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1993년생,
울산 학성여고,
학부: 포항공대 화학과
대학원: 포항공대 생화학석사

👀 엄청 똑소리나는 분이시군요
그래서 이런 소설을 쓰셨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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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일보에서 편집도 영업도 아닌 어중간한 일을 할 때 전문가 사이에서 명편집장이란 소리를 들었다. 더불어 ‘자유시사’ 동인으로 유명한 가토 가이슌 선생한테 혼이 나갈 정도로 괴롭힘을 당한 덕분에 일에 있어 좋고 싫음도 전혀 없다.

심지어 자신의 펜을 모독하고 짓밟는 일에 변태적 흥미와 긍지마저 느꼈다.

그러다 규슈일보를 그만둔 뒤 낑낑대며 쓰고 싶은 재료를 펜대에 가득 채운 채 산속으로 들어와 그 재료를 조금씩 짜내려는데, 산속 특유의 외롭고 고요한 분위기 탓인지 점점 펜촉이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전화기가 울려대는 와중에도 태연히 미끄러지던 펜이 파리의 날갯소리만으로도 멈추고 말았다.

어쨌든 고맙게도 펜이 느리나마 움직여주기는 하니 펜대를 부여잡고 또 부여잡으며 오늘까지 버텨왔다. 하지만 최근…… 이라고 해도 지난해 말부터 펜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잡지의 주문에 맞추다 보면 줄거리가 도무지 기분 좋게 흘러가지 않으니, 자기만족일지 몰라도 결국 원래 구성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럴수록 빗자루로 시궁창 흙을 휘젓듯 펜촉이 무거워지고 이곳저곳에서 악취가 확확 코를 찔러 빼도 박도 못했다.

*유메노 규사쿠의 평생 역작인 『도구라 마구라』를 말한다.

글을 쓰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보통은 제일 먼저 술을 마신다. 아니면 마음껏 미쳐 날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타개책은 원기가 왕성하고 근력이 센 사람이나 가능한 일, 몇 번이나 죽을 뻔한 겉만 멀쩡한 내겐 맞지 않는 소생법이다.

그야말로 마음속 깊이 룸펜 기분을 만끽하며 안내판 하나 없는 산골짜기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문장은 한 줄도 못 쓰면서 하이쿠와 센류와 와카**는 써진다. 물론 변변한 작품이 나올 리 없다.

**셋 다 모두 일본 고유의 정형시. 하이쿠는 5·7·5의 열일곱 자, 센류는 하이쿠에서 파생되어 에도시대에 유행한 풍속시, 와카는 5·7·5·7·7의 서른한 자로 되어 있다.

쓰고 싶은 재료가 이토록 많고, 또 쓰고 싶어 좀이 쑤시는 데도 한 줄도 쓸 수 없다면 당연히 그 책임은 펜에 있는 게 틀림없다.

실은 나도 신기하기 그지없다. 도저히 원고를 쓸 수 없어 사죄할 마음으로 펜을 들었는데, 펜촉이 거침없이 움직이더니 어느덧 긴 글이 되어버렸다. 다시 읽어보니 결코 재미있는 문장은 아니다. 그래도 내 심정만큼은 그럭저럭 담고 있다.

슬럼프에 빠진 펜이 슬럼프에 관한 일만은 줄줄 써 내려가다니, 이 무슨 얄궂은 현상이란 말인가.

창작이란 대개 가짜로 지어내는 일이니, 앞으로 지어낸 이야기 즉 소설을 영원히 쓸 수 없게 된다. 이거, 창작의 세계에서 목매 죽게 생겼다.

창작의 세계에서 되살아나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걸까? 그림이나 와카, 하이쿠를 짓는 것 말고 다른 살길은 없단 말인가.

독감기
우메자키 하루오梅崎春生
1915년 후쿠오카현 출생. 1936년 도쿄대 국문과에 입학, 동인지 『기항지』를 창간하는 한편 『와세다문학』에 첫 소설 「바람 잔치」를 발표했다. 1940년 졸업 후 사무직원으로 일하다가 해군에 소집되어 암호병으로 복무했다. 1946년 서른한 살 때, 해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허망한 죽음 속에서 전쟁의 의미를 성찰하는 「사쿠라섬」을 써서 주목받았다. 그해 잡지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전후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이되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1954년 「낡은 집의 춘추」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1965년 7월 19일 쉰 살에 간경변으로 세상을 떠났다.
「독감기」는 1958년 1월 잡지 『풍보』에 실린 글이다.

