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쓸 수 없다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도쿄도 출생. 1893년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교편을 잡으며 가인 마사오카 시키, 다카하마 교시 등과 함께 하이쿠 동인으로 활동했다. 1900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돼 2년간 영국에서 유학했는데, 타지에서의 가난한 생활은 그에게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남겼다. 1903년 귀국해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중 기분 전환 삼아 글을 써보라는 다카하마 교시의 권유로 1905년 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두견』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연재해 호평받았다. 이후 『도련님』, 『한눈팔기』 등 걸작을 다수 남기며 ‘국민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오랫동안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다가 1916년 12월 9일 마흔아홉 살에 생을 마감했다.「어쨌든 쓸 수 없다네」는 1905년 12월 잡지 『두견』을 주간하던 친구 다카하마 교시에게 보낸 편지다.

「해로행」 한 장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다섯 장 정도와 맞먹는 힘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야. 맞고 안 맞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내일부터 힘내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쓸 작정이지만, 쓰려고 하면 괴로워집니다. 누군가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17일 아니면 18일까지는 보내겠습니다. 자네와 인쇄소가 입을 헤 벌린 채 기다리면 미안하니까.
1905년 12월 11일 월요일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1892년 가나가와현 출생. 1910년 열여덟 살에 배 수선공으로 일하다가 크게 다친 뒤 도쿄로 올라와 공예가 밑에서 기술을 배우며 홀로 문학을 공부하고 습작했다. 몇몇 잡지 현상 공모에 입선하며 이름을 알렸고, 역사소설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1925년 『검난여난』, 1926년 『나루토비첩』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35년부터 4년간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미야모토 무사시』는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의 치열한 삶을 다룬 대하소설로 신문소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는데, 영화나 만화,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이후 고전을 재해석한 『삼국지』, 『신수호전』 등을 연재하다가 마지막 신문소설 『사본태평기』가 끝날 무렵 폐암에 걸려 1962년 9월 7일 일흔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의욕이 사그라들었다」는 1951년 2월 요미우리신문 기자에게 보낸 편지다.

소설 말일세. 아무래도 쓰지 못할 것 같아. 자네가 내게 보여준 다년에 걸친 성의며 격려며 온갖 호의를 생각하면 뭐라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네만, 이해해주지 않겠나. 도저히 글이 안 써지네. 요사이 자꾸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고 현실이 절망스럽달까, 그런 약한 마음만 싹터서 책임이 무거운 신문소설에 손을 댈 의욕이 사그라들었어.

의무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다자이 오사무는 1940년 전후로 안정된 결혼 생활 속에서 뛰어난 작품을 대거 선보였다. 그중에는 아내 쓰시마 미치코가 등장하는 「봄의 도둑」이나 「달려라 메로스」 같은 밝은 소설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1940년 『월간 문장』 1월호부터 6월호에 걸쳐 연재된 「여자의 결투」, 『중앙공론』 2월호에 발표된 「직소」를 다자이가 구술하면 그의 아내 쓰시마 미치코가 필기해서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쓰시마 미치코가 1978년 펴낸 『회상의 다자이 오사무』에 따르면 "그는 전문을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구술했다. 막힘도 없고 고쳐 말하지도 않았다."
「의무」는 1940년 4월 잡지 『문학자』에 실린 글이다.

의무 수행이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해야 한다. 왜 사는가. 어째서 글을 쓰는가. 그것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라고 지금의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다. 돈을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쾌락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요전 날에 들길을 혼자 걷다가 문득 생각했다. "사랑이란 결국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쓰겠다고 답장했다. 원고료가 탐나서도 아니었다. 동인 선배에게 아양 떨 마음도 아니었다. 쓸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부탁받으면 그때는 반드시 써야 한다는 계율 때문에 ‘쓰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줄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남에게 부탁받으면 줘야 한다는 계율과 같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앉은 자세를 바로잡자.

현재 나는 의무를 위해 살고 있다. 의무가 내 생명을 지탱해주고 있다. 한 개인의 본능으로는 죽어도 좋다. 죽든, 살든, 병들든 그다지 차이는 없다.

의무는 내게 노력을 명한다. 쉼 없이 더, 더 노력하라고 명한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서 싸운다. 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단순하다.

책상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1872년 도치기현 출생. 1890년 도쿄로 올라와 풍속소설의 일인자 오자키 고요 문하에서 단편 「참외밭」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1899년 출판사 박문관에 입사해 교정기자로 근무하며 1902년 모파상의 영향을 받은 「쥬에몬의 최후」를 써서 호평받았다. 1906년 『문장세계』 편집 주임을 맡아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한편 1907년 스승과 여제자의 관계를 다룬 「이불」을 발표했다. 「이불」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자기 고백적 방향으로 결정지으며 사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내』, 『시골 선생』으로 자연주의 문학을 자기 고백적 방향으로 결정지으며 사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내』, 『시골 선생』으로 자연주의 거장이란 칭호를 얻은 이후 1912년 회사를 그만두고 창작 활동에 전념하며 『온천 순례기』 등 기행문도 다수 남겼다. 1930년 5월 13일 쉰여덟 살에 생을 마감했다.
「책상」은 1917년 6월 출간된 수필집 『도쿄 30년』에 실린 글이다.

서재 책상에 앉아본다. 펜을 들고 원고지를 늘어놓고 드디어 쓰기 시작한다. 한 글자 두 글자 써보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재도 재미없거니와 흥도 안 난다. 도저히 회심작이 나올 성싶지 않다.

