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국화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1879년 도쿄도 출생. 학창 시절부터 에도시대 통속소설을 탐독했다. 1900년 가부키 극장 전속 작가로 들어가 야학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며 에밀 졸라에 심취했다. 1902년 장편 『지옥의 꽃』을 발표해 모리 오가이에게 극찬받았다. 1903년 미국을 거쳐 프랑스에 머물다가 1908년 귀국, 이듬해 출간한 『프랑스 이야기』가 풍기 문란이란 이유로 판매 금지당했다. 1910년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게이오대 문학과 교수가 되어 『미타문학』을 창간하고 편집했다. 이후 동시대 문명에 대한 혐오감을 토로하며 탐미주의 화류소설 『묵동기담』, 산책 수필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등을 남겼다. 1952년 문화훈장을 받은 그는 1959년 4월 30일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
「때늦은 국화」는 1923년 11월 잡지 『여성』에 실린 글이다.

조루리는 일본 전통 악기인 샤미센 반주에 맞춰 읊는 이야기 또는 노래. 고하루와 지헤에, 우라자토와 도키지로 모두 조루리 작품의 남녀 주인공들이다.

나는 초고를 반드시 세키슈 생지*****에다 쓴다. 서양지가 아닌 생지에 쓴 초고는 못 쓰게 되면 집 안 먼지를 털어내는 먼지떨이를 만들기에 좋고 마구 구겨 부드럽게 해서 뒷간으로 가져가면 아사쿠사 종이보다 훨씬 낫다. 휴지의 유용, 가치 없는 글자가 죽 적힌 초고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평소 문학에 뜻을 둔 사람에게 서양지와 만년필을 사용하지 말라고 설파하는 것은 이 폐물 이용법을 알게 하려는 노파심이나 다름없다.

*****시마네현의 서부 이와미 지방의 옛 이름으로 옛날부터 종이 생산지로 유명하다.

『명성』에 실린 모리 오가이가 만년에 쓴 초고를 본 적 있는데, 괘선 없는 반지에 붓으로 해서와 행서를 섞어 써 내려간 서체가 티 없이 맑고 아름다웠다. 거침없이 쑥쑥 뻗어나간 것이 곧바로 그의 글임을 알게 했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날 마당에서 둥지로 서둘러 돌아오는 작은 새의 소리를 들으며 치자를 따서, 추운 밤 고즈넉이 홀로 켜진 등불 아래 얼어붙은 손끝을 녹이며 깨진 질냄비에 넣고 끓일 때의 정취란,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만든 치자즙을 짜서 괘선을 그려 넣은 종이에 붓을 갖다댈 때의 마음과 비교하면 훨씬 맑고 깨끗하리라. 하나는 완전히 무심한 시간이고, 하나는 세밀한 작업의 고통과 퇴고의 어려움으로 자주 긴 탄식이 흘러나온다.

올가을 이상하게도 재해를 피한 우리 집 마당에 겨울이 재빨리 찾아왔다. 붓을 내려놓고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니 마당을 반쯤 비춘 석양에 잘 익은 치자가 불타올라 사람이 와서 따기를 기다린다.

나의 가난 이야기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1886년 도쿄도 출생. 1908년 도쿄대 국문과에 입학, 「문신」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1911년 학비 미납으로 퇴학당한 뒤 「소년」, 「비밀」 등을 써서 나가이 가후로부터 극찬받았다. 이후 탐미주의적 색채로 에로티시즘과 마조히즘을 그려낸 작품을 다수 선보이며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1933년 수필집 『음예예찬』을 출간한 이듬해부터 고전 『겐지 이야기』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들어가며 작품 역시 고전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1943년부터 1948년에 걸쳐 오사카의 자매 이야기 『세설』을 완성했으며, 1958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이래 일곱 차례 후보에 올랐다. 고혈압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꾸준히 글을 쓰던 그는 1965년 7월 30일 일흔아홉 살에 생을 마감했다.
「나의 가난 이야기」는 1935년 1월 잡지 『중앙공론』에 실린 글이다.

