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윤관희 외 옮김 / 두란노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내가 왜 별다섯을 주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최고의 책이기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두 가지를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렇지만 일반 독서인의 입장으로 보더라도 이 책은 치열한 논쟁과 재미있는 사례로 충분히 별 넷은 줄 수 있다. 리 스트로벨은 예일법대를 나와 신문기자로 유명한 사람으로 원래 무신론자 또는 회의론자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아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계기로 정말 예수가 존재했고 부활따위를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오랜 질문을 풀기위해 당대 최고의 신학자를 하나하나 만나가며 문제를 풀어나간다.

나같이 신학에 무지한 사람조차도 이름이 들려올 정도로 리 스트로벨이 인터뷰한 사람은 엄청난 학자들이다. 신학쪽으로 따지면 국보급학자들이고 20세기 후반의 기독교 신학이 바로 이들의 손끝에서 빚어졌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사람들이다. 크레그 블롬버그, 브루스 메쯔거, 도널드 카슨 등...이들은 여러 대학의 교수를 하고 기본적으로 10여개국어나 상황에 따라서는 30개 언어를 다루는 신학적 천재들인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런 사람들과 저자가 이렇게 불타오르는 토론을 하는 것을 처음본다.

둘째 이 책은 [예수는 신화다]와 무관한 복음주의 쪽에서 명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원제목은 [The Case For Christ]즉,[예수를 옹호하는 변론]이라는 책의 번역본이다. 원래 3부작으로 [The Case For Creator] [The Case For Belief]와 짝을 이룬다. 마지막 책은 [특종! 믿음 사건]이라는 얼토당토않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조금 안타깝다. 참고로 이 책들을 번역한 출판사는 기독교 전문 출판사인 두란노이다.

내가 지적으로 왕성한 기독교 신자라면 아니면 신학도라면 당연히 이 책을 냉큼 읽을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논쟁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어쩌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생각의 갈래가 담겨진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사색을 할 것이다. 리 스트로벨이 날카롭게 질문하면 해당 신학자들은 정말 이성적으로 합당한 해결을 해낸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리 스트로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건 불완전해'또는 '이건 이상해.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라고 생각하는 대목이 많다는 점이며, 신학자 역시 리 스트로벨의 질문에 한 걸음 더 나간 대답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치열한 학문적 탐구를 나는 도대체 본 적이 없다.

전체가 3부작인 이 책은 다시  세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1부 기록 검토 2부 예수 분석 3부 부활 연구' ---1부는 비교적 지루한 문헌학적 고고학적 탐구인 셈이지만 1부를  감내하면 충분한 보상이 온다. 2부 3부는 정말 재미있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에게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그가 미쳤기 때문인가?"라고 묻는 장면이랄지 법의학자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속임수였는가?"라고 묻는 부분등은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부조차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세계 최고의 성서학자의 인터뷰 중에는 최근 읽었던 도올 선생님의 [요한 복음 강해]에서 강조했던 사실들과 배치되는 점들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 복음서외에는 거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보다는 풍부하다는 사실, 그리고 요한복음의 강조에 대한 사복음서 모두 개별적 가치를 가진다는 점 같은 원론적인 부분부터 인구조사를 위해 원적지로 이동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자료 발견- 이런 부분 등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물론 최근에 읽은 톰 라이트의 [예수]라는 책과 비교해 보면 이 책 속의 전문가들은 사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이 쓰여진 시간을 무척 빠르게 잡고있는 보수적 학자군임을 알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올 선생님이 터무니없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실제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를 들이댄다는 면에서는 [예수는 역사다]가 머리를 상당히 복잡하게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나에게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키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간곡히 권하노니, 기독교인 형제 자매들이여. 이 책 한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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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sdsss 2008-06-11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쓰시네요ㅋ
 
예수 -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를 추적한 BBC 다큐멘터리
톰 라이트 지음, 이혜진 옮김 / 살림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도올 선생님의 [요한복음 강해]를 읽고 과연 예수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궁금증을 가지게 되어 읽게 된 책이다. 특히 톰 라이트는 성공회 주교이자 뛰어난 성서학자로 관심이 갔다. 그러나 이 책은 BBC 다큐멘터리를 저자가 진행한 후 덧붙여 쓴 책으로 구체적인 사실이 많지도 않고 신학적인 면을 상세히 묘사해 주지도 않는다. 다만 상식적인 언어로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인 것이다. 결국, '1부,예수-과거와 현재'는 역사적 예수를 추적한 것으로 아주 간략하게 스케치만 해주는 셈이 되어 갈증만 더 일으킨 셈이 되었다.

다만 , 40쪽부터 비롯되는 탕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예수의 가르침이 그 당시에는 얼마나 혁명적이고 강렬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좋은 설명이다. 이 부분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부분이었고, 평소 궁금하던 부분이 풀린 셈으로 중요하게 생각되어 꽤 길지만 인용한다. 꼭 읽어보시길 권한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대통령이 조깅하는 모습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조금만 빠르게 걸어도 품위를 잃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예수가 전해주는 이야기 중에 존경받던 한 원로가 거리로 내달리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 사건은 마치 총리가 수영복을 입고 기자회견을 하는 일에 맞먹는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처음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이야기는 '달려 나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라 불렸어도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탕자의 비유'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두 아들을 가진 한 남자가 있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에 해당되는 재산을 요구한다. 그는 상속분을 그 즉시 가져가려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었던 당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미리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당시 사회에서 이러한 요구는 마치 '나는 당신이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즉 아들이 아버지를 저주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요구를 수용한다. 그가 한 말은 사실상 "알았다. 날더러 이제는 좀 빠져 달라는 말이구나. 기꺼이 그렇게 하마. 여기 네 상속분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어린 아들은 자신의 몫인 재산을 팔아(이러한 행동 역시 분명 아버지의 마음을 몹시 쓸쓸하게 했을 것이다.)외국으로 떠난다. 그 후에 펼쳐질 일은 뻔했다. 아들은 돈을 탕진하고 운도 다하여 결국 돼지를 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유대인 청년이 추락할 수 있는 최저점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마음 한 편에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움튼다.

이것이 두 번째 충격이다. 당시 문화에서는 불명예를 입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를 저주했고, 가문에 먹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집으로 돌아갔고,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난다.이제는 노인이 된 청년의 아버지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거리로 달려 나왔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며 온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푼다.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던 당시 사람들이 아버지의 행동에 놀란 것은 당연했다. 특히 그의 형은 격분했다.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그는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불만을 표시함으로써 아버지에게 망신을 준다. 현대 문화에서 조차 공적인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버릇없이 구는 아들을 받아주기는 힘들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아들을꾸짖는 대신 부드럽게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명예롭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 주기를 원했다. 다시 한 번 아버지는 자신의 권위를 포기했던 것이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이야기가 주는 마지막 충격은, 이야기가 조금 일찍 끝나 버린다는 데 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증을 남기고 끝나버린 영화처럼 예수는 이야기를 중간에 멈춰 버린다. 특별히 당시의 문화에서라면 사람들은 더욱 궁금해 했을 것이다. 큰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왔을까? 이후에 이들의 삶은 어떻게 펼쳐졌을까?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결말은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청중들에게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이런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멍한 느낌이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인 것이다.이 이야기에 감동을 먹은 내가 크게 느낀 것은 두 가지다.

 우선, 이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아버지는 엄하고 어머니는 자애롭다'는 식의 유교적인 아버지가 아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과거와 죄를 모두 포용하는 지장보살과 같은 아버지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를 할 때 이렇게 따스한 봄햇살같은 아버지로 우리는 부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고보면 기독교는 부성적인 전쟁신을 섬기는 종교라는 식의 판단은 정말 안타까운 편견이다.

또, 진부한 질문이지만 믿음과 지식과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분명한 것은, 유대인들의 문화나 당시의 상황을 알지 않는한 이런 드라마를 결코 읽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믿음은 상식과 교양을 토대로 더욱 풍요롭게 자라날 수가 있다.

감동적이긴 하지만 이 책이 아쉬운 점은 있다. 병마개를 딸뿐 음료수를 마실 수있게 하지는 않는 점이 안타깝긴 하다. 책을 읽고나면 저자가 무척 학식이 있으며 그 학식을 독단적이지 않으면서도 감동적인 필치로 우리앞에 펼쳐줄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이냐? .저자는 저자의 주된 저서 2권을 읽기를 권하고 있다.

다행히 두책은 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번역하였다. 1권[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2권[예수와 하나님의 승리]-1권은 신약시대의 유대를 쓴 것이고 2권은 역사적 예수를 탐색한 것이다. 합쳐서 5만원정도 되는 걸 보면 방대한 서적인듯 싶다. 이 두 책은 나에겐 좋은 정보인 셈인데 최근의 도올 선생님의 책 2권 [요한복음 강해]와 [기독교 성서의 이해]에 짝을 이루는 뛰어난 신학자의 책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두 책을 도올 선생님의 책과 교차해서 읽음으로써 좀더 생각을 하며 읽을 수 있지 않나 싶다.(이 책들은 알라딘엔 없고 YES24엔 있다. 문제는 돈이지만!)

