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고조선의 강역이 랴오뚱이 아니라 평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믿는 학자들이 줄곧 있어왔다. 이들은 고려사(高麗史)』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평양의 단군릉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530년에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동현(江東縣)에 "현 서쪽 3리에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록에 주목한다. - P124

그러면 북한에서는 왜 그렇게 단군릉 개건에 열중했는가라는 물음이남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장정신(張正信, 58세)관장이 대담중에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에 대한 개건사업을 전개했다"고 한 말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즉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동명성왕,  고려의 왕건, 그런 식으로……… - P127

김일성 주석은 결국 자신의 생애 마지막 대역사였던 이 단군릉 개건사업의 완성을 3개월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고, 1994년 10월 29일에 그 유훈을 이어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단군이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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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인돌은 오덕형입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런데 그 오덕리 고인돌은 이번에 가보기 힘듭니까?"
"오덕리 고인돌요? 그건 잠깐 미역감으러 갔습니다."
"미역감으러 가다니요? 아! 알았습니다. 저수지에… - P119

"리선생, 염려 마십시오. 전라남도 승주 주암댐에는 고인돌 100개가 미역은 고사하고 그대로 수장됐답니다. 
누가 누굴 흉보겠어요. 오히려 리선생의 넉넉한  유머감각에 놀랄걸요." - P119

통역은 필요없고, 전화는 안되는 곳
평양에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저녁식사 뒤 여느 때처럼 둘러앉아 차를마시며 환담을 나누는데 권영빈 단장이 불현듯 묻고 나왔다. 바람을
"우리가 평양에 온 지 겨우 나흘밖에 안됐나? 그런데 왜 한달은 된것 같지?"
49바다 "왜? 객지 나오면 다 그런 거지"
사람"다 그렇긴? 일년에 몇번씩 외국에 나다녔어도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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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이처럼 천연의 요새이기는 했지만 그 방위의 기본이 강줄기이고 산이 아닌지라 이를 보강함이 평양성의 기본 계획이 되었음은 설명없이도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로 고구려시대부터 평양성은 내성·외성·중성 · 북성 등 겹겹이 네개의 성으로 둘러싸였다. 북성에는 군대, 내성에는 관아가 들어가 있었고, 중성 · 외성에는 민가가 자리잡았는데 그 중성의 서쪽 대문이 바로 보통문이다. 보통문은 이처럼 산과 강이 마주보는자리에 있어 주변풍광이 참으로 곱다. 그래서 일찍이 평양8경의 하나로꼽혀왔다. - P79

전란에도 살아난 신문
또한 보통문은 예부터 신문이라고 불렸다. 임진왜란 중 평양성 탈환작전 때 불화살이 문에 어지러울 정도로 날아들었으나 끝내 불에 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때부터 귀신 같은 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지세 덕이었는가, 보통문의 사주팔자였던가. 그로부터350년 뒤 한국전쟁에서 평양은 아주 심하게 폭격을 당해 전쟁이 끝났을때 시내에 온전한 건물이라고는 딱 두 채뿐이었다 - P79

"교통 위반하면 벌금을 냅니까?"
"아니요. 교육을 받습니다."
"교육? 무슨 교육을 받나요?"
"곳곳에 교통지도소가 있는데 큰판에 교통안전수칙 30여가지 적어놓은 것을 다 외워야 보내줍니다. 다 못 외우면 이튿날 또 와야 해요. 교수 선생도 그걸 다 외우려면 못 걸려도 서너 시간은 걸립니다."
- P80

천하명문, 채제공의 중건기
나는 뒤로 돌아 들보 쪽을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무슨 시판중수기(記)라도 있을까 살피니 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뜻밖에도 채제공(蔡濟恭, 1720~99)이 쓴  ‘보통문 중건기‘었다.
정조 때 가장 유능한 재상으로 이름높았던 채제공이 50세 때 평안감사가 되어 이 보통문을 고치고 낙성할 때 써붙인 현판이다. 더듬거리며 한자씩 풀어보자니 그 뜻이 참으로 크고 아름다웠다. - P82

