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1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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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

광개토왕릉비의 정확한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이다. 이 비석은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선왕의 공적을 기리고 묘지를 지키는 연호(烟戶, 일종의 관노비)들에 대한 규정을 남기기 위해 서기 414년에 능의 동쪽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의 모양은 아래와 위가 넓고 가운데가 좁은 형태다. 높이는 6.39미터이고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미터, 제2면이 1.35미터, 제3면이 2미터, 제4면이 1.46미터이다. 또한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좌단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길이는 3.35미터, 너비는 2.7미터로 불규칙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좌단의 두께는 고르지 못하여 동남측이 0.16미터, 서북측이 0.63미터이다.

이 비에는 사방으로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의 글자 총수는 원래 1,775자였으나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141자이다. 그리고 141자 중 앞뒤 문맥으로 추측 가능한 글자가 9자이므로 현재 132자에 대한 판독이 불가능하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하여 추모(주몽), 유류(유리), 대주류(대무신왕) 등 3대의 왕위 계승에 대한 것과 광개토왕의 즉위에 대한 내용이다. 둘째 부분은 광개토왕의 치적을 적은 것으로, 여기에는 백제정벌, 신라구원, 부여정벌 등에 대한 내용들이 쓰여 있다. 셋째 부분은 광개토왕이 생시에 내린 교시에 근거한 묘비와 연호의 규정을 적고 있다.

이 같은 비문의 내용은 그 어느 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사료로서 고구려 및 그 주변 국가의 역사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내용의 일부는 지워지고 없으며, 또한 확인되는 글자 중에도 판독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 때문에 해석 문제를 놓고 학자들간에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여기서는 능비의 발견과 탁본 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왕의 치적과 관련된 부분의 원문과 번역문을 옮긴다.

⑴ 영락 태왕 5년(395년) 을미년 기사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 不歸*人 躬率往討 過富山 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于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 王備游觀土境 田而還

영락 5년, 그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귀환시키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지나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의 부락 육칠백 영(마을)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거기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에 이르렀다. 왕은 사냥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국토를 즐기며 구경도 하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왔다.

⑵ 영락 태왕 6년(396년) 병신년 기사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南攻取 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于利城**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城 奧利城 勾*城 古模耶羅城 須鄒城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農賣城 沸城 比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漢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赤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拔城 宗古盧城 仇天城 ****逼其國城 殘不服義 敢出迎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殘兵歸穴 就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始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 五十八城 村七白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백잔(百殘, 백제를 낮춰 부른 말)과 신라는 옛날엔 우리의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치고 신라를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신묘년에 왜가 도래하자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던 것이다.}> 6년(영락 태왕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했다. 우리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우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미성 오리성 구*성 고모야라성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농매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적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종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승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핍기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어느덧 백잔의 도성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백잔은 의(義)에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소굴을 포위했다. 그러나 백잔의 군주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하였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 성, 7백 개 촌을 얻었다. 또한 백잔주의 형제와 백잔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국도로 돌아왔다.

⑶ 영락 태왕 8년(398년) 무술년 기사

八年戊戌 敎遣偏斯觀 帛愼土谷 因便抄 得莫斯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백신의 토곡에 보내 순찰하도록 했다. 그 결과 막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으며, 이로부터 조공하고 정사를 보고했다.

⑷ 영락 태왕 9년(399년) 기해년 기사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壤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特遣使還 告以密計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은 하평양을 순시했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그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신라왕)을 천민으로 삼았으니 (고구려에)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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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꿈행자
제일 잘 익은 복숭아는 제일 높은 가지에 달려 있다.
- 제임스 휘트컴 라일리 - P10

mini꿈행자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의심을 가지고 끝내고, 의심하면서 시작하는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끝내게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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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명신들 중에는 이 을두지를 비롯하여 유리명왕 대의 재상 을소와 그의 후손으로 고국천왕 대에 재상을 지내는 을파소, 고구려의 맹장으로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등이 있다. 백제 온조의 재상 중에도 을음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 역시 고구려 출신이다. 이 을씨들은 아마도 고구려 5부족 중 한 종족을 이루는 귀족 가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 민중왕의 짧은 치세

(?~서기 48년, 재위기간:서기 44년 10월~서기 48년 모월, 약 4년)

민중왕은 유리명왕의 다섯째 아들이자 유리명왕의 제2왕후 송씨 소생이며, 이름은 해색주(解色朱)이다.

민중왕 이외에도 능이 있는 지명을 그대로 묘호로 사용한 경우는 모본왕(5대), 고국천왕(9대), 산상왕(10대), 동천왕(11대), 중천왕(12대), 서천왕(13대), 봉상왕(14대), 미천왕(15대), 고국원왕(16대), 소수림왕(17대), 고국양왕(18대) 등이다. 즉, 민중왕이 민중원에 묻힌 것처럼 모본왕은 모본에, 고국천왕은 고국천에, 산상왕은 산상에, 동천왕은 동천에, 중천왕은 중천에, 서천왕은 서천에, 봉상왕은 봉상에, 미천왕은 미천에, 고국원왕은 고국원에, 소수림왕은 소수림에, 고국양왕은 고국양에 묻혔다는 뜻이다.