드디어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이번 독감은 성질이 고약해서 열이 일주일이나 계속된다는 소문이 났기에 무서워서 최대한 조심했다. 외출도 하지 않고 칫솔질도 게을리하지 않고 틈만 나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결국 당해버렸다. 11월 27일의 일이다.

이것으로 다나베 군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게 되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끝이 났다. 양쪽 다 축하할 일이다. 이상, 인간이 굳게 믿으면 어떻게든 된다는 허술한 일장 연설.

쓰지 못한 원고
호조 다미오北條民雄
1914년 경성 출생. 1933년 열아홉 살 때 한센병에 걸려 도쿄 근교 국립요양소 다마전생원에 입원한 뒤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마전생원은 기관지 겸 문예지 『산앵』, 『뻐꾸기』 등을 발행했는데, 그는 같은 한센병 환자였던 시인 미쓰오카 료지의 권유로 동화 「귀여운 폴」, 「제비꽃」을 실었다. 습작을 보낸 것을 계기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학 수업을 이어갔고 1936년 『문학계』에 「생명의 초야」를 발표했다. 자신의 비극적인 숙명과 한센병 격리 시설의 참혹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생명의 초야」는 그해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 「한센병 가족」, 「안대기」 등을 쓰며 창작열을 불태우다가 1937년 12월 5일 스물세 살에 생을 마감했다.
「쓰지 못한 원고」는 1935년 3월 아동 문예지 『뻐꾸기』에 실린 글이다.

오늘은 2월 27일이다.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이 될수록 점점 세차게 쏟아진다.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주룩주룩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때때로 어딘가 멀리서 밀물이 밀려왔다 밀려가듯 바람이 불어댄다. 지금 너무나 기분이 우울하다.

빗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은 쓸쓸해도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제법 도움이 된다. 비가 많이 내리는 곳에서 태어난 탓인지 나는 비라는 녀석이 좋아서 미치겠다. 여름비, 겨울비, 봄비. 어느 계절에 내리는 비라도 저마다의 정취가 마치 포근한 솜처럼 기분 좋게 머리를 에워싼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는 보통 때보다 두 배 정도 글이 잘 써진다. 아니, 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긴다.

특히 동화는 "음, 그렇지. 음, 그렇군" 감탄하며 새삼 나 같은 놈이 나설 자리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고 만다. 결국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멍하니 빗소리를 듣는 처지에 이른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말이다.

"분노라고요! …… 그래요, 바로 분노죠! 어린아이한테도 위대한 분노가 있답니다. …… 아니요, 당신네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 말입니다. 비록 남에게 멸시당해도 결백한 마음을 지닌 우리 아이들은 아홉 살 나이에 이미 세상의 진실을 터득한답니다."

서재와 별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년 구마모토현 출생. 1904년 와세다대 영문과에 입학, 이듬해 와세다학보 현상 공모에서 신체시 「전도각성부」가 입선하며 시단에 데뷔했다. 1909년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사 이야기를 그린 시집 『사종문』으로 명성을 쌓았다. 탐미파 동인 ‘빵의 모임’을 조직해 관능미 넘치는 시를 주로 짓다가 1918년 가나가와현 오다와라로 이사한 뒤 아동문학가 스즈키 미에키치가 창간한 『빨간 새』에 동요와 아동시를 다수 발표했다. 1926년 도쿄로 집을 옮긴 그는 문예지 『근대풍경』, 『신시론』을 발행하며 당대 시단을 이끌었다. 한국 문인과도 인연이 깊은데, 김소운이 기타하라의 문하에서 시를 공부했고 유학생이던 정지용이 『근대풍경』에 시 「카페 프랑스」 등을 발표했다. 1942년 11월 2일 쉰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다.
「서재와 별」은 1930년 6월에 발표된 글이다.