지금 평양에서 고쳐야 할 것은 이 보통문만이 아니다. 나라 곳간이텅 비고 재정이 고갈된 것은 문의 기둥이 썩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백성들이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시달리는 것은 서까래 네 구석이 무너져내리는 형세와 무엇이 다르며, 풍속이 퇴폐해 날로 낮은 데로 흘러감은 기와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건이 허물어진 것은 혹은 기다려 고치면 되겠지만 백성의 삶이 허물어진 것은 장차 어디에 기대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 말을 여기에 기록해두어 내가 근본을 버리고 그 말엽만 힘쓴 것을 부끄러워했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

이런 글을 일러 명문이라 하는 것이리라. - P83

집 한 채 지은 것을 축하하는 가운데에서도 생활과 사상과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경륜이 바로 기문에 잘 나타나는 것이다. 청풍 한벽루(寒碧樓)에 붙인 하륜(河崙,  1347-1416)의 기문은 정자를 고친다는 것은 한 고을 수령 된 자가 하는 미미한 일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정자를 보면 오히려 고을의 정치와 도덕까지 알 수 있음을  논했고, 공주 취원루(聚返樓)에 붙인 서거정의 글은 정자란 한갓 놀고 쉬는 곳이 아니라 민생의 현장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임을 말했는데, 채제공은「보통문 중건기」에서 관과 민이 할 일을 두루 다 말하고 있다.  옛 문장가들의 뜻은 그처럼 원대했다.  - P84

"용강 선생, 나도 소장 아바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물론입네다. 아바이는 존칭입니다."

설명을 들으니 북한에는 ‘동무‘ ‘동지‘ ‘아바이‘라는 호칭이 있다. 동무는 친구나 손아랫사람의 이름이나 관직에 붙이고, 동지는 윗사람이나나이든 사람의 이름이나 직함에 붙이는 존칭이다. 과장 동무, 철수 동무는 낮춤이고 과장 동지, 철수 동지는 존칭이다. 그리고 동지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많으면 아바이가 붙는다는 것이다. 소장 아바이, 관리원 아바이, 부장 아바이... - P90

북한에서 ‘님‘이라는 어미가 붙는 것은 수령님 · 장군님 · 원수님 등 특수한 경우에 한하고, 나처럼 체제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이름이나직함 뒤에 선생을 붙인다. 기자 선생, 의사 선생, 홍준 선생 등으로 부르는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남한말의 씨(氏), 영어로 ‘미스터‘(Mr.)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꼭 ‘교수 선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P91

한반도 최초의 인간이 살던 곳
나의 첫 북한답사는 1997년 9월 23일부터 10월 4일까지 행해졌다. 그중 4일은 묘향산에 다녀왔고 나머지 7일은 내내 평양지역을 답사했다.
그럴 정도로 평양은 답사의 보고(寶庫)였다. 남한에서  어느 도시가 일주일을 머무르면서 매일 답사를 다닐 만큼 많은 유적을 갖고 있을까. 글쎄, 서울과 경주 정도일 것이다. - P97

검은모루유적의 발견은 해방 후 북한 고고학계의 최대 성과로, 한반도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었음을 확인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지금은 남한에서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충남 공주시 석장리 등 30여곳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었지만 그때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99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먼저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어 그들이 식민사관을 조장할 때 그 점을 항상 강조했던 것인데, 검은모루유적은 이를 통쾌하게 극복하면서 한국의 역사를 물경 50만년 전으로 끌어올려놓았다. 그리하여 검은모루유적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국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고, 나 또한 해마다 맡아 가르치는 한국미술사 시간에 첫날 첫번째 슬라이드로 비추는 곳이 바로 이 유적이다. 그 기념비적인 유적을 답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가슴이 설레지 않겠는가. - P99