이처럼 28왕 중 12왕의 묘호가 능이 있는 지명과 동일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같은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의 어느 시대, 어느 왕의 묘호에서도 이런 경우는 찾아볼 수 없으며, 백제나 신라, 왜 등 당시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 같은 일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능이 위치한 지명을 묘호로 삼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광개토왕의 정식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 명칭의 맨 앞 세 글자, 즉 ‘국강상’은 그가 묻힌 지명이며 동시에 능호이다. 그래서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국강상에 묻혀 있으며, 땅의 경계를 넓게 열어 평안을 가져다 준 좋고 위대한 왕.’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고구려 묘호 양식이다. 이 광개토왕의 묘호를 바탕으로 고구려 묘호를 분석해 보면 우선 능의 위치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으로 치적, 그리고 약칭할 수 있는 명칭, 마지막으로 일반적인 관용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간략하게 기호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묘호 = 능 위치(또는 능호) + 치적 + 약칭 + 일반 관용어

이것을 광개토왕의 묘호에 대입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국강상(능호) + 광개토경(치적) + 평안(약칭) + 호태왕(일반 관용어)

1. 모본왕의 폭정과 두로의 반정

(?~서기 53년, 재위기간:서기 48년 모월~53년 11월, 약 5년)

모본왕은 대무신왕의 맏아들로 대무신왕의 첫 번째 왕후 소생이며, 이름은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이다. 서기 32년 1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서기 44년 10월에 대무신왕이 생을 마감했으나 그는 어린 탓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대신 숙부인 해색주(민중왕)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서기 48년에 민중왕이 죽자 그 때에야 비로소 고구려 제5대 왕에 즉위하였다.

"그의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나랏일을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다."

이처럼 모본왕은 그다지 덕스러운 성격이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즉위시부터 그런 성격을 드러냈던 것은 아니었다.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 사람의 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했다. 이제 왕이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다. 그대는 백성의 원수인 왕 해우를 처단하라."

1. 태조왕의 고토회복운동과 대국으로 성장하는 고구려

(서기 47~165년, 재위기간:서기 53년 11월~146년 12월, 93년 1개월)

태조는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며, 부여 출신의 태후 해씨 소생이다. 서기 47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어수, 이름은 궁(宮)이다. 서기 53년 11월에 두로에 의해 모본왕이 살해되자 7살의 어린 나이로 고구려 제6대 왕에 올랐다.

모본왕을 축출한 고구려 조정은 나이 어린 태조를 옹립하여 고조선의 옛 영역을 회복하는 데 주력한다. 이 같은 정책으로 고구려는 요서를 완전히 장악하는 한편 산동반도 너머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후한(동한)과 함께 명실공히 대륙의 맹주로 부상한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종주국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고구려 조정은 고조선의 고토회복을 선언하고, 서기 105년에 한의 요동을 선제공격하여 6개 현을 정복하였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에 당황한 동한은 급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 태수 경기로 하여금 고구려군을 대적하게 하였다.

이처럼 중국 역사에서 ‘태조’라는 칭호를 사용한 시기는 고구려에 비해 한참 뒤의 일이다. 5대 시기가 907년에 시작되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구려는 그보다 약 700년 앞서서 ‘태조’라는 묘호를 사용한 것이다. 때문에 ‘태조’라는 묘호의 기원은 고구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태조’라는 묘호는 나라를 세운 사람에게 붙이는 묘호이다. 하지만 이 칭호를 처음 사용한 고구려인들은 제6대 왕에게 그 묘호를 올렸다. 다시 말해서 ‘태조’라는 묘호가 처음 사용될 당시에는 반드시 ‘나라를 세운 사람’에게만 붙이는 칭호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4. 동한을 상대로 한 고구려의 고토회복전쟁

태조는 고(古)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동한과 많은 전쟁을 치른다. 고토회복의 일차적 목표는 현도군을 수복하는 일이었다.

동옥저(東沃沮)

동옥저는 태조 4년(서기 56년)에 고구려에 복속된 국가다. 옥저는 원래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가 있었는데, 북옥저는 이미 동명성왕 10년(서기전 28년)에 멸망했고, 남옥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처럼 남옥저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면 동옥저가 단 한 번도 중국 세력에 의해 정복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옥저는 고조선 말기에 형성되어 고구려 태조 대까지 유지되다가 서기 56년에 비로소 멸망했던 것이다.

조나(藻那)와 주나(朱那)

고구려는 서기 72년에 조나를 정복하고, 서기 74년에 다시 주나를 굴복시킨다. 당시 조나와 주나는 모두 왕이 다스리는 독립된 국가였다. 하지만 아주 작은 나라였던 모양이다. 『삼국지』나 『후한서』의
지리지에 그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삼국사기』의 지리지에도 없다.

동해곡(東海谷)과 남해(南海)

태조 55년(서기 107년) 10월 기사에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꼬리가 아홉 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의 동해곡을 흔히 한반도의 동해 어딘가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태조 당시 동해라는 지명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현재 동해라고 부르고 있는 한반도 동쪽 바다는 당시에 ‘창해(滄海)’ 또는 ‘대해(大海)’라고 불리었다.