내가 가난한 가장 큰 이유는 글 쓰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원고를 재촉하는 편집자들에게 늘 호소하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함께 사는 가족뿐이다. 편집자들은 적당히 흘려듣는 것 같아 억울하기 짝이 없다. 사실 일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린다거나 아주 고심해서 문장을 다듬는다거나 하는 점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게 싫어서 나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맞게 시간을 나눠 쓰지 못하기에 조금 긴 글을 집필하기 시작하면 놀기는커녕 관혼상제의 의리마저 저버린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지내다 보면 세상과 아예 접촉 없이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니, 여러 가지 방해가 들어오고 이윽고 일이 늦어진다. 그러면 이번에는 겨우 일을 마무리하고도 노는 시간조차 가질 틈 없이 곧바로 다음 일에 달려들어야 한다.

신문소설의 어려움

기쿠치 간菊池寛
1888년 가가와현 출생. 1910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구메 마사오와 친구가 되지만 졸업 직전 퇴학당했다. 졸업자격 검정시험을 거쳐 교토대 영문과에 진학, 졸업 후 도쿄로 올라와 시사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1916년 「아버지, 돌아오다」를 발표했다. 이후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1920년 마이니치신문에 『진주부인』을 연재해 인기 작가가 됐다. 1923년 1월 『문예춘추』를 창간해 신진 작가 발굴에 나섰다. 1935년 세상을 떠난 두 명의 친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나오키 산주고를 기리며 아쿠타가와상(순수문학 대상)과 나오키상(대중문학 대상)을 만들었다. 또 『육지의 인어』, 『두 번째 키스』 등 쉰 편에 이르는 통속소설을 남겼다. 1948년 3월 6일 예순 살에 협심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신문소설의 어려움」은 1925년에 발표된 글이다.

바둑을 두든 장기를 두든 직업이 되면 전혀 재미있지 않은 모양인데, 작가도 창작할 때는 상당히 고통스럽다. 원고지 열 매나 스무 매짜리 단편을 쓰느라 시작하기 전에 사나흘, 끝낸 후에 사나흘은 헛되이 흘려보낸다.

독서와 창작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나쓰메 소세키는 1907년부터 도쿄대 교수를 그만두고 아사히신문에 전속 작가로 들어가 집에서 신문소설을 집필하며 책 읽기에 몰두했다.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가난한 유학생에게 최고의 위안은 독서라며 밥값을 아껴 책을 사서 밤새 읽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아울러 매주 목요일마다 그를 흠모하는 문학청년들이 집으로 찾아와 서재에서 밤새도록 자유롭게 문학을 토론했다. 이른바 ‘목요회’로 나쓰메 소세키가 죽을 때까지 계속 열렸는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구메 마사오 등도 참여한 바 있다.
「독서와 창작」은 1909년 2월 잡지 『중학세계』에 실린 글이다.

도무지 시간이 없어 독서를 못 하니 곤란하다. 신문소설을 쓰는 동안은 바빠서 당연히 책을 읽지 못하고, 겨우 다 쓰고 나면 이번에는 그때까지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둔 서양 잡지 서너 종과 일본 잡지 그리고 외국에서 주문해 받은 책이 쌓여 있다. 그것도 읽어 보고 싶은데, 고새 젊은 친구들이 자신이 쓴 작품을 들고 와서 읽어봐달라, 비평해달라 조른다. 또 편지가 오면 답장을 쓰거나 손님이 오면 응대를 하느라 바쁘기 그지없다.

말할 것도 없이 드러누우면 금세 잠들기에 잠자리에서 책을 읽는 일도 없다. 정말이지 하루에 책을 읽을 시간이 얼마 안 된다.

메모

호리 다쓰오堀辰雄
호리 다쓰오의 만년 대표작으로 한 소설가를 사랑했던 어머니와 딸인 ‘나오코’의 인생을 다룬 『나오코』는 단편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4년 『문예춘추』 10월호에 프롤로그격인 「이야기 속 여인」(후에 「느릅나무 집」 1부)을 발표한 이후 후속편을 쓰지 못하다가 1939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941년 『중앙공론』 3월호에 본편인 「나오코」를, 이어 『문학계』 9월호에 「자각」(후에 「느릅나무 집」 2부)을 발표했다. 7년여 만에 『나오코』를 완성한 호리 다쓰오는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 작가인 나로선 태어나 처음으로 정말로 소설다운 소설을 쓴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밝혔다.
「메모」는 1940년 4월 잡지 『문학계』에 실린 글이다.