"교수 선생, 검은모루에 가면 실망이 클 겁니다. 학생 때 가보았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연히 북조선의 유적은 형편없다고 쓰면영 야단 아닙니까." - P100

"운석 동무, 걱정 안해도 됩니다. 교수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망한 절에 뒹구는 돌을 보고도 폐사지의 아름다움이라고말하는 분 아닙니까." - P100

"이것은 그냥 ‘깨진 돌‘이고 뗀석기는 형태와 쓸모를 머릿속에 구상한 다음 내리쳐서 만든 ‘깨뜨린 돌‘입니다. 대개는 내리쳐깨기와 때려깨기로 만들었지요. 즉 행위에 목적과 의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 P106

"야! 고고학과 미술사라는 게 굉장하구나! 나는 경제만 아는 무식쟁이였구만 ‘깨진 돌‘하고 ‘깨뜨린 돌‘ 사이에 그런 철학적인 차이가있었단 말인가. 이야!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거 놀랍구나!" 
운석 동무는 검은모루를 돌아 내려가도록 ‘뗀석기에는 행위의 목적과의식이 있다‘는 말을 내내 되뇌고 있었다. - P106

일본의 큐우슈우(九州)에 약간 있을 뿐, 주로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우리나라 고유의 거석(巨石) 기념물이다.  북한에는 약 2만 기, 남한에는어림잡아 3 만기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2, 3천년 전의 유물이 5만점이나있는 셈이다. 유네스코가 이것을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든 말든 나는 세계미술사의 지평에서 한국미술을  평가할 때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첫번째 유물은 고인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2000년에 강화도·고창·화순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P108

"룡곡리의 20여기 되는 고인돌 가운데 제4호무덤에서는 사람뼈가나왔습니다. 절대연대 측정값은 4,539+-167년입니다. 그리고 바로 옆 제5호 무덤에서는  청동비파형(靑銅琵琶形) 창끝이 출토되었습니다."

북한의 고고학은 이처럼 엄청스러운 데가 있다. ‘약‘이라는 말은 차치하고, 아주 당당하게 십단위 아래까지 계산에 넣곤 한다. - P110

"우리도 얼마전까지는 기원전 12세기 정도로 보았죠. 그러나 단군릉이 조사되면서 이제는 기원전 30세기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리선생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내 전공도 아닌 분야에 섣불리대들 일도 아니었고, 설혹 이견이 있더라도 내가 지금 그 논쟁을 하러 온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인돌의 연대에 관한 남북 고고학자들의 견해차는 너무도 컸다. 학문교류가 없는만큼 그 간격이 넓고 깊어 보인다. - P111

"선생, 일없습니다. 고인돌이라는 것이 넓적한 바윗덩어리니 옥수수가리를 내려놓지 않아도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것은 고인돌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였지 하나하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조상님들덕에 농부들은 옥수숫대를 잘 말리게 되었고, 우리는 고인돌 덕에 이 용곡리 산골까지 들어와보게 되었으니 모두 문화유산의 공 아니겠습니까."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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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4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문화유산 답사기 계속 읽으시네요. 유홍준씨 글맛이 있죠. 저는 오래전에 나올때마다 보다가 어느 순간 멈춘듯해요. 그러고보니 이 책도 서울이랑 제주편은 못읽었네요. ㅎㅎ

대장정 2022-10-04 22:34   좋아요 1 | URL
일본, 중국포함 총 18권중 8,9,10,4,5 5권 안읽었더라구요. 책 나올때 바로바로 읽는다고 읽었는데 게을러서 그렇죠. 이참에 다 읽어야죠.ㅎㅎ
 

p.44
「송인」 정지상, 送人 鄭知常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둑엔 풀빛이 짙어 가는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마르려는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강물에 더해지네


정지상, 출처 네이버

서경정씨의 시조
이칭별칭 호 남호(南湖)
유형 인물
시대 고려
출생-사망 미상 ~ 1135년(인종 13)
성격 관리, 문신
출신지 서경(西京)
성별 남
관련사건 묘청의 난
저서(작품) 신설(新雪), 향연치어(鄕宴致語), 백률사(栢律寺), 서루(西樓)
대표관직(경력) 지제고(知制誥)

