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84)는 3세 때 부터 글을 깨치고 8세 때는 화석정(花石亭) 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한 천재였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한 이후 15세에는 다른 사람에게 배울 게 없다며 스승 없이 조광조를 사숙하다가 백인걸 문하에 들어가우계 성혼을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다. 16세 (1551)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묘막 생활을 하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뇌하며 불교 서적을 읽고 흥미를  느껴서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뒤엔 금강산 마하연에 들어가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을
얻고 승려 생활을 했다. 그때 율곡의 나이는 불과19세였다. - P460

그러나 1년 뒤 결국 불교나 유학이나 도를 찾아가는 것은 매한가지라며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는 위나 아래나 같은 것/이는 색(色)도아니요 공(空)도 아니라네" 라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는 시를 짓고 하산했다.  20세(1555)에 하산해서는 다시 성리학에 열중해 23세 때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물음을 구하기도 했다. 이때 퇴계는 율곡이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같은 글을 주었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일 만들기를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
持心貴在不欺
入朝當戒喜事 - P460

퇴계를 만난 바로 그해 겨울 율곡은 생원시 별시(別試)에서 장원했고 29세(1564)에는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했다. 이로써 율곡은 13세 이후 모두 9번 장원으로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후 호조좌랑으로 벼슬길에 올라 대사간을 몇 번이나 지내며 경륜을 펼쳤고 한때는 파주 율곡으로 물러나 학문에 열중하기도 하다가49세(1584)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피란길에 한탄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5천원 권 지폐에 그의초상을 담아 기리고 있다. - P461

율곡 이후에 배향된 이들은 모두 율곡학파의 노론계 학자였다. 김장생과 조헌은 율곡의 제자였고,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이자 율곡의 사위였으며, 송시열과 송준길은 김장생의 제자이자 김집의 제자였다. 박세채역시 김집의 제자였다. - P462

탁영 김일손과 남명 조식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와 퇴계학파의 학봉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우 정경세 등은 문묘 배향이 추진되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 P462

"천리마 꼬리를 잡고 가는 파리도 천리를 간다." - P464

안회는 비록 독실하게 공부하기도 했지만 공자라는 천리마 꼬리를붙잡았기 때문에 그 덕행이 더욱 드러났다.
여기서 사마천이 천리마 꼬리에다 비유한 것에 대해서는 당나라사마정이 『사기』의 주석으로 쓴 『색은(隱)』을 보면 ‘기미창승(驥尾蒼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기미‘는 천리마 꼬리고 ‘장승‘은 파리다.
파리가 천리마 꼬리를 잡으면 천리를 간다. 
蒼蠅附驥尾而致千里 - P465

이것을 속되게 풀이하자면 실력 없는 자는 천리마 꼬리라도 붙잡고같이 가는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한 처세술일 수도 있다. 이는 첫째 뒤통수만 보고 달리면 둘째는 될 수 있다는 상업적 ·외교적 기술보다 한수위다. 실력이 없으면 천리마 꼬리를 잡는 것이 상책이 아닐 수 없다. - P465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
크건 작건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 P476

성균관 답사를 이 하마비에서 시작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곁에 있는 영조대왕의 탕평비(蕩)에서 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영조 18년(1742)에 세운 이 탕평비에는 영조가 「논어」 「위정편(爲政篇)」에나오는  말을 풀어서 친필로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두루 아우르고 치우치지 않는것은 군자의 공적인 마음이요,
比而弗周 寔小人之私
(비이불주식소인지사의)
치우치고 두루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곧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 - P476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 「홍범(洪範篇)」에 실린  이상적인 정치를펴기 위한 9가지 규범 중 다섯번째에 나오는 말이다.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 - P476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을 기리며
탕평비 앞에 서면 영조대왕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일어난다. 누가 뭐래도 영조는 80여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창경궁 흥화문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여론의 힘으로 균역법(均役法)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정신병 탓에 사람  죽이기를 일삼는 사도세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어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아비로서 슬픈 결단을 내리는 등 평생을 탕평치국에 바쳤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손자(정조)에게 효(孝孫)이라는 도장을 새겨주면서  유세손서(諭世孫書)에 이렇게 당부를 남겼다. - P479

아! 해동 300년 우리 조선왕조는 83세 임금이 25세 손자에게 의지한다.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 P479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를 안정시킴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규장각을 세워 학자를 곁에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술잔을 내려주면서 "100리 가는 사람이 90리를 반쯤으로 생각하듯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 P479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냇물이 만 개여도 거기에 비친 달은 하나인바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치며 달이 각기그 형태에 따라 비추듯이 사람들은 각자의 얼굴과 기량에 맞게 대하는것이 군주의 자세라고 했다. - P480

정조가 이처럼 사람을 아꼈기 때문에 이 시대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문예부흥을 이루었다. 정치에서 번암 채제공,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 사상에선 다산 정약용, 미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나왔다. 번암과 연암과 다산과 단원이 위대하다면 이들을 낳은 정조시대도 위대한 것이다.
이리하여 영조시대에 일어난 문예부흥은 정조시대로 이어졌다. - P480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이냐고 물으면 태평성대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역사상 그런 시대는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 증명되지도 않는 요순시대라고 상상할 뿐이다. 그래서 문화사가들은 태평성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한 시대의 치세를 칭송하는 최대의 찬사는 ‘문예부흥기‘다. 서양 역사에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동양 역사에서는18세기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연간이 문예부흥기라는 명예를 갖고 있다. 문예부흥기의 국정철학은 ‘경국제민(經國濟民) 문화보국(文化保國)‘
여덟 글자로 요약된다. 즉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을 구제하고 문화로서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 P480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8세기 3분기 석굴암·불국사·에밀레종으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2분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때, 15세기 2분기 한글을 창제하고 종묘제례악을 정비한 세종대왕 때,
그리고 18세기 후반기 영·정조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 - P480

