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이 이처럼 천연의 요새이기는 했지만 그 방위의 기본이 강줄기이고 산이 아닌지라 이를 보강함이 평양성의 기본 계획이 되었음은 설명없이도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로 고구려시대부터 평양성은 내성·외성·중성 · 북성 등 겹겹이 네개의 성으로 둘러싸였다. 북성에는 군대, 내성에는 관아가 들어가 있었고, 중성 · 외성에는 민가가 자리잡았는데 그 중성의 서쪽 대문이 바로 보통문이다. 보통문은 이처럼 산과 강이 마주보는자리에 있어 주변풍광이 참으로 곱다. 그래서 일찍이 평양8경의 하나로꼽혀왔다. - P79

전란에도 살아난 신문
또한 보통문은 예부터 신문이라고 불렸다. 임진왜란 중 평양성 탈환작전 때 불화살이 문에 어지러울 정도로 날아들었으나 끝내 불에 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때부터 귀신 같은 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지세 덕이었는가, 보통문의 사주팔자였던가. 그로부터350년 뒤 한국전쟁에서 평양은 아주 심하게 폭격을 당해 전쟁이 끝났을때 시내에 온전한 건물이라고는 딱 두 채뿐이었다 - P79

"교통 위반하면 벌금을 냅니까?"
"아니요. 교육을 받습니다."
"교육? 무슨 교육을 받나요?"
"곳곳에 교통지도소가 있는데 큰판에 교통안전수칙 30여가지 적어놓은 것을 다 외워야 보내줍니다. 다 못 외우면 이튿날 또 와야 해요. 교수 선생도 그걸 다 외우려면 못 걸려도 서너 시간은 걸립니다."
- P80

천하명문, 채제공의 중건기
나는 뒤로 돌아 들보 쪽을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무슨 시판중수기(記)라도 있을까 살피니 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뜻밖에도 채제공(蔡濟恭, 1720~99)이 쓴  ‘보통문 중건기‘었다.
정조 때 가장 유능한 재상으로 이름높았던 채제공이 50세 때 평안감사가 되어 이 보통문을 고치고 낙성할 때 써붙인 현판이다. 더듬거리며 한자씩 풀어보자니 그 뜻이 참으로 크고 아름다웠다. - P82

지금 평양에서 고쳐야 할 것은 이 보통문만이 아니다. 나라 곳간이텅 비고 재정이 고갈된 것은 문의 기둥이 썩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백성들이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시달리는 것은 서까래 네 구석이 무너져내리는 형세와 무엇이 다르며, 풍속이 퇴폐해 날로 낮은 데로 흘러감은 기와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건이 허물어진 것은 혹은 기다려 고치면 되겠지만 백성의 삶이 허물어진 것은 장차 어디에 기대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 말을 여기에 기록해두어 내가 근본을 버리고 그 말엽만 힘쓴 것을 부끄러워했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

이런 글을 일러 명문이라 하는 것이리라. - P83

집 한 채 지은 것을 축하하는 가운데에서도 생활과 사상과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경륜이 바로 기문에 잘 나타나는 것이다. 청풍 한벽루(寒碧樓)에 붙인 하륜(河崙,  1347-1416)의 기문은 정자를 고친다는 것은 한 고을 수령 된 자가 하는 미미한 일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정자를 보면 오히려 고을의 정치와 도덕까지 알 수 있음을  논했고, 공주 취원루(聚返樓)에 붙인 서거정의 글은 정자란 한갓 놀고 쉬는 곳이 아니라 민생의 현장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임을 말했는데, 채제공은「보통문 중건기」에서 관과 민이 할 일을 두루 다 말하고 있다.  옛 문장가들의 뜻은 그처럼 원대했다.  - P84

"용강 선생, 나도 소장 아바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물론입네다. 아바이는 존칭입니다."

설명을 들으니 북한에는 ‘동무‘ ‘동지‘ ‘아바이‘라는 호칭이 있다. 동무는 친구나 손아랫사람의 이름이나 관직에 붙이고, 동지는 윗사람이나나이든 사람의 이름이나 직함에 붙이는 존칭이다. 과장 동무, 철수 동무는 낮춤이고 과장 동지, 철수 동지는 존칭이다. 그리고 동지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많으면 아바이가 붙는다는 것이다. 소장 아바이, 관리원 아바이, 부장 아바이... - P90

북한에서 ‘님‘이라는 어미가 붙는 것은 수령님 · 장군님 · 원수님 등 특수한 경우에 한하고, 나처럼 체제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이름이나직함 뒤에 선생을 붙인다. 기자 선생, 의사 선생, 홍준 선생 등으로 부르는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남한말의 씨(氏), 영어로 ‘미스터‘(Mr.)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꼭 ‘교수 선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P91

