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전 19년에 동부여에 살고 있던 주몽의 첫 부인 예씨와 원자 유류(유리)가 고구려에 오고, 유류가 태자로 책봉되면서 연씨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몽이 죽자 자신의 족속들과 함께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백제를 세운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은 ‘재사’라고 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무골’이라고 했고, 수초로 옷을 만들어 입은 사람은 ‘묵거’라고 했다. 하지만 성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의 성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졸본’으로 기록하고 있고,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홀본(忽本)’, 『위서』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지명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를 졸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첫 번째는 오녀산성설이다. 지금의 만주 환인 북쪽 환인분지 안에 있는 해발 약 8백 미터의 산지에 축성된 이 오녀산성은 남북 약 1천 미터, 동서 너비 약 3백 미터의 비교적 규모가 큰 성이다. 부근에는 환인현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의 적석총(積石塚,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일명 돌무지 무덤)을 비롯해 많은 고분군이 있다.
두 번째는 요동설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주장이다. 그는 ‘고구려’전에서 "고구려는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졸본주가 지금의 화주(함남 영흥) 또는 성주(평남 성천)라고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지역에 있다."고 쓰고 있다.
요동이란 요수의 동쪽을 일컫는다. 하지만 고구려 당시의 요수가 현재의 요하(랴오허)였다는 주장과 현재의 난하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때문에 요동을 랴오허의 동쪽에 설정해야 할지 아니면 난하의 동쪽에 설정해야 할지 아직 불분명한 상태다.
이들은 모두 동이(東夷)족에서 흘러나온 예맥(濊貊)족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국가들이다. 따라서 이 국가들을 형성한 사람들을 알기 위해서는 동이와 예맥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이에 동이, 예맥에 대해 언급하고 부여, 말갈, 비류, 해인, 옥저 등의 성립 시기 및 위치와 영토에 대하여 간단하게 기술한다.
동이(東夷)
‘동이’라는 말은 초기에는 하나의 민족을 의미하기보다는 중국의 한(漢)족이 자신들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른 명칭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후한 때 허신이 편찬한 『설문해자(設文解字)』는 "큰 것을 따르고 활을 잘 다루는 동방의 사람들이다(從大從弓東方之人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夷)는 곧 뿌리이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道)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가 된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동이족은 대개 견()·우(于)·방(方)·황(黃)·백(白)·적(赤)·현(玄)·풍(風)·양이(陽夷) 등 9종족으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한(漢)족의 활동 영역이 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중원에서 밀려나와 중국의 동해안(황해안)과 북방에 밀집된다.
예맥(濊貊)
예는 ‘예(穢)’ 또는 ‘예(濊)’로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穢)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예(穢)라는 한자는 ‘벼농사를 지으면서 매해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예(穢)가 ‘물을 좇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예(濊)로 바뀌게 되는데, 이 또한 벼농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즉 벼농사를 위해서는 물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예(穢)’와 ‘예(濊)’는 같은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맥은 대개 ‘맥(貊)’ 또는 ‘맥()’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맥은 신화적인 동물인 ‘맥’을 의미하거나 ‘북쪽’을 의미한다. 맥은 불을 뿜는 동물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흡사 불을 잡아먹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이 경우 ‘맥’은 ‘맥을 숭배하는 사람들’ 또는 ‘맥이라는 동물을 연상케 하는 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을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예·맥 동종설(同種說)과 예와 맥을 따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예·맥 이종설(異種說)이 있다. 동종설에서는 예는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고 맥은 국명이기 때문에 예맥이라 함은 ‘예족이 세운 맥국’이라고 주장하고, 이종설에서는 예와 맥은 동이에서 나온 다른 부족인데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하여 예맥으로 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부여(夫餘)
부여의 명칭이 최초로 보이는 곳은 『사기』의 「화식열전(貨殖列傳)」인데, 거기에는 "연나라는 오환과 부여에 인접해 있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일을 기록한 『사기』의 「흉노전」에는 "흉노의 좌측왕과 장수는 동방 쪽에 있으며, 상곡으로부터 더 나아가는 자는 예맥과 조선을 만나게 된다."고 하여 당시에는 부여라는 나라가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부여는 서기전 4세기경에 성립되어 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에 의해 멸망당하는 494년까지 약 800년 동안 지속된 나라이다. 그 영토는 남으로는 발해만 연안과 요서·요동, 북으로 흑룡강, 서로는 대흥안령산맥, 동으로는 우수리강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말갈(靺鞨)
말갈이라는 명칭은 두 글자 모두 가죽 혁(革)자가 부수인 점으로 미루어 가죽옷을 만들어 입는 부족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갈은 이미 고구려 성립 이전부터 부락을 이루고 있었음을 『삼국사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수서』 「말갈전」에는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말갈은 부여국의 변방에 흩어져 살며 가죽옷을 해 입는 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여 사람들은 흰옷을 즐겨 입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말갈과 부여는 의복문화를 통하여 확연히 구분되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에 한반도에 자주 출현하여 백제 및 신라와 세력을 다퉜던 말갈은 백산 말갈이었으며, 고구려를 도와 중원 국가를 공략하던 말갈은 흑수 말갈이었다. 백산과 흑수는 고구려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병합된 상태로 한반도 북부와 두만강 및 송화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말갈족들은 후에 여진족으로 이어져 금과 청을 세운다.