당시 사람들이 동해라고 부르던 바다는 현재 황해라고 부르는 중국 동쪽 바다였다.

동한 시대 중국 사람들은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의 바다를 ‘발해(渤海)’라고 불렀고, 산동반도에서 상해까지를 ‘동해’라고 불렀으며, 상해 아래쪽 바다를 ‘남해’라고 불렀다. 발해는 현재도 ‘발해(渤海, 안개 낀 바다)’라고 부르며, 동해는 ‘황해(黃海)’와 ‘동해’로 부르고 있고, 남해는 여전히 ‘남해’로 부른다. 다만 상해에서 복주(대만 앞바다)까지는 남해와 동해가 겹치는 부분이다.

마한(馬韓)

「고구려본기」에 마한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태조 69년(서기 121년) 12월이다. 이 무렵 고구려는 한의 요동과 현도를 공략하기 위해 선비, 예맥, 마한 등의 군사를 동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현도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마한에 관련된 기사는 바로 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하는 다음의 내용에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그의 독단을 방지할 목적으로 서기 123년 10월에 근신들인 패자 목도루와 고복장을 좌, 우보로 삼아 수성을 견제하였다.

이 같은 태조의 견제책 덕분에 한동안 조정은 별 탈 없이 정사를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성의 힘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세력이 나타나면서 상황은 급속도로 변화되었다.

수성의 수하 중에는 미유, 어지류, 양신이라는 모사꾼들이 있었다. 미유는 당시 관나부 우태였으며, 어지류는 환나부 우태, 양신은 비류나부의 조의였다.

2. 폭군 차대왕의 즉위와 계속되는 피의 숙청

(서기 71~165년, 재위기간:서기 146년 12월~165년 10월, 18년 10개월)

태조를 몰아내고 차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고구려 조정은 피바람에 휩싸인다. 차대왕은 즉위하자 곧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걸림돌이 되는 왕족들을 가차없이 죽였던 것이다.

차대왕은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 재사의 차남이며, 태조의 동복 아우로 태조 초기에 수렴청정을 했던 태후 해씨 소생이다. 서기 71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수성(遂成)이다. 친형 태조의 총애를 받아 요직을 두루 거치며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서기 121년부터는 국정을 도맡았다. 이후 권력을 독식하며 왕위 찬탈을 꿈꾸다 서기 146년 12월에 태조를 압박하여 상왕으로 물러앉히고 고구려 제7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76세였다.

1. 신대왕의 즉위와 조정의 안정

(서기 89~179년, 재위기간:서기 165년 10월~179년 12월, 14년 2개월)

신대왕은 고추가(古鄒加, 조선 때의 칭호로는 임금의 아버지인 대원군에 해당) 재사의 셋째 아들이며, 태조와 차대왕의 이복 동생이다. 서기 89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백고(伯固), 또는 백구(伯句)이다. 누구 소생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차대왕 재위 때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산 속에 몸을 숨겼다가 서기 165년 10월에 명림답부에 의해 차대왕이 제거되자 77살의 노구로 고구려 제8대 왕에 추대되었다.

명림답부의 정변으로 차대왕이 제거되고 신대왕이 등극함에 따라 고구려 백성들은 폭정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신대왕은 화합책을 도모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는 한편 백성들에 대한 위무정책을 추진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변해감에 따라 고구려와 동한 사이에 패권 다툼이 진행된다. 이로 인해 고구려 백성들은 몇 번에 걸쳐 전쟁을 경험한다.

신대왕은 화합정책과 함께 조정의 행정체제를 대폭 개선하였다. 재상격인 좌우보 제도를 없애고 국상제(國相制)를 도입하여 초대 국상에 명림답부를 임명하였다.

동한은 이 때의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서기 172년(신대왕 8년) 11월에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을 침략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퇴각하다가 좌원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전멸하는 대패(좌원대첩)를 경험한다.

좌원에서의 승리 이후, 고구려는 한의 요동과 현도를 압박하여 국력을 증강시켰으며, 동한은 그 후 오랫동안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다.

좌원대첩의 승리로 고구려의 안정에 크게 기여한 초대 국상 명림답부는 서기 179년 9월에 사망하였고, 그해 12월에 신대왕도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고국곡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신대왕(新大王)’이라 하였다.

3. 명림답부와 좌원대첩

신대왕 시대는 명림답부(明臨答夫)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서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대왕을 왕으로 추대한 사람도 그고, 신대왕 때에 처음 시작된 국상제도를 마련한 사람도 그다. 또한 초대 국상이 되어 신대왕의 모든 정책을 이끌어주고 훈계하며 확립한 사람도 그였다. 따라서 신대왕 시대는 명림답부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명림답부는 연나부(椽那部, 절노부라고도 함) 출신으로 서기 67년(태조 15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연나부는 유리명왕 이후에는 주로 왕후를 배출하던 부족이었다. 때문에 고구려 건국 초기의 연나부는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연나부의 조의에 올라 있었다. 조의는 패자, 대주부, 주부, 우태와 마찬가지로 나부에서 부여받는 작위였다. 이들 작위 가운데 조의는 맨 아래 작위에 해당된다.

