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변화가 풍부해야 충만한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충만도 굳건한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충만한 시간이란 곧 지속의 시간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는 반복도 굳이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속성이 붕괴된 후에야 반복은 반복으로서 의식되고 문젯거리로 떠오른다. 그리하여 모든 일상적 반복의 형식이 혁명가 당통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되는 것이다. - P129
시간은 지속성을, 장구함을, 느림을 잃어버린다. 시간이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것, 자극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텅 빈 간격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권태는 필연적으로 "놀라운 것, 거듭하여 갑자기 새롭게 휘몰아치는 것, ‘충격적인 것‘ 을 향한 중독"을 수반한다. 충만한 지속성은 "한시도 쉴 줄 모르고 계속되는 기발한 활동"에 밀려난다. 하이데거는 더 이상 행동을 향한 결단을 깊은 권태의 대척점에 두지 않는다. 그는 이제 "결연한 시선"이 긴 것, 느린 것을 보기에는 너무 근시여서 긴 시간의 향기를 느낄 줄 모른다는 것,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나게 한 주된 원인이라는 것,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는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는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P134
후기의 하이데거는 행위의 강조를 철회하고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옹호한다. 그것의 이름은 "느긋함"이다. 느긋함은 결연한 행동에 맞서는 "맞쉼"으로서,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 속에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머뭇거림" "수줍음" "자제" 등도 행위의 완전히 장악당한 삶에 있다. 깊은 권태는 과도한 활동성, 어떤 형태의 사색도 알지 못하는 활동적 삶의 이면이다. 강박적인 활동주의는 권태를 지탱해준다. 깊은 권태의 저주는 활동적 삶이 그 위기의 끝자락에서 사색적 삶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색적 삶을 위해 봉사하게 될 때 풀릴 것이다. - P135
바로 테오레인, 진리에 대한 사색적 고찰로서의 사유가 한가로움의 바탕을 이룬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한가로움을 활동하지 않는 수동성과 구별한다. "한가로움 속에서 기쁨을 주는 것은 짐을 벗어버린 나태함이 아니다. 기쁨은 진리의 탐구나 발굴에서 온다." "진리의 인식을 향한 노력"은 "자랑스러운 한가로움"에 속한다. 오히려 한가로울 능력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나태의 징표이다. 한가로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과 비슷하기는커녕 그것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한가로움은 기분 전환이 아니라 집중을 돕는다. 머무름은 감각의 집중을 전제한다. - P141
프로테스탄티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과 구원을 결합한다. 일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킨다. 일은 삶의 목표가 된다. 막스 베버는 경건주의자 친첸도르프Zinzendorf(1700-1760)를 인용한다. "그저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면 인간은 괴로움에 빠지거나 죽고 말 것이다." 시간 낭비는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다. 불필요하게 오래 자는 것도 단죄의 대상이다. 시간의 경제학과 구원의 경제학이 서로 뒤얽힌다. 캘빈주의자인 백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날마다 더욱 조심하라. 그러면 가지고 있는 금과 은도 전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헛된 오락, 옷치장, 잡담, 쓸데없는 모임, 잠,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시간을 빼앗아가는 유혹으로 작용할 기미가 보이면, 이에 맞추어 경계심을 강화시켜라."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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