끝으로 톰 라이트는 자신의 책과 더불어 꼭 읽어보길 원한다면서 읽을만한 책을 적어놓았는데 다행히 그중 절반은 번역되었다. [사복음서의 영성](CLC) : [역사적 예수의 진실](대한 기독교서회) : [예수 새로보기](한국 신학 연구소) : [네 편의 복음서, 한 분의 예수](UCN) ; [역사적 예수](한국 기독교 연구소) : [예수 :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한국기독교 연구소) :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CLC) : [예수와 유대교]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복음서와 예수](대한 기독교서회) : [유대인 예수의 종교](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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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코멘트 2008-08-0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쎄요.. N.T.라이트 교수를 도올과 '짝을 이루는' 신학자라고 생각한다면.... 라이트는 펄쩍 뛰고 남을걸요.. 그리고 라이트는 3권도 이미 출간했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하늘연못 2008-08-05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지요. 저도 도올 선생님의 책을 읽고 미심쩍어서 잣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찾다가 이 책을 읽은 것입니다. 짝을 이룬다는 의미는- 지금 생각해보니 잘못된 단어선택이었습니다.- 입장이 달라 논리적으로 대척점에 있거나, 중립적이어서 척도가 될수 있는 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독보적인 성서학자인 라이트는 놀라울 정도로 방대하고 세밀합니다. 또 도올 선생님과 입장차도 큽니다. 다만 통찰력이란 면에서는 어떤 경우엔 통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라이트의 저서는 읽는 기쁨을 줍니다. 4권이 어서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하룻밤의 만찬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김영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두가지 인연이 있다.
우선 교회다니는 사촌 동생이 선물을 해왔다는 것
둘째 이책이 리스트로 벨의 [case]3부작과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와
더불어 복음주의 단체에서 좋은 책으로 꼽힌다는 말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두번째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다.
적어도 [case]와 비교해볼때 기독교에 대해 다루는 부분도 협소하고
'예수를 영접하세요'라는 기본 멘트에 충실한 가벼운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읽을 만한 좋은 책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니 바라건대, 지적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라면 이 책을 읽고
[case]의 번역본인 [예수는 역사다]를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책을 펴기 전에 우선 저자 데이비드 그레고리를 보자.
우선 저자 이름에서 우리는 기독교 냄새를 물씬 맛볼 수 있다. 데이비드는 성서 이름으로는 다윗이고 그레고리는 교황이름 아닌가? 참으로 강렬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이력은? 다양하다. 처음엔 경영학을 전공하고 해당분야에서 10년동안 일했다.
그러다가 종교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했고 최종적으로 다시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이러고 보면 이 책은 종교학 + 신학의 내용을 커뮤니케이션에 염두에 두고 가공해서
경영학적으로 판매한 셈이된다.

나는 우선 이 책이 무신론자인 주인공 닉이 예수의 초대를 받아
밀라노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예수를 사기꾼이라 의심하는 걸로
시작하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예수의 제자인 도마나 형제인 야고보도 부활을 의심했었지 않은가?

적어도 성만찬을 기독교의 핵심으로 보는 나에게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예수를 만나기 적절한 장소란 생각이 들었다. 예수는 삶이란 지상의 잔치 또는 식사에 참석하신 것이며 우리의 삶과도 같은 맹맹한 물을 뜨거운 피와 같은 포도주로 바꾸고 척박한 지상의 빵을 이웃과 나누는 사랑을 가르치신 삶이 아니었던가? 그런 아름다운 사람 예수와 만나 저녁 식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충만한 체험임에 분명하다.


또 마음에 드는 것은 닉과 예수의 관계를 보듯 우리와 예수와의 관계를 불신과 연민의 관계로 설정한 점이다.
닉의 속마음은 이런 거다. '니가 예수라니 무슨 개소리냐?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뭔 상관이냐?'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서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적어도 최근에 미국 복음주의 단체에서 가장 좋은 책으로 꼽힌 책들은
기독교인이 아닌 나조차도 현기증이 날만큼 살벌하다.
'도대체 미국인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뒤흔드는거야' 라고 생각되는 질문까지도 한다.


예를 들어 필립얀시의 [우리가 미처 몰랐던 예수]에서는 예수의 탄생은 말할 것도 없고
산상수훈조차도 요즘 세상에 맞지 않는다며 뒤흔들고
리 스트로벨의 [예수는 역사다]에서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미친 사람이 아닌가?' 라고 심리학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처절한 질문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찾아가는 것이다.

미국은 기독교가 저변문화로 깔려있으나 동부를 제외하고는 점차
개인주의적인 무신앙으로 넘어가고 요가, 선불교, 명상 등의 세계 종교와
과학주의, UFO신앙 등의 신흥 종교로 다변화되는 상태가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에 무려 6번이나 우승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는 감독과 조던을 중심으로 선불교의 명상을 통해 경기력을 극대화 시켰다고 한다. 또한 웰빙 열풍이나 뉴 에이지 종교운동은 힌두교나 요가 수행을 기반으로 한 경우가 많다. 사상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미국의 기독교는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신학 안에서도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한 진보적인 학자진영은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통해 기존의 신학을 대체하는 대중적인 기독교 신학을 표방하고 대대적인 이론적인 공략을 해왔다.  
따라서 보수적 기독교진영은 윤리적인 그리고 전통적인 신앙인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이성적으로 실증적으로 방어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생각할 때, 이 책의 처음이 불교나 힌두교, 이슬람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는 범신론이니 문제고, 불교는 무신론이니 문제이며,
이슬람은 가짜 선지자니 문제라는 식의 공격은 격이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기독교를 결론으로 놓고 시작하는 순환논쟁인데 저자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단지 저자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즉, 거꾸로 예수는 최후의 선지자가 아니다고 이슬람은 마호멧을 치켜올릴 것이고,
예수의 사랑은 자민족 중심, 인간중심의 사랑으로 중생의 사랑을 무르짖는 붓다에 비해
생명 존중이 부족하다고 불교는 웃음지을 것이며,
현대 우주론 중의 순환우주니 다원우주를 떠받칠 수 있는 것은 우리 밖에 없다고 힌두교는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니 저자가 책의 서두를 그런 식의 견강부회로 소진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귀담아 들을 몇가지 핵심을
아주 매력적으로 말하고 있고 이것이야 말로 이 책을 좋은 책으로 만든다.

(1)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2) 현세의 모든 악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은 데서 비롯하였다.
(3) 따라서 무엇보다도 속죄를 통한 관계 회복이 중요하다.
(4) 그런데 인간들이 알아서 속죄할 인간들인가? 어디로 갈 줄도 모르고 헤매고 있다.
(5) 따라서 대신 속죄하려고 독생자 예수를 보냈다.
(여기서 참고로 독생자의 의미는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 즉 하나님이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유일무이한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는 단 하나의 결정적 증거이다.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적어도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에서는!)

그런데 당연히 우리의 무신론자 닉은 '뭐할려고 예수가 죽어요?'라고 묻는다.
내 생각에는 이 부분이 재미도 있고 감동적인 장면인데 예수가 간곡하게 말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딸이 마약을 하고 누군가를 죽여서 살인죄를 저질러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런데 그 죄를 대신 당신이 질 수 있다면 대신 죽겠느냐?"고 되묻는다. 닉은 우리같은 한국인에게는 퍽 익숙한 대답을 한다. 자신은 그래도 오래 살았고 딸은 남은 인생이 창창하니까 대신 죽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가 하신 이야기가 조금 찡한 얘기다. 당신이 사랑하는 딸을 위해 죽었듯 하나님도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해 예수로 나타나시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예수는 유대교의 희생제의와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피상적이고 도식적인 정치사회적인 이야기보다는 훨씬 절박한 심정과 애틋한 사랑이 담긴 해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책을 이렇게 끝까지 세밀하게 리뷰를 쓴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좋은 책이니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고 불신자인 나는 여기서 아듀를 고할까 한다.
참고로 이 책 외에도 신이나 예수와 직접 만났다는 책들이 있는데
유명한 뉴에이지 서적인 [신과 나눈 이야기]시리즈도 있고
최근 명상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문화영 선생의 [예수인터뷰]가 있다. 참고 하시길!

(*** 배암발 1 :사실 예수를 직접 만났다는 이런 책들이 난 당최 적응이 안된다. 그게 진짜 예수인지 자신의 무의식의 반영인지 난 판정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해결은 인문학 적일 수 밖에 없는데 예수가 말했던 하나님의 나라랄지 사랑 등의 핵심개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에 맞게 즉 성서의 문맥에 맞게 이야기를 한다면 예수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뜻이란게 어디 정답이 이거다라고 적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의 미혹됨은 크다! 그 미혹과 혼돈 속에서 섣부른 자기 확신만이 판을 치는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헷갈리는 상황이 더 있는데, 예를 들어 얼마전에 불우하게 죽은 정다빈 양이 마지막 글에서 주님의 은혜를 받았어요라고 고백했는데 성서에 나오는 그 은혜인가? 그냥 기분좋은 상태를 은혜라고 개인적인 단어선택을 했지 않나? 다빈 양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다빈 양이 남긴 말은 헷갈린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적어도 지성적으로는 해결되어야할 문제인 것이다.이런 인문학적 성찰이 없고서는 거짓 선지자들과 종교가로 끊임없이 후달려야 하는 것이 21세기 한국인이 겪는 실제 상황이다. 미혹과 혼돈이 또다른 미혹과 혼돈을 만날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도처에 널려있는 현실일때 나는 어디에 서있어야 하는 걸까?

그러면 이쯤해서, 까놓고 말하자. 그럼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가 [예수인터뷰]보다 나은 책인가? 지금 내 수준에서는 알 수 없다가 그 답이다. 외국에서 유명한 책이라고 좋은 책은 아니다. [다빈치 코드]가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사실은 아니듯이!)

***배암발 2 : 책 끝에 나오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때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예수는 역사다]의 10장 '의학적 증거'에서 논증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이 책은 그냥 막 지어낸 것은 아니고어느 정도 기본적인 학문적 성과를 염두에 두고 구성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하튼 예수가 십자가에서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는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니만큼 [예수는 역사다]를 서점에서라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예수는 역사다]는 [예수는 신화다]와 완전히 다른 책으로 복음주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변호하는 책이다. 생각에 따라서는 세속화로 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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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07-03-18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맨처음에 주인공 닉은 모태 신앙인으로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믿음과 삶이 동떨어진 집안분위기와 미션스쿨에서 강제로 기독교 교리를 학습 받을 때의 고통을 겪으며 기독교와 멀어졌고,

사회인이 된 후에는 지역교회의 자본주의적 확장주의적 선교방식 때문에 기독교에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 결정적으로 기독교를 배척하게 된 이유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계기때문이다. 이 부분은 책의 클라이막스이기 때문에 내용을 말할 수는 없으니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여하튼 일반 교회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멀리 했던 닉이 참된 예수의 말씀을 만나기 위해 성경을 편다는 것으로 끝난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히 교회가자고 말하는 책은 아닌 셈이다. 오히려 기성 교회나 경직된 신앙생활을 비판하고, 참된 신앙을 모색한다는 것이 책의 의도이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이 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고  묻고 싶다.