『삼국사기』는 "좌원에서 전투를 벌이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좌원대첩’의 전말이다.

1. 고국천왕의 개혁정책과 외척의 반발

(?~서기 197년, 재위기간:서기 179년 12월~197년 5월, 17년 5개월)

고국천왕은 신대왕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남무(男武)이고, 별호는 이이모(伊夷謀)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고, 모후도 밝혀지지 않았다. 서기 176년(신대왕 12년) 3월에 형인 발기를 제치고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3년 뒤인 서기 179년 12월에 신대왕이 사망함에 따라 고구려 제9대 왕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키가 9척이고, 풍채가 웅장하며 힘이 셌다. 사무 처리에 있어 관용과 예리함을 겸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가 말해주듯 그는 문무를 겸비하였고, 과단성과 부드러움을 고루 갖춘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환곡제도는 백성들이 가장 많이 굶주리는 3월에서부터 7월까지 국창을 열어 가호의 식구에 차등적으로 구제곡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인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 구휼제였다. 이는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인 제도로서 후에 고려와 조선의 환곡제도의 기초가 된다.

2. 산상왕의 환도성 천도와 중국 정세의 혼미

(?~서기 227년, 재위기간:서기 197년 5월~서기 227년 5월, 30년)

산상왕은 신대왕의 넷째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둘째 아우이다. 이름은 연우(延優)이며 태어난 연도와 모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서기 197년 5월에 고국천왕이 죽자 그의 왕후 우씨가 계략을 꾸며 그를 왕위에 앉혔으며, 그녀 자신은 그의 왕후가 되었다.[『삼국사기』는 그의 별호를 ‘위궁(位宮, 제6대 태조 궁과 닮았다는 뜻)’이라고 한다고 했으나 『삼국지』 ‘동이전’의 내용을 잘 분석해보면 ‘위궁’이라는 별호는 동천왕의 것임을 알 수 있다.]

1. 동천왕의 평양 천도와 서진정책

(서기 209~248년, 재위기간:서기 227년 5월~248년 9월, 21년 4개월)

동천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서진정책에 박차를 가한다. 중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대륙의 맹주로 부상하기 위한 동천왕의 노력은 고구려의 영토확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위의 반격으로 도성이 함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동천왕은 산상왕의 장남이며 소후 후녀 소생이다. 서기 209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교체,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별호는 위궁(位宮)이다. 서기 213년에 5살의 어린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서기 227년 5월 산상왕이 죽자 고구려 제11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1780년에 쓴 『도강록(渡江錄)』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평양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여러 군데였음을 밝히면서 ‘평양’이 도읍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라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않은데, 우리의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을 기준으로 삼아 패수를 찾고 있다. 그러나 옛날 중국인들은 요동의 이쪽을 죄다 ‘패수’라고 하였다. 그 때문에 패수의 위치가 확정되지 않아 항상 사실과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중천왕의 국력회복운동과 평양성 시대

(?~서기 270년, 재위기간:서기 248년 9월~270년 10월, 22년 1개월)

중천왕은 동천왕 대의 전화로 인해 피폐해진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회복하는 데 주력한다. 또한 평양을 도읍지로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병행한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평양을 중심으로 국력을 회복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중천왕은 동천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연불(然弗)이다. 누구의 소생인지 분명치 않으며 언제 태어났는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정실 왕후에게서 태어난 것만은 확실한 듯하며, 아래로 예물과 사구라는 이름을 가진 2명의 남동생이 있다. 서기 243년 1월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248년 9월 동천왕이 죽자 고구려 제12대 왕에 올랐다.

1. 서천왕의 평화정착 노력과 북방정책

(?~서기 292년, 재위기간:서기 270년 10월~292년 3월, 약 21년 5개월)

중천왕의 국력회복운동을 바탕으로 서천왕은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매진하며 북방정책을 추진한다. 고구려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숙신은 고구려의 변방을 노략질하며 항거하고, 이 때문에 조정에서 숙신정벌론이 대두하여 고구려는 모처럼 전쟁 준비에 돌입한다.

서천왕은 중천왕의 차남이며 이름은 약로[藥盧, 혹은 약우(若友)라고도 함]이다. 태어난 연대와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서기 2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서기 270년 10월 중천왕이 사망하자 고구려 제13대 왕에 올랐다(장남을 제치고 차남인 서천왕이 태자에 오른 경위는 분명치 않다. 다만 장남이 관나부인의 소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숙신(肅愼)

숙신이라 함은 서쪽으로는 송화강, 남쪽으로는 두만강, 북쪽으로는 동흑룡강과 북극해, 동쪽으로는 동해에 둘러싸인 지역에 살던 부족을 말한다. 이들은 때로 읍루라 불리기도 하고, 물길(勿吉)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후한서』 ‘읍루’편에는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라고 하였고, 『위서』 ‘물길’편에도 ‘물길국은 옛 숙신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삼국지』 ‘동이전’에는 ‘읍루’편은 있으나 ‘숙신’편은 없다. 반면에 『삼국지』의 각 기록에는 ‘숙신’이라는 명칭은 자주 사용되고 있으나 ‘읍루’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숙신은 ‘숙신씨’라고 호칭하고 있지만 읍루나 물길에는 ‘씨’를 붙이지 않는다. 이는 곧 숙신은 부족을 대표하는 성씨를 나타내는 것이고, 읍루나 물길은 그들이 만든 국호이거나 그들의 마을을 지칭하는 단어였다는 사실로 이해될 수 있다.

