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2,000년 전 이 땅에 온 허황옥은 혈연과 불연, 그리고 교류의 인연을 맺어준 메씬저이자 교류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와함께 있다. 문명은 이러한 메씬저와 교류인들에 의해 알려지며 교류된다. - P84

지구상의 어디든, 고대국가의 건국 과정은 거의 신화로 윤색되어 전해오고 있다. 신화의 주인공은 예외 없이 건국자이며, 신화의 구성은대체로 건국의 기틀이 마련된 후에 완성되는데, 그때까지를 ‘신화시대‘라고 한다. 따라서 건국신화의 내용은 건국과정을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건국신화는 오래 전승되는 ‘왜곡 없는 윤색‘이니, ‘강요하지 않는 신앙‘이니 하는 평을 받는다. - P86

우선 고구려건국신화는 다양한 신화소를 갈무리하고 있다. 천강소(天降素)인 하늘의 신 (해모수)과 물의 신(하백)의 딸의 결합은 천지조화를 말하며 여기에 난생(卵生素)가  얹히는데,원래 천강은 북방유목민들의 신앙이고 난생은 남방농경민들의 신앙이나, 그것이 주몽신화에서는 하나로 어우러진다. 게다가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는 기적(奇蹟素)도 곁든다.  한마디로, 하늘의 도움과 신의 보우를 받는 천조신우(天助神佑)의 신화소가 대단히  돋보이는 복합화다. 이에 비해 로마의  건국신화에는 신화소가 빈약하다. 씰비아가 동굴에서 마르스 신을 만나 쌍둥이 형제를 낳고, 그 아이들이 늑대의젖을 먹고 자라난 것 말고는 별다른 신화소가 없다. - P92

고구려의 옛 땅 옌볜(延邊)은 필자가 나서  자란 고장이다. 거기서 고구려의 떳떳한 후예로 자부하면서 겨레의 역사를 배웠고 겨레의 얼과 넋을 키웠다. - P108

이렇게 고구려는 필자뿐만 아니라, 우리겨레 모두의 가슴속에 마냥 살아 숨 쉬고 있는 실체다. 중국은 이러한 실체를 무시한 채 관변의 힘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어마어마한 괴물을 가설해놓고 여러 가지 강변과 요설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끌어들이면서 고구려의 정체성을 냉큼 지워버리려고 한다. - P112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강변과 억지들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고구려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 정체성이란 고구려의 종족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닌 자생의 예맥족계라는 것,
고구려는 조공이나 책봉에 얽매인 ‘중원 왕조의 지방정권이 아니라중국 왕조사에는 전무후무하게 700년 이상 장수한 자주독립국가라는것,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하고 발해와 고려로 이어지는, 한민족 역사의 정통국가라는 것, 고구려는 ‘중화문명‘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인선진문명을 가진 나라라는 것 등이다. 고구려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다. - P115

역사는 누가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거나 바꾼다고 해서 바꿔지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사실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토주권‘이 ‘역사주권과 다르다는 것은 역사학의 상식이다. 현실적으로 옛 고구려 땅을 지배한다고 해서 그 역사까지 마구 지배할 수는없는 것이다. - P115

역사에서 보면, 한 나라의 생존은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 즉 그 국제성에 크게 의존한다. 특히 역사의 격변기에는 그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성은 국가의 권력행위에서 나타난다. 국제관계에서 권력행위란 다른 나라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과다른 나라로부터의 영향을 거부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행위를 말한다. - P117

우리는 슬기로운 선조들의 창의성과 노력에 의해 인류 모두에게 보편주의적 가치를 선사할 수 있는 세계적 문화유산을 수두룩하게 가지고 있다. 그중 고구려 문화유산이 가장 뛰어나거니와, 그 가운데서도 고분벽화는 가위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해명에서 벽화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기록은 기록자에 의해 실상이 가감될 수있지만, 벽화만은 그대로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어느 학자는 벽화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민족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하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우리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그러한 민족 중의 하나다. - P127

이러한 교류상은 멀리 서역과의 교류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벽화에서 보다시피 고구려인들은 서역인들과 같은 유형, 즉 카프탄형 (kaftan, 앞 여밈형, 전개형前開型)의 복식을 착용하고 있다. 이 형은고대 아시아 유목기마민족의 복식에서 시원하여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포함한 서역 일원에서 널리 유행하다가 마침내 범아시아적인 전통복식으로 정착되었다. - P128