답부터 이야기하면 젊은 이다.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편의상 이야기하자면 20대라고 해야겠다. 조숙한 10대 후반도 읽을만 하지만
변태적 성행위에 관한 내용이 범람하는 책의 특성상 추천이 조금 꺼려진다.
그렇지만 20대 특히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즐겁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잘못된 기억인지는 모르지만 이 책은 얼마 전까지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책이었다.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갑다. 내가 특별히 변태적인 취향의 사람이 아닌지라 이 책을
볼 수 있어 반갑다고 말하는 데는 거의 10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진정 그렇다.
그리고 이제 왜 이 책을 긍정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하려 한다. 

만약 이 책을 잘 아는 이야기에 대한 비틀기를 시도한 작품이라고 본다면
10여 년 전에 읽었던 책이 떠오른다. 무슨 세계사라는 이름의 책이었는 데 몇 편의 인상적인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창세기로부터 비롯되는 책인데 중간에 소경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곳에 소경이 살고 있었는데, 소경 눈을 떠주는 신기한 무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길을 떠난다. 
예수를 만나 소경은 마침내 눈을 뜨게 된다. 그런데 소경이 눈을 뜨고 본 세상은 참으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굶어죽은 시체들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아이들, 처절한 살육과 폭력의 현장 등.
그래서 그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한 예수를 저주하면서 눈을 스스로 후벼버린다.

어떤 의미에서 [알고보면...]과 이 이야기는 메세지가 같다.
섣부른 구원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단층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 속의 구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부모님의 이야기 속에서의 구원은 이런 것이다.


"착하면 상을 받고 악하면 벌받는다.그리고 이 세계는 정의롭다.
선한 사람은 비록 고생을 할지라도 결국 더 큰 행복의 문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니 아이들아 이 아름답고 감명깊은 이야기를 들으며 예쁜 꿈 꿔라."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담아 부모님들이 들려줬던 그 이야기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듯 그저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일까? 그리고 이야기 속의 세상이 진실일까?
여하튼 이런 성찰 또는 열린 생각을 유도한다는 면에서 두 책은 같다.

그럼에도 [..세계사]는 [알고보면...]에 비해 그다지 폭력적이지도 않고 충격이 크지도 않다.
왜냐하면 성경이 애초부터 아이들을 위한 환상을 심어주는 책도 아니고 성인용이기 때문이다.(특히 구약은)
또 성경을 비틀은 [...세계사]는 소경이 설혹 예수를 저주한다고 하더라도 던지는 질문자체는 무척 윤리적이다.


[알고보면...]이 충격적인 이유는 어렸을적 부모님이 아름답게만 들려주었던 동화들이
사실은 무척 성적이고 변태적이며 폭력적인 세상의 현실을 깔고 있다는 참담한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기좋은 꽃으로 치장된 문뒤에는 죽은 개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새앙쥐들이 있었다!

참고로 구약성경의 이야기들 중에는 실상은 역겨울 정도로 변태적이고 외설스러운 장면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좀더 학구적인 책이 있는데 까치에서 나온 [길섶의 창녀들]이라는 책이 그렇다.
그렇다. 성경 속의 상황도 [알고보면...]보다 심하면 심했지 낫지는 않다.  

사실 레위기 18장만 보아도 우리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것도 야훼의 말씀으로 근친상간의 리스트가 읊어진다.

"아무리 같은 핏줄을 타고 난 사람을 가까이 하여 부끄러운 곳(하체성기)을 벗기면 안된다.
나는 야훼다.
네 아비의 부끄러운 곳도 어미의 부끄러운 곳도 벗기면 안된다.
네 어미인데, 어찌 그 부끄러운 곳을 벗기겠느냐?
....
네 누이의 부끄러운 곳을 벗겨도 안된다.
이복 누이든 동복 누이든, 와서 낳았든 낳아 가지고 왔든,
그녀의 부끄러운 곳을 벗기면 안된다....."
(이상의 번역은 도올 [요한복음 강해])

이런 인용은 성경이나 유대인에 대한 훼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야훼의 율법이 절절한 이유는 이런 적나라한 현실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발견되기 어렵다. 
기원 전 유대인의 문화나 역사가 근친상간과 살육, 굶주림이 범람한 상황이었다면
18세기 유럽의 모습도 그에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이 있으니
로버트 단턴의 유명한 책, [고양이 대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알고보면...]을 읽으셨다면 반드시 [고양이 대학살]까지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왜 고양이들은 학살을 당해야만 했는가?'라는 무화과 나무님의 리뷰와
'고양이 죽이기'라는 쭈글님의 리뷰를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특히 무화과 나무님의 리뷰는 무척 훌륭하다.

역사학자의 손에서 쓰여진 [고양이 대학살]을 본다면
이 책 [알고보면...]이 변태스럽고 추악한 작가에게 쓰여진 저질스러운 책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유럽 역사와 문학을 전공한 두 여류 작가가 ,꼼꼼하게 역사 및 그림동화의 문헌을 고증한 후
세심하게 쓴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진실을 보라. 그런데 그 진실은 때로 고통스럽다.

또 다른 비틀기를 시도한 책으로는 로버트 짐러의 [파라독스 이솝우화]가 있다.
시원스럽고 간단한 삽화가 인상적인 이 책은 이솝우화를 정신분석적으로 비틀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상은 최근의 평범한 상식에 맞추어 재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읽다보면 이솝 우화를 한쪽 방면 즉 처세술 또는 세상살이의 교훈으로만
읽어내었던 자신을 한번 돌이켜보는 깨우침은 있다.

예를 들어 처음을 장식하는 여우의 신포도 이야기만 해도 동생 여우가 투덜대면서
물러날 때 경쟁심에 휩싸인 오빠 여우가 하는 말이 가관이다.
 
"싫다. 넌 지금 저 포도를 따지 못하는 네 무능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고 있는거야.
하지만, 난 달라. 난 관념론자가 아니니까 기꺼이 현실과 맞서겠어.
저 포도는 분명히 지금까지 먹어 본 어떤 것보다 달콤할 거야.
난 약간이라도 맛을 볼 때까지 단념하지 않아."

그런데 이쯤해서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요즘에 처세술 책들은 모두 이런 식의 우화를 깔고 있다.
또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깔고 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겨놨을까][마시멜로 이야기][달란트 이야기] 등등....

그리고 우리는 책이 내놓은 달콤한 처세술의 교훈을 향해 달려간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게 자본주의의 덫이요 신자유주의의 덫이 아닐까?
달콤하고 조그만 이야기 밑에는 구더기들이 우글우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파라독스...]나 [알고보면...]은 유별나 보이고 설혹 불편한 심정을 야기하지만
이런 베스트셀러처럼 우아하게 탐욕을 향해 뛰자는 식의 모순된 언사를 행하지는 않는다.
도대체 우리가 생각하는 옳음이나 선함, 정당한 이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할 틈도 없이
한 방향으로 달려가기를 권하는 이런 책들이야말로 타락을 부추기는 책일지도 모른다.
이런 현대판 동화책이야 말로 진정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맨 마지막으로 꺼내 읽은 책이
제임스 핀 가너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이다.
코메디언이었다는 저자는 세상의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동화를
나름대로의 절묘한 비틀기를 통해 유쾌하게 들려주고 있다.

[알고보면...][고양이 대학살][정치적으로...]는
같은 동화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어 곁들여 읽는다면
동화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터득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인문학이란 것이 세상의 선입견과 터부를 깨뜨리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거로구나 하는 느낌을 느끼며 약간의 자유로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난 그런 걸 희망한다.

끝으로 참혹한 동화의 조그만 부분을 맛뵈기를 해드리면 이렇다.
[알고보면...]의 '백설공주'는 중세 유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우아한 동화의 뒷면에는 무수한 처참한 현실이 그늘져 있다.

(1) 일찍이 근친상간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특이한 행위가 아니었다.(26쪽)


(2)인육을 먹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근이 자주 발생했는데,
특히 13-14세기 동안에는 날씨에 의한 대규모의 기근이 자주 발생했다.
....처참한 모습으로 야윈 사람들은 길이나 광장에서 힘없이 죽어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시체를 먹었다.(38쪽)


(3) 쇠구두는 중세 유럽에서 마녀를 고문할 때 자주 사용하던 도구였다.
죄수에게 새빨갛게 달구어진 쇠구두를 신기고 해머로 그 구두를 찌그러뜨리는
지옥 같은 처참한 장면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특히 16세기 말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이 기구를 이용해서
마녀사냥을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66쪽)


(4) 전혀 모르는 미녀의 시체에게 한눈에 반해서
자기의 성으로 유리관을 운반하게 한 왕자의 행동에 대하여
모리 요시노부는 '궤도를 이탈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말 한 번 나누어본 적도 없는 낯선 사람의 시체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식사조차도 그 옆에서 했다는 왕자의 행동은
뭔가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72쪽) 

이런게 끝이길 싫어서 [정치적으로...]의 백설공주의 끝을 적어본다.
백설공주와의 유대를 회복한 왕비가 독사과를 토해내며 성차별주의자들인 난장이들에게 외친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동불능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그리고 네놈들이 성차별주의자답게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동안,
나는 개인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앞으로 나는 여성의 영혼과 육체 사이의 균열을 치료하는 데 내 인생을 바치겠다.
육체의 타고난 모습을 받아들이고,
영혼과 육체가 조화를 이룬 통일체로서 다시 완전해지는 법을 여성들한테 가르칠 것이다.
 
백설공주와 나는 바로 이 자리에
여성을 위한 휴양 및 회의 센터를 세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세계 자매들을 위한 연수회와 지역 위원회
그리고 난소 연구회도 개최할 수 있겠지."

백설공주와 왕비는 사이좋은 친구가 되어,
여권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것으로 동화는 끝이 난다.

 그렇다. 이런 것도 구원이라면 구원이다.
과거는 참혹하되 미래는 밝아야한다. 그 밝음이 꼭 틀에 박힌 무엇일 필요는 없겠다.
[정치적으로...]는 상투적 비틀기를 통해 자유를 선사한다.
이야기의 결말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정치적으로...]가 절판되었다는 것이 아쉽다.
어느  헌책방에서 먼지낀 이 책을 발견하거든 서슴없이 구입하시길 권하고 싶다.)

결국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닿게 된 생각은 이런 거다.
진부한 감이 있긴 하지만 좀더 절실하게 느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세상은 단하나의 해석을 강요할지라도 우린 그 강요에 머무르면 안된다.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아야 한다는 모순을 우린 살아야 한다."

