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우리는 심심찮게 민속축제 마당에서 청사자와 황사자의 탈을쓰고 두 패로 나뉘어 굿거리장단에 맞춰 꼬리를 휘저으며 덩실덩실춤을 추는 흥겹고 익살스러운 장면을 목격한다. 탈을 쓰고 추는 춤이라고는 하지만, 사자가 없는 이 땅에서 과연 어떻게 사자춤이 생겨났을까. 그것도 천몇백 년을 내려오면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우리의 한민속놀이로 줄곧 이어져왔으니 말이다. 그 해답은 서역(西域)이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대면에서 찾게 된다. - P220

서역이란 원래 중국인들이 막연하게 중국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말로서, 우리를 포함해 한자문명권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줄곧사용되어왔다. - P221

이 말은 기원전 60년에 전한(前漢)이 숙적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타림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한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는 주로 오늘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영내의 수십 개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이것이 좁은 의미의 서역이다.  - P221

그러나 한대 이후 중국의 대외 교섭과 교류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서역의 포괄범위가 서쪽으로 더 넓어져서 7세기 당대에 이르러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뿐만 아니라, 멀리 페르시아(이란)와 대식(大食, 아랍)까지를  망라하게 되었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근세까지의 개념이다.  - P221

한국에서 서역이란 용어는 『고려사』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통일신라가 상대한 서역은 넓은 의미의 서역으로서, 지역이 광대하고 민족이나 문화도 다양하여 교류의 폭도 그만큼 넓었다 - P221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인들이 서역문물에 대해 갖는 호기심은대단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귀족 사대부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서역에서 들어온 호화품들을 장만하고 남용하는 바람에 무분별한 사치풍조까지 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지위고하에 따라 옷[色服], 탈것(車騎], 그릇(器用], 집(屋舍] 등에서서역문물을 사용할 데 대한 세칙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흥덕왕(興)은 834년에 사치를 금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그 서문에서 일부 호화를 일삼는 사람들이 외래품만을선호하고 국산품을 혐오하는 방자한 작태를 힐책하면서 이 사용금지세칙을 위반하는 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 P222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괘릉 무인석이 오른쪽 옆구리에지름이 10cm가량 되는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것이다. 복주머니는 동양, 특히 한국 고유의 장신구로서 신라땅에서 서역인이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사실은 조각상의 예술성보다는 신라에 온 서역인들이 신라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점, 즉 두 문명이 융합한 결과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 P235

이상에서 살펴본 무인석이나 흙인형은단지 상징적 염원만을 담은 조각이 아니라,
늦어도 7세기경부터는 서역인들이 신라땅에 와서 살면서 무장이나 문관으로까지 기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상당한 정도의 사실성이 투영된 증거물이다. 기나긴 세월의 풍속에서도 의연히 서 있는 저 무인석과 흙인형은 우리가 서역인들과서로의 문화를 주고받으면서 삶을 함께해온 그 옛날의 만남과 어울림의 역사를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 P236

우리와 이웃하면서 한 문명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일본 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서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동안 그 해답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서양사람들이 우리더러 세상과 동떨어진 호젓한 ‘은둔(隱遁)의 나라‘라고 하니, 남들은 물론 우리마저도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무심히 넘겨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해답은 중세 아랍사람들이 주고 있다 - P237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00~500년, 쎄스뻬데스보다는 무려 700~800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여러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漢)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람들은다름 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마치 1,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과연 어떠했으며, 그들은 신라를 세계에 어떻게 알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일찍이 우리 겨레가 누리던 드높은 위상이기도 해서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P238

이렇듯 중세 아랍인들의 캔버스에는 윤색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신라의 넉넉하고 진취적인 자화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런 것을 알 바 없는 서구인들은 19세기 말 우리를 ‘은둔‘의 화신으로 곡필했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신라에 관한 중세 아랍문헌의 기술은 신라가 아닌 일본에 관한 기술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른바 ‘신라일본비정설‘을 들고 나와 반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을 현혹시켰고, 그 여파는 우리네 학계에까지 미쳤다. 나라가 힘이 약하고 학문이 뒤처지면 참역사가 난도질당한다는 뼈저린 교훈이다. - P244

원래 신화(mythology)란 단순한 과거 이야기거나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이야기가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경험의 반영이나 상징이다. 그 속에는 역사적·문화적 경험과 이상향 같은 꿈도 들어 있다. - P21

일반적으로 신화는 여러가지 내용을 일정한 논리체계 속에 조합하고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하지만, 그 속에는 일정한 역사성과 설화성도 공존한다. ‘단군신화‘도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이 신화는 우리 겨레의 개국이나 국조와 관련된 신화이기 때문에 그 위상과 의미가 각별하다. - P21

단군신화의 문명교류사적 의미는 한마디로 당대의 여타 문명과 신화소(神話素), 즉 신화를 꾸미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를 공유한다는 데 있다. - P21