뭔가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이것저것 궁리해도 무심코 게으름을 피워서(게으름만큼 내 건강에 좋은 것은 없기에) 좀처럼 계획한 대로 글이 써지지 않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잠시 고바야시의 소설론을 소개하고 싶어서 이 메모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말로 번역하면 결국 내가 받아들인 이데아밖에 나오지 않을 게 뻔하니 그만두련다. 대신 고바야시에게 언젠가 써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해야겠다. 베란다에서의 잡담은 9시까지 이어졌다. 자, 이제 바깥 공기를 꽤 마셨으니 그만 나의 나오코한테로 돌아가야겠다.

세 편의 연재소설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
1894년 미에현 출생. 1916년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헌책방 주인, 편집기자를 거쳐 1923년 「2전짜리 동전」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필명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다. 1925년 「D언덕의 살인 사건」에 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처음 등장시키며 「심리시험」, 「다락방의 산책자」 등을 발표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추리, 탐정, 환상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는데, 1931년 첫 전집이 출간되자 24만 부나 팔렸다. 1936년 검열이 심해지자 소년용 탐정물로 전향해 걸작을 다수 남겼다. 만년에는 ‘탐정작가클럽’을 조직해 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에도가와란포상’을 제정해 신진 작가 발굴에 힘썼다. 1965년 7월 28일 일흔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세 편의 연재소설」은 1954년 11월에 출간된 『탐정소설 40년』에 실린 글이다.

어느 하루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1903년 후쿠오카현 출생. 어린 시절부터 행상하는 부모를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1922년 여학교 졸업 후 도쿄로 올라와 사무원, 카페 여급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글쓰기에 몰두했다. 1930년 자신의 경험을 간결한 일기체로 고백한 『방랑기』로 일약 인기 작가가 됐다. 그 인세로 1931년 11월 혼자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 이듬해 돌아와 1933년 『삼등여행기』를 펴냈다. 1935년 사소설적 소설에서 벗어난 단편 「굴」을 발표하며 문단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여성 자립과 사회 문제를 파고드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인 결과 1948년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했다. 유명 작가가 됐음에도 원고 청탁을 거절 안 해서 1949년부터 1951년에 걸쳐 연재 아홉 편을 진행하며 건강을 해친 끝에 1951년 6월 28일 마흔여덟 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어느 하루」는 1937년 1월 30일에 쓴 일기다.

저녁 무렵부터 가랑비가 내리다가 말다 한다. 신문을 읽으면 우울해서 견딜 수 없다. 무엇보다 시국이 불안하다. 하야시 센쥬로 대장에게 총리라는 임무가 주어졌단다. 어찌 됐든 나는 오늘도 아등바등 글을 써 내려간다.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없는 신세니.
1937년 1월 30일

문인의 생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나쓰메 소세키가 1907년 당시 아사히신문의 전속 작가가 되면서 받은 월급은 200엔. 거기에 1년에 두 번 상여금 200엔이 나왔다. 당시 기자 초임 월급이 30엔쯤, 도쿄대 교수 월급이 150엔쯤 했다. 그리고 와세다 미나미초로 이사해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소세키산방’이라 불리던 이 집은 원래 의원으로 지어진 탓에 주거 공간 외에 진료실이 있었는데, 그는 진료실에 마루를 깔고 앉은뱅이책상과 책장을 놓아 서재로 꾸몄다. 그 서재에서 『산시로』, 『그 후』, 『마음』 등을 썼다.
「문인의 생활」은 1914년 3월 22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글이다.

내가 막대한 부를 쌓았다느니 굉장한 저택을 지었다느니 땅과 집을 사고팔아 돈을 벌었다느니, 갖가지 소문이 세간에 떠도는 모양이지만 다 거짓말이다.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면 이런 더러운 집에서 살 턱이 없다. 땅과 집을 어떤 경로로 사들이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 집도 내 집이 아니다. 셋집이다. 매달 집세를 내고 있다. 세상의 소문이란 게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기존 국판본 외에 요사이 따로 작게 인쇄한 문고본이 나왔다. 양쪽을 합쳐 35판을 찍었고 부수는 초판이 2천 부, 재판부터는 거의 1천 부였다. 무엇보다 이 35판은 상권이 그렇다는 얘기고 중권과 하권은 훨씬 판수가 적다. 여하튼 얼마의 인세를 받는 탓에 내가 책을 팔아 돈을 벌어들인다고 알려진 셈이다.

애초 나는 책을 써서 파는 일을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팔게 되면 크든 작든 욕심, 그러니까 평판을 높이고 싶다거나 인기를 얻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생긴다. 그러다 보면 품성과 책의 품위가 얼마간 비루해지기 십상이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자비로 출판해 동호인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는 것이 제일 좋지만, 나는 가난뱅이이기에 불가능하다.