"도쿄에는 별님이 없네요."
우리 집 아이는 자주 말한다.
"아, 아, 나에게는 서재가 없어."
그 아버지인 나의 탄식이다.
오다와라 덴진산의 하늘은 온갖 별자리로 가득했다. 자연 풍광도 매우 환하고 빼어났지만, 위층 발코니나 침실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남달랐다. 그 별들이 도쿄에 오니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도쿄에 오고 나서부터 하룻밤도 나만의 차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망해버린다. 글을 쓸 수 없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병이 날 지경이다. 정말로 오다와라의 그 허물어진 ‘부엉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1919년 오다와라에 기타하라 하쿠슈가 지은 집의 이름으로, 현관 양옆에 작은 파란 유리창이 있는 모습이 마치 부엉이 얼굴 같아서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쓸 수 없는 원고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
1898년 후쿠시마현 출생. 1916년 와세다대 문과에 입학, 이듬해 신경쇠약으로 휴학하고 교토에서 생활하며 『문장세계』에 첫 소설 「신마」를 발표했다. 1920년 도쿄로 돌아와 기쿠치 간 문하에서 「파리」, 「태양」을 잇따라 써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1930년 공장을 무대로 인간관계를 신심리주의 기법으로 그려낸 「기계」를 선보이며 예술파의 중심인물로 올라선 뒤 신문소설을 다수 연재하는 한편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46년 10년 가까이 집필하던 장편 『여수』가 검열로 수정되거나 삭제되는 일에 충격받아 건강을 해친 끝에 1947년 12월 30일 마흔아홉 살에 생을 마감했다.
「쓸 수 없는 원고」는 1927년 8월 잡지 『문장구락부』에 실린 글이다.

아침에는 정신이 멍하다. 어떤 책에 3월생인 사람은 아침 몇 시간은 혼자 있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아침에 누가 찾아오면 그날은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침 몇 시간 동안 내 머리는 받아들일 것을 모두 받아들이고 오후가 되면 축 늘어진다. 그럴 때면 방문객의 청중이 될 뿐이다.

하지만 생활이 있다.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활이 예술보다 더 중요하다고, 자신을 타이르는 버릇이 느닷없이 튀어나온다. 정말 생활이 예술보다 중요하다면, 그런 삶 따윈 살고 싶지 않다. 이론과 감정이 프롤레타리아 예술처럼 지리멸렬해진다. 생활에 중점을 둘 것인가, 예술에 중점을 둘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운명도 그와 함께 정해진다.

지금 기분이 뒤숭숭하다. 바람이 어느새 비를 머금고 불어와서다. 나는 비바람이 싫다. 그런 까닭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소질이 충분하다.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있을 때, 이 빗속을 뚫고 예의 그 잡지기자가 달려왔다. 응접실로 나갔다. 그는 솔직하고 용감하며 젊고 선하다. 하찮은 내 소설 한 편을 받으려고 벌써 석 달 전부터 여섯 번이나 우리 집을 방문한 터였다.

쓸 수 없는 날에는 아무리 해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 나는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화장실 안이다. 아니, 볼일도 없는데 여긴 뭐 하러 들어왔지. 밖으로 나오다 이번에는 격자문에 머리를 내리친다. "으음, 으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따위 글을 써봤자 뭐가 된단 말인가. 그저 노동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을.

나의 생활에서

마키노 신이치牧野信一
1896년 가나가와현 출생. 1914년 와세다대 영문과 입학,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읽으며 습작을 거듭했다. 1919년 단편 「손톱」을 발표해 자연주의의 대가 시마자키 도손에게 극찬받았다. 1920년 『신소설』에 실린 「볼록거울」로 첫 원고료를 받은 뒤 고향으로 돌아와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 1924년 아버지가 갑작스레 죽자 「아버지를 파는 자식」을 『신조』에 발표했다. 어린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아버지는 그에게 큰 상처였고, 이후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육친 혐오적 작품을 주로 썼다. 1931년 도쿄로 이사한 뒤에도 작품은 점점 어두워지고 우울증은 심해졌다. 결국 1934년 홀로 가나가와에서 방랑하며 글을 쓰다가 1936년 3월 24일 마흔 살에 고향 집에서 자살했다.
「나의 생활에서」는 1935년 8월 잡지 『신조』에 실린 글이다.