☆ 지제고
고려 시대에, 왕의 조서(詔書)나 교서(敎書) 따위의  
글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내지제고와 외지제고의 구분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에 지제교로 고쳤다.

p.46
김부식과 정지상은 문장으로 동시에 이름을 날린 라이벌로 서로 다투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날  정지상이 ˝절에는 염불소리 그치고  하늘은 유리처럼 맑다(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라는 글을 지었는데,  김부식이 이 글귀를 빼앗고자 했으나 정지상은 주지 않았다. 나중에 정지상은 김부식에게 주살되어 음귀(陰鬼)가 되었다.
김부식이 어느날 봄을 읊은 시를 지어 ˝버들은 천 가닥으로 푸르고 복사꽃은 만 점으로  붉구나(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라 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정지상 귀신이  김부식의 뺨을 때리며 ˝천 가닥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보았느냐? ‘버들은 가닥마다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다(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라고 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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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 허가증을 받기까지
솔직히 말해서 나의 북한답삿길이 이렇게 빨리 열릴 줄은 몰랐다. 내가 북한답사의 희망을 처음 말한 것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첫째 권을내고 어느 시사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였으니까, 1993년 6월의 일이다. 이듬해에 둘째 권을 내면서는 아예 서문에 그런 뜻을 밝혀두었다. 다만 그때는 국토박물관의 온전한 답사를 위해서 북한의 문화유산까지 다루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희망을 말했을 뿐이지 어떤 전망이나 준비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 당시 상황에서는 이런 엄청난 일이 성사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 P21

"리용객 여러분을 렬렬히 환영합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얼마나 큰 행운이고 얼마나 큰 영광인가 내 칠자인지 팔자인지에 이런 특혜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해봤다.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란 그저 해본 소리였는데 진짜로 내일 평양에들어가게 된 것이다. - P25

고음의 맑은 목소리를 가진 여승무원이 힘찬 평양말씨로 안내방송을 했다.

"JS152 승무원은 리용객 여러분을 렬렬히 환영합니다. 평양까지 비행거리는 1천 킬로미터, 비행시간은 1시간 30분을 예견합니다. 승무원의 방조(도움)가 필요하신 분은 머리 위의 금단추를 눌러주십시오."

그리고 비행기는 활주로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P27

이내 프로펠러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더니 우리 비행기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행기가 수평을 잡고 편안히 날아가자 창밖으로는 황해바다가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평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P28

여승무원의 고향 사랑
12시 비행기인지라 기내에서 점심식사가 나왔다. ‘곽밥(도시락)‘에 간단한 디저트가 곁들여져 있는 것이 여느 비행기 음식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밥이건 빵이건 기름기가 적고 반찬에는 조미료가 들어 있지 않은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윤기와 부티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게 궁기(窮氣)로 보였을 것이고 천연스러움을 찾는 사람에게는 순진무구로 비쳤을 것이다. 이런 음식의 감각은 북한에 체류하는 열이틀 동안생활문화 곳곳에서 느끼게 된 북한의 보편적인 인상이기도 했다. - P28

"북조선의 문화유산을 남한에 소개하려고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야! 이거야 정말 좋은 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정방산(正方山) 성불사(成佛寺)에 가보십시오. 성불사는 북조선에서 할아버지절이라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이 있답니다. 성불사에는 또 우물이 셋 있단 말입니다. 남자중 샘물, 여자중 샘물, 아기중 샘물입니다. 그중에서 여자중 샘물이 가장 맛있단 말입니다." - P29

"거기가 제 고향이거든요." - P30

"우리 비행기가 강하를 시작했습니다. 모두 걸상띠를  다시를매어야겠습니다. 우리는 15분 뒤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하겠습니다. 평양의 기온은 20도, 날은 개었습니다." - P30

"지금까지 여러분께서 들으신 음악은 교향악 ‘미제의 숨통을 끊어라‘였습니다." - P32

"그렇지만 교수 선생, 오통로에 맞춰야 합니다."
"오통로라니?"
"거 뭐라고 하나………… 5번에 맞추십시오."
"아, 아, 채널 5! 알았습니다."