더 밝은 집이 좋다. 더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다. 서재 벽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고 천장은 빗물이 새서 얼룩이 졌다. 상당히 지저분하지만 천장을 올려다보는 사람은 그다지 없으니까 이대로 놔둘 생각이다. 무엇보다 다다미가 안 깔린 마루가 문제다. 널빤지 사이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겨울이면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채광 상태도 나쁘다. 여기에 앉아 읽고 쓰는 일이 괴로워도 신경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에 개의치 않으려 한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천장을 도배할 종이를 보내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특별히 내가 이런 집을 좋아해서 이렇게 어둡고 더러운 집에 사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살 뿐이다.

오락이란 것에는 별로 욕구가 없다. 당구는 물론 바둑도 장기도 아무것도 모른다.

햇빛 잘 드는 창 아래 정갈한 책상. 이것이 내 취향이리라. 한적함을 사랑한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호주머니 안에서 살아가고 싶다. 밝은 것이 좋다. 따뜻한 것이 좋다.

햇빛 쏟아지는 미닫이창 아래서 쓰면 가장 좋지만, 이 집에는 그런 장소가 없으므로 종종 양지바른 툇마루에 책상을 꺼내 놓고 머리에 햇빛을 흠뻑 받으며 펜을 든다. 너무 더우면 밀짚모자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글이 잘 써진다. 결국 밝은 곳이 제일이다.

필기도구는 처음엔 금색 G펜을 사용했다. 대여섯 해쯤 썼던가. 이후 만년필로 바꿨다. 지금 사용하는 만년필은 2대째로 ‘오노토’다. 특별히 좋아서 사용하는 것도 뭣도 아니다. 마루젠서점의 우치다 로안 군이 선물로 줘서 사용할 뿐이다. 붓으로 원고를 쓴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다.

나의 이력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
1891년 오사카부 출생. 1911년 와세다대 영문과에 입학했지만 수업료를 내지 못해 중퇴했다. 와세다미술연구회 기자, 잡지 편집기자 등을 거쳐 1923년 『문예춘추』 창간과 동시에 가십난 ‘문단 유머’를 맡아 독설로 화제를 모았다. 간토대지진 이후 오사카 플라톤사에서 일하며 시대소설을 발표하는 한편 ‘일본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키노 쇼조 집에 살며 영화판에 발을 들였다. 직접 영화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기도 했으며, 그의 작품 또한 쉰 편 가까이 영화화됐다. 이후 영화판에서 나온 뒤 『청춘행장기』, 『남국태평기』 등을 쓰며 대중작가로 자리 잡았다. 1934년 2월 24일 마흔세 살에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나의 이력」은 서른다섯 살 때 쓴 글로 보이지만 실제로 발표된 것은 마흔 살 때인 193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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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쓸 수 없다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도쿄도 출생. 1893년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교편을 잡으며 가인 마사오카 시키, 다카하마 교시 등과 함께 하이쿠 동인으로 활동했다. 1900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돼 2년간 영국에서 유학했는데, 타지에서의 가난한 생활은 그에게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남겼다. 1903년 귀국해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중 기분 전환 삼아 글을 써보라는 다카하마 교시의 권유로 1905년 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두견』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연재해 호평받았다. 이후 『도련님』, 『한눈팔기』 등 걸작을 다수 남기며 ‘국민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오랫동안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다가 1916년 12월 9일 마흔아홉 살에 생을 마감했다.「어쨌든 쓸 수 없다네」는 1905년 12월 잡지 『두견』을 주간하던 친구 다카하마 교시에게 보낸 편지다.

「해로행」 한 장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다섯 장 정도와 맞먹는 힘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야. 맞고 안 맞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내일부터 힘내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쓸 작정이지만, 쓰려고 하면 괴로워집니다. 누군가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17일 아니면 18일까지는 보내겠습니다. 자네와 인쇄소가 입을 헤 벌린 채 기다리면 미안하니까.
1905년 12월 11일 월요일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1892년 가나가와현 출생. 1910년 열여덟 살에 배 수선공으로 일하다가 크게 다친 뒤 도쿄로 올라와 공예가 밑에서 기술을 배우며 홀로 문학을 공부하고 습작했다. 몇몇 잡지 현상 공모에 입선하며 이름을 알렸고, 역사소설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1925년 『검난여난』, 1926년 『나루토비첩』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35년부터 4년간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미야모토 무사시』는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의 치열한 삶을 다룬 대하소설로 신문소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는데, 영화나 만화,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이후 고전을 재해석한 『삼국지』, 『신수호전』 등을 연재하다가 마지막 신문소설 『사본태평기』가 끝날 무렵 폐암에 걸려 1962년 9월 7일 일흔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의욕이 사그라들었다」는 1951년 2월 요미우리신문 기자에게 보낸 편지다.