나는 술을 잠시 끊고 낮에는 나비를 잡거나 밤에는 수면제가 들을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음악을 들었다.
7월. 훌쩍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첨단인은 말한다

호리 다쓰오堀辰雄
1904년 도쿄도 출생.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어머니가 실종되자 며칠간 물속을 찾아 헤매다 흉막염에 걸려 휴학했다. 1925년 도쿄대 국문과에 입학, 동인지 『산누에』에 첫 소설 「단밤」을 발표했다. 스물네 살에 흉막염이 재발해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서 요양하며 1930년 『개조』에 단편 「성가족」을 써서 호평받았다. 1934년 약혼하지만 약혼자 역시 같은 병을 앓아 이듬해 둘이 함께 요양소에서 치료하던 중 약혼자가 죽자, 1938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바람이 분다』를 출간했다. 순수한 사랑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이 작품으로 인기 작가가 됐다. 수년간 요양 생활을 하면서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다가 1953년 5월 28일 마흔아홉 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첨단인은 말한다」는 1930년 11월 잡지 『신문예일기』에 실린 글이다.

글을 쓰려고 해도 도저히 쓸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면 맥없이 축 늘어져서는 글쓰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생각하며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그리고 공원 안에서 아이들이 끈끈이를 칠한 기다란 장대를 들고 잠자리를 잡으려고 쫓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이 부럽기 그지없다. 할 수만 있다면 글쓰기 따윈 내팽개치고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싶다. 그만큼 글 쓰는 일이 고통스럽다.

오늘날, 작가는 고통을 이용한 글쓰기가 금지되어 있다. 평정심으로만 써야 하는데, 그 평정심을 손에 넣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내가 쓰려고 해도 쓸 수 없는 이유는 전적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해서다. 아이들이 잠자리를 노리는 것처럼 평정심을 손에 넣으려고 수없이 애써봤지만 실패했다. 보라, 눈앞에서 무심하게 놀아대는 아이들의 저 잠자리 잡는 솜씨를! 오, 나의 천사들이여!

잡언

다네다 산토카種田山頭火
1882년 야마구치현 출생. 1902년 와세다대 문학과에 입학했다가 신경쇠약으로 중퇴하고 귀향해 1906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술도가를 운영했다. 그러나 문학의 꿈을 접지 못해 1911년 스물아홉 살에 하이쿠를 쓰기 시작, 하이쿠나 와카 동인으로 활동했다. 1916년 술도가가 도산한 탓에 구마모토로 가서 고서점을 개업하지만 이 역시 실패, 얼마 뒤 남동생마저 자살했다. 열 살 때 투신자살한 어머니의 시신을 목격한 일이 트라우마였던 그는 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켰고 1925년 마흔세 살에 출가했다. 이후 법의와 삿갓 차림으로 서일본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하이쿠를 짓고 글을 썼다. 1932년 고향의 작은 초암으로 들어가 살다가 1940년 10월 11일 쉰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잡언」은 1913년 1월 하이쿠 회람잡지 『새해 첫 파도』에 실린 글이다.

나는 이번에도 하이쿠를 내지 못했다. 하이쿠를 짓지 못한 자가 이렇게 제멋대로 불평을 늘어놓다니. 미안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지금은 아무리 해도 하이쿠를 짓지 못하겠다. 하이쿠를 읊을 여유, 소재가 있어도 그걸 하이쿠로 표현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깊은 구멍이 있다.
차가운 바람이 불다.
누군가가 걸어온다.
회색빛 안개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온다.
누구냐!
정신 차려라!
벌벌 떨지 마라,
어서, 어서,
우물쭈물하지 말고 어서 오라!
위험해, 조심해!
구멍이 있어,
깊은 구멍이 있어, 검은 구멍이 있어.
떨어진다! 차라리 뛰어들어라!
아, 그는…… 나는 쾅 하고 쓰러졌다!!!

