, 경쟁이라는 단어까지 쓰레기통에 내버리면 도대체 무엇으로 자신들의 꿈을 이루겠다는 것일까? 경쟁을 보수에 헌납한 사람들에게 유권자들이 무슨 믿음으로 표를 줄 수 있을까?
대기업의 중소기업 착취가 진정한 경쟁인가? 학벌 간판을 놓고 싸우는 입시 전쟁이 진정한 경쟁인가? 정글의 법칙을 따르는 약육강식이 진정한 경쟁이란 말인가? 진보는 경쟁을 부정할 게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경쟁을 해보자며 경쟁을 선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진보가 기존의 경쟁관을 바꾸지 않으면 한국 사회를 약육강식형 경쟁관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겨주는 비극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P113

안철수의 정의 · 공정 메시지는 공생을 강조하는 것으로 완결된다. "사업을 해보니 그래요. 성공이라는 결과를 봤을 때, 내가 공헌하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사회가 내게 허락해준 것이더라고요. 그런 성공의 결과는 100퍼센트 내 것이 아니에요. 그것을 독식하는 것은 천민자본주의죠.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약탈하고 그런 식으로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잖아요. 그게 제 생각의 출발이었어요." - P120

서경호는 "생각해보자. 우리의 공적 제도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가? 규범을 토대로 사회 전반의 투명성과 신뢰성이 높은가? 사회적 갈등이 ‘떼법‘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해결되는가?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하는 이가 많다면 우리의 사회적 자본은 탄탄한 거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다들 불안해 혈연 · 지연 · 학연 등 온갖 인연을 애써 따지고 맺는 것이다. 재정부가 지난해 말 발표한 국가경쟁력 보고서에서 한국의 사회적 자본을 중하위권으로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니 누구의 동생 · 친구라고 혹은 정치인과 함께 찍은 사진 하나 때문에 주가가 뛰는 일까지 벌어졌다. ‘옷깃만 스쳐도 상한가‘, ‘사돈의 팔촌주‘란 우스개까지 나돈다. 테마주가 대선 주자 탓은 아니다. 그렇다고 못 말리는 일부 투자자 얘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중략) 대선 후보 시절에, 나아가 선거에서 이겨 청와대의 주인이 돼도 테마주를 앞에 놓고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회초리로 삼았으면 한다. (중략)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자기 이름이 붙은 테마주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더 이상 테마주 따위가 설치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새겨야 한다. 정치 테마주의 존재는 대선 주자의 수치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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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을 때 <손석희의 미국탐험>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당시 전직 방송기자 출신인 시민운동가를 만났는데, ‘왜 기자를 그만두고 시민운동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기자는 양쪽 입장의 균형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한쪽의 입장을 견지하고 싶은 때가 많았다. 기자를 그만두고 시민운동을 하는 것은 내가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다.‘ 저 역시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방송인으로 있는 한 균형 감각과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 P91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한국 사회에서 ‘신념‘이나 ‘확신‘이란 말이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것도 문제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시절엔 확신은 물론 ‘광신‘마저 투쟁의 동력으로 필요했고 긍정 평가할 수 있었겠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선, 게다가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극심한 상황에선, 그 어느 쪽을 막론하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확신이다. 확신은 나의 확신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잔인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 P104

원래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때 그렇듯이 가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평가, 아니 비판은 이른바 위선에 대한 혐오가 지나친 나머지 나타나는 ‘반위선 근본주의‘ 구호라 할 수 있는 "성인이 아니면 입 닥쳐Saint or shut up"를 연상케 한다. "투사가 되어라, 아니면 비판받아 마땅하다"라는 식의 이분법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투사도 변절하길 밥 먹듯이 하는 세상에서 그런 요구는 가혹한 정도를 넘어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 P139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박구용도 「변절의 흑백논리」라는 『경향신문』(2013년 6월 1일) 칼럼에서 "마음이 변해서 떠난 것이라면 배신이 아니다. 지나간 사랑을 부인한 것도 아니라면 모욕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종편이 현실이 되었으니 배척하는 것보다는 수준을 높이는게 현실적이지 않느냐‘는 주장은 명백한 현실 왜곡이자 이상의 교란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 그가 말하는 현실은 모두가 인정해야 할 불변의 과학적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비추어 자의적으로 구성한 그의 세계일 뿐이다. 그처럼 야만적 현실을 인정하기보다 인정할 수 있는 현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현실론으로 이완용이 나라를 팔았고 이광수가 문학을 팔았다. 그리고 또 흑과 백을 뒤집으며 수많은 변절자들이 흑백논리의 저편에서 자신을 변론했다. 나도 끝없이 변절하지만 그 변절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기는 못 친다." - P146