소설 말일세. 아무래도 쓰지 못할 것 같아. 자네가 내게 보여준 다년에 걸친 성의며 격려며 온갖 호의를 생각하면 뭐라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네만, 이해해주지 않겠나. 도저히 글이 안 써지네. 요사이 자꾸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고 현실이 절망스럽달까, 그런 약한 마음만 싹터서 책임이 무거운 신문소설에 손을 댈 의욕이 사그라들었어.

의무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다자이 오사무는 1940년 전후로 안정된 결혼 생활 속에서 뛰어난 작품을 대거 선보였다. 그중에는 아내 쓰시마 미치코가 등장하는 「봄의 도둑」이나 「달려라 메로스」 같은 밝은 소설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1940년 『월간 문장』 1월호부터 6월호에 걸쳐 연재된 「여자의 결투」, 『중앙공론』 2월호에 발표된 「직소」를 다자이가 구술하면 그의 아내 쓰시마 미치코가 필기해서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쓰시마 미치코가 1978년 펴낸 『회상의 다자이 오사무』에 따르면 "그는 전문을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구술했다. 막힘도 없고 고쳐 말하지도 않았다."
「의무」는 1940년 4월 잡지 『문학자』에 실린 글이다.

의무 수행이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해야 한다. 왜 사는가. 어째서 글을 쓰는가. 그것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라고 지금의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다. 돈을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쾌락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요전 날에 들길을 혼자 걷다가 문득 생각했다. "사랑이란 결국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쓰겠다고 답장했다. 원고료가 탐나서도 아니었다. 동인 선배에게 아양 떨 마음도 아니었다. 쓸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부탁받으면 그때는 반드시 써야 한다는 계율 때문에 ‘쓰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줄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남에게 부탁받으면 줘야 한다는 계율과 같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앉은 자세를 바로잡자.

현재 나는 의무를 위해 살고 있다. 의무가 내 생명을 지탱해주고 있다. 한 개인의 본능으로는 죽어도 좋다. 죽든, 살든, 병들든 그다지 차이는 없다.

의무는 내게 노력을 명한다. 쉼 없이 더, 더 노력하라고 명한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서 싸운다. 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단순하다.

책상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1872년 도치기현 출생. 1890년 도쿄로 올라와 풍속소설의 일인자 오자키 고요 문하에서 단편 「참외밭」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1899년 출판사 박문관에 입사해 교정기자로 근무하며 1902년 모파상의 영향을 받은 「쥬에몬의 최후」를 써서 호평받았다. 1906년 『문장세계』 편집 주임을 맡아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한편 1907년 스승과 여제자의 관계를 다룬 「이불」을 발표했다. 「이불」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자기 고백적 방향으로 결정지으며 사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내』, 『시골 선생』으로 자연주의 문학을 자기 고백적 방향으로 결정지으며 사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내』, 『시골 선생』으로 자연주의 거장이란 칭호를 얻은 이후 1912년 회사를 그만두고 창작 활동에 전념하며 『온천 순례기』 등 기행문도 다수 남겼다. 1930년 5월 13일 쉰여덟 살에 생을 마감했다.
「책상」은 1917년 6월 출간된 수필집 『도쿄 30년』에 실린 글이다.

서재 책상에 앉아본다. 펜을 들고 원고지를 늘어놓고 드디어 쓰기 시작한다. 한 글자 두 글자 써보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재도 재미없거니와 흥도 안 난다. 도저히 회심작이 나올 성싶지 않다.

"또 못 썼어요?"
아내가 묻는다.
"안 돼, 안 돼."
"속 썩이네요."
"오늘 밤, 할 거야. 오늘 밤이야말로……."

"어슬렁대는 꼴이 어쩐지 동물원의 호랑이 같구먼."
"그러게요."