짜증이 나서 책상받침으로 쓰던 [알고보면...]이란 책이
알고보니 실로 진실한 책이며, 새로운 깨침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완전히 나쁜 책도 완전히 좋은 책도 없다던 헌책방 주인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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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07-03-08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시 제가 리뷰중에 무슨 세계사라고 밝힌 책 제목을 아시면 알려주세요. 오래된 일이고 해서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네요.제 기억에는 노아의 방주로 부터 시작되었는데요. 7일간의 세계사? 비슷한거 같기도 하구요.새삼 궁금하네요.

하늘연못 2007-03-08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새삼 느낀 점은 [이웃집 살인마]에 나오듯이 살인과 잔혹의 심사라는 것이 누군가 특수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고 인류 보편의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입니다. 18세기 유럽의 모습이 결국 히틀러의 학살, 일본인들의 학살, 최근의 민간인 학살의 실마리이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 학살자는 그가 아니라 나라는 거죠. 인간은 성적이며 잔혹한 동물이다. 애초부터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 어둠의 세계는 결국 구원을 말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뭐 더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통렬한 감정이 생기네요. 꼭 기독교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통렬한 감정은 저에게는 드문 일입니다.
 
요한복음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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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뜨거운 논란이 되는 책에 대해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 것인가?
간략한 줄거리 요약과 더불어 구체적인 논점을 적으면 될 것이다.
구체적 논점이 없이 자신의 입장에 치우친 때이른 판단이 주된 내용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1. 이 책은 EBS에서 신설한 어학교육 프로그램(www.ebslang.co.kr)의 교재로
개발된 책이다. 따라서 인터넷 강의를 들어야 도올 선생의 본지를 더욱
쉽게 파악할 수가 있다.  

2. 서(intro)에서 우선 강조되는 점은 기독교가 조선후기 남인들의 주체적인
수용에 의해 이루어졌다
는 것이다. 이때 핵심이 되는 인물은 이벽, 이승훈,
권철신과 정양종, 정약전, 정약용 형제였다. 즉, 이들 초기 수용자들은
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교리 탐구를 통해
조선이라는 폐쇄된 문명의 대안을 찾고자 했다.따라서 우리의 기독교 수용은
주체적, 계몽적, 이성적이었으며 미래지향적 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미신을 배격하는 성리학자인 이들을 매혹했던 기독교의 힘은
무엇인가
하는 점과 대부분 배교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 초기 수용자들의
처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점이다.

기독교가 급격히 성장한 이유는 조선이 망하면서 성리학이 해체되면서 정신적
공백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지만, 지식인에게는 민족해방이나 근대화의 열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기 때문이었고, 민중의 입장에서는 인간 평등사상이 주는 해방감과
더불어 구원의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을 시작으로 200년이 넘은 지금, 기독교는 단순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애환을 담은 우리의 종교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3. 도올 선생의 주장 중 또다른 쇼킹한 주장은 구약은 참고문헌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결국 신약에 한정된다
는 것이다. 구약의 역사는 유대인과 유대인의
민족신인 야훼간의 특정한 계약을 적은 것으로 신약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도올 선생의 입장에서는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민족의 희망을 좌절시킨 역사다.'(37쪽)

다윗과 솔로몬은 사치와 부도덕으로 나라를 망친 질나쁜 왕으로 결코 칭송할만한
인간들이 아니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예수를 치사한 다윗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예수는 유대인이지만 율법에 사로잡힌 유대인이기를
거부하고 사랑의 종교를 세운 사람으로 질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도올 선생은 마가, 마태, 누가의 3 복음서는 다윗의 후손이자 민족적
구원자로서의 예수에 집착하여 구약과 이적에 속박되어 있는 반면, 요한 복음은
유대의 전통에서 벗어나 헬라이즘의 로고스론을 통해 구약의 속박을 벗어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신약 중에서도 요한 복음을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는 것이다. 

4. 이제 본격적인 요한 복음의 강해를 보자.
강해에서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하는 부분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에 나오는
'말씀'에 대한 설명이다.

요한복음이 이오니아의 에베소에서 AD 100년경에
성립했다고 할때 '말씀'즉, 로고스의 사상적 뿌리는 BC 500년 경 같은 에베소에
살았던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찾을 수가 있다
.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코스모스를 긍정하였으며, 우주의 법칙으로써의 로고스를
끊임없이 변화와 투쟁을 하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불이라고 보았다. 

복잡한 내용은 직접 보아야 겠지만 최종결론은 이렇다. "로고스는 법칙으로서
우주에 내재하는 동시에 사유의 법칙으로서 우리 마음에,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생명이요 빛이었다."
(87쪽)

5.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사상을 긍정하는 도올 선생의 입장에서 볼때
변화하는 코스모스를 현상계로 머리 속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실재계로
나누고 오직 관념만을 중시했던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개탄스러운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플라톤을 거쳐 기독교에 반영되는 데 그 결과는
관념적 기독교, 세상과 분리된 상관없는 하느님이다
. "...그렇게 되면
당연히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로고스는, 우주의 투쟁의 긴장 속에 내재하던
로고스로부터, 우주 밖의, 그러니까 시공을 벗어난 초월적인 로고스로 그 성격이
바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로고스는 이데아적인 것이 되고 물질적 성격이
완전히 추상되어버린 이성적 실체가 되어버린다."(92쪽)

그렇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인데 도올 선생은 기독교의 역사가 헤라클레이토스의
코스모스의 긍정과 파르메니데스의 코스모스의 부정이 서로 뒤엉킨 채 진행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이런 헬레니즘의 보편적 토양을 간과한다면 신약이나
요한복음의 내밀한 이야기를 읽어내기 힘들다는 도올 선생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분열과 융합은 요한복음의 끊임없는 주제를
형성한다. 우리는 분열의 측면만을 강조해서도 아니되고 융합의 측면만을
강조해서도 아니된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을 읽어나가는 묘미이다
."

6. 나는 이쯤해서 인터넷 강의에서 들은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차이를 적고
갈무리를 지으려고 한다. 원래 내 리뷰의 의도는 구체적인 사실을 가지고
서로 논쟁합시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어서 였다.

사족을 달면, 도올 선생도 연세가 예순이시고 적어도 내 관점으로 봐서는
성의와 열성을 가진 좋은 학자이시다.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동네 강아지
취급하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이
두 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노무현 대통령과 도올 선생이다.) 여하튼,
구체적인 논점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만이 도올 선생으로 부터 배우려는 사람도,
배척하고 극복하려는 사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부질없이 종교와 입장이 다른 사람끼리 감정적인 대립하지 말고
"나는 여기까지는 파악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지 않냐? come and see!
Let's talk about it!"이런게 좋지 않나 싶다.   

5. 다시 내용으로 돌아가 마가, 마태, 누가 복음은 예수를 기술하는 방식이
비슷해서 공관복음이라고 불리는데 예수는 공관복음 속에서 이렇게 나타난다.

1) 시골인 갈릴리 지역에 주로 살았던 목수로 천민신분이었다.(최하층 20%)
2) 갈릴리의 시골, 나사렛의 예수가 소외된 계층에게 이적을 보이며 제자를 끌어모은다.
대중의 인기를 높아져 갈릴리 민중의 지도자로 추앙을 받게 된후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그러나 성전에서 동물을 몰아내고 환전상의 상을 뒤엎는 과격한 행동을 한 것을 계기로
지배층에게 위험한 자로 미움을 사게되고, 결국 십자가 형을 받았으나 부활, 승천한다.
3) 결국, 예수의 삶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일직선적인 상승곡선을 그린다.

요한복음은 이와는 다른 혁신적인 복음서이다.
1) 예수는 지상의 출생과 관계없이 로고스의 화신이다.
2) 태초부터 우주의 생성에 관여한 존재이다. 신이며 인간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증언이나 이적에 의존하지 않는다.
3)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일직선적인 구도가 없다.
4) 국제도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개방적이고 지적인 존재이다.

6. 끝으로 요한복음의 특징인 로고스 기독론적인 요소는 예수를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로고스 기독론(영지주의)이라는 이야기의 큰 틀을 미리 내세움으로써
유대민족의 혈통이나 이적의 과시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결과, 신화적인 요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인간적인 예수가 드러나게 된다.
 

로고스론이라는 신화적 장치가 인간 예수를 드러내는 이유가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추가 리뷰 ( 5월 25일)****

인터넷 강의가 3단계에 접어들고 [요한복음 강해]를 3번째 읽고 있다. [강해]를 읽으면서 곤혹스러웠던 부분을 생각해 보려 한다.

[강해]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크게 3군데인데 (1) '서: 한국 성서수용의 주체적 역사'에서 중반 이후의 논리적 연결 (2) 로고스 기독론 (3) 종말론의 현재화 이다. (2)는 철학 및 역사적 숙고가 필요한 부분이고 (3) 신학적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므로 그리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1)인데 책을 나름대로 정독했다고 생각하지만 유득공의 [발해고] 부분이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부분이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않은 것이 곤혹스럽다. 

또 이 부분을 달리 보면, 블루비니님의 리뷰에서 보듯이 '밥맛없는 민족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분명히 존재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런 감정적인 거부감을 덜고 [강해]를 호의적으로 본다면 이 밥맛없는 민족주의 부분이 도올 선생의 전체 논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여하튼 도올 선생의 논지는 조금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고 논리상으로도 엉성해서 거부감을 들게 하지만, 거부감을 넘어  저자가 의도한 논지를 확연히 파악되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우선 이런 부분이 도올 선생의 영감에 의한 원고지 채우기형 글쓰기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영감에 의한 글쓰기는 책의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실존적인 감동을 일으키는 힘은 있지만 앞뒤가 모순되기도 하고 논리적인 구성이 엉성해지는 부분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더라도 이런 글쓰기 속에 상당한 감정을 담아 길게 적은 부분이 있다면 도올 선생의 의식세계 속에 중요하게 자리잡은 생각이라는 걸 나타내므로 적절한 논리적인 연관을 찾아내어 핵심적인 주장으로 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강해]의 처음을 이끄는 '서'부분의 핵심적 주장은 제목 그래로 '한국 성서수용의 주체적 역사'이다. 이승훈 이벽 등에 의해 기독교가 주체적으로 수용되는 역사를 그리다가 도올 선생은 '기독교가 조선 문명의 주축으로 진입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 대답은 (1) 내부의 동질적 요소 : 풍류지도, 신바람 (2)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 : 인간 평등의 이상 (3) 구원 또는 율법 부정의 실존적 절실성 : 유교문화의 신분주의적이고 의례적인 질곡에서의 해방 (4) 역사적 상황의 동질성 : 식민지 상황의 이스라엘과 조선 이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펼쳐지는데 그들의 역사가 하느님을 배반하고 고생한 역사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 이전에도 부패한 지배층과 강대국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듯 고생하던 유태인들은 예수 사후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시까지 무려 1800여년을 나라없이 떠돌게 된다. 이들은 신과의 계약을 어긴 결과 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죽인 결과 고향을 잃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되찾았다.  이것을 설명하는 틀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를 시련을 통해 참회한다는 것 또는 하느님이 어리석은 행위를 반성할 수 있는 시련을 내리시고 충분히 성숙했을 때 다시 해방하신다는 것이다. 시련의 끝은 고향으로의 되돌아옴이다.