"무엇을 얻겠다고 하는 순간 오히려 잃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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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어둠은 드물지 않게 매혹을 발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은 더 많은 기쁨을 생산하기 위해 은유를 동원하여 성서를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들은 비유의 외투로 덮인다. 경건한 신념으로 탐구하는 인간의 이성이 계속 훈련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들이 벗겨져 공개적으로 제시될 때 무가치하게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다른 곳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드러내놓고 명백하게 말해진 것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워진다. 너무나 새로워져서, 그것을 숨겨진 상태에서 밖으로 끄집어낼 때 달콤한 맛이 날 정도다.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숨겨두는 것은 배움의 열의를 가진 사람들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것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이를테면 자기한테 감추어져 있는 것을 더 뜨겁게 동경하며, 그렇게 동경하던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만큼 더 큰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비유의 외투는 말을 에로틱하게 만든다. 비유의 외투는 말을 갈망의 대상으로 고양시킨다. 말은 비유의 옷을 입었을 떄 더욱 유혹적이 된다. 감추어져 있다는 부정적 특성은 해석학을 에로티즘으로 만든다. 발견과 해독은 벗기는 쾌감을 일으킨다. 반면 정보는 적나라하다. 벌거벗은 말은 매력을 상실하고 평범해진다. 비밀의 해석학은 투명성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폐기해야만 하는 악마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술, 다시 말해 설사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뭔가 깊이를 창출하는 문화적 기술이다. - P46

투명성은 아름다움의 매체가 아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미는 가리는 것과 가려지는 것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은 베일도 아니고, 가려진 대상 자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베일 속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 대상은 베일이 걷히고 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궁극적으로 베일을 본질로 하는 저 대상을 다르게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즉 비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ㅡ옮긴이). 오직 아름다움만이 가림과 가려짐 속에서 본질적이고, 아름다움 외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의 신적인 존재 근거는 비밀에 있다. 미는 필연적으로 베일과 가림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노출시킬 수 없는 것이다. 가려진 것은 오직 가려져 있을 때만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다. 폭로는 가려진 것을 없애버린다. 따라서 벌거벗은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으로도 가리지 않은 채 벌거벗은 상태에서 본질적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인간의 벗은 몸 속에서 모든 미를 뛰어넘은 어떤 존재, 즉 숭고한 것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모든 형상을 뛰어넘는 어떤 작품, 즉 창조주의 작품이다." 오직 어떤 형식이나 형상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 반면 숭고한 것은 형식이나 형상이 없는 벌거벗음이며, 여기에는 미를 구성하는 비밀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숭고함은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하지만 피조물로서의 벌거벗음은 전혀 포르노적이지 않다. 그것은 참으로 숭고하며 창조주의 업적을 환기한다. 칸트 역시 모든 재현,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대상에 대해 숭고하다고 말한다. 숭고함은 상상력을 초월한다. - P48

포르노적으로 자기를 전시하며 맞은편 상대를 향해 "교태를 부리는" 얼굴만큼 숭고함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 - P51

에로틱한 암시는 지시적이지 않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에로틱한 유혹의 힘은 "타자 자신에게조차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게 될 어떤 것에 관한 예감, 내가 결코 알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의 봉인 속에서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타자의 어떤 부분"과의 유희 속에서 발휘된다. 포르노적인 것은 매력적이지도 않고 암시적이지도 않다. 포르노적인 것은 전염시키고 자극할 뿐이다. 여기에는 유혹을 위해 필요한 거리가 없는 것이다. 에로틱한 매력에는 박탈의 부정성이 필수적이다. - P56