그런데 갑자기 한밤중에 흥이 솟는다. 나는 홀로 일어나 펜을 잡는다. 펜이 손과 마음과 함께 달린다. 그 기쁨! 그 강함! 또 그 즐거움! 순식간에 두 장, 세 장, 네 장, 다섯 장을 써 내려간다. 아까 괴로운 직업이라고 말한 푸념은 어느새 잊어버린다. 옛날 문하생 시절로 마음이 되돌아가 있다. 어두운 램프 아래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채 글쓰기에 몰두하던……. 문단도 없고 T 군도 없고 세간도 없다. 그저 펜과 종이와 내 마음이 함께 움직일 뿐이다.

나는 이미 나았다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사카구치 안고는 1947년부터 집필을 위해서라며 각성제를 복용했다. 게다가 1948년 6월,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하자 우울증에 빠졌다. 이를 극복하려고 장편 ‘일본 이야기(후에 『화』)’를 쓰기 시작했지만, 불규칙한 생활 탓에 수면제의 일종인 아도름까지 복용하게 되었다. 결국 1949년 2월 23일 부인이자 수필가인 가지 미치요에 의해 병원에 입원했다. 4월 19일 자진 퇴원한 후 6월 이 경험을 자세히 적은 「정신병 비망록」을 시작으로 작품을 활발히 발표하는 한편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나는 이미 나았다」는 1949년 4월 11일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글이다.

나와 창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년 도쿄도 출생. 1913년 도쿄대 영문과에 입학, 이듬해 첫 소설 「노년」을 발표했다. 1915년 훗날 대표작이 되는 「나생문」을 선보였지만 큰 이목을 끌지 못하다가 1916년 「코」가 나쓰메 소세키에게 극찬받으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1919년 마이니치신문에 전속 작가로 입사해 창작에 전념하며 10년 남짓한 작가 생활 동안 백사십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 전공인 영문학을 비롯해 프랑스· 러시아문학의 영향도 받았지만 한문학에도 조예가 깊던 그는 초기에는 설화문학에서 취한 소재를 재해석한 작품을 주로 썼다. 이후 예술지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다수 집필하며 명성을 쌓았다. 1927년 7월 24일 서른다섯 살에 집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나와 창작」은 1917년 7월 『문장세계』에 실린 글이다.

활자화된 원고를 읽으면 대체로 싫증이 난다. 언제나 글을 쓰는 방법보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이래서야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뼈에 사무쳐서, 글 쓸 때보다 평소 생활에서 사랑과 미움을 소진하고 싶어진다. 그다음 다시 보면 좋아지는 글이 있고 더욱 나빠지는 글이 있는데, 이건 그때그때 다르다.

홀리다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
1889년 이시카와현 출생. 사생아로 태어나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급사로 일하며 시인의 꿈을 키웠다. 1906년 당시 신진 작가의 등용문이던 『문장세계』 현상 공모에 입선, 본격적으로 시를 짓기 시작했다. 1913년 스물네 살에 일을 그만두고 도쿄로 올라와 문예지 『자몽』, 『탁상분수』에 서정미 가득한 시를 다수 발표했다. 1918년 자비 출판한 『사랑의 시집』으로 시단의 인정을 받은 뒤 1919년 첫 소설 「유년시대」를 써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관능미 넘치는 사소설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는데, 대표작인 『안즈코』, 『꿀의 정취』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노년을 보내다가 1962년 3월 26일 일흔세 살에 생을 마감했다.
「홀리다」는 1961년 12월 7일 니혼케이자이신문에 실린 글이다.

1955년부터 1961년 초에 걸쳐 나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글을 썼다. 매일 활자를 한가득 뱉어냈다.

한밤중에 생각한 일

모리 오가이森鴎外
1862년 시마네현 출생. 1881년 열아홉 살에 도쿄대 의학부 본과를 졸업, 육군 군의로 채용돼 근무했다. 1884년 독일로 유학 가서 위생학을 연구하는 한편 문학과 미술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공부했다. 1888년 귀국해 군의학교 교관이 된 그는 1890년 「무희」를 시작으로 「아베일족」, 『기러기』 등 일본 근대문학에 한 획을 긋는 걸작을 다수 남겼다. 또 안데르센의 『즉흥시인』, 괴테의 『파우스트』를 비롯해 외국 작품과 문학 이론을 꾸준히 번역해 문단에 소개했다. 아울러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문부성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는 등 미술 평론에서도 활약했다. 1917년 제실박물관장, 1919년 제국미술원장을 지낸 뒤 1922년 7월 9일 예순 살에 세상을 떠났다.
「한밤중에 생각한 일」은 1908년 12월 미술지 『광풍』에 실린 글이다.