다음으로, 두 신화의 가장 큰 상이점은 이념적 지향점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매사에서 갈등과 상극, 살해와 분열로 탈출구를 찾고있으나, 단군신화는 조화와 상생, 합일에 지향점을 맞추고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건국이념에서 시작하여 부지자의(父知子意) 즉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기‘
에, 천신인 환인이 아들 환웅의 웅지를 알아서 지상에 내려 보내고, 환웅은 웅녀의 청을 받아들여 결합하고,  약속을 어긴 범에게도 관대하다 - P26

이처럼 우리의 단군신화는 신화 특유의 공유성이나 보편성을 갖고있지만, 투철한 동양사상에 바탕하고 우리 겨레의 건국이념에 충실한 신화다. 그래서 세계의 무수한 신화 속에서도 고고 위상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 P27

유물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증인이고 시비를 가려내는 판관이다.
그 값어치는 시간이 올라갈수록 더 높다. 1925년 대홍수가 진 후 한강 하류에 위치한 서울 암사동에서 우연히 빗물에 씻겨나간 빗살무늬토기(일명 즐문토기 櫛文土器)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우리나라의 60곳 넘는 데서 이런 유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 P28

그리하여 빗살무늬토기문화권은 거석문화권과 채도(彩陶) 문화권, 세석기(細石器) 문화권과 함께  신석기시대의 4대 문화권 중 하나로 자리매김되었다. - P29

비록 발원지나 유동경로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석기시대에 북방의 드넓은 지역에 동서로 빗살무늬토기대가 형성되어 문명교류사의 서장을 장식했다는 사실이다. - P31

이와 더불어 신석기시대에 고아시아인들과 함께 일구어놓은 빗살무늬토기문화는 적어도 청동기시대 이전까지 우리의 고대문화가 중국과는 무관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채도(彩陶)에서흑도(黑陶)로,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되는 중국의 토기는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것은 중국의 중화사상이나 우리의 사대주의 유습에 일침을 놓는 질그릇의 엄정한 증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를 역사적 만남의 시비를 가려낸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 P35

세상에 흔한 것이 돌이라 흔히들 돌을 무지나 아둔함, 그리고 무언(無言)에 빗댄다. 그러나 인간의 슬기가  스며들었을 때, 돌은 ‘영원불멸의 상징‘이나 ‘수호신‘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말도 한다. 이것은 동서양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우리 민간신앙에서 돌은 ‘서낭바위‘ ‘마을수호신‘ 등으로 신격화되는데, 그것은 돌이 풍요나 다산, 번식, 기후의 순조로움, 전승,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 P36

문화유산은 색다르고 생소한 지식의 세계로 우리를 여행시켜주는 학습의 공간이다. - P37

거석기념물은 지역에 따라 제작연대나 형태 및 기능이 조금씩 다르지만, 총체적으로 유형화하여 고찰할 수 있다. 긴 기둥 모양의 돌 하나를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멘히르(menhir, 독석獨石, 수석竪石, 선돌)와 돌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돌을 한 개 가로 얹은 트릴리톤(trilithon), 그리고 돌을 여러 개 세운 위에 평평한 뚜껑돌을 얹은 돌멘(dolmen)이 있다. - P37

돌멘 앞에 큰 돌로 출입하는 통로를 만들고흙을 쌓은 코리도툼(corridor-tomb, 연도분羨道墳, 널길무덤)과  기둥 모양의 돌을 여러 줄 배열한 알리뉴망(alignements, 열석), 여러 개의 돌을 일정한 간격에 따라 원형으로 둘러 세운 크롬렉 (cromlech, 환상열석環狀列石)도  있다. 그 밖에 사람의 형상을 한 석상(石像)도  거석기념물에 속한다. - P39

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려 있는데, 대개는 무리를 지어 있어 그 분포밀도가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형태나 껴묻거리도 다양하다. 알려지기로는 지금 세계에 약 55,000기의 각종 거석유물이 있는데, 그중 고인돌은 그리 많지 않다. 거석유물이 많다고 하는 아일랜드에도 고인돌은 고작 1,500기밖에 없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약40,000기(북한에 14,000~15,000기)가 집중되어 있다. 그중 전남 지방에서 발견된 것만 약 20,000 기나 되니, 정말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고인돌 밀집지역이다. ‘고인돌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순·고창·강화 지역의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 제977호로 등록했다. 고인돌이 대표적 거석기념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커다란 문화적 긍지를 갖게된다. - P42

이처럼 고인돌은 그 옛날 우리겨레의 삶을 지켜주고 빛낸 값진 문화유산이기에 후손들은 늘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해왔다. - P43

이러한 얼과 넋은 겨레의 갈라짐을 넘어 딛고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2002년 남북한 고인돌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벙어리 냉가슴앓듯 하다가 만남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었다. 반세기라는 한 맺힌세월이 고인돌의 이름에서부터 그 기원과 제작연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 학자들 사이에 얕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 P46

본의 아니게 하나의 역사를 놓고 서로 다르게 둘로 써왔다. 어찌 고인돌뿐이랴. 우리 겨레 앞에 놓인 숙명적 과제는 본디 하나를 둘 아닌 하나로만 되게 하는 일이다. - P47

이딸리아 동남부에 위치한 브룬디씨움(Brundisium)시는 청동 교역으로 이름난 고장으로, 이 도시 이름을 따서 청동을 ‘브론즈(bronze)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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