이후 서울집에 돌아와서 나는 텔레비전을 켤 때면 KBS는 9통로, MBC는 11 통로라고 바꾸어 부르면서 "여보, 구통로 좀 켜봐요" 하고 말하는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우습고 재미있더니, 이제는 일상용어가 되어 채널이 더 낯설고 거북한 단어가 되어간다. 나는 이런식으로 우리말 생활용어를 인해 동무에게 많이 배워왔다. - P34

다만 딱 한번 호기심에 타봤는데, 벤츠가 좋긴 좋은 차였다. 그런데 그다음날 다시 버스를 타니까 그전까지  아무 불편을 못 느끼던버스 뒷자리가 왜 그렇게 딱딱하고 요동을 치는지 다시 길이 들 때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역시 벤츠 같은 차는 타려면 계속 타야지 잠깐 탈것은 못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 P36

"방향적으로 말하여, 유적유물을 학술적으로 조사하고 과학적으로해석할 수 있도록 최선, 최대로 보장하겠습니다." - P37

북측 안창복 단장의 환영인사말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해방 50년 만에 처음입니다. 신청은 좀 있었지만 허락은 처음입니다. 아마도 이 사업이 제대로 되면 사람들은 우리가 소리없이 위대한 사업을 했다고 평가해줄 겁니다. 중앙일보사 통일문화연구소는 이 사업에 아주 좋은 종자(種子)를  제시하셨습니다. 문화유산은 민족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계기를마련해줄 것입니다. 방향적으로 말해서, 교수 선생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민족통일에 도움이 되는 글을 써주십시오. 호상화해가 시작되는 단초가 되는 글을 남겨주십시오. 사실 통일이 별거겠습니까. 이렇게 만나다보면 통일이 자연 되는 것이죠. 교수 선생도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 P38

"방향적으로 말해서, 나는 있는 대로 보고 느낀 대로 쓸 것입니다." - P38

평양의 상징은 대동강 모란봉평양의 첫 답사는 대동문(大同門)에서 시작하여 평양성 유적지를 두루 둘러보는 것으로 잡았다. 그것은 나의 강력한 요구이기도 했다.
역사도시에는 반드시 그 도시를 상징하는 유적이 있는 법이다. 파르테논신전을 보아야 아테네에 온 것 같고 에펠탑을 보기 전에는 빠리에 온것 같지 않음이 그것이다. 그렇게 따져볼 때 평양의 상징은 당연히 모란봉의 평양성유적에 있다. - P40

공주의 공산성(公山城)보다도 공산성에서 바라보는 금강이 아름답고, 부여의 부소산성(扶蘇山城)보다도  낙화암에서 내려다보는 백마강이 애잔하고 아련한  역사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듯 평양의 심장은 대동강이다. 또 평양사람들의 삶과 서정은 남김없이 대동강에 실려왔다. - P41

"용강 선생, 평양이 낳은 상징적인 인물이 누구일까요?"
"상징적 인물? 그거야 ‘위대한 수령님‘ 아닙니까. 만경대 고향집 (김일성 생가)에도 가보실랍니까?" - P42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그 평양의 예술인들이 보여준 예술세계는 어떤식으로든 모두 대동강을 노래하고 그린 것이다. 정지상의 대동강 이별노래「벗을 보내며(送友人)」, 조광진의 부벽루 현판글씨, 뿐만 아니라 김관호가 특선한 해질녘」이라는 작품은 대동강변에서 미역감는 여인들을 그린 것이었고, 김동인의 배따라기」는 대동강의 뱃노래다. 그러니 평양하면 더욱 대동강이며, 평양의 첫 답사는 당연히 거기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P43

버드나무 가로수의 강변 산책로는 정말 운치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래서 평양을 버들류(柳)자를 써서 ‘유경(柳京)‘이라고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P44

 그러고는 곧 정지상의 유명한 시 벗을 보내며의 ‘우헐장제초색다‘가 생각났다.