"또 못 썼어요?"
아내가 묻는다.
"안 돼, 안 돼."
"속 썩이네요."
"오늘 밤, 할 거야. 오늘 밤이야말로……."

"어슬렁대는 꼴이 어쩐지 동물원의 호랑이 같구먼."
"그러게요."

그런데 갑자기 한밤중에 흥이 솟는다. 나는 홀로 일어나 펜을 잡는다. 펜이 손과 마음과 함께 달린다. 그 기쁨! 그 강함! 또 그 즐거움! 순식간에 두 장, 세 장, 네 장, 다섯 장을 써 내려간다. 아까 괴로운 직업이라고 말한 푸념은 어느새 잊어버린다. 옛날 문하생 시절로 마음이 되돌아가 있다. 어두운 램프 아래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채 글쓰기에 몰두하던……. 문단도 없고 T 군도 없고 세간도 없다. 그저 펜과 종이와 내 마음이 함께 움직일 뿐이다.

나는 이미 나았다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사카구치 안고는 1947년부터 집필을 위해서라며 각성제를 복용했다. 게다가 1948년 6월,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하자 우울증에 빠졌다. 이를 극복하려고 장편 ‘일본 이야기(후에 『화』)’를 쓰기 시작했지만, 불규칙한 생활 탓에 수면제의 일종인 아도름까지 복용하게 되었다. 결국 1949년 2월 23일 부인이자 수필가인 가지 미치요에 의해 병원에 입원했다. 4월 19일 자진 퇴원한 후 6월 이 경험을 자세히 적은 「정신병 비망록」을 시작으로 작품을 활발히 발표하는 한편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나는 이미 나았다」는 1949년 4월 11일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글이다.

나와 창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년 도쿄도 출생. 1913년 도쿄대 영문과에 입학, 이듬해 첫 소설 「노년」을 발표했다. 1915년 훗날 대표작이 되는 「나생문」을 선보였지만 큰 이목을 끌지 못하다가 1916년 「코」가 나쓰메 소세키에게 극찬받으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1919년 마이니치신문에 전속 작가로 입사해 창작에 전념하며 10년 남짓한 작가 생활 동안 백사십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 전공인 영문학을 비롯해 프랑스· 러시아문학의 영향도 받았지만 한문학에도 조예가 깊던 그는 초기에는 설화문학에서 취한 소재를 재해석한 작품을 주로 썼다. 이후 예술지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다수 집필하며 명성을 쌓았다. 1927년 7월 24일 서른다섯 살에 집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나와 창작」은 1917년 7월 『문장세계』에 실린 글이다.

활자화된 원고를 읽으면 대체로 싫증이 난다. 언제나 글을 쓰는 방법보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이래서야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뼈에 사무쳐서, 글 쓸 때보다 평소 생활에서 사랑과 미움을 소진하고 싶어진다. 그다음 다시 보면 좋아지는 글이 있고 더욱 나빠지는 글이 있는데, 이건 그때그때 다르다.

홀리다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
1889년 이시카와현 출생. 사생아로 태어나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급사로 일하며 시인의 꿈을 키웠다. 1906년 당시 신진 작가의 등용문이던 『문장세계』 현상 공모에 입선, 본격적으로 시를 짓기 시작했다. 1913년 스물네 살에 일을 그만두고 도쿄로 올라와 문예지 『자몽』, 『탁상분수』에 서정미 가득한 시를 다수 발표했다. 1918년 자비 출판한 『사랑의 시집』으로 시단의 인정을 받은 뒤 1919년 첫 소설 「유년시대」를 써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관능미 넘치는 사소설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는데, 대표작인 『안즈코』, 『꿀의 정취』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노년을 보내다가 1962년 3월 26일 일흔세 살에 생을 마감했다.
「홀리다」는 1961년 12월 7일 니혼케이자이신문에 실린 글이다.

1955년부터 1961년 초에 걸쳐 나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글을 썼다. 매일 활자를 한가득 뱉어냈다.

한밤중에 생각한 일

모리 오가이森鴎外
1862년 시마네현 출생. 1881년 열아홉 살에 도쿄대 의학부 본과를 졸업, 육군 군의로 채용돼 근무했다. 1884년 독일로 유학 가서 위생학을 연구하는 한편 문학과 미술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공부했다. 1888년 귀국해 군의학교 교관이 된 그는 1890년 「무희」를 시작으로 「아베일족」, 『기러기』 등 일본 근대문학에 한 획을 긋는 걸작을 다수 남겼다. 또 안데르센의 『즉흥시인』, 괴테의 『파우스트』를 비롯해 외국 작품과 문학 이론을 꾸준히 번역해 문단에 소개했다. 아울러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문부성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는 등 미술 평론에서도 활약했다. 1917년 제실박물관장, 1919년 제국미술원장을 지낸 뒤 1922년 7월 9일 예순 살에 세상을 떠났다.
「한밤중에 생각한 일」은 1908년 12월 미술지 『광풍』에 실린 글이다.

아이고, 벌써 2시다. 대개 느낀 바를 쓸 수 있게끔 하는 것은 기세다. 시대의 흐름이다. 예술에서 전신 나체가 전부 금지되던 시대가 있었지만 어느새 지나갔다. 새로운 ‘자연주의’니 뭐니 해서 상당히 소란스러운데, 지금껏 문학이 에로틱한 면을 정직하게 쓰지 못하다가 요사이 조금 쓰기 시작했을 뿐이다.

아이고 맙소사! 이거, 너무 건너뛰어 미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3시가 되기 전에 자야 한다. 내일 아침 잠이 덜 깨서 관청에 나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어디, 이제 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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