조선의 기독교가 팽창하던 시기의 조선은 어떠하였던가? 조선 역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는 어떤 어리석음을 저질렀던가?  이스라엘의 후회스런 역사에 대응되는 우리 민족의 어리석은 역사는 다음과 같다. (1) 민족적 고향인 만주 벌판의 포기 : 신라의 삼국통일, 유득공의 [발해고]에서의 통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2) 깨어있는 민족적 선각자의 박해 : 묘청, 최영, 이이, 김덕령, 이순신, 소현세자 등.

굳이 단순화 한다면 만주는 예루살렘이오, 최영이나 이순신은 예수가 될 것이다. 예수를 죽여 1800년을 떠돈 유대인과 최영을 죽여 만주를 잃고 이순신을 죽여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인은 처지가 비슷하다. 민족의 역사의 고향을 버리고 협소한 한반도에 갇혀살며 넓은 세계로 가자고 선도하는 선지자를 죽인 역사, 그래서 끝내 이민족의 식민지가 된 역사가 우리의 역사이다.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깨인 민족이 되어 우리의 민족적인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이런 구구한 이야기를 통해 도올선생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우리민족의 초기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읽으면서 자기민족의 역사를 반성할 줄 알았고, 그리고 좌절과 패배와 낭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으려 했다는 것이다."(56쪽) "내가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는 이런 기독교다. 절박한 상황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자신의 죄악을 반성하고, 나 일신의 편안함이나 세속적 영욕에서 벗어나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공동체로서의 기독교!"(58쪽)

도올 선생의 이런 진지한 고백을 의미있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의 병립이 도올 선생의 의도만큼 석연치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거지의 개연성 정도로 보여진다. 우선 TV를 장식하는 폭력과 전쟁으로 점철된 이스라엘의 현실을 우리 민족이 품고 살 필요는 없지 않는가?  또, 만주 회복을 의미하는 듯한 위와 같은 도식은 식민지 시대에 유효할 지언정 국경분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지금에 합당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도올 선생의 이런 거북한 이야기는 결국 이런 식으로 변형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 만주벌판의 회복이란 민족적인 정체성과 주체성 찾기일 수 밖에 없다. 이때 민족적 정체성이란 국경으로 갈라지는 국가의 정체성이라기 보다는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우리들의 정신세계의 깨임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2) 민족적 선각자라는 문제는 깨인 개인들에 의한 리더쉽의 구성에 속하는 것으로 이 역시 문화적인 부흥, 실존적인 자각 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여진다.

그럼 이러한 결론의 귀결로서, 우리 사회의 부흥이나 깨임은 무엇을 기반으로 하여야 할 것인가? 아마도 진실 또는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일 것이다. 기독교의 이해가 성서의 바른 이해에 달려 있듯이 우리 문화와 개인의 성숙이 고전에 대한 바른 이해에 달려있다고 하면 맞는 말일까? 여하튼 내 생각으로는 바른 이해라는 것은 복잡한 현상의 해체를 통한 근원에의 접근과 관계가 있다. 그렇게 만나는 것이 로고스인지 하느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서'는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논지가 뒤섞여서 참 석연치 않은 글이다.  

** 배암발 : [기독교 성서의 이해]는 노란색, [요한복음강해]는 검정색이다. 아마도 빛과 어둠의 대비일 것이다. 몽매한 코스모스에 비치는 복음의 밝은 빛,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표현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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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07-03-0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 페이퍼에 있는 나귀님의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8) : 도올과 허혁'은 내용도 재미있고 읽을만 합니다. 은혜 공동체 강연과 나귀님의 페이퍼가 ‚I찮은 보조 자료가 되니까 [요한 복음 강해]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하늘연못 2007-03-07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마이페이퍼를 써도 등록이 안되므로 은혜 공동체 강연 중에서 도올 선생의 요한복음을 보는 관점과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이하 발췌한 부분)

*** 이 강연 전문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발췌문을 게재하는 이유는 도올 선생 옹호의 뜻이 아니라 [요한복음 강해]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실한 이해가 있고나서야 옹호든 반박이든 가능합니다. 이 강연이 저에게 중요해보이는 이유는, 강연이 두 책이 탈고된 직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도올 선생이 정말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핵심을 밝히고 있지 않겠느냐는 점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교와 기독교가 다르다.
예수교는 정말로 3년 예수님의 사역과 더불어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 3년이 진짜 예수교다.
그 다음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 사도들의 모임을 ‘기독교’라고 부른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란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믿음의 종교다.

예수교와 기독교는 엄밀하게 다르다.
그래도 초대교회는 예수교적인 기독교다. 그런데 313년 로마황제에게 공인 받은 뒤엔 황제교적 기독교가 됐다. 나는 그것을 못 믿겠다. 그 이후 기독교는 문제가 있다. 예수교장로회이면 예수교로 돌아가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자.

요한복음 17장에 21절 보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믿게 한 것을 아옵소서”라고 했다.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 들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내가 참 포도나무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했다. 예수가 만약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열매가 여러분이다. 나무 전체가 교회라는 영적인 생명 공동체다.
내 안에 거하라. 포도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기독교가 이런 것을 상실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할 땐 내 안에서 거하라. 동시에 상호적인 것이다. 나도 너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 근거는 내가 하나님 속에 거한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 그러한 거함에 의해 우리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
논리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과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로서 거한다.

기독교는 요한복음 메시지를 밀고 들어가면 불교도 설 자리가 없이 과격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이런 요한복음 사상을 해석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이다. 우리가 그런 속성을 구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인간이 없는데 하나님이 뭐하러 가치가 있느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있느냐. 인간의 관계를 떠난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유대민족과의 계약 관계에서만 하나님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줬다는 것 때문에 야훼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예수와 우리, 예수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게 ‘항상 하나님과 내가 서로 하나된 것처럼 그의 생명에 매달린 열매, 너희들도 서로 하나가 되라’

하늘연못 2007-03-1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음은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신대 명예교수이신 김경재 선생의 인터뷰기사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분이어서 그런지 주장도 유연하고 도올 선생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시네요. 참고바랍니다.****

-도올은 기독교인들이 거대한 압력단체를 만들려 한다며 기독교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는 진보 쪽이 70~80년대에 참여한 것은 로맨스고 우리가 하면 불륜이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70~80년대엔 약자들을 아무도 대변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상한 상황이 끝나면 종교인들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논공행상에 참여했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또 우파들은 안보를 위해 한-미 동맹이나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등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 이데올로기이지 성서의 정신이 아니다.

-도올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구약의 야훼는 수없이 사람을 죽이고, 질투하고 화낸다. 예수가 신약에서 ‘아버지’라고 한 분과 구약의 야훼가 같은 분인가. 이런 질문이 신학계에서 있어 왔는가?




=당연히 있었다. 도올이 질타하는 것은 오직 유대민족만을 위해 타민족을 죽이는 부족신 개념에 대한 맹신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훼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수없이 얘기했다. 자식 열둘 가진 부모가 있다고 치자. 정상적인 부모라면 가진 것도 없고, 장애를 가진 자식에게 가장 마음이 쓰이게 마련이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애급의 노예로 끌려가 그토록 고초를 받을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긴 것이다. 그들만이 특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신의 편벽한 모습이 성서에 비침으로써 반목과 전쟁의 역사를 부채질한 것이 아닌가?

=구약도 솔로몬과 다윗 등 왕권이 성립된 뒤 편집된 것이다. 제왕 전승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런 제왕적 모습을 부각시켰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도 야훼의 전지전능성, 제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게 현실 아닌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도 야훼야말로 진짜 신이니, 환웅, 환인, 제석신,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등 다른 신을 모두 쫓아내고 이 땅을 야훼가 제패하는 것처럼 묘사한 게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종교로서 선교 사명을 갖고 있다는 정치 메시아니즘도 구약을 밑바닥에 깔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것으로, 그런 잘못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는 어떤 신인가?

=야훼는 제왕적 신이 아니다. 야훼란 말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긍휼히 여기는 모성적 고통, 산고의 진통에 동참하는 이’다. 한반도의 초기 백성들이 교리적 도그마가 아니라 아무런 선입관 없이 성경을 읽다 보니 어렴풋이 그런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공감해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제왕처럼 하늘 위에 앉아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인가?

=섬김과 봉사를 통해 정의와 평등을 이루는 분이다. 일제나 미국 극우주의자들처럼 침략하고 세상을 제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견강부회하며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관이다.

-도올이 예수와 한반도 초기 올곧은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라면, 보수 기독교가 왜 이처럼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신관이 중요하다. 신관이 바뀌지 않으면 기독교가 바뀌지 않고 세상이 바뀌지 못한다. 그래서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로 인해 기존의 신관과 교권이 흔들리는 데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치적 우파들과 결속하는 것에 대한 방해라고 여긴다. 약자와 함께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예수의 사랑을 실현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통해 세상적 힘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젊은 지성인들이 도올의 강의를 듣고 깨어나서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기총 이용규 회장과 최희범 총무는 기자들과 만나 ‘철학자가 성서를 해석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철학과 신학은 같지 않다. 그러나 지성과 이성을 배제한 신학은 없다. 초자연적 신을 얘기하는 보수적 신학도 교리들을 보면 대단히 논리와 합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신이나 구원도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적 진리다, 영이다, 신앙이다’라며 신성의 보자기로 감싸는 ‘경계 침해의 논리’는 교권 보호를 위해 상대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카르 바르트는 “신학도 인간이 하는 학문적 시도”라고 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계시된 신학이란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신앙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열리지 지식과 과학으로는 안 된다’고도 주장했다.