인생에는 해결이란 없다. 다만 해결 비슷한 것은 하나 있다. 그건 죽음이다! 하고 누군가 외쳤다. 하지만 죽음 그 자체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죽음 역시 해결도 뭣도 아니다! 인생이란 모순의 다른 이름이다. 모순에 뿌리내리고 핀 악의 꽃, 그게 예술이라고 믿었다.

아름다운 사람을 울리고 술을 마시며
장단이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
여인숙 2층에서 굴러다니는 한 장의 신문을 읽으며
하룻밤을 지새운다
술을 마셔도 취기가 오르지 않는 사람은
그저 홀로 난간을 잡고 먼 구름을 본다
술이 깨서 마시는 물이 달듯이
홀몸으로 충분한 이 신세가 기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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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수많은 탐험대가 지구의 구석구석을 이미 다 거쳐 간 후다. 신대륙도, 잃어버린 땅도 지구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황량하고 외딴지역이라도 찾아가서탐사할 수 있게 되었다. - P54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전 경호원을 시켜 건설한도시다. 알렉산더 대왕은 외래문화를 존중했고 개방적 성격의 인물로서 지식 추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 P55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진정한 의미의 연구 현장이었다.도서관 소속 학자들은 코스모스 전체를 연구했다. 코스모스 Cosmos는 우주의 질서를 뜻하는 그리스 어이며 카오스 Chaos에 대응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만물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내포한다. 그리고 우주가 얼마나 미묘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지고 돌아가는지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 단어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P56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Prolemacos는 오늘날의 사이비 과학이라 할 점성술을 수집하여 정리했다. 그가주창한 지구 중심 우주관인 천동설이 1,500년 동안 맹위를 떨쳤다. - P57

지성적 역량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형편없이 틀릴 수가 있음을 상기케 하는 인류사의 좋은 예였다. 이러한 위인들 중에 위대한 여인도 있었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히파티아 Hyparia 는 도서관의 마지막 등불을 지킨 여인으로서, 초석을 쌓은 지 700년이 된 이 도서관이 파괴되고 약탈당할 때 그곳에서 함께 순사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나중에더 할 것이다. - P58

무엇보다도 도서관의 생명은 모아 놓은 책들에 있다. 도서관 관계자들은 세상의 모든 문화와 모든 언어를 샅샅이 뒤졌다. 사람들을 해외로 보내서 책을 사들였고 장서를 확충해 갔다.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한 상선은 관리의 검문을 받았는데, 검문의 목적은 밀수품 적발이 아니라 책 찾기에 있었다. 책 두루마리가 발견되면 즉시 빌려다가 베낀뒤, 사본은 도서관에 보관하고 원본은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정확한수치를 어림하긴 어렵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는 일일이 손으로 쓴 파피루스 두루마리 책이 50만여 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P58

고대인들은 세계가 아주 오래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먼 과거까지 들여다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주가 옛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됐음을 알고 있다. 인류는 지구 바깥으로 나가서 우주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한점 티끌 위에 살고 있고 그 티끌은 그저 그렇고 그런 별의 주변을 돌며또 그 별은 보잘 것 없는 어느 은하의 외진 한 귀퉁이에 틀어박혀 있음을 알게 됐다. - P60

우리의 존재가 무한한 공간 속의 한 점이라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찰나의 순간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 P60

인류는 대폭발의 아득히 먼 후손이다.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코스모스를 알고자, 더불어 코스모스를 변화시키고자 태어난 존재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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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원고 언제 주실 건가요!?
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분투기

지은이 다자이 오사무, 유메노 규사쿠, 우메자키 하루오, 호조 다미오, 기타하라 하쿠슈, 요코미쓰 리이치, 마키노 신이치, 호리 다쓰오, 다네다 산토카, 사카구치 안고, 다카무라 고타로, 나쓰메 소세키, 요시카와 에이지, 다야마 가타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무로 사이세이, 모리 오가이, 나가이 가후, 다니자키 준이치로, 기쿠치 간, 에도가와 란포, 하야시 후미코, 나오키 산주고, 이즈미 교카, 야마모토 슈고로, 미야모토 유리코, 오구마 히데오, 이토 노에,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시다 구니오, 『반장난』 편집부