바르트는 사진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한다. 첫번째 요소를 그는 "스투디움 studium"이라고 부른다. 탐구해야 할 광대한 정보들의 영역과 "시름없는 소망, 방향 없는 관심, 일관성 없는 기호ㅡ좋다/싫다ㅡ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스투디움은 ‘사랑하다‘가 아니라 ‘좋아하다‘의 범주에 들어간다. ‘좋아요/싫어요‘가 스투디움의 판단 형식이다. 스투디움에서 격렬함이나 열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두번째 요소인 "푼크툼 punctum"은 "스투디움"을 깨뜨린다. 그것은 호감이 아니라 어떤 상처, 격한 감동, 당혹감을 낳는다. 단조로운 사진은 푼크툼이 없는 사진이다. 그것은 스투디움의 대상일 뿐이다. "보도 사진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사진에 속한다(단조로운 사진이 반드시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미지들 중에는 푼크툼이 없다. 충격은 있을지언정ㅡ평범한 것도 충격을 일으킬 수 있다ㅡ당혹감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울부짖는‘ 사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진도 상처를 입히지는 못한다. 이와 같은 보도 사진들은 (한눈에) 분류되고 정리된다. 그 이상은 아니다." 푼크툼은 연속적인 정보들의 행렬을 단시킨다. 그것은 균열, 단층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푼크툼은 극도의 강렬함과 응축의 장소이며, 그 속에는 뭔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내재한다. 푼크툼에는 스투디움에 특징적인 투명성과 명백성이 전혀 없다. "무엇인지 이름을 대지 못하는 무능함은 내적인 불안의 확실한 징표다. [......] 작용은 느껴지지만 작용이 나타나는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것에는 기호도 이름도 없다. 그것은 꿰뚫고 들어오지만 나의 내면 어딘가 불특정한 지대에 내려앉는다. [......]"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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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과잉소통은 침묵과 고동의 자유 공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이 자유 공간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실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있다. 과잉소통은 자신 안에 침묵을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는 언어를 억압한다. 언어는 정적으로부터 생겨난다. 정적이 없으면 언어는 이미 소음이다. 첼란에 따르면 문학에는 "침묵을 향한 강한 성향"이 내재한다. 소통의 소음은 경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적 원리로서의 자연은 경청의 근본적인 수동성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 앞에서 히페리온은 거듭 말한다. ‘내 모든 존재가 침묵하고 경청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침묵하는 존재는 실제로 ‘응시‘가 아니라 ‘경청‘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이다." - P97

문학과 예술은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은 문학과 예술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첼란은 「자오선」연설에서 문학을 분명하게 타자와 연결시킨다. "[……] 어떤 타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더 나아가 아마도 전적인 타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 예로부터 시의 희망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어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그 만남의 비밀 속에서, 상대를 앞에 두고서 비로소 생겨난다. "시는 하나의 타자에게 가고자 하고, 이 타자를 필요로 하며, 상대를 필요로 한다. 시는 타자를 찾아가고, 타자에게 말을 건다.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에게는 모든 사물, 모든 인간이 타자의 형상이다."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도 상대다. 시는 어떤 사물을 호출하고, 이 사물을 그 다름 속에서 만나며, 사물과 대화하는 관계를 맺는다. 시에게는 모든 것들이 너로 나타난다. - P98

오늘날의 지각과 소통에서는 타자의 현존으로서의 상대가 점점 더 사라진다. 갈수록 상대는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전락한다. 모든 관심이 에고에 집중된다. 지각을 탈거울화시키는 것, 상대와 타인과 타자를 향해 지각을 여는 것은 분명 예술과 문학의 과제다. 현재 정치와 경제는 관심을 에고로 이끈다. 이런 관심은 자기생산에 기여한다. 그것은 점점 더 타자로부터 유리되어 에고로 흘러간다. 오늘날 우리는 관심을 둘러싸고 가차 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서로에게 우리는 관심을 얻으려고 싸우는 쇼윈도들이다. - P99