1. 폭정을 일삼는 봉상왕과 창조리의 반정

(?~서기 300년, 재위기간:서기 292년 3월~300년 9월, 8년 6개월)

서천왕 사망 후 성정이 포악하고 사치를 좋아하던 봉상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 조정은 난국을 맞는다. 더구나 선비족 모용부의 강성으로 전란에 휘말리기까지 하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기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상왕의 폭정은 멈추지 않는다.

봉상왕은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상부[相夫, 혹은 삽시루(矢婁)]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분명하지 않으며 태자에 책봉된 연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왕위에 오른 시기도 정확하지 않으나 숙부인 달가를 죽인 서기 292년 3월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 같은 성품은 왕위에 오른 이후 곧 친족 살해도 서슴지 않는 악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2. 5호 16국 시대의 전개와 미천왕의 팽창정책

(?~서기 331년, 재위기간:서기 300년 9월~331년 2월, 30년 5개월)

미천왕이 왕위에 오를 무렵 중원을 통일한 진은 공중분해되고 있었다. 이른바 ‘팔왕의 난’을 겪으면서 진은 스스로 침몰하였고, 이 틈을 노려 흉노, 선비 등이 다투어 중원으로 진출하여 나라를 세운다. 고구려 역시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과감한 팽창정책을 감행하여 영토확장을 통한 고토회복을 노리게 된다.

1. 모용 선비의 성장과 고국원왕의 수난

(?~371년, 재위기간:서기 331년 2월~371년 10월, 40년 8개월)

고국원왕이 즉위했을 무렵 모용 선비는 더욱 힘을 강화하여 남하정책을 실시한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서남쪽 변방이 위협받는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산동반도에서는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된 이래 꾸준히 팽창정책을 펴오던 백제가 더욱 힘을 키워 북진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다. 신진세력의 강성으로 고구려는 잊지 못할 수난을 경험하게 된다.

고국원왕은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으로 아명은 사유(斯由), 이름은 소(釗)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서기 314년(미천왕 15년) 정월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서기 331년 2월에 미천왕이 죽자 고구려 제16대 왕이 되었다.

1. 문치를 통한 소수림왕의 중앙집권화와 백제 정벌정책

(?~서기 384년, 재위기간:서기 371년 10월~384년 11월, 13년 1개월)

소수림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문치주의를 표방한다. 그의 문치는 곧 중앙집권화와 당시의 혼란스런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꾸준히 백제에 대한 정벌전쟁을 감행한다.

소수림왕은 고국원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고국원왕 25년인 3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371년 10월에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평양성싸움에서 전사하자 고구려 제17대 왕에 올랐다.

거란(契丹)

거란은 서기 4세기에 처음 등장하며, 『삼국사기』에는 소수림왕 재위시인 378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378년(소수림왕 8년) 9월에 거란이 고구려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거란은 한자로는 글단(契丹)이라고 표기하는데,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흉노설, 선비설, 흉노와 선비의 융합설 등으로 나눌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정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거란은 언어적으로 볼 때 선비와 같은 몽고어족에 속해 흉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따라서 거란은 선비족 가운데 하나의 부족이 성장하여 흉노의 일부를 복속한 족속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 후연의 등장과 고국양왕의 팽창정책

(?~서기 392년, 재위기간:서기 384년 11월~391년 모월, 약 7년)

고국양왕 즉위 무렵은 대륙의 세력 판도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전진이 몰락하고, 모용수가 연(후연)을 재건하여 하북과 요서를 압박한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후연의 대립은 불가피해지고, 백제 또한 이 기회를 노려 요서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한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후연과 백제를 대상으로 숱한 전쟁을 치른다.

고국양왕은 고국원왕의 차남이며, 소수림왕의 동복 아우이다. 모후는 고국원왕의 왕후이고, 태어난 연도는 확실치 않으며, 이름은 이련[伊連,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다. 384년 11월에 형인 소수림왕이 아들 없이 죽자 조신들의 추대에 따라 고구려 제18대 왕에 올랐다.

1. 광개토왕의 국력신장정책과 고구려의 팽창

(서기 375~413년, 재위기간:서기 391년 모월~413년 10월, 약 22년)

광개토왕은 즉위와 동시에 과감한 영토확장정책을 감행한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영토는 확대되고, 국제사회에서 고구려의 위상도 제고된다. 이를 위해 광개토왕은 숱한 전쟁을 수행한다. 화북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후연, 신진세력 백제, 그리고 왜, 신라, 부여, 거란 등 많은 나라가 고구려와 부딪친다.

