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 ‘무엇을’, ‘왜’ 보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더 관심을 가졌던 소크라테스.
나는 주로 전자의 질문을 탐닉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문제는 너무 관념적으로 흘러가는 때가 많았다는 것. ‘어떻게’라는 질문의 가장 큰 장점은 실용성에 있다.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내가, 우리가 어떻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든 철학의 핵심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왜에 대해 탐구하고 엄청난 답변을 내놓은 사람들은 많지만 철학의 시초를 소크라테스라 부르는 것이다.
철학이 삶과 떨어지는 순간 그 생명력은 소실된다.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나의 철학이 살아 숨 쉴 수 있기를. 가정에서 학교에서 나의 모든 일상에서 살아 있는 철학을 하고 그 생생함을 학생들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한다. 노력해야겠다.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의 사상’같은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은 변증법, 엘렌쿠스, 귀납적 추론 등의 멋진 용어로 말할 수 있지만 단순한 용어로 말하자면 바로 대화다. 소크라테스에세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그러나 이 대화는 수단이다. 어떤 수단? 바로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수단.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배웠다.
- 시리에게 ‘질문’의 의미와 사람에게 ‘질문’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
커다란 질문일수록 우리는 정보만 제공하는 답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윤리는 그 커다란 질문을 다루는 학문이니 단순한 정보 나열에는 어떠한 관심도 없을 수밖에. 사랑은 뭘까? 악은 왜 존재하는 거지?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보가 아닌 보다 더 큰 것, 바로 의미다.
- 질문은 일방향이 아니다. 질문은 (최소) 양방향으로 움직인다. 질문은 의미를 구하고 또 전달한다. 적절한 때 친구에게 적절한 질문을 묻는 것은 연민과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질문을 무기로 사용한다. 상대를 저격하고 자신을 저격한다. 질문으로 변명을 삼고, 나중에는 정당화한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진정한 창문은 눈이 아니라 질문이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 - p.54
-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다.
- 좋은 아빠.
- 아이의 질문이 성가신 것은 멍청한 질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제대로 대답할 능력이 없어서다.
편협하고 수상쩍은 지식보다는 폭넓고 솔직한 무지가 더 나았다. - P49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동료 시민들이 조각상의 제작이나 민주주의의 실천 같은 면에서는 더 나아지려는 의지가 대단하면서, 왜 이런 종류의 질문에는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없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테네인들은 모든 것을 개선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 모든 것에 자기 자신은 포함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 점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 결심이 철학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이제 철학은 우주에 대해 불확실한 추측을 하는 학문이 아니다. 철학은 삶,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것이고, 어떻게 하면 이 삶을 최대한 잘 살아내느냐에 관한 것이다. 철학은 실용적이다. 필수적이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마을에 정착시켰고, 철학을 사람들의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 P50
우리는 종종 궁금해하는 것과 호기심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 물론 두 가지 다 무관심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방식은서로 다르다. 궁금해하는 것은 호기심과 달리 본인과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다. 우리는 냉철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냉철하게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냉철하게 궁금해할 순 없다. 호기심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늘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반짝이는 대상을 쫓아가겠다며 위협한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마음은 오래도록 머문다. 호기심이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발을 올려둔 것이 바로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절대로 반짝이는 대상을 쫓지 않는다. 절대로 고양이를 죽이지 않은다. - P56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한 데에는 좋은 뜻이 있었다. 바로 더 선명한 시야를 위해서였다. 소크라테스는 검안사였다. 사람들은 잘못된 도수의 안경을 쓰고 돌아다닌다. 이런 실수는 당연히 보는 방식과 보는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왜곡된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착각한다. 심지어 자신이 안 맞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하루 종일 휘청거리며 가구에 부딪치고 사람들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내내 가구와 사람들을 탓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어리석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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