=‘신앙=반지성주의’로 몰고 가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 그것은 몽매주의다. 상당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그런 교권주의와 권위로 다스려 전근대적 복종의 미덕만을 강조해 오면서 무지한 맹신이 진짜 신앙인 양 호도했다.

-기독교에서 도올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낡은 부대는 신축성과 유연성이 없어서 새로운 것을 담아내기 어렵다. 담으면 터져버려서 술도 상하고 부대도 상한다.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어떤 부대인가.


하늘연못 2007-05-22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의 신학자들과의 대토론회도 감동적이었지만 3월의 개신교 목사이자 교회사학 박사인 이국헌 선생과의 서신 논쟁이 더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신문기사와 이국헌 선생의 마지막 편지를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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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이국헌 목사와 공개신학 논쟁
이국헌 목사 “도올 지적 아픈 채찍…그래도 종교는 초월적 영역 설명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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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21 선교센터’ 소장이자 기독교회사 박사인 이국헌 목사가 개신교 온오프라인 신문인 〈뉴스앤조이〉에 지난 9일과 12일 띄운 글을 통해 공개적인 질문을 던지자, 도올이 15일 “사람들이 저서인 〈기독교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도 읽지 않고 편견만을 펴는 반면 시간을 내 깊게 읽고 사회적 담론을 창출해내는 데 감동을 받았다”며 답글을 올린 것이다.

이 목사는 ‘도올에게 기독교 종말론을 묻다’라는 첫 글에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사상들을 통해 세계를 구원할 보편적 진리의 틀을 제공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학문적 활동은 기독교 신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채찍이 되고 있다”며 “그러나 그 사상이 정말로 기독교 사상을 보편적 진리의 틀로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한 것은 어느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기독교 신학에서 묵시론적 종말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며 조목조목 반격했다. 이 목사는 “지금 이 시간에도 3차원의 시공 속에서 존재의 한계에 부딪혀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저들에게 기독교의 종말론을 단지 현재적인 의미로만 국한시킨다면 그것이 저들에게 무슨 희망이 되며, 구원의 진리가 되겠느냐”며 “죽음은 불가항력적이고 초월적 경험이기에 종교는 경험 너머까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또 ‘로고스 기독론과 역사적 예수’라는 두 번째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이시며(니케아 신경), 따라서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다(칼케돈 신경)라는 신앙 고백에 의거해 기독교 신학은 논쟁과 정립을 거듭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런 고백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의 진리를 벗어난 잘못된 신앙 고백이라고 말하고 있다”며 “역사적 관점에선 그런 지적은 어느 정도는 수용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이런 신앙 고백적 정식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기독교 신학적 본질이 있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이어 “기독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사람은 과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선생님은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사상의 한 큰 흐름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영원한 것일 수 없고, 지금 이 시점에서 유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며 “그것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흘러온 사상적 지류 중 하나로, 하나의 옵션인데, 그것이 절대적 대안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도올은 답글에서 “근본적으로 목사님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종말론과 묵시론을 이원적으로 대비시킨 것은 순수하게 방편적인 것으로, 우리나라 기독교의 일반적 성향이나, 한국인의 영성적 내면에 지나치게 묵시론적 기대가 강렬하게, 미신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광정해야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도올은 또 “초대교회운동사에서도 재림에 대한 기대가 없이는 공동체 형성 자체가 불가능했다”며 “그것을 순수하게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자각과 미지의 미래에 대한 건강하고 밝은 희망으로서 해석한다면 저는 단지 그 희망 앞에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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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헌 목사가 김용옥 교수에게 보낸 서신
2007년 03월 16일 (금) 10: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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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도올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뉴스앤조이>를 통해서 제기한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신문의 기사로는 적지 않는 내용이었고, 매우 축약적인 기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을 단숨에 이해하셔서 선생님의 혜안과 그 이해를 바탕으로 기꺼이 답신을 보내주신 격조 높은 인격에 우선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선생님께서 기독교계를 향해서 담론을 요구하신 것이 기독교 신앙의 깊은 이해를 이끌어내기 위한 진실한 제안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런 진실담론들을 통해서 발전되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뜻을 새삼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교회에 중요한 신학적 성찰의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것을 또 한 번 공감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수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아우르고 있는 기독교의 묵시론적 종말론이 기독교 희망론으로서 거듭났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한 기독교 종말론의 한 유형이 된다는 사실을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특별히 그 희망의 신학이 현재적 삶의 혁명과 연관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미래 희망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기독교 종말론이 단지 미래의 카타스트로피적 종말만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후기 유대 문학서에서 발전했던 묵시론적 종말론의 폐해를 반복하는 것이며, 그 폐해가 결국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비본질적 종교운동을 낳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학적 대안은 종말론의 현재적 의미를 함께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말론과는 신학적 장르로서 크게 연관이 없을 것 같기도 한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가 실제로는 기독교 종말론의 의미를 매우 구체화시켜주고 역사화시켜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정치신학화 되지 않는 범위에서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 및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현재에 기독교인들이 삶 속에서, 예수를 믿는 실존적 신앙적 결단 속에서, 그리고 미래에 예수의 파루시아를 통해서 완성되는 나라에서, 포괄적으로 실현되는 나라 즉 과거·현재·미래라는 모든 역사적 지평에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종말론은 과거와 미래의 이중적 개념과 더불어 현재적 종말론의 의미를 모두 강조할 때 가장 구체화된 종말론 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 종말론적 희망과 현재 실존적 결단에 의한 현재적 종말론이 공존할 수 있다는 선생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특별히 선생님께서는 이런 이중적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아울러 묵시론과 종말론의 신학적 긴장감이 있음을 이해하시면서도, 기독교 종말론의 실존적 지평,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신 것이 신학적 중심을 잡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말씀에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인식의 불균형과 그로 인한 교회적 폐해가 나타나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신학적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을 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거의 전무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선생님의 의지가 너무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지적대로 한국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잘못된 묵시론적 기대와 미신적 종말운동에 대한 신학적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묵시론과 종말론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현재적 종말론의 의미를 매우 강조하고 있는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 그 신학적 지도가 가능하겠기에 현재적 종말론을 강조했다는 선생님의 의도를 잘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학자로서 저희 역시 미래적 종말론에 나타난 파루시아와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한 더 깊은 영적 의미를 잘 정리하고 다듬어서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 나라의 미래를 바르게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작은 영역에서 영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저도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의미 있는 대화를 통해 더 큰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진실담론을 위한 개인적 헌신을 재 다짐하면서, 앞으로 새로운 관계로 지속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독교의 진리를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틀로 만드는 일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만나 뵙기를 바라며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 그리고 선생님을 위해서 늘 기도하겠습니다.

2007년 3월 15일
이국헌 드림

하늘연못 2007-05-2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은 5월 11일의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있었던 도올 선생과 신학자들과의 대토론회 내용********************
"21세기에는 믿음의 강요보다 이해가 필요하다"
도올 김경재·김광식·김은규·김준우 교수와 공개토론

도올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가 한국조직신학회(회장 이정배)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에 나섰다. 한국조직신학회는 논란이 되고 있는 도올의 주장에 '불편한 진실'이 담겨있다며, 이제는 이를 인정하고 논의하기 위해 토론회를 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도올의 '불편한 진실'에 공감하고, 오해를 풀면서도 그의 성서이해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지적했다.

5월 11일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중강당에서 열린 토론회에는 7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려, 계단이나 바닥에 앉아 토론회를 경청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인사한 유동식 전 교수(연세대)는 "평생 신학회를 다녔지만 오늘처럼 많은 사람이 신학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 봤다. 진지한 토의를 통해 우리 신학과 민족에 토대를 쌓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날 토론회는 △ 구약무용론을 주장한 도올 선생의 신학적 입장의 정당성과 그에 대한 반론 △ 도올 식의 기독교 성서 이해에 대하여(성경의 정경화 과정에 대한 이해) △요한복음을 헬레니즘의 시각에서 보는 신학적(탈구약적) 의중의 편파성 여부 △아타나시우스 대신 아리우스 주의에서 기독교를 재구성하는 도올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평가 등의 주제를 다뤘다. 토론회에는 김은규 교수(성공회대)·김경재 교수(한신대)·김광식 교수(연세대)·김준우(감신대)가 참가했다. 토론회의 사회는 이정배 교수(감신대)가 맡았으며, 토론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도올이 응답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구약 무용론에 대하여
김은규 : 교계에서 회자되는 구약폐기론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도올이 의도하고 있는 것을 봐야한다. 그는 지배이념과 권위가 된 신학을 거부하고 성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고, 한국신학계의 교리주의와 배타성·폐쇄성을 꼬집고 있다. 그러나 토라·오경·십계명에 들어 있는 법에는 사회안전망과 정의실현 등 창조와 해방의 의식이 담겨 있고, 구약의 사상에는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킨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는 신앙이 담겨 있다. 올바른 사상과 지혜가 담긴 구약은 신약과 균형을 맞춰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김준우 : 율법이 아닌 율법주의를 거부했고, 구약폐기론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니 오해가 풀렸다. 그렇다면 책 제목을 '기독교 성서의 이해'에서 '신약성서의 이해'로 바꿀 의향이 있는가? 또 책 속에 율법의 부정이라는 구절을 율법주의의 부정이라고 수정을 할 것인가?

도올 : 포괄적이고 정확한 지적이다.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하겠다. 기독교성서의 이해에서 구약을 뺐다는 것은 내가 히브리어를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자적 양심에서 볼때 원전을 다루지 않고 맘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 구약의 이해가 모자랄 수 있다. 히브리어도 공부할 용의가 있다.

다만 굽힐 수 없는 주장도 있다. 신약에 없는 십일조를 신자들에게 왜 강요하냐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 조직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나도 인정하겠다. 그런데 하나님말씀이라고 하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구절을 설교의 근거로 활용하면 좋은데, 그것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 하나님 말씀처럼 말한다. 이런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다.

김경재 : 동양의 유교·불교·노장사상의 터 위에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이것이 앞선 사상과 어떤 면에서 다른가? 기독교가 어떤 것이기에 한국에 공헌할 것으로 판단했는가?