광개토왕은 고국양왕의 장남으로 서기 375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담덕(談德)이다.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서기 386년(고국양왕 3년) 정월에 12살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고, 서기 391년에 고국양왕이 지병이 악화되어 상왕으로 물러남에 따라 17세의 나이로 고구려 제19대 왕에 올랐다.

관미성전투(392년)

‘관미성전투’는 고구려가 백제의 요새 관미성을 함락시킨 큰 전쟁으로 고구려 광개토왕 2년, 백제 진사왕(제16대) 8년에 일어났다.

패수싸움(395년)

‘패수싸움’은 고구려의 광개토왕 5년, 백제의 아신왕 4년에 있었던 전쟁으로 백제의 아신왕이 한수 이북을 회복하기 위해 벌였다.

병신대원정(396년)

‘병신대원정’은 광개토왕 6년의 일로 패수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광개토왕이 병신년인 서기 396년(영락 6년)에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 정벌에 나선 것을 일컫는다.

경자대원정(400년)

‘경자대원정’은 서기 400년 경자년에 고구려가 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사건이다.

갑진왜란(404년)

경자년에 신라 땅 거의 대부분을 점령했다가 고구려의 원군 때문에 쫓겨난 왜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본토를 노렸는데, 그 사건이 바로 ‘갑진왜란’이다.

정미대출병(407년)

정미대출병은 갑진왜란에 대한 보복전으로 서기 407년에 있었던 사건이다. 갑진왜란으로 유주 정복 계획이 좌절되자 광개토왕은 군사 5만을 동원하여 백제의 잔여 대륙기지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그 곳에 머물러 있던 백제군과 왜군을 공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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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19년에 동부여에 살고 있던 주몽의 첫 부인 예씨와 원자 유류(유리)가 고구려에 오고, 유류가 태자로 책봉되면서 연씨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몽이 죽자 자신의 족속들과 함께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백제를 세운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은 ‘재사’라고 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무골’이라고 했고, 수초로 옷을 만들어 입은 사람은 ‘묵거’라고 했다. 하지만 성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의 성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졸본’으로 기록하고 있고,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홀본(忽本)’, 『위서』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지명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를 졸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첫 번째는 오녀산성설이다. 지금의 만주 환인 북쪽 환인분지 안에 있는 해발 약 8백 미터의 산지에 축성된 이 오녀산성은 남북 약 1천 미터, 동서 너비 약 3백 미터의 비교적 규모가 큰 성이다. 부근에는 환인현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의 적석총(積石塚,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일명 돌무지 무덤)을 비롯해 많은 고분군이 있다.

두 번째는 요동설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주장이다. 그는 ‘고구려’전에서 "고구려는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졸본주가 지금의 화주(함남 영흥) 또는 성주(평남 성천)라고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지역에 있다."고 쓰고 있다.

요동이란 요수의 동쪽을 일컫는다. 하지만 고구려 당시의 요수가 현재의 요하(랴오허)였다는 주장과 현재의 난하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때문에 요동을 랴오허의 동쪽에 설정해야 할지 아니면 난하의 동쪽에 설정해야 할지 아직 불분명한 상태다.

이들은 모두 동이(東夷)족에서 흘러나온 예맥(濊貊)족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국가들이다. 따라서 이 국가들을 형성한 사람들을 알기 위해서는 동이와 예맥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이에 동이, 예맥에 대해 언급하고 부여, 말갈, 비류, 해인, 옥저 등의 성립 시기 및 위치와 영토에 대하여 간단하게 기술한다.

동이(東夷)

‘동이’라는 말은 초기에는 하나의 민족을 의미하기보다는 중국의 한(漢)족이 자신들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른 명칭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후한 때 허신이 편찬한 『설문해자(設文解字)』는 "큰 것을 따르고 활을 잘 다루는 동방의 사람들이다(從大從弓東方之人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夷)는 곧 뿌리이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道)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가 된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동이족은 대개 견()·우(于)·방(方)·황(黃)·백(白)·적(赤)·현(玄)·풍(風)·양이(陽夷) 등 9종족으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한(漢)족의 활동 영역이 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중원에서 밀려나와 중국의 동해안(황해안)과 북방에 밀집된다.

예맥(濊貊)

예는 ‘예(穢)’ 또는 ‘예(濊)’로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穢)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예(穢)라는 한자는 ‘벼농사를 지으면서 매해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예(穢)가 ‘물을 좇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예(濊)로 바뀌게 되는데, 이 또한 벼농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즉 벼농사를 위해서는 물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예(穢)’와 ‘예(濊)’는 같은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맥은 대개 ‘맥(貊)’ 또는 ‘맥()’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맥은 신화적인 동물인 ‘맥’을 의미하거나 ‘북쪽’을 의미한다. 맥은 불을 뿜는 동물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흡사 불을 잡아먹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이 경우 ‘맥’은 ‘맥을 숭배하는 사람들’ 또는 ‘맥이라는 동물을 연상케 하는 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을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예·맥 동종설(同種說)과 예와 맥을 따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예·맥 이종설(異種說)이 있다. 동종설에서는 예는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고 맥은 국명이기 때문에 예맥이라 함은 ‘예족이 세운 맥국’이라고 주장하고, 이종설에서는 예와 맥은 동이에서 나온 다른 부족인데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하여 예맥으로 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부여(夫餘)