문화에서 유형(類型, type)은 공통되는 문화형식을  말하는데, 그것은 주로 전파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양식(樣式, style)은드러난 문화의 가변적인  표현형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시대나 환경에 따라 변할수 있다.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복식과 서역복식을 양식적 측면에서 비교 · 검토해보면, 다 같이 바지와 저고리를 착용하고, 깃이나 섶, 도련, 소매 끝에 다른 색의  천으로 단(연緣)을 두르는 가연법(加緣法)을 취하며,  고깔형의 모자인 변형모(弁形帽)와 조우관(鳥羽冠) 같은 둥근 모자를 쓰는 등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 P129

그리고 벽화에 나타나는 이색적인 서역인상은 당시 서역과의 인적교류를 말해준다. 안악 3호분의 수박(手搏, 손잡고 겨루기) 그림과 각저총(角抵塚)의 씨름 그림에서 고구려인과 겨루는 상대는 큰 눈과 높은매부리코를 지닌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서역인임이 틀림없다. 그림속의 서역인이 우리가 흔히 절에서 보는 수호 담당의 사천왕이나 금강역사 등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상징적 존재와는 달리, 평범한 생활속에서 겨루기를 즐기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은 서역인이 고구려땅에 와서 함께 살면서 서로의 문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같은 시기의 북중국 벽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현상으로서, 고구려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서역과 직접 교류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 P130

끝으로, 고구려 벽화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몇 가지 무늬도 알고보면 서역에서 들어온 것이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연꽃무늬인데, 연화총(蓮花塚)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에서는 벽화뿐만 아니라 건축장식에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 P132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대중국 교류는 인접한 한 나라와의 유무상통이었을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교류상을 갖췄기에 고구려의 당당한 국제성과 고구려 문화유산의 보편주의적 가치가 비로소공인되는 것이다. - P138

고구려는 명실 공히 대제국답게 세계를 향해 가슴을 열고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기원과 계통을달리하는 당대의 다원적인 가용문화(文化)를 적극 수용한  후 그것을 ‘고구려문화‘라는 용광로 속에 용해시켜 특유의 선진문화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완숙시켜 신라나 백제, 심지어 일본에까지 넘겨줌으로써 문명전달의 교두보 역할도 수행했다. - P127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우물이나 사진관, 식당 등에 ‘고구려‘나 ‘발해‘란 이름이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땅이아니었는데도 ‘고구려‘란 이름이 지금까지 그토록 쓰이고 있는 것은현지인들의 말을 빌리면 고구려와 발해는 ‘그것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란 뜻이다. 발해의 정체성을 압축한 말이다. - P141

일찍이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朴濟家,  1750~1805)는 "우리나라 선비들이 신라 주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틀어막아버리니 ・・・・・・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 하고 개탄한 바 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거니와 그 무지와무시가 마침내 천여 년을 넘어선 오늘에 와서 그 참역사가 송두리째말소될 위기를 자초하고야 말았으니, 참으로 비탄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 P142

이것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불완전성이 낳은 후과이기도 하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는 일정한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또 하나의민족국가인 북방의 발해까지 아우르는 완전한 통일로 이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국가 분립시대를 연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이른바일통삼한(一統三韓)‘의 내재적 한계성이며, 우리 겨레가  두고두고 반추해야 할 뼈저린 역사적 교훈이다. 그것이 아니었던들, 발해는우리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나지 않았을 것이며, 발해의 기나긴 수난에 허무한 빌미도 제공되지 않았을 것이다. - P142

우리의 해동성국 발해는 오늘날까지도 그 수난의 역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치욕의 역사를 더 이상 연장시킬 수는 없다. 이젠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귀감을 얻어 발해사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오롯하게 밝혀냄으로써 왜곡과 변조를 막아내야 한다. 우리에게는 흙탕을 헤집고 솟아 흐르는 샘물처럼 수난을 극복하는 슬기와 용기가 있다. - P146

우리의 역사 정통을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출구는 오직 하나,
지켜내는 일뿐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우리의 민족사 정통에 뿌리박은 발해의 정체성을 명백히 가려내는 일이다. 그 정체성이란한마디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민족의정통 주권국가라는 것이다. - P148