도올 : 우리 민족은 구한말 정신사적 유산이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서 기독교를 수용했다. 특히 우리는 백인 선교사의 선교를 통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해서 받아들였다. 특히 성서가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에 받아들였고, 유교의 율법주의의 해방 논리를 제공해 정착했다. 오늘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김광식 : 두 권의 책을 통해 신학자들이 들춰보지 않을 것을 봐줘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글의 내용에서 현재 우리가 붙들고 있는 전승이 근원으로부터 동떨어져서 돌아가야 하며, 비본래적인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27권의 신약 중 요한복음 1장 1절만 가지고 모든 주장을 펼친다. 조직신학은 학문으로 보지 않는다. 창세기 1장 1절만 가지고도 독재 이데올로기와 해방 이데올로기를 만들 수 있다. 조직신학 교리를 긍정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는 없는가?

도올 : 앞으로 조직신학을 더 공부하겠다. 훌륭한 조직신학을 읽지 못해서 교리의 세계에 대한 깊이를 갖지 못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 글은 해체나 환원의 단순한 방법을 이용한 것이 아니다. 나는 세계적인 고전학자다. 내가 닦은 엄밀한 훈련이 있다. 핵심적인 의제를 사회에 던지기 위해 전략을 쓴 것이다.

신약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도올 식의 성서이해)

김광식 : 복음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신학자들의 대답은 다 다르다. 선생은 두 권의 책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말하지만 내용을 보면 정치적이다. 기독교의 복음을 보편적인 가치가 구현된 이상적인 시민사회 정신의 구현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도올 선생의 복음의 이해다. 선생이 주장하는 것은 짝퉁이고, 동의하지 않은 부분을 싹둑 자른 싹둑복음이다. 총체적인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도올 선생은 역사적 예수에 중점을 두는 듯하다

도올 : 나는 복음을 시민사회 정신을 등으로 고집하고 있지 않다. 지금 나를 싹둑복음이라는 흉악한 말로 규정하고 있다. 비판하려면 원로답게 정당하게 비판해라.

김준우 : 성서자체와 복음이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과 등식화 될 수 없다는 지적. 성경 자체가 오류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신학자들이 하기에는 위험한 주장인데 그 주장을 하신 것은 찬동한다. 그러나 선생은 책에서 민족적 기개를 문제 삼고, 역사의식을 문제 삼았지만, 하나님나라에 대한 강조가 없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설명도 개인주의적이고, 비정치적이며, 비사회적인 각도로만 접근했다.

김은규 : 성서가 정경이 되기 전에는 구약시대 공동체 시대에 맞게 내려오다가 제국과 교황의 의도가 들어가 정경이 되면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정경화 과정이 있어서 서민들이 기독교를 알 수 있고, 기독교에 적을 둘 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올 : 어느정도는 민주적 과정이었다고 본다. 누가 독단적으로 정경을 결정했다고 초대교회 역사를 단순화 할 생각은 없다. 성서의 문헌을 보면 드라마가 많다. 상식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면 해결이 안 될 문제가 많다. 나처럼 상식 있는 사람을 기독교가 죽이려고 하는데 나정도만 수용해도 굉장한 것이다.

어머니에게 신앙을 받고 대한민국 기독교가 잘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싹둑복음을 말했다. 4복음서는 탁월하다. 나는 복음서를 유치한 영지복음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4복음서는 성서편찬자의 최후의 양심이라고 본다. 내용이 서로가 다름에도 예수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해줘서 토론이 가능해졌다. 신학자가 아닌 내가 하나님나라를 말했을때 예수의 실존적 의미나 토론이 사라질 위험이 있어서 언급을 피했다.

김광식 : 싹둑복음은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것뿐이다. 나는 단지 선생이 성경을 너그러운 눈으로 보셨으면 한다. 성서에는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도를 찾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본분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설교자는 교인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은혜 받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게 해야 하지 않나?"

도올 : 오해는 풀렸다. 저도 신앙인으로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적합한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나도 내 책을 그대로 설교에 쓰라고 하지 않는다. 김 교수님은 칸트에서 시작해서 이제 와서 자유주의 신앙에 머물렀으며, 칼바르트 같은 종합성도 없다고 했다.

질문의 진정성은 이해하지만 교수님과 같은 그런 태도가 교회를 망쳤다고 본다. 교수님의 신학체계가 너무 나이브하다. 한국교회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교회 건물이나 짓고 공동화되어가고 있다. 믿음을 가진 공동체주의는 충분하다. 아무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21세기에는 그런 공동체는 유지가 되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신앙을 강요하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해시켜야 한다. 과학적 세계관에 노출되고, 억압의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이해보다 믿음을 추구하면 목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을 헬레니즘의 시각에서 보는 탈구약적 편파성에 대하여

김준우 : 선생의 해석에는 깨달음이 강조 된다. 기독교에서 부족했던 각해 차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맥락자체가 당시의 정치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예수 공동체가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난 상황에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로고스 기독론이 나온 것이며,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말씀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히 지혜의 교사 각도에서 해석할 때 사회적 약자와 배우지 못한 사람을 위해 말씀이 육신으로 내려온 (미륵하생과 같은) 부분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냐.

김경재 : 한국기독교는 문자적으로만 해석해 신이 33년간 인간으로 둔갑해 살다가 본거지로 돌아갔다는 수준으로 로고스를 이해한다. 고대의 비슷한 신화가 많은데 그것을 반복하려고 요한복음이 쓰인 것은 아니다. 예수가 로고스의 화육이라면 나도 원론적으로 로고스의 화육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로고스의 화육이지만 나머지는 안 된다고 말하면 거리감을 느낀다. 성서는 너가 곧 로고스의 화육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가 왜 요한복음을 좋아하는가?

도올 : 오늘 이 자리는 배우러 나온 곳이다. 김준우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것은 앞으로 많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김경재 교수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을 좋아하는 이유'는 추상적 해석의 자유가 있어서 그렇다. 나도 인간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와 인간은 차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겸손해져야 할 인간이 건방져지고, 기독교가 설 자리가 없어,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이 양심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요한복음을 해석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하면 이단이 된다. 불교와 다를 게 없다는 말을 듣는다. 신학 하는 사람들이 로고스론을 안 읽는다. 볼트만 같은 책을 나만큼도 안 읽었다.

아리우스주의를 선호했던 탈 전통적 입장에 대한 평가

김경재 : 논쟁의 결과로 하나는 정통, 하나는 이단이 된 기독교의 비극이었다. 둘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진리의 한 측면이지 하나는 정통이고, 하나는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의 의도를 받아들인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풍요를 누릴 수 있다.

김광식 : 누구는 틀리고 누구는 옳은 것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가 권력으로 관철시켰다지만 아리우스도 역시 그랬다. 똑같다. 나는 삼위일체 기독론을 믿고 목사가 되었다. 저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옳고 그른 것은 하나님이 밝혀주실 것이다. 제 입장에서 아리우스를 택하지 않고 아타나시우스를 택했고, 약점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다. 다르게 믿는 신앙을 참아주고 견뎌 내고 아량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기독교인이고 목사다보니 부처에게 빌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도올 : 이 논쟁이 현재에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리우스에 대한 논의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논의가 유치하다고 본다.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신앙의 본질적인 얘기를 어떻게 하나. 아리우스의 입장도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누가 정통이고 이단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폭넓게 이해하자는 것이다.

국내 신학자들이 사해문서는 열렬히 연구하면서 나그함마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 중 몇 개는 4복음서와 겹치는 것이 30%고, 80%이상이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서를 이해하는 문서가 될 것이다. 이런 것에 신학도들이 관심을 더 가졌으면 한다.

하늘연못 2007-05-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도올 선생과 토론을 벌인 한국 조직신학회는 한국의 기독교 신학을 대표하는 간판급의 학회이다. 참고로 조직신학(systemetic theology)은 원래 성서 무오류설을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의 전체를 systemetic하게 이론화하려는 학문적 시도이다. 결국 가장 거시적으로 기독교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를 본 이정배 회장이 학회의 이름으로 도올선생의 두 저작에 대해 지적한 부분은 매우 관심이 간다. (이하는 한겨레 신문의 조연현 기자의 정리 내용) *****

“예수에 대한 뭇 해석에 열려진 태도 필요”
‘도올 성서 이해‘ 토론회를 열면서(한국 조직신학 회장 이정배)

▶토론회가 열리기까지


오늘의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험난한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도올 선생과의 대화자체를 불필요하게 생각했고 이런 자리를 계획한 저희 조직신학회에 차가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토론자를 모시는 일에서부터 장소사용 문제에 이르기 까지 쉬운 일은 없었습니다. 평소 반기독교적 사상가로 호가 나있던 도올 선생께서 신학을 말하고 성서를 가르치는 일 자체가 싫었던 것입니다. 신학자들 중에도 금번 출간된 두 책,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를 한 동양 철학자의 어설픈 작품으로 폄하했고 심지어 전통 기독교 해석을 뒤엎는 이단자로 배척한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물음은 있되 대답 없는, 역으로 박제화된 답만 있는 교회현실


그러나 본 토론회가 신문 기사화된며칠간 토론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여준 백여 명의 기독교평신도들의 전화를 받은 바 있습니다. 이는 도올 선생이 내건 신학적 화두에 흑백논리로 접근한 기성 교회의 시각에 평신도들이 만족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물음은 있되 대답이 없는, 역으로 박제화된 답이 있어 물음 자체를 허락 않는 교회현실에 대한 이의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금번 토론회를 위해 물심양면의 격려를 준 목회자들이 있었음을 말씀드립니다.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진실이 담겨있다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진실 담겨있다면 들어야


아울러 도올 선생의 기독교 및 성서이해의 한계와 문제점을 밝혀주기를 부탁하였습니다. 전화를 준 뭇 평신도분들과 지적 성실성을 지닌 목회자분들의 뜻으로 본 토론회가 열릴 수 있게 된 것으로 믿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건강한 공동체 토론을 원했던 도올 선생과 편치 않은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토론자로 응해주신 두분 원로 조직신학자이신 김광식, 김경재 박사님 그리고 역사적 예수 전문 번역가인 김준우 박사님 그리고 토론자를 청하기 가장 힘들었던 분야인 구약성서학자 김은규 교수님들께도 머리숙여 고마운 마음을 표합니다.