부여의 명칭이 최초로 보이는 곳은 『사기』의 「화식열전(貨殖列傳)」인데, 거기에는 "연나라는 오환과 부여에 인접해 있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일을 기록한 『사기』의 「흉노전」에는 "흉노의 좌측왕과 장수는 동방 쪽에 있으며, 상곡으로부터 더 나아가는 자는 예맥과 조선을 만나게 된다."고 하여 당시에는 부여라는 나라가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부여는 서기전 4세기경에 성립되어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에 의해 멸망당하는 494년까지 약 800년 동안 지속된 나라이다. 그 영토는 남으로는 발해만 연안과 요서·요동, 북으로 흑룡강, 서로는 대흥안령산맥, 동으로는 우수리강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말갈(靺鞨)

말갈이라는 명칭은 두 글자 모두 가죽 혁(革)자가 부수인 점으로 미루어 가죽옷을 만들어 입는 부족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갈은 이미 고구려 성립 이전부터 부락을 이루고 있었음을 『삼국사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수서』 「말갈전」에는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말갈은 부여국의 변방에 흩어져 살며 가죽옷을 해 입는 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여 사람들은 흰옷을 즐겨 입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말갈과 부여는 의복문화를 통하여 확연히 구분되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에 한반도에 자주 출현하여 백제 및 신라와 세력을 다퉜던 말갈은 백산 말갈이었으며, 고구려를 도와 중원 국가를 공략하던 말갈은 흑수 말갈이었다. 백산과 흑수는 고구려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병합된 상태로 한반도 북부와 두만강 및 송화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말갈족들은 후에 여진족으로 이어져 금과 청을 세운다.

비류(沸流)

비류는 고구려에 최초로 복속된 국가이며, 복속된 이후에는 다물도(多勿都)로 개칭된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서기 37년에 비류를 침략하였는데, 이 때 비류의 왕은 송양이었다. 즉, 비류는 대대로 송씨가 다스리던 국가였다는 뜻이다.

행인(荇人)

행인은 고구려가 두 번째로 복속한 국가이다.

동명성왕은 서기전 32년 10월에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하여 행인국을 정복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행인국은 송화강 주변의 하얼빈이나 다칭 지역에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세 가지 가설 가운데 세 번째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옥저가 남옥저와 8백여 리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남옥저와 북옥저 사이에는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북옥저의 남쪽 경계가 읍루와 접해 있다고 했으므로 남옥저와 북옥저 사이에는 읍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루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으며, 남으로는 동옥저와 접해 있고, 서남으로는 부여, 서북으로는 북옥저, 동북으로는 끝닿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 같은 설정을 바탕으로 할 때 북옥저의 위치는 흑룡강(아무르강)의 본류와 지류로 둘러싸이며, 이는 지금의 하바로프스크 서북방에 위치한 콤소몰스크나아무레 지역 일대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경계는 동남쪽과 북쪽은 읍루에 둘러싸이고, 서남쪽과 서쪽은 부여에 둘러싸인다. 따라서 북옥저는 사방이 흑룡강의 본류와 지류로 둘러싸인 오각형 모양의 땅이 되는 것이다.

대소의 군림은 곧 예씨 모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류는 옥지, 구추, 도조 등의 친구들과 의논한 후 어머니 예씨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할 것을 다짐하고, 서기전 19년 4월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여 고구려 땅을 밟는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유류파의 중심 인물은 주몽과 함께 망명한 오이, 마리, 협보를 비롯하여 대표적인 무장 세력인 부분노와 부위염, 고구려 토착 세력인 탁리, 사비, 설지 등이었고, 비류파의 중심 인물은 소서노의 지지기반인 계루부 출신의 관리들과 오간, 마려 등의 중신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두 파의 대립은 유류파의 승리로 끝났다. 고구려 개국 이후 계루부는 동명성왕에 의해 거의 장악당한 상태였고, 나머지 네 부족 역시 동명성왕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명성왕의 고향 친구들인 오이, 마리, 협보 등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유류파가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비류파가 떠난 뒤, 유류는 동명성왕 측근들의 보필을 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태자 책봉 5개월 뒤인 서기전 19년 9월에 동명성왕이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2대 왕에 올랐다. 그가 바로 유리명왕이다.

2. 유리명왕의 정권 장악 노력과 고구려의 격변

(?~서기 18년, 재위기간:서기전 19년 9월~서기 18년 10월, 36년 1개월)

주몽의 원자 유리명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구려 조정은 한 차례 정쟁을 치른다. 조정을 장악하려는 유리명왕과 이를 저지하려는 개국공신들 사이에 팽팽한 힘싸움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유리명왕은 동명성왕의 맏아들로 동부여 출신의 왕후 예씨 소생이며, 이름은 유류 또는 유리이고, 동부여에서 서기전 38년 또는 서기전 37년경에 태어났다. 이후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망명하였고, 서기전 19년 4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그해 9월에 동명성왕이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고구려 제2대 왕에 즉위하였다.