비갠 긴 강둑에는 풀빛 더욱 푸르른데
남포로 님 보내는 노랫가락 구슬퍼라.
대동강물은 어느 때나 마를 것인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만 푸른 물결에 더하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 P44

김부식과 정지상은 문장으로 동시에 이름을 날린 라이벌로 서로 다투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날  정지상이 "절에는 염불소리 그치고 하늘은 유리처럼 맑다(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라는 글을 지었는데,  김부식이 이 글귀를 빼앗고자 했으나 정지상은 주지 않았다. 나중에 정지상은 김부식에게 주살되어 음귀(陰鬼)가 되었다.
김부식이 어느날 봄을 읊은 시를 지어 "버들은 천 가닥으로 푸르고 복사꽃은 만 점으로 붉구나(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라 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정지상 귀신이  김부식의 뺨을 때리며 "천 가닥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보았느냐? ‘버들은 가닥마다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붉다(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라고 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 P46

대동문 · 대동문 · 대동문.
대동강 강둑을 걸은 지 5분도 채 안되어 대동문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곁에 연광정(鍊光亭)이 붙어 있었다.  나는 이 두 건물이 이렇게 가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하기사 평양 내성(內城)의 동쪽 대문이  대동문이고 동쪽 장대(將臺)가 연광정이니 붙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붙어 있을 것이라 추론하는 것과 실제로 붙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은체감의 강도가 완전히 달랐다.
대동강변과 모란봉 일대의 많은 유적 가운데 대(臺)는 을밀대, 누(樓)는 부벽루(浮碧樓)가 압권이라면  정(亭)은 연광정, 문(門)은 대동문을 꼽을 것이다. 더욱이 연광정은 관서8경의 하나로 이름을 얻었고, 대동문은평양성의 정문이니 그 명성이 평양의 울타리를 훨씬 넘는다. - P47

부벽루 회상 둘
연광정 다음 답사처는 당연히 강변 위쪽에 있는 부벽루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안내단장 하는 말이 부벽루는 지금 일반인 출입이 안된다는것이다.
나는 순간 "말도 안됩니다!"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용강 선생은 나의뜻밖의 큰 소리에 다소 당황한 빛을 보이며 부벽루가 있는 영명사(明寺)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다음 요양소가 세워졌기 때문이라며 극구 사정을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내가 다소 누그러지는 듯하자 은근히 묻는다. - P57

대동강변 모란봉청류벽(淸流壁)에 높직이 올라앉은  부벽루는 고구려때 절 영명사의 부속건물로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리고, 다시 누대가 중건된 것은 1614년, 광해군 6년이라고 했으니 건축적으로 역사가 오래된 것이거나 크게 의미를 둘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부벽루에서 보고 싶은 것이 두개 있었다. - P58

눌인 조광진의 행위예술
하나는 그 현판글씨다. 평양사람 눌인 조광진의 명작이자 대표작이며가장 큰 대작이다. 조광진은 말이 어눌하여 눌인이라고 했는데, 당대의이름난 명필로 특히 힘차고 기발한 구성의 예서를 잘 써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압록강 이동(東)에 이만한  명필이 없다"며그의 글씨에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특히 그는 큰 글씨를 잘 써서부벽루 현판글씨도 한자 크기가 김장김치독하다. - P59

평양성을 끼고 흐르는 강물,
아! 넓기도 하여라.
강 건너 멀리 아득한 벌판 동쪽에는
점 찍은 듯 까맣게 산, 산, 산……… - P64

이 김황원의 시구는 지금 부벽루가 아닌 연광정에 그 원문과 번역문이주련으로 걸려 있어 답사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었다.