한반도 최초의 인간이 살던 곳
나의 첫 북한답사는 1997년 9월 23일부터 10월 4일까지 행해졌다. 그중 4일은 묘향산에 다녀왔고 나머지 7일은 내내 평양지역을 답사했다.
그럴 정도로 평양은 답사의 보고(寶庫)였다. 남한에서  어느 도시가 일주일을 머무르면서 매일 답사를 다닐 만큼 많은 유적을 갖고 있을까. 글쎄, 서울과 경주 정도일 것이다. - P97

검은모루유적의 발견은 해방 후 북한 고고학계의 최대 성과로, 한반도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었음을 확인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지금은 남한에서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충남 공주시 석장리 등 30여곳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었지만 그때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99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먼저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어 그들이 식민사관을 조장할 때 그 점을 항상 강조했던 것인데, 검은모루유적은 이를 통쾌하게 극복하면서 한국의 역사를 물경 50만년 전으로 끌어올려놓았다. 그리하여 검은모루유적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국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고, 나 또한 해마다 맡아 가르치는 한국미술사 시간에 첫날 첫번째 슬라이드로 비추는 곳이 바로 이 유적이다. 그 기념비적인 유적을 답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가슴이 설레지 않겠는가. - P99

"교수 선생, 검은모루에 가면 실망이 클 겁니다. 학생 때 가보았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연히 북조선의 유적은 형편없다고 쓰면영 야단 아닙니까." - P100

"운석 동무, 걱정 안해도 됩니다. 교수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망한 절에 뒹구는 돌을 보고도 폐사지의 아름다움이라고말하는 분 아닙니까." - P100

"이것은 그냥 ‘깨진 돌‘이고 뗀석기는 형태와 쓸모를 머릿속에 구상한 다음 내리쳐서 만든 ‘깨뜨린 돌‘입니다. 대개는 내리쳐깨기와 때려깨기로 만들었지요. 즉 행위에 목적과 의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 P106

"야! 고고학과 미술사라는 게 굉장하구나! 나는 경제만 아는 무식쟁이였구만 ‘깨진 돌‘하고 ‘깨뜨린 돌‘ 사이에 그런 철학적인 차이가있었단 말인가. 이야!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거 놀랍구나!" 
운석 동무는 검은모루를 돌아 내려가도록 ‘뗀석기에는 행위의 목적과의식이 있다‘는 말을 내내 되뇌고 있었다. - P106

일본의 큐우슈우(九州)에 약간 있을 뿐, 주로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우리나라 고유의 거석(巨石) 기념물이다.  북한에는 약 2만 기, 남한에는어림잡아 3 만기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2, 3천년 전의 유물이 5만점이나있는 셈이다. 유네스코가 이것을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든 말든 나는 세계미술사의 지평에서 한국미술을  평가할 때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첫번째 유물은 고인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2000년에 강화도·고창·화순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P108

"룡곡리의 20여기 되는 고인돌 가운데 제4호무덤에서는 사람뼈가나왔습니다. 절대연대 측정값은 4,539+-167년입니다. 그리고 바로 옆 제5호 무덤에서는  청동비파형(靑銅琵琶形) 창끝이 출토되었습니다."

북한의 고고학은 이처럼 엄청스러운 데가 있다. ‘약‘이라는 말은 차치하고, 아주 당당하게 십단위 아래까지 계산에 넣곤 한다. - P110

"우리도 얼마전까지는 기원전 12세기 정도로 보았죠. 그러나 단군릉이 조사되면서 이제는 기원전 30세기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리선생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내 전공도 아닌 분야에 섣불리대들 일도 아니었고, 설혹 이견이 있더라도 내가 지금 그 논쟁을 하러 온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인돌의 연대에 관한 남북 고고학자들의 견해차는 너무도 컸다. 학문교류가 없는만큼 그 간격이 넓고 깊어 보인다. - P111

"선생, 일없습니다. 고인돌이라는 것이 넓적한 바윗덩어리니 옥수수가리를 내려놓지 않아도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것은 고인돌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였지 하나하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조상님들덕에 농부들은 옥수숫대를 잘 말리게 되었고, 우리는 고인돌 덕에 이 용곡리 산골까지 들어와보게 되었으니 모두 문화유산의 공 아니겠습니까."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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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4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문화유산 답사기 계속 읽으시네요. 유홍준씨 글맛이 있죠. 저는 오래전에 나올때마다 보다가 어느 순간 멈춘듯해요. 그러고보니 이 책도 서울이랑 제주편은 못읽었네요. ㅎㅎ

대장정 2022-10-04 22:34   좋아요 1 | URL
일본, 중국포함 총 18권중 8,9,10,4,5 5권 안읽었더라구요. 책 나올때 바로바로 읽는다고 읽었는데 게을러서 그렇죠. 이참에 다 읽어야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