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과잉소통은 침묵과 고동의 자유 공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이 자유 공간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실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있다. 과잉소통은 자신 안에 침묵을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는 언어를 억압한다. 언어는 정적으로부터 생겨난다. 정적이 없으면 언어는 이미 소음이다. 첼란에 따르면 문학에는 "침묵을 향한 강한 성향"이 내재한다. 소통의 소음은 경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적 원리로서의 자연은 경청의 근본적인 수동성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 앞에서 히페리온은 거듭 말한다. ‘내 모든 존재가 침묵하고 경청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침묵하는 존재는 실제로 ‘응시‘가 아니라 ‘경청‘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이다." - P97

문학과 예술은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은 문학과 예술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첼란은 「자오선」연설에서 문학을 분명하게 타자와 연결시킨다. "[……] 어떤 타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더 나아가 아마도 전적인 타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 예로부터 시의 희망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어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그 만남의 비밀 속에서, 상대를 앞에 두고서 비로소 생겨난다. "시는 하나의 타자에게 가고자 하고, 이 타자를 필요로 하며, 상대를 필요로 한다. 시는 타자를 찾아가고, 타자에게 말을 건다.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에게는 모든 사물, 모든 인간이 타자의 형상이다."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도 상대다. 시는 어떤 사물을 호출하고, 이 사물을 그 다름 속에서 만나며, 사물과 대화하는 관계를 맺는다. 시에게는 모든 것들이 너로 나타난다. - P98

오늘날의 지각과 소통에서는 타자의 현존으로서의 상대가 점점 더 사라진다. 갈수록 상대는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전락한다. 모든 관심이 에고에 집중된다. 지각을 탈거울화시키는 것, 상대와 타인과 타자를 향해 지각을 여는 것은 분명 예술과 문학의 과제다. 현재 정치와 경제는 관심을 에고로 이끈다. 이런 관심은 자기생산에 기여한다. 그것은 점점 더 타자로부터 유리되어 에고로 흘러간다. 오늘날 우리는 관심을 둘러싸고 가차 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서로에게 우리는 관심을 얻으려고 싸우는 쇼윈도들이다. - P99

첼란의 관심 시학은 오늘날의 관심 경제와 대립한다. 그의 관심 시학은 오로지 타자에만 집중한다. "여기서 카프카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말브랑슈의 말을 재인용하겠습니다. ‘관심은 영혼의 자연적인 기도다.‘" 영혼은 언제나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영혼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 영혼은 타자, 전적인 타자를 향해 기도하는 호출이다. 레비나스도 관심을 타자의 호출을 전제로 하는 "더 많은 의식"이라고 보았다.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타자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관심의 경제가 관심의 시학과 관심의 윤리학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관심의 경제는 타자에 대한 배반을 추동시키고, 자아의 시간을 전면화한다. 이에 반해 관심의 시학은 타자에 고유한, 가장 고유한 시간을, 타자의 시간을 발견한다. 관심의 시학은 "그것, 즉 타자에 가장 고유한 것이 함께 말하게 한다. 타자의 시간 말이다." - P99

타자를 너로서 호출하는 것에는 위험이 없지 않다. 우리는 타자의 다름과 낯섦에 자신을 내맡길 각오를 해야 한다. 타자의 "너-계기"에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다. 그것은 "우리를 잡아채 위험한 극단으로 몰아가고, 검증된 연관을 느슨하게 풀고, 만족보다는 의문을 더 많이 남겨놓으며, 안전을 뒤흔들고, 그래서 섬뜩하고, 그래서 불가결하다." 오늘날의 소통은 타자로부터 너-계기를 제거하고, 타자를 "그것Es"으로, 즉 같은 것으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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