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가 아프다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1906년 니가타현 출생. 1926년 도요대 인도철학이론과에 입학, 불교서와 철학서를 읽고 독학으로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등을 익혔다. 1931년 단편 「겨울바람 부는 술 창고에서」가 시마자키 도손에게 극찬받은 일을 계기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34년 친구 두 명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잠시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창작에 매진했다. 1946년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를 분석한 평론 『타락론』과 단편 「백치」로 단번에 인기 작가가 됐다. 이후 소설과 수필,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등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국세청과의 세금 소송, 경륜 부정 사건 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뇌출혈로 마흔아홉 살에 사망했다. 「위가 아프다」는 1950년 11월 잡지 『신조』에 실린 글이다.
원고를 쓰려고 마음먹은 날이 되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위경련이 일었다. 아직 밤 11시 30분이다. 댄스홀에서 밴드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매일 저녁 대여섯 시께부터 일고여덟 시께까지 술을 마시고 바로 잔다. 그리고 밤 11시 30분이나 12시쯤 깨서 글을 쓰는 습관이 있다.
책상 앞에 앉으니 위가 아파 왔다. 속이 차가워 그런가 싶어 천을 배에 친친 감고 잠시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도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참다못해 약을 사러 약국으로 달려갔다.
아침결에 신문소설 한 회분을 다 쓰고 났더니 일단 위의 통증은 가라앉았다. 그런데 실은 대폭발 뒤 화산처럼 밖으로 연기는 나지 않아도 화구 밑바닥에서 용암이 빠지직빠지직 무늬를 그리며 가스를 내뿜는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정말이지 화산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느낌이다.
시에 관해 말하지 않고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1883년 도쿄도 출생. 1897년 도쿄예술대 조각과에 입학, 문학에도 뜻이 있어 요사노 뎃칸이 창간한 잡지 『명성』에 시를 투고했다. 1906년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파리로 건너가 생활하며 프랑스문학에 심취했다. 1909년 귀국해 미술 비평에 뛰어들어 당대 미술계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한편 로댕과 관련된 책을 다수 번역했다. 1914년 첫 시집 『도정』을 자비 출판해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인정받았다. 이후 조각가로 활약하며 자연과 인간,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칠백여 편 가까이 남겼다. 특히 1941년 출간된 시집 『지에코초』는 아내 지에코를 향한 사랑을 소박한 언어로 읊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56년 4월 2일 일흔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시에 관해 말하지 않고」는 1950년에 발표된 글이다.
예전부터 시 강좌를 위해 시론을 써달라는 의뢰가 있었음에도 한 줄도 쓸 수 없는 심정이기에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편집자 한 명이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조금 질려 더욱 고사했지만, 결국 쓸 수 없는 이유라도 쓰라고 해서 할 수 없이 펜을 든다.
나는 이제껏 메이지시대 이래 일본 시의 통념을 거의 밟아 뭉개며 걸어왔다. 이른바 ‘시마자키 도손―간바라 아리아케―기타하라 하쿠슈―하기와라 사쿠타로―현대 시인’이란 계열과는 다른 길이다.
어쨌든 쓸 수 없다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도쿄도 출생. 1893년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교편을 잡으며 가인 마사오카 시키, 다카하마 교시 등과 함께 하이쿠 동인으로 활동했다. 1900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돼 2년간 영국에서 유학했는데, 타지에서의 가난한 생활은 그에게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남겼다. 1903년 귀국해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중 기분 전환 삼아 글을 써보라는 다카하마 교시의 권유로 1905년 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두견』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연재해 호평받았다. 이후 『도련님』, 『한눈팔기』 등 걸작을 다수 남기며 ‘국민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오랫동안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다가 1916년 12월 9일 마흔아홉 살에 생을 마감했다.「어쨌든 쓸 수 없다네」는 1905년 12월 잡지 『두견』을 주간하던 친구 다카하마 교시에게 보낸 편지다.
다카하마 교시에게 14일에 원고를 마감하란 분부가 있었습니다만, 14일까지는 어렵겠습니다. 17일이 일요일이니 17일 또는 18일로 합시다. 그리 서두르면 시의 신이 용납지 않아요. (이 구절은 시인 조로) 어쨌든 쓸 수 없답니다.
당시 문예평론가로 활약하던 오마치 게이게쓰(大町桂月 1868~1925)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대해 "시적 정취가 있는 반면 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비평한 것을 말한다. 이를 읽은 나쓰메 소세키는 1906년 1월 발표한 7화 작중 인물 간 대화에 게이게쓰를 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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