1장, 쓸수없다

작가의 초상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년 아오모리현 출생. 1930년 도쿄대 불문과에 입학, 공산주의 운동에 몰두하다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 문하에 들어갔다. 1935년 『문예』에 실린 「역행」이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복막염 치료를 받다 약물 중독에 빠지고 학교에서 제적당하는 등 시련을 겪으면서도 1936년 첫 단편집 『만년』을 출간했다. 1938년 이부세 마스지의 소개로 결혼하고 나서 안정을 찾고 많은 작품을 썼다. 1947년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을 반영한 『사양』으로 인기 작가가 됐다. 1948년 5월 『인간 실격』을 완성한 뒤 6월 13일 서른아홉 살에 연인과 함께 다마강에 투신자살했다. 자살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죽기 직전 쓰던 「굿바이」가 미완성 유작으로 남았다.
「작가의 초상」은 1940년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미야코신문에 연재된 글이다.

어떤 수필이든 열 매쯤 쓰지 못할 리 없건만, 이 작가는 벌써 오늘로 사흘이나 웅얼웅얼 읊조리며 쓰고는 조금 있다 찢고 또 쓰고는 조금 있다 찢고 있다. 일본은 지금 종이가 부족한 상황이라 이렇게 찢어대면 아까운데, 전전긍긍하면서도 그만 찢어버린다.

"무슨 말을 해도 당신, 결국은 자기변호잖아."

목표 삼은 상대에게만 실수 없이 명중하고, 다른 좋은 사람에게는 티끌 하나 묻히고 싶지 않다. 나는 어설퍼서 뭔가 적극적인 언동을 하면 반드시 남에게 헛되이 상처를 입힌다. 친구들 사이에서 ‘쇠갈퀴’란 이름으로 불린다.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는 무교회주의를 창시한 그리스도교 사상가이며, 쓰카모토 도라지(塚本虎二 1885~1973)는 그의 제자로 성서학자이다.

"어느 여름, 나가노현 구쓰카케 온천에서 선생이 장난으로 내 아이에게 더운물을 끼얹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내가 하는 일은 다 이렇다, 친절이 도리어 해가 된다고 말했다."

어제 미야코신문에 보낼 수필을 쓰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도무지 써지지 않았다. 수필이 아니라 소설이라면 얼마든지 거침없이 써 내려갈 텐데, 하고 한 달 전부터 구상 중인 단편소설을 되새겼다.

"오늘은 하늘이 맑게 개었으니 여느 때처럼 산책을 나가본다. 홍매, 일찍도 피었구나. 세상 만물에 사랑이 깃들어 있구나. 봄은 헛들지 않고 다시 온다" 식으로 시치미를 떼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홀로 일류의 길을 걷고자 노력할 따름이다. 그래서 매일 쓸데없는 고생을 수없이 겪는다. 스스로도 바보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혼자서 얼굴을 붉힐 때도 있다.

별문제 없는 수필 재료는 없는 걸까? 죽은 친구 일을 쓸까? 여행한 일을 쓸까? 일기를 쓸까? 나는 일기를,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다. 아니, 쓸 수 없었다.

"사랑이 뭔지 알아? 사랑은 말이야, 의무 수행이야. 아, 슬프네. 또 뭐냐, 사랑이란 도덕 완수야. 또 뭐냐, 사랑이란 육체 포옹이야. 모두 납득할 만한 말이지. 그럴지도 몰라. 정답일지도 몰라. 하지만 또 하나, 또 하나, 또 뭔가 있다고! 알겠나, 사랑이란…… 나도 잘 몰라. 그걸 안다면…… 말이지." 두 명의 불량배 손님을 상대로 큰일이고 뭐고 맥 빠진 소리만 지껄이다가 잔뜩 취해 곯아떨어졌다.

"이건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하며쓰던 원고를 찢어버린다.
고작 열 매 내외 원고에
사흘이고 나흘이고 끙끙댄다."
다자이 오사무

"혹시 내 팬은진실한 사건이 아니면쓸 수 없게 된 걸까?"

