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1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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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

광개토왕릉비의 정확한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이다. 이 비석은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선왕의 공적을 기리고 묘지를 지키는 연호(烟戶, 일종의 관노비)들에 대한 규정을 남기기 위해 서기 414년에 능의 동쪽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의 모양은 아래와 위가 넓고 가운데가 좁은 형태다. 높이는 6.39미터이고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미터, 제2면이 1.35미터, 제3면이 2미터, 제4면이 1.46미터이다. 또한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좌단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길이는 3.35미터, 너비는 2.7미터로 불규칙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좌단의 두께는 고르지 못하여 동남측이 0.16미터, 서북측이 0.63미터이다.

이 비에는 사방으로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의 글자 총수는 원래 1,775자였으나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141자이다. 그리고 141자 중 앞뒤 문맥으로 추측 가능한 글자가 9자이므로 현재 132자에 대한 판독이 불가능하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하여 추모(주몽), 유류(유리), 대주류(대무신왕) 등 3대의 왕위 계승에 대한 것과 광개토왕의 즉위에 대한 내용이다. 둘째 부분은 광개토왕의 치적을 적은 것으로, 여기에는 백제정벌, 신라구원, 부여정벌 등에 대한 내용들이 쓰여 있다. 셋째 부분은 광개토왕이 생시에 내린 교시에 근거한 묘비와 연호의 규정을 적고 있다.

이 같은 비문의 내용은 그 어느 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사료로서 고구려 및 그 주변 국가의 역사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내용의 일부는 지워지고 없으며, 또한 확인되는 글자 중에도 판독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 때문에 해석 문제를 놓고 학자들간에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여기서는 능비의 발견과 탁본 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왕의 치적과 관련된 부분의 원문과 번역문을 옮긴다.

⑴ 영락 태왕 5년(395년) 을미년 기사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 不歸*人 躬率往討 過富山 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于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 王備游觀土境 田而還

영락 5년, 그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귀환시키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지나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의 부락 육칠백 영(마을)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거기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에 이르렀다. 왕은 사냥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국토를 즐기며 구경도 하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왔다.

⑵ 영락 태왕 6년(396년) 병신년 기사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南攻取 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于利城**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城 奧利城 勾*城 古模耶羅城 須鄒城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農賣城 沸城 比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漢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赤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拔城 宗古盧城 仇天城 ****逼其國城 殘不服義 敢出迎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殘兵歸穴 就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始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 五十八城 村七白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백잔(百殘, 백제를 낮춰 부른 말)과 신라는 옛날엔 우리의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치고 신라를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신묘년에 왜가 도래하자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던 것이다.}> 6년(영락 태왕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했다. 우리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우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미성 오리성 구*성 고모야라성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농매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적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종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승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핍기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어느덧 백잔의 도성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백잔은 의(義)에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소굴을 포위했다. 그러나 백잔의 군주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하였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 성, 7백 개 촌을 얻었다. 또한 백잔주의 형제와 백잔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국도로 돌아왔다.

⑶ 영락 태왕 8년(398년) 무술년 기사

八年戊戌 敎遣偏斯觀 帛愼土谷 因便抄 得莫斯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백신의 토곡에 보내 순찰하도록 했다. 그 결과 막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으며, 이로부터 조공하고 정사를 보고했다.

⑷ 영락 태왕 9년(399년) 기해년 기사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壤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特遣使還 告以密計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은 하평양을 순시했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그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신라왕)을 천민으로 삼았으니 (고구려에)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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