총체적으로 볼 때, 발해의 종족은 고조선과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예맥·부여 계통의 고구려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거론되는말갈인이란 어떤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쑹화강(松花江)유역의 속말(粟末) 말갈이니, 백두산 지역의 백산(白山) 말갈이니 하는  것과 같이 지역에 따라 주민 일반을 가리키는 중국 측의 비칭(稱)인 것이다. 쑨진지 같은 중국 학자도 말같은 어떤 민족이나 종족도 아닌 예맥이나 숙신(肅), 고아시아의 3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일부 부락군이나 부락연맹 같은 것이라고 하여 말갈의 종족성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이 말하는 것처럼 발해는 말갈인들이 세운 지방정권이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고구려의 당당한 계승국인 것이다. - P151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발해인들의 생활문화다. 인간집단의 생활문화는 장시간의 답습과 축적 등 전승을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법이다. 전승 없이 어느 순간에 급조되지는 않는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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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가락국수로왕(首露王)의 배필로 이 땅에 온 현숙한 외방여인 허황옥(許黃玉,  허왕후)은 지금도 우리 속에 살아있다. 2002년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는 36억 아시아인의 하나 됨을 상징하여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이 재현되었다. 해마다 치러지는 김해의 수로제에서 왕은 왕후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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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0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은지 한참 되어서 기억도 안나는데 앞으로 대장정님 덕분에 다시 떠올릴 수 있겠네요. ^^

대장정 2022-10-20 18:52   좋아요 2 | URL
사놓고 안 읽었던 책들을 읽고 있네요.ㅎㅎ^^~
 

우리와 남들을 이어주는 유대치고 벼만큼 끈끈하고 오래된 것은 없다. 그것은 아마 벼야말로 ‘벼문화권이란 하나의 유대로 묶여 있는사람들 모두의 생명원으로서 수천 년 동안 서로 간의 문화적 공유성과 상관성을 줄곧 유지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유대는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 P57

그뿐이랴. 벼는 생태적으로 환경을 보전하는 기능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홍수가 지는 여름철은 벼농사가 한창인 때라서 논은 홍수조절기능을 하는 거대한 댐과 같다. 보통 논둑 높이를 27cm로 치면 우리나라전체 논(1,345,000ha)에 가둘 수 있는 물은 춘천댐 저수량의 24배에 맞먹는 약 36억 톤이나 된다고 한다. 다목적댐 건설비용으로 환산하면 무려 15조 원이나 공얻는 셈이라고 하니, 실로 크나큰 혜택이아닐 수 없다. 그 밖에 논은 비탈진 밭에서 씻겨 내리는 흙을 받아서보존하기도 하고, 물이 논으로 들어와 작물생산에 이용되는 동안 정화되어 수질이 좋아지며, 벼가 논에서 자라는 동안 광합성 작용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함으로써 대기를 정화하는 역할도 해내 환경이 보전된다. - P60

벼농사의 긴 역사가 보여주듯이, 친화성과 순화력은 문명의 산생과성장을 결과하며, 문명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조화시켜주는 중요한요인이다. 그것을 이탈하거나 상실했을 때, 문명은 생존 근거를 잃게되어 결국 도태되고 만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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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야마 시치리, 가와이 간지

히가시노 게이고식 추리소설이 가끔 식상해지거나 지겨워질 때 외도했던 책

좋다.

나카야마 시치리. 책을 이렇게나 많이 썼을줄 몰랐다. 제목에 교향곡 작곡가가 많네
다 읽어봐야겠다.

아직 5권밖에 못 읽었다. 공짜 e북으로

가와이 간지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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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우리는 심심찮게 민속축제 마당에서 청사자와 황사자의 탈을쓰고 두 패로 나뉘어 굿거리장단에 맞춰 꼬리를 휘저으며 덩실덩실춤을 추는 흥겹고 익살스러운 장면을 목격한다. 탈을 쓰고 추는 춤이라고는 하지만, 사자가 없는 이 땅에서 과연 어떻게 사자춤이 생겨났을까. 그것도 천몇백 년을 내려오면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우리의 한민속놀이로 줄곧 이어져왔으니 말이다. 그 해답은 서역(西域)이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대면에서 찾게 된다. - P220

서역이란 원래 중국인들이 막연하게 중국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말로서, 우리를 포함해 한자문명권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줄곧사용되어왔다. - P221

이 말은 기원전 60년에 전한(前漢)이 숙적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타림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한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는 주로 오늘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영내의 수십 개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이것이 좁은 의미의 서역이다.  - P221

그러나 한대 이후 중국의 대외 교섭과 교류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서역의 포괄범위가 서쪽으로 더 넓어져서 7세기 당대에 이르러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뿐만 아니라, 멀리 페르시아(이란)와 대식(大食, 아랍)까지를  망라하게 되었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근세까지의 개념이다.  - P221