슬럼프
유메노 규사쿠夢野久作
1889년 후쿠오카현 출생. 1911년 게이오대 문학과에 입학, 1915년 돌연 출가해 2년 남짓 나라와 교토에서 수행했다. 그러다 환속해 규슈일보에서 신문기자를 거쳐 편집장으로 일하며 르포르타주나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1926년 「괴이한 북」으로 잡지 『신청년』 현상 공모에 입선한 이후 추리소설 창작에 매진했다. 1929년 발표한 「삽화의 기적」이 에도가와 란포에게 극찬받으며 괴기하면서도 환상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35년 출간된 장편 『도구라 마구라』는 구상에서 탈고까지 10년 넘는 세월이 걸렸는데, 읽다 보면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평을 들으며 일본 탐정소설 3대 기서로 꼽힌다. 1936년 3월 11일 마흔일곱 살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슬럼프」는 1935년 3월 탐정소설 전문지 『프로필』에 실린 글이다.

미안하기 짝이 없다. 요전번 청탁받은 원고, 한 번 마감을 미뤘건만 또 쓰지 못했다.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버렸다. 약간 자랑 같긴 한데, 나는 여태껏 슬럼프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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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사실 진짜 선생님이 아닌 거죠?"

태린이 그렇게 물어왔을 때, 이제프는 뜻밖의 질문에는 더이상 놀라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 태린이 그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궁금하긴 했다.

그제야 이제프는 태린의 눈을 마주보았다. 지금까지 관찰 대상이었던 아이들이 어느 시점을 넘기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아이들은 성장하며 자의식을 키워가기에, 결코 두 개의 의식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고유한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범람체와 강하게 충돌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제프는 태린과 쏠이 형성하는 관계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로 주목해왔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영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쏠은 엄연한 의미에서, 친구가 아닌 기생하는 존재다. 태린이 살아 있지 않으면, 쏠도 그런 형태로 자아를 가지고 살 수 없는.

이제프는 태린에게 지상을 주고 싶었다. 노을과 별들을 주고 싶었다. 단지 파견자가 되어 지상을 경험하고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언젠가 태린이 파견자가 될 수 있다면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보게 되겠지만, 그것은 갈망을 증폭하는 일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지상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지상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지상을 되찾아와야 했다. 별과 노을과 바다가 있는 행성은 다시 인간의 것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되돌아온 행성을 목격하고 나면 태린도 이해할 터였다. 이 행성은 본래 인간의 것이어야 했다.

무언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자고 설득하는 편이 훨씬 쉽다.

그때는 태린도 이 모든 것이 선물임을 이해하겠지.

늪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다. 파견 본부의 사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그런데 왜 이 진동 신호는 늪인들이 숨기려고 했던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걸까? 그것도 한참 전부터.

—사랑해. 이제 모든 걸 함께 잊어버리자.

그리고 쏠은 스스로를 죽였다.

범람체의 본능을 거스르는 방식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억압되어 있던 감각들이, 쏠이 그 순간에 느꼈던 고통과 두려움이 아주 짧은 시간 태린에게 밀려들었다. 쏠은 그 고통을 견디고 스스로 사라지기를 선택했다. 태린의 자아가 찢어져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그들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알고 싶어서 왔다. 정말로 이 모든 일이 사실인지 믿을 수 없어서, 직접 보아야 했다. 어떤 확신도 신념도 없었다. 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도망치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태린은 알 수 있었다.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아.

"정태린, 난 너를 알아. 범람체가 있을 때도, 사라졌을 때도 너는 너였지. 네가 지닌 고유한 자아. 빛나는 눈빛. 그런 것들은 범람체에 의해 오염되지 않아. 그들은 다르지. 그들은……"

"결국 인류 전체를 저들의 숙주로 삼으려는 게 아닌가 싶군."

브리핑했던 여자가 그 말에 대꾸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우리를 굳이 숙주 삼을 이유는 없어요."

"우리를 숙주 삼지 않아도, 지구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범람체들의 행성이었으니까요."

무거운 침묵과 탄식이 회의실을 채웠다.

흐르는 물이 햇빛을 반사해 윤슬이 반짝였고 강 인근의 나무들은 범람화 정도가 크지 않았다.

밤의 바다는 많은 색깔들을 품고 있었다. 온몸으로 감각되는 빛의 조각들을.

—보다시피.

그 세계는 여전히 낯설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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