아이고, 벌써 2시다. 대개 느낀 바를 쓸 수 있게끔 하는 것은 기세다. 시대의 흐름이다. 예술에서 전신 나체가 전부 금지되던 시대가 있었지만 어느새 지나갔다. 새로운 ‘자연주의’니 뭐니 해서 상당히 소란스러운데, 지금껏 문학이 에로틱한 면을 정직하게 쓰지 못하다가 요사이 조금 쓰기 시작했을 뿐이다.

아이고 맙소사! 이거, 너무 건너뛰어 미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3시가 되기 전에 자야 한다. 내일 아침 잠이 덜 깨서 관청에 나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어디, 이제 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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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신께 나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수밖에없다. 그분은 먼지에서 너희 모두를 창조하셨다. 코란』 40장 - P63

모든 철학 사조들 가운데 진화에 관한 생각이야말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진화 논의가 스콜라철학에 손발이 묶인채, 1,000년의 세월을 칠흑의 지하에서 완전히 죽어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다윈이 나타나 고대의 그리스 사상 체계에 새로운 생명의 피를 수혈했으니, 비로소묶였던 손발의 족쇄가 풀려서 오늘에 부활할 수 있었다. - P63

나는 지금까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왔던 모든 유기 생물들이 단 하나의 어떤 워시 생물에서 유래했다고 거의 확신한다. 생명의 숨결이 최초로 불어 넣어진 그 생물이러한 생명관에는 모종의 승에서 다양한 형태의 모든 생물들이 비롯됐다고.......
고함이 서려 있어우리의 행성 지구가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태양 주위를 거듭도는 동안에, 그리도 간단하기만 했던 원시 생물이긴 진화의 과정을 밟으면서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생물 종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원시 유기체가 우리 지구에서이렇게 아름답고 저렇게 놀라운 생물들로 진화할 수 있었으며 그 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1859년****** - P64

그렇다면 최초의 생명은 그 분자들에서 어떻게 비롯될 수 있었을까? 이 최초의 유기 생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와 같이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의 생물로 진화할 수있었단 말인가? 아, 그리고 그 원초의 생명이 진화하여 어느 때부터인가 인식 기능을 갖추게 됨으로써 이제는 스스로의 기원을 탐구할 수있게 됐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단 말인가? - P65

우리가 지구 생명의 본질을 알려고 노력하고 외계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것은 실은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개의 방편이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이다. - P65

지구가 생명의 발생과 서식에 있어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얼마나 놀라운 우연이며 지구인들에게 얼마나 큰 행운이냐고 감탄하는 소리를 우리는 주위에서 종종 듣게 된다.  - P66

적절하게 유지되는 온도,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물의 존재, 산소를 충분히 포함한 대기권 등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조건들이 지구에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감탄성 주장이 부분적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 P66

채소는 먼옛날에는 야생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농장의 조금은 편안한 삶에 저절로 적응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진실은 우리의 예상과 아주 다르다. 그들이 가진 특성의 거의 대부분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 P71

헤이케게, 목양견, 젖소, 옥수수 등에서 볼 수 있는 인위 도태의 핵심은 식물과 동물의 외형적 특성과 행동 형질 들이 그대로 유전된다는 점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인간은 특정 변종의 번식을 조장하고 다른 변종의 번식을 억제해 왔다. - P71

진화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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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 아프다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1906년 니가타현 출생. 1926년 도요대 인도철학이론과에 입학, 불교서와 철학서를 읽고 독학으로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등을 익혔다. 1931년 단편 「겨울바람 부는 술 창고에서」가 시마자키 도손에게 극찬받은 일을 계기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34년 친구 두 명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잠시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창작에 매진했다. 1946년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를 분석한 평론 『타락론』과 단편 「백치」로 단번에 인기 작가가 됐다. 이후 소설과 수필,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등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국세청과의 세금 소송, 경륜 부정 사건 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뇌출혈로 마흔아홉 살에 사망했다.
「위가 아프다」는 1950년 11월 잡지 『신조』에 실린 글이다.