비류(沸流)
비류는 고구려에 최초로 복속된 국가이며, 복속된 이후에는 다물도(多勿都)로 개칭된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서기 37년에 비류를 침략하였는데, 이 때 비류의 왕은 송양이었다. 즉, 비류는 대대로 송씨가 다스리던 국가였다는 뜻이다.
행인(荇人)
행인은 고구려가 두 번째로 복속한 국가이다.
동명성왕은 서기전 32년 10월에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하여 행인국을 정복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행인국은 송화강 주변의 하얼빈이나 다칭 지역에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세 가지 가설 가운데 세 번째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옥저가 남옥저와 8백여 리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남옥저와 북옥저 사이에는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북옥저의 남쪽 경계가 읍루와 접해 있다고 했으므로 남옥저와 북옥저 사이에는 읍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루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으며, 남으로는 동옥저와 접해 있고, 서남으로는 부여, 서북으로는 북옥저, 동북으로는 끝닿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 같은 설정을 바탕으로 할 때 북옥저의 위치는 흑룡강(아무르강)의 본류와 지류로 둘러싸이며, 이는 지금의 하바로프스크 서북방에 위치한 콤소몰스크나아무레 지역 일대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경계는 동남쪽과 북쪽은 읍루에 둘러싸이고, 서남쪽과 서쪽은 부여에 둘러싸인다. 따라서 북옥저는 사방이 흑룡강의 본류와 지류로 둘러싸인 오각형 모양의 땅이 되는 것이다.
대소의 군림은 곧 예씨 모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류는 옥지, 구추, 도조 등의 친구들과 의논한 후 어머니 예씨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할 것을 다짐하고, 서기전 19년 4월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여 고구려 땅을 밟는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유류파의 중심 인물은 주몽과 함께 망명한 오이, 마리, 협보를 비롯하여 대표적인 무장 세력인 부분노와 부위염, 고구려 토착 세력인 탁리, 사비, 설지 등이었고, 비류파의 중심 인물은 소서노의 지지기반인 계루부 출신의 관리들과 오간, 마려 등의 중신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두 파의 대립은 유류파의 승리로 끝났다. 고구려 개국 이후 계루부는 동명성왕에 의해 거의 장악당한 상태였고, 나머지 네 부족 역시 동명성왕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명성왕의 고향 친구들인 오이, 마리, 협보 등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유류파가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비류파가 떠난 뒤, 유류는 동명성왕 측근들의 보필을 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태자 책봉 5개월 뒤인 서기전 19년 9월에 동명성왕이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2대 왕에 올랐다. 그가 바로 유리명왕이다.
2. 유리명왕의 정권 장악 노력과 고구려의 격변
(?~서기 18년, 재위기간:서기전 19년 9월~서기 18년 10월, 36년 1개월)
주몽의 원자 유리명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구려 조정은 한 차례 정쟁을 치른다. 조정을 장악하려는 유리명왕과 이를 저지하려는 개국공신들 사이에 팽팽한 힘싸움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유리명왕은 동명성왕의 맏아들로 동부여 출신의 왕후 예씨 소생이며, 이름은 유류 또는 유리이고, 동부여에서 서기전 38년 또는 서기전 37년경에 태어났다. 이후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망명하였고, 서기전 19년 4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그해 9월에 동명성왕이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고구려 제2대 왕에 즉위하였다.
황룡 왕이 해명을 살려놓자 유리명왕은 서기 9년 3월에 졸본으로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칼을 내주고 자결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해명은 순순히 명령에 복종하여 자결하였고, 이로써 유리명왕은 자신의 아들을 두 명이나 죽인 잔혹한 임금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을 듣게 된다.