첼란의 관심 시학은 오늘날의 관심 경제와 대립한다. 그의 관심 시학은 오로지 타자에만 집중한다. "여기서 카프카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말브랑슈의 말을 재인용하겠습니다. ‘관심은 영혼의 자연적인 기도다.‘" 영혼은 언제나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영혼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 영혼은 타자, 전적인 타자를 향해 기도하는 호출이다. 레비나스도 관심을 타자의 호출을 전제로 하는 "더 많은 의식"이라고 보았다.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타자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관심의 경제가 관심의 시학과 관심의 윤리학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관심의 경제는 타자에 대한 배반을 추동시키고, 자아의 시간을 전면화한다. 이에 반해 관심의 시학은 타자에 고유한, 가장 고유한 시간을, 타자의 시간을 발견한다. 관심의 시학은 "그것, 즉 타자에 가장 고유한 것이 함께 말하게 한다. 타자의 시간 말이다." - P99

타자를 너로서 호출하는 것에는 위험이 없지 않다. 우리는 타자의 다름과 낯섦에 자신을 내맡길 각오를 해야 한다. 타자의 "너-계기"에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다. 그것은 "우리를 잡아채 위험한 극단으로 몰아가고, 검증된 연관을 느슨하게 풀고, 만족보다는 의문을 더 많이 남겨놓으며, 안전을 뒤흔들고, 그래서 섬뜩하고, 그래서 불가결하다." 오늘날의 소통은 타자로부터 너-계기를 제거하고, 타자를 "그것Es"으로, 즉 같은 것으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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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변화가 풍부해야 충만한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충만도 굳건한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충만한 시간이란 곧 지속의 시간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는 반복도 굳이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속성이 붕괴된 후에야 반복은 반복으로서 의식되고 문젯거리로 떠오른다. 그리하여 모든 일상적 반복의 형식이 혁명가 당통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되는 것이다. - P129

시간은 지속성을, 장구함을, 느림을 잃어버린다. 시간이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것, 자극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텅 빈 간격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권태는 필연적으로 "놀라운 것, 거듭하여 갑자기 새롭게 휘몰아치는 것, ‘충격적인 것‘ 을 향한 중독"을 수반한다. 충만한 지속성은 "한시도 쉴 줄 모르고 계속되는 기발한 활동"에 밀려난다. 하이데거는 더 이상 행동을 향한 결단을 깊은 권태의 대척점에 두지 않는다. 그는 이제 "결연한 시선"이 긴 것, 느린 것을 보기에는 너무 근시여서 긴 시간의 향기를 느낄 줄 모른다는 것,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나게 한 주된 원인이라는 것,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는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는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P134

후기의 하이데거는 행위의 강조를 철회하고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옹호한다. 그것의 이름은 "느긋함"이다. 느긋함은 결연한 행동에 맞서는 "맞쉼"으로서,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 속에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머뭇거림" "수줍음" "자제" 등도 행위의 완전히 장악당한 삶에 있다.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 삶의 이면이다. 강박적인 활동주의는 권태를 지탱해준다. 깊은 권태의 저주는 활동적 삶이 그 위기의 끝자락에서 사색적 삶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색적 삶을 위해 봉사하게 될 때 풀릴 것이다. - P135

바로 테오레인, 진리에 대한 사색적 고찰로서의 사유가 한가로움의 바탕을 이룬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한가로움을 활동하지 않는 수동성과 구별한다. "한가로움 속에서 기쁨을 주는 것은 짐을 벗어버린 나태함이 아니다. 기쁨은 진리의 탐구나 발굴에서 온다." "진리의 인식을 향한 노력"은 "자랑스러운 한가로움"에 속한다. 오히려 한가로울 능력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나태의 징표이다. 한가로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과 비슷하기는커녕 그것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한가로움은 기분 전환이 아니라 집중을 돕는다. 머무름은 감각의 집중을 전제한다. - P141

프로테스탄티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과 구원을 결합한다. 일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킨다. 일은 삶의 목표가 된다. 막스 베버는 경건주의자 친첸도르프Zinzendorf(1700-1760)를 인용한다. "그저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면 인간은 괴로움에 빠지거나 죽고 말 것이다." 시간 낭비는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다. 불필요하게 오래 자는 것도 단죄의 대상이다. 시간의 경제학과 구원의 경제학이 서로 뒤얽힌다. 캘빈주의자인 백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날마다 더욱 조심하라. 그러면 가지고 있는 금과 은도 전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헛된 오락, 옷치장, 잡담, 쓸데없는 모임, 잠,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시간을 빼앗아가는 유혹으로 작용할 기미가 보이면, 이에 맞추어 경계심을 강화시켜라."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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