▶지금까지의 논쟁점


한겨레 조연현 종교담담 전문기자 역할 커


주지하듯 EBS 방송을 통해 도올 선생의 “요한복음강해”가 진행되면서 그리고 그 서언격으로 집필된 “기독교성서의 이해”가 출판되면서 신문지상과 온라인상에는 도올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의견표명이 줄잇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영성가를 소개하고 있는 한겨레 종교담당 전문기자인 조연현 선생의 역할이 컸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훼손 음모론’과 ‘국외자의 지적 오만’ 반론


사회자로서 본인은 지금까지의 논쟁점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본 토론회의 입장을 천명하고자 합니다. 크게보아 종래의 비판은 목회적 차원의 감정적 비판과 이단으로 정죄한 신학적 비판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화 없는 일방적 비판이었다는 점에서 두 입장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목회적 차원에서 교회를 훼손하는 음모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정통적 신앙노선을 손상시켜 신앙인을 더욱 혼동으로 치닫게 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의 지적 오만의 문제 역시 도올 선생에게 집중된 비판이었습니다. 이천년 지속된 전문 신학의 영역을 국외자가 함부로 칩입했다는 것이지요.


구약성서 부정적 이해가 교회 자극 기폭제


신학적 차원의 비판은 도올의 기독교 이해에 대한 이단 정죄로 이어져 있습니다. 교회 제도권 안에 머물러 있는 학자였다면 출교처분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천년 기독교 전통을 뒤짚어 본 도올의 시각은 관용을 중시하는 카톨릭 교회로부터도 상당한 저항을 받았습니다. 구약성서의 부정적 이해가 기독교교회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신구약을 예언과 성취의 구도로 읽는 기존시각과 복음과 믿음을 율법적으로 해석해온 목회적 현실에서 구약무용론이 마르시오니즘과 동일시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강해, 편협함 넘어 이단으로 평가


예언자적 시각의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습니다. 이런 비판은 요한복음을 헬라적으로 이해하는 도올의 입장과 잇대어 있습니다. 도올 선생은 육화된 로고스 예수를 인간 모두를 신으로 부르는 위대한 영성의 시발점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는 인간과 신의 하나 됨을 목적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도올 선생은 이것을 영지주의와 싸우면서도 그와 닮아간 요한복음의 본질로 여기나 성서학자들은 이를 구약성서로부터 기독교가 탈맥락화된 결과라고 거부합니다. 무엇보다 정경화 과정 자체에 대한 도올 선생의 비판적 이해는 신학자만의 학문세계를 세간에 불편한 진실로서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경들과 최근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 속에서 초기 기독교 해석의 다양한 모습(열려진 정경)을 보며 이후 폐쇄적 정경화 과정을 로마의 정치적 맥락과 연계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정통 기독교 신학의 시원으로 알려진 니케아 칼케돈 신조를 아리우스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뒤집는 도올선생의 입장은 요한복음강해와 맥을 같이하나 정통 교리신학자들의 눈에 편협함을 넘어 이단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에 대한 강한 긍정도 도마 올라


하지만 선생은 사적 예수 연구 결과물을 상당히 수용하면서도 역사적 예수 상에 만족치 않고 신앙의 그리스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정통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성서 자체가 역사적 문서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서슴치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중도하차된 것에 대한 학자적 불만도 적지 않게 토로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다른 차원의 비판입니다 만, 전체적으로 볼 때 영지주의 세계관에 대한 강한 긍정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토론에 들어가며


시간과 지면의 제약으로 간략하게나마 회자되고 있는 논쟁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쉽게도 세간의 논의는 이단 시비로까지 확장되어 선한 의도로 본 논쟁에 참여하고픈 사람들의 의지를 묶어 놓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균형잡힌 시각들이 생겨나고 있긴 하나 여전히 부족한 실상입니다. 이에 본 토론회는 도올 선생이 제시한 ‘불편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의도로 풀어가고자 합니다. 먼저는 본 토론회의 근본 의도를 말씀드리고 이어 토론회의 진행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도올 선생의 진리탐구 진정성과 진면목 인정


토론자들의 준비모임에서 의견을 나눴듯이 우리는 요한복음 강해를 대중적 매체를 통해 전달한 도올 선생의 수고와 진정성을 인정합니다. 물론 신앙적 동기에서는 아니었으나 기독교 서구의 텍스트 중에서 성서, 그중에서 요한복음을 택하여 그 의미와 주요성을 풀어낸 것은 분명 기독교를 흔들기 위함이 아니라 진리탐구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책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물론 그와 관계하려는 실존적 계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신대학교 1학년 시절 청년부 헌신예배 설교자로 기록된 옛 주보를 지금껏 간직한 사실과 그것을 책에 삽입한 것을 보면서 뭇 사상을 넘나들었으나 그가 다시 돌아올 지점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한신대 1학년 시절 헌신예배 설교자 기록 주보 간직


물론 그가 돌아온다면 오늘의 가시적 기독교는 아니겠지요. 요한적으로 이해된 기독교, 그것은 ‘플레타르키아(민본)’의 종교, 곧 동아시아적으로 이해된 신앙의 그리스도는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 주제는 기독교 복음의 토착화 과제로 이어져도 좋을 듯싶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본 책속에서 저자 가슴속에 남아있는 엄마, 그가 지닌 신앙적 에토스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고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에 대한 그의 말걸음은 폄하의 대상이 아니라 진지한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신학 학문세계와 목회 현장 괴리 너무 큰 것은 불행


또한 두 책속에 언급된 무수한 신학적 논의들은 교회 현장에서는 낯선 이론이겠으나 신학자들 세계 안에서는 한번쯤 격렬하게 토의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토론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의 학문 세계와 목회현장간의 괴리가 너무 큰 것은 서로를 위해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학은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면서도 교회의 방향을 이끌 책임이 있는 학문입니다. 물론 신학자들 역시도 저마다 자신의 관점을 갖고 특정 입장을 대변하기에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누구라도 비판과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홀로 완전한 사상과 이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점에서 도올 선생의 편파적 자료사용 내지 특정 관점의 과다 부각 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토론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철학·철학·동서양 아우르는 기독교 이해 ‘추종 불허’


하지만 누군가 지적했듯이 성서 무오설과 경전 절대주의에 입각한 한국 교회 및 목회적 현실에 대한 선생의 비판은 신학자가 해야 될 몫이었음을 숙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자는 여전히 도올 선생의 신학적 아마츄어리즘에 대해 조소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성서와 역사 그리고 철학 나아가 동서양을 아우르며 기독교를 이해하는 도올 선생의 사상적 폭을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도 눈에 띠지 않습니다. 도올 선생과 같이 동서사상과 언어에 능통한 평신도 기독교 사상가가 나온 것을 너무 불편해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의 생각과 사상 역시 일리(一理)를 지녔다고 볼 만한 아량과 관용은 한국 교회현실에서 아직 요원한 일인지요?


그 때문에 교회가 휘둘린다면 되레 우리 교회 바탕 되물어야


제 신학적 이론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나 이단 시비는 성숙한 기독교의 모습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 없이는 신학이 불가능하지만 예수에 대한 뭇 해석에 대해서는 열려진 태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제 그가 던진 ‘불편한 진실’은 논의될 주제이지 피해 갈 주제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한국 교회가 휘둘린다면 오히려 우리 교회가 반석위에 터 닦여진 것인가를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기독교 신학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조직신학자들의 모임에서 신학 대토론회가 논의되고 준비되어 오늘의 자리를 갖게 된 것을 조직신학회 회장으로서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뭘 토론할까


이런 의도 하에 본 토론회는 다음의 주제를 따라 적당한 시간을 할당하여 3시간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신구약성서 관계에 대한 차이나 입장 조율


첫째는 도올 선생으로부터 두 책을 쓰신 동기와 계기, 신학적 문제의식,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에 대한 말씀을 청해 듣겠습니다. 이 글과 함께 자료집에 담겨 있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네 분의 토론자 분들을 중심으로 신구약성서 관계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통해 도올 선생과의 차이 내지는 입장의 조율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구약 무용론을 주장한 도올 선생의 신학적 입장의 정당성과 그에 대한 반론이 제시될 수 있겠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부정적 시각 검토


셋째로는 신약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킬 것입니다. 도올 식의 기독교 성서 이해에 대한 토론자들의 찬반 토론이 준비될 예정입니다. 이에 더하여 정경화 과정에 대한 이해 역시 비판적 대화의 주제로 부각될 것입니다. 넷째로 성서중에서 요한복음을 중시한 도올 선생의 의도를 듣고 요한복음을 헬레니즘의 시각에서 보는 신학적(탈구약적) 의중의 편파성 여부를 집중 토론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과 영지주의와의 관계 역시 중요한 토론거리이며 로고스 기독론의 빛에서 동양적 신학,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까지도 생각해 보고 싶은 자리입니다. 아울러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도올 선생의 부정적 시각 역시 토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는 탈정통적 입장 평가


마지막으로 기독교 정통주의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아타나시우스 대신 아리우스 주의를 선호하며 그 빛에서 기독교를 재구성하는 도올 선생의 입장에 대한 토론자들의 평가를 듣고자 합니다.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리적 중요성을 인정하되 로고스 기독론에 근거 이를 전혀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는 도올 선생의 탈정통적 입장에 대한 긍/부정적 평가가 주어질 것입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신(靈)중심적 기독교 신학이 말해지는 지금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 논쟁의 의미를 현대적 차원에서 재검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끝으로 취재하는 언론에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의 토론회를 도발적 언어를 사용하여 흥미위주로 기사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 조직신학회가 한국 교회를 향한 도올 선생의 진정성을 보았기에 그리고 선생께서 참된 토론의 장을 원하였기에 원로 신학자들이 기꺼이 참여하신 장인 것을 숙지하셔서 오늘의 토론회가 한국 교회 앞날에 유익함이 되는 자리였음을 널리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멀리 가까이에서 이런 바램을 갖고 이 자리를 찾아주신 여러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계획된 주제 모두가 정해진 시간 내 토론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본 모임을 진행시켜 보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정배 교수(사회·한국 조직신학회 회장)




실증주의자 2011-04-2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페이지 즐겨찾기 해두고 요한복음강해 읽을 때 두고두고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