"네 년은 한인의 집에 살던 비첩인 주제에 어찌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느냐?"
이 말을 듣고 치희는 분통을 터뜨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유리명왕은 말을 타고 치희를 뒤쫓아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리명왕이 지었다는 시가 ‘황조가’이다.
편편황조 鶣鶣黃鳥 (펄펄 나는 꾀꼬리는)
자웅상의 雌雄相依 (암수 서로 정다운데,)
염아지독 念我之獨 (외로운 이 내 몸은)
수기여귀 誰基與歸 (뉘와 함께 돌아갈꼬?)
도절(서기전 17년~서기 원년)
도절(都切)은 유리명왕의 맏아들이며, 제1왕후 송씨의 소생인 듯하다. 그리고 그를 송씨의 소생으로 볼 때 서기전 17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해명(서기전 12년~서기 9년)
해명은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이며, 제2왕후 송씨 소생으로 서기 4년 16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여진(?~서기 18년)
유리명왕의 넷째 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서기 18년 4월에 물에 빠져죽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재사(생몰년 미상)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로 제6대 태조의 아버지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또는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봉작인 고추가(古鄒加, 조선의 대원군이나 부원군에 해당함)에 올라 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첫째, 졸본은 구려의 옛 수도였기 때문에 구려시대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둘째, 졸본은 변방이 가까워 적의 침입이 용이한 곳이었다. 특히 부여와 아주 근거리에 있는 까닭에 항상 부여의 전쟁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셋째, 졸본은 자기 손으로 큰아들 도절을 죽게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졸본의 민심이 유리명왕에게서 멀어졌다.
선비(鮮卑)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년), 고구려는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선비를 정벌해 속국으로 만든다.
선비는 원래 사르모론(西喇木倫)강 유역에 흩어져 있던 동호족의 지파로서 유목민이다. 이들은 요서 지역 및 대흥안령산맥, 소흥안령산맥, 요동 등 넓은 곳에 분포해 있었으며 유리명왕 당시에는 나라를 형성하지 못했다.
유리명왕 당시만 하더라도 선비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인구도 적었으며, 힘도 하나로 결집되지 못했다. 하지만 2세기가 되면 선비족의 힘은 강성해진다. 이 시기의 선비족에는 흉노와 탁발, 정령, 오환, 한족 등이 일부 포함되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다.
양맥(梁貊)
유리명왕 33년(서기 14년)에 유리명왕은 오이와 마리에게 명령하여 군사 2만으로 양맥을 멸망시키고,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점령한다. 『삼국사기』는 이 고구려현이 현도군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룡국(黃龍國)
황룡국은 『삼국사기』 유리명왕 27년(서기 8년)과 28년(서기 9년)에 등장하는 나라 이름이다. 이 황룡국 왕이 선물한 활을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 해명이 꺾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고구려 조정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던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2.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대무신왕의 팽창정책
(서기 4~44년, 재위기간:서기 18년 10월~서기 44년 10월, 26년)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이며, 다물후 송양의 차녀인 제2왕후 송씨 소생이다. 서기 4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무휼(武恤)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총명하였고, 유리명왕 33년(서기 14년) 정월에 11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서기 18년 10월에 유리명왕이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3대 왕에 올랐다.
사신으로부터 이러한 해석을 전해들은 대소는 후회를 거듭하였고, 그런 가운데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준비하여 서기 21년 12월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정벌길에 오른 대무신왕은 9척 장신 괴유를 장수로 맞아들였는데, 이듬해 2월 그는 부여 왕 대소의 목을 벤다.
좌보로 있던 재상 을두지는 적군이 암벽성인 위나암성 안에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수초로 싸서 적장에게 보낸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 안에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물러간다.
이른바 을두지의 ‘잉어계책’ 덕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대무신왕은 그 이후로도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낙랑을 정복한다.
호동왕자(?~서기 32년)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이며(실제적으로는 장남), 제2왕후 해씨 소생이다(『삼국사기』는 둘째 아들 해우를 장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적통이고, 왕위를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동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4월과 11월 기사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부여 정벌전쟁
대무신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부여를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 한의 내분으로 대륙의 정치질서가 문란해진 가운데 고구려는 대륙의 맹주로 성장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부여를 치기로 한 것이다.
고·한의 위나암성 싸움과 을두지의 ‘잉어계책’
고구려가 팽창정책을 지속하는 가운데 이에 위기를 느낀 한나라는 서기 28년 7월에 1백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한다. 침략의 선봉장은 한의 요동 태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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