원고를 쓰려고 마음먹은 날이 되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위경련이 일었다. 아직 밤 11시 30분이다. 댄스홀에서 밴드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매일 저녁 대여섯 시께부터 일고여덟 시께까지 술을 마시고 바로 잔다. 그리고 밤 11시 30분이나 12시쯤 깨서 글을 쓰는 습관이 있다.

책상 앞에 앉으니 위가 아파 왔다. 속이 차가워 그런가 싶어 천을 배에 친친 감고 잠시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도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참다못해 약을 사러 약국으로 달려갔다.

아침결에 신문소설 한 회분을 다 쓰고 났더니 일단 위의 통증은 가라앉았다. 그런데 실은 대폭발 뒤 화산처럼 밖으로 연기는 나지 않아도 화구 밑바닥에서 용암이 빠지직빠지직 무늬를 그리며 가스를 내뿜는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정말이지 화산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느낌이다.

시에 관해 말하지 않고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1883년 도쿄도 출생. 1897년 도쿄예술대 조각과에 입학, 문학에도 뜻이 있어 요사노 뎃칸이 창간한 잡지 『명성』에 시를 투고했다. 1906년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파리로 건너가 생활하며 프랑스문학에 심취했다. 1909년 귀국해 미술 비평에 뛰어들어 당대 미술계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한편 로댕과 관련된 책을 다수 번역했다. 1914년 첫 시집 『도정』을 자비 출판해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인정받았다. 이후 조각가로 활약하며 자연과 인간,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칠백여 편 가까이 남겼다. 특히 1941년 출간된 시집 『지에코초』는 아내 지에코를 향한 사랑을 소박한 언어로 읊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56년 4월 2일 일흔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시에 관해 말하지 않고」는 1950년에 발표된 글이다.

예전부터 시 강좌를 위해 시론을 써달라는 의뢰가 있었음에도 한 줄도 쓸 수 없는 심정이기에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편집자 한 명이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조금 질려 더욱 고사했지만, 결국 쓸 수 없는 이유라도 쓰라고 해서 할 수 없이 펜을 든다.

나는 이제껏 메이지시대 이래 일본 시의 통념을 거의 밟아 뭉개며 걸어왔다. 이른바 ‘시마자키 도손―간바라 아리아케―기타하라 하쿠슈―하기와라 사쿠타로―현대 시인’이란 계열과는 다른 길이다.

어쨌든 쓸 수 없다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도쿄도 출생. 1893년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교편을 잡으며 가인 마사오카 시키, 다카하마 교시 등과 함께 하이쿠 동인으로 활동했다. 1900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돼 2년간 영국에서 유학했는데, 타지에서의 가난한 생활은 그에게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남겼다. 1903년 귀국해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중 기분 전환 삼아 글을 써보라는 다카하마 교시의 권유로 1905년 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두견』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연재해 호평받았다. 이후 『도련님』, 『한눈팔기』 등 걸작을 다수 남기며 ‘국민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오랫동안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다가 1916년 12월 9일 마흔아홉 살에 생을 마감했다.「어쨌든 쓸 수 없다네」는 1905년 12월 잡지 『두견』을 주간하던 친구 다카하마 교시에게 보낸 편지다.

다카하마 교시에게
14일에 원고를 마감하란 분부가 있었습니다만, 14일까지는 어렵겠습니다. 17일이 일요일이니 17일 또는 18일로 합시다. 그리 서두르면 시의 신이 용납지 않아요. (이 구절은 시인 조로) 어쨌든 쓸 수 없답니다.

당시 문예평론가로 활약하던 오마치 게이게쓰(大町桂月 1868~1925)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대해 "시적 정취가 있는 반면 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비평한 것을 말한다. 이를 읽은 나쓰메 소세키는 1906년 1월 발표한 7화 작중 인물 간 대화에 게이게쓰를 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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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다자이 오사무, 유메노 규사쿠, 우메자키 하루오, 호조 다미오, 기타하라 하쿠슈, 요코미쓰 리이치, 마키노 신이치, 호리 다쓰오, 다네다 산토카, 사카구치 안고, 다카무라 고타로, 나쓰메 소세키, 요시카와 에이지, 다야마 가타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무로 사이세이, 모리 오가이, 나가이 가후, 다니자키 준이치로, 기쿠치 간, 에도가와 란포, 하야시 후미코, 나오키 산주고, 이즈미 교카, 야마모토 슈고로, 미야모토 유리코, 오구마 히데오, 이토 노에,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시다 구니오, 『반장난』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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