황룡 왕이 해명을 살려놓자 유리명왕은 서기 9년 3월에 졸본으로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칼을 내주고 자결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해명은 순순히 명령에 복종하여 자결하였고, 이로써 유리명왕은 자신의 아들을 두 명이나 죽인 잔혹한 임금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을 듣게 된다.

"네 년은 한인의 집에 살던 비첩인 주제에 어찌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느냐?"

이 말을 듣고 치희는 분통을 터뜨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유리명왕은 말을 타고 치희를 뒤쫓아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리명왕이 지었다는 시가 ‘황조가’이다.

편편황조 鶣鶣黃鳥 (펄펄 나는 꾀꼬리는)

자웅상의 雌雄相依 (암수 서로 정다운데,)

염아지독 念我之獨 (외로운 이 내 몸은)

수기여귀 誰基與歸 (뉘와 함께 돌아갈꼬?)

도절(서기전 17년~서기 원년)

도절(都切)은 유리명왕의 맏아들이며, 제1왕후 송씨의 소생인 듯하다. 그리고 그를 송씨의 소생으로 볼 때 서기전 17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해명(서기전 12년~서기 9년)

해명은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이며, 제2왕후 송씨 소생으로 서기 4년 16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여진(?~서기 18년)

유리명왕의 넷째 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서기 18년 4월에 물에 빠져죽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재사(생몰년 미상)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로 제6대 태조의 아버지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또는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봉작인 고추가(古鄒加, 조선의 대원군이나 부원군에 해당함)에 올라 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첫째, 졸본은 구려의 옛 수도였기 때문에 구려시대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둘째, 졸본은 변방이 가까워 적의 침입이 용이한 곳이었다. 특히 부여와 아주 근거리에 있는 까닭에 항상 부여의 전쟁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셋째, 졸본은 자기 손으로 큰아들 도절을 죽게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졸본의 민심이 유리명왕에게서 멀어졌다.

선비(鮮卑)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년), 고구려는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선비를 정벌해 속국으로 만든다.

선비는 원래 사르모론(西喇木倫)강 유역에 흩어져 있던 동호족의 지파로서 유목민이다. 이들은 요서 지역 및 대흥안령산맥, 소흥안령산맥, 요동 등 넓은 곳에 분포해 있었으며 유리명왕 당시에는 나라를 형성하지 못했다.

유리명왕 당시만 하더라도 선비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인구도 적었으며, 힘도 하나로 결집되지 못했다. 하지만 2세기가 되면 선비족의 힘은 강성해진다. 이 시기의 선비족에는 흉노와 탁발, 정령, 오환, 한족 등이 일부 포함되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다.

양맥(梁貊)

유리명왕 33년(서기 14년)에 유리명왕은 오이와 마리에게 명령하여 군사 2만으로 양맥을 멸망시키고,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점령한다. 『삼국사기』는 이 고구려현이 현도군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룡국(黃龍國)

황룡국은 『삼국사기』 유리명왕 27년(서기 8년)과 28년(서기 9년)에 등장하는 나라 이름이다. 이 황룡국 왕이 선물한 활을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 해명이 꺾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고구려 조정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던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2.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대무신왕의 팽창정책

(서기 4~44년, 재위기간:서기 18년 10월~서기 44년 10월, 26년)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이며, 다물후 송양의 차녀인 제2왕후 송씨 소생이다. 서기 4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무휼(武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총명하였고, 유리명왕 33년(서기 14년) 정월에 11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서기 18년 10월에 유리명왕이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3대 왕에 올랐다.

사신으로부터 이러한 해석을 전해들은 대소는 후회를 거듭하였고, 그런 가운데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준비하여 서기 21년 12월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정벌길에 오른 대무신왕은 9척 장신 괴유를 장수로 맞아들였는데, 이듬해 2월 그는 부여 왕 대소의 목을 벤다.

좌보로 있던 재상 을두지는 적군이 암벽성인 위나암성 안에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수초로 싸서 적장에게 보낸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 안에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물러간다.

이른바 을두지의 ‘잉어계책’ 덕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대무신왕은 그 이후로도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낙랑을 정복한다.

호동왕자(?~서기 32년)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이며(실제적으로는 장남), 제2왕후 해씨 소생이다(『삼국사기』는 둘째 아들 해우를 장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적통이고, 왕위를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동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4월과 11월 기사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부여 정벌전쟁

대무신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부여를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 한의 내분으로 대륙의 정치질서가 문란해진 가운데 고구려는 대륙의 맹주로 성장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부여를 치기로 한 것이다.

고·한의 위나암성 싸움과 을두지의 ‘잉어계책’

고구려가 팽창정책을 지속하는 가운데 이에 위기를 느낀 한나라는 서기 28년 7월에 1백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한다. 침략의 선봉장은 한의 요동 태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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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날까지 책은 사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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