한국에서 서역이란 용어는 『고려사』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통일신라가 상대한 서역은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지역이 광대하고 민족이나 문화도 다양하여 교류의 폭도 그만큼 넓었다 - P221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인들이 서역문물에 대해 갖는 호기심은대단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귀족 사대부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서역에서 들어온 호화품들을 장만하고 남용하는 바람에 무분별한 사치풍조까지 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지위고하에 따라 옷[色服], 탈것(車騎], 그릇(器用], 집(屋舍] 등에서서역문물을 사용할 데 대한 세칙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흥덕왕(興)은 834년에 사치를 금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그 서문에서 일부 호화를 일삼는 사람들이 외래품만을선호하고 국산품을 혐오하는 방자한 작태를 힐책하면서 이 사용금지세칙을 위반하는 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 P222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괘릉 무인석이 오른쪽 옆구리에지름이 10cm가량 되는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것이다. 복주머니는 동양, 특히 한국 고유의 장신구로서 신라땅에서 서역인이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사실은 조각상의 예술성보다는 신라에 온 서역인들이 신라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점, 즉 두 문명이 융합한 결과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 P235

이상에서 살펴본 무인석이나 흙인형은단지 상징적 염원만을 담은 조각이 아니라,
늦어도 7세기경부터는 서역인들이 신라땅에 와서 살면서 무장이나 문관으로까지 기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상당한 정도의 사실성이 투영된 증거물이다. 기나긴 세월의 풍속에서도 의연히 서 있는 저 무인석과 흙인형은 우리가 서역인들과서로의 문화를 주고받으면서 삶을 함께해온 그 옛날의 만남과 어울림의 역사를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 P236

우리와 이웃하면서 한 문명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일본 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서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동안 그 해답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서양사람들이 우리더러 세상과 동떨어진 호젓한 ‘은둔(隱遁)의 나라‘라고 하니, 남들은 물론 우리마저도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무심히 넘겨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해답은 중세 아랍사람들이 주고 있다 - P237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00~500년, 쎄스뻬데스보다는 무려 700~800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여러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漢)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람들은다름 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마치 1,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과연 어떠했으며, 그들은 신라를 세계에 어떻게 알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일찍이 우리 겨레가 누리던 드높은 위상이기도 해서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P238

이렇듯 중세 아랍인들의 캔버스에는 윤색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신라의 넉넉하고 진취적인 자화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런 것을 알 바 없는 서구인들은 19세기 말 우리를 ‘은둔‘의 화신으로 곡필했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신라에 관한 중세 아랍문헌의 기술은 신라가 아닌 일본에 관한 기술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른바 ‘신라일본비정설‘을 들고 나와 반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을 현혹시켰고, 그 여파는 우리네 학계에까지 미쳤다. 나라가 힘이 약하고 학문이 뒤처지면 참역사가 난도질당한다는 뼈저린 교훈이다. - P244

원래 신화(mythology)란 단순한 과거 이야기거나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이야기가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경험의 반영이나 상징이다. 그 속에는 역사적·문화적 경험과 이상향 같은 꿈도 들어 있다. - P21

일반적으로 신화는 여러가지 내용을 일정한 논리체계 속에 조합하고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하지만, 그 속에는 일정한 역사성과 설화성도 공존한다. ‘단군신화‘도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이 신화는 우리 겨레의 개국이나 국조와 관련된 신화이기 때문에 그 위상과 의미가 각별하다. - P21

단군신화의 문명교류사적 의미는 한마디로 당대의 여타 문명과 신화소(神話素), 즉 신화를 꾸미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를 공유한다는 데 있다. - P21

다음으로, 두 신화의 가장 큰 상이점은 이념적 지향점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매사에서 갈등과 상극, 살해와 분열로 탈출구를 찾고있으나, 단군신화는 조화와 상생, 합일에 지향점을 맞추고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건국이념에서 시작하여 부지자의(父知子意) 즉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기‘
에, 천신인 환인이 아들 환웅의 웅지를 알아서 지상에 내려 보내고, 환웅은 웅녀의 청을 받아들여 결합하고,  약속을 어긴 범에게도 관대하다 - P26

이처럼 우리의 단군신화는 신화 특유의 공유성이나 보편성을 갖고있지만, 투철한 동양사상에 바탕하고 우리 겨레의 건국이념에 충실한 신화다. 그래서 세계의 무수한 신화 속에서도 고고 위상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 P27