긴 성벽 한쪽 면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는 띄엄띄엄 산들일세.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 P65

모란봉공원 소묘
떠오르부벽루에 갈 수 없는 나의 아쉬움을 달래려는지 안내단장은 내 어깨를잡으며 길을 이끈다.
"교수 선생, 이거 좀 서운하긴 하겠지만 이제 을밀대 올라가보면부벽루도 보이고 부벽루 아래 릉라도(綾羅島)와 김황원이 말한 점점점도 더 멀리 보입니다. 기운 내기요!" - P66

견고한 고구려 성문, 칠성문
또 어느만큼 오르니 왼쪽으로 자그마한 문루(門樓)가  우리를 맞이한다. 칠성문(七星門)이란다.  칠성이라면 북두칠성에서 유래한 것일 테니북문이 틀림없는데, 북문 중에서도 평양 내성의 북문이다.
고구려 때 쌓은 평양성은 자그마치 네겹으로 둘려 있어 내성 · 외성(外城)·중성(中城)·북성(北城)으로 되어  있다. - P67

배따라기」의 김동인이라는 작가상
「배따라기」의 마지막 부분에 형이 아우의 배따라기 소리를 듣고 모란봉을 뛰어다니며 찾아보는 얘기가 나온다. 을밀대 쪽인 것 같아 그쪽으로 달려갔다가 또 기자묘 쪽으로 달려가보곤 한다. 그렇다면 그때 형이 서성이던 곳이 바로 여기쯤 될 터다. 즉 나는 지금 소설 「배따라기」의무대에 서 있는 것이다. - P70

어렸을 때 동인은 울음을 한번 터뜨리면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고한다. 또 울 때는 발버둥을 치는 까닭에 가족들은 혹시나 어린것의 발꿈치에 가시라도 박히면 어쩌나 하여 비단요를 깔아놓아주어 그 위에 앉아 발버둥치며 울게 하였다고 한다. (・・・)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그의 오만하다는 성미가 무엇에서부터 비롯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것이다. - P71

알다시피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는  도덕과 계몽을 내세웠고 김동인이 얘기한 것은 패륜과 불륜이었다. 그런데 도덕을 얘기한춘원은 결과적으로 도덕적 패륜에 빠졌고 김동인은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있는 정신으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춘원이 말한 것은 계몽이라기보다 관념이었고, 김동인이 얘기한 것은 패륜이 아니라 현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 P71

을밀대 성가퀴에 기대서서
칠성문에서 을밀대까지는 길이 곧게 뻗어 있다. 군사적으로는 망루지만 평시에는 정자로 쓰였단다. 6세기 중엽, 고구려 평양성을 쌓을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아들인 을밀장군이 쌓은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고 들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 을밀선녀가 이곳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자주 내려와 놀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과 웃미르터, 즉 웃밀이언덕이라는 이름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 P73

을밀대 정자
  고구려 때 쌓은 을밀대 축대는 평양성의 견고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그 정자는 평양8경의 하나로, 사방으로 그림 같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해서 사정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 P73

대동강 모란봉 사방의 아련한 풍광들이 이렇게 다 여기로 모여든다.
아, 알겠다! 그래서 을밀대의 옛 이름이 승경(勝景)을  모았다는 뜻으로 취승대(聚勝臺)라고도 했고,  사방이 탁 트였다고 해서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한  것이구나. - P74

이 그림의 사진을 기자는 갖고 있지만 벌거벗은 여인을 그린 것인고로 게재치 못함을 양해 바람. - P76

날이 어두워지고 황혼에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에도 그들의 모습은 내눈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것은 꿈에나 그리던 나의 소망이 그렇게나타난 것인가, 아니면 정녕 온몸으로 사무치게 그리워하였던 대동강이남녘에서 온 반가운 객(客)에게 보내는 뜨거운 환영(歡迎)의  환영(幻影)이었는가!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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