유물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증인이고 시비를 가려내는 판관이다.
그 값어치는 시간이 올라갈수록 더 높다. 1925년 대홍수가 진 후 한강 하류에 위치한 서울 암사동에서 우연히 빗물에 씻겨나간 빗살무늬토기(일명 즐문토기 櫛文土器)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우리나라의 60곳 넘는 데서 이런 유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 P28

그리하여 빗살무늬토기문화권은 거석문화권과 채도(彩陶) 문화권, 세석기(細石器) 문화권과 함께  신석기시대의 4대 문화권 중 하나로 자리매김되었다. - P29

비록 발원지나 유동경로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석기시대에 북방의 드넓은 지역에 동서로 빗살무늬토기대가 형성되어 문명교류사의 서장을 장식했다는 사실이다. - P31

이와 더불어 신석기시대에 고아시아인들과 함께 일구어놓은 빗살무늬토기문화는 적어도 청동기시대 이전까지 우리의 고대문화가 중국과는 무관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채도(彩陶)에서흑도(黑陶)로,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되는 중국의 토기는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것은 중국의 중화사상이나 우리의 사대주의 유습에 일침을 놓는 질그릇의 엄정한 증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를 역사적 만남의 시비를 가려낸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 P35

세상에 흔한 것이 돌이라 흔히들 돌을 무지나 아둔함, 그리고 무언(無言)에 빗댄다. 그러나 인간의 슬기가  스며들었을 때, 돌은 ‘영원불멸의 상징‘이나 ‘수호신‘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말도 한다. 이것은 동서양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우리 민간신앙에서 돌은 ‘서낭바위‘ ‘마을수호신‘ 등으로 신격화되는데, 그것은 돌이 풍요나 다산, 번식, 기후의 순조로움, 전승,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 P36

문화유산은 색다르고 생소한 지식의 세계로 우리를 여행시켜주는 학습의 공간이다. - P37

거석기념물은 지역에 따라 제작연대나 형태 및 기능이 조금씩 다르지만, 총체적으로 유형화하여 고찰할 수 있다. 긴 기둥 모양의 돌 하나를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멘히르(menhir, 독석獨石, 수석竪石, 선돌)와 돌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돌을 한 개 가로 얹은 트릴리톤(trilithon), 그리고 돌을 여러 개 세운 위에 평평한 뚜껑돌을 얹은 돌멘(dolmen)이 있다. - P37

돌멘 앞에 큰 돌로 출입하는 통로를 만들고흙을 쌓은 코리도툼(corridor-tomb, 연도분羨道墳, 널길무덤)과  기둥 모양의 돌을 여러 줄 배열한 알리뉴망(alignements, 열석), 여러 개의 돌을 일정한 간격에 따라 원형으로 둘러 세운 크롬렉 (cromlech, 환상열석環狀列石)도  있다. 그 밖에 사람의 형상을 한 석상(石像)도  거석기념물에 속한다. - P39

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려 있는데, 대개는 무리를 지어 있어 그 분포밀도가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형태나 껴묻거리도 다양하다. 알려지기로는 지금 세계에 약 55,000기의 각종 거석유물이 있는데, 그중 고인돌은 그리 많지 않다. 거석유물이 많다고 하는 아일랜드에도 고인돌은 고작 1,500기밖에 없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약40,000기(북한에 14,000~15,000기)가 집중되어 있다. 그중 전남 지방에서 발견된 것만 약 20,000 기나 되니, 정말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고인돌 밀집지역이다. ‘고인돌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순·고창·강화 지역의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 제977호로 등록했다. 고인돌이 대표적 거석기념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커다란 문화적 긍지를 갖게된다. - P42

이처럼 고인돌은 그 옛날 우리겨레의 삶을 지켜주고 빛낸 값진 문화유산이기에 후손들은 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해왔다. - P43

이러한 얼과 넋은 겨레의 갈라짐을 넘어 딛고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2002년 남북한 고인돌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벙어리 냉가슴앓듯 하다가 만남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었다. 반세기라는 한 맺힌세월이 고인돌의 이름에서부터 그 기원과 제작연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 학자들 사이에 얕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 P46

본의 아니게 하나의 역사를 놓고 서로 다르게 둘로 써왔다. 어찌 고인돌뿐이랴. 우리 겨레 앞에 놓인 숙명적 과제는 본디 하나를 둘 아닌 하나로만 되게 하는 일이다. - P47

이딸리아 동남부에 위치한 브룬디씨움(Brundisium)시는 청동 교역으로 이름난 고장으로, 이 도시 이름을 따서 청동을 ‘브론즈(bronze)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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