돌이켜보건대 우리 역사상 네 차례 나타난 문예부흥기는 영·정조시대 이후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그것을 어떻게 문예부흥기로 승화시킬 것이냐가 우리 시대의 과제인데 나는 영조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정조시대가 이어간 모습에서 그 해답의실마리를 읽어본다. - P481

영·정조시대 회화에 등장한 진경산수·풍속화·문인화라는 새로운3대 장르는 영조시대에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 능호관이인상 등 양반 출신의 지식인 화가들이 선구적으로 개척한 것을 정조시대에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등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출신의 전문화가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영조시대 그림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예술적  고뇌가 서린 내용상의 깊이가 있고 정조시대 그림엔 정교한 테크닉이 두드러지는 형식상의 완결미가 돋보인다. - P481

이를 비약해서 말하자면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제시한 진보적 내용을 능력 있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들이 형식으로 구현해낸 것이었다. 지난 세월 우리가 쌓아온 값진 경험을 토대로 이제 능력있는 진정한 엑스퍼트(expert, 전문가)들이 경국제민과 문화보국의 자세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게 된다면 혹 후세 사람들이 우리가 살던 이 시기를 문예부흥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광과 사명이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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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의 법을 관장하여 국가의 학정(學政)을 다스리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한다.

그리고 주소(注疏, 각주)에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성(成)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균(均)이란습속의 치우침을 균형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의 교육 현장에서도 인성교육의 참뜻으로 새겨들을 만한 것이다. - P381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국초 이래 왕조의 문신·학자들이 거의 다 성균관을 거쳐갔다. 매월당 김시습, 율곡 이이 등이성균관 출신이었고,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은 이 학교 교장인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조선왕조는 쉽게 말해 지식인 관료사회였는데 나라에서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세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 유일한 국립대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조선시대 지성의 산실이었다. - P383

유생의 사회적 지위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세종 때(1429)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고 임진왜란 후 재정 부족 탓에 75명으로 줄였다가 영조 때 120여 명으로 늘어났지만 말기에는 위상이 낮아지면서 다시100명으로 줄었다. 성균관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시행되는 사마시에 합격한 진사 100명과 생원 100명에 한해 입학이 허용되었으나 어느 시대어느 사회에나 뒷문 입학이 있듯이 성균관에도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일종의 보결생(生) 제도가 있었다. 이를 기재생(生)이라 했다. - P385

그때나 지금이나 학생은 영원히 나라의 자산이고 희망이기에 성균관유생들은 이런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들 역시 지식인 집단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를 유학생의 상소라고 해서 유소(儒疏)라고 했다.  유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는데권당(捲堂)이라불렀다. 그래도 안 되면 동맹휴업을  감행했다. 이는 성균관을 비운다고해서 공관(空)이라고 했다. 많은 면에서 오늘날의 대학과 비슷했다. 조선시대엔 성균관이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 P386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중종 14년 (1519) 대사성 윤탁(尹悼)이 명륜당 아래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주 보게 심으면서 기초가튼튼해야만 학문을 크게 이루고 나무는 뿌리가 무성해야 가지가 잘 자라니 공부하는 유생들도 이를 본받아 정성껏 잘 키울 것을 당부했다고한다. - P404

숭교방의 반궁먼 옛날로 돌아가서 600여 년 전,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설계한 삼봉(三峰) 정도전 (鄭道傳)은 동네마다 이름을 지으면서 성균관 일대는  ‘가르침을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교방(崇敎坊)이라고  했다. 오늘날 대학로가 있는 성균관 옆 동네가 동숭동 (東崇洞)인 것은 숭교방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 P409

양반 관료사회였던 조선왕조에서 생원진사가 되었다는 것에는 출세의 첫 관문을 넘어섰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기다리는 대과는 엄청난 경쟁을 뚫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3년마다 치러지는 과거에서 소과는 생원진사 합쳐서 200명을 뽑지만 대과는 33명뿐이었다. 게다가 재수는 기본이고 3수, 4수가 보통이었다. 대과에 급제한 나이를 보면 퇴계가 35세, 다산은 28세, 추사는 34세였다. 그때 나이 34세라면 지금의 체감 연령으로는 40대 중반은 된다. - P412

그래서 한두 번 대과를 치러보고 포기하는 이도 많았다. 또 설사 대과에 합격한다 해도 당색(黨色) 때문에  출셋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일찌감치 대과를 포기하고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기도 있었다. 대과에 급제하지못하면 고급 관료에는 오를 수 없었지만 당색이 맞으면 종6품 이하 하급직은 얻을 수 있어 종6품외직(外職)인  현감까지는 나아갈 수 있었다. - P412

한때(2010) 인기를 모았던 KBS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의 원작은정은궐 작가가 쓴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파란미디어 2007)인데, 그는 반중잡영」에서 소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며 실제로 소설 속의 일부 장면들이 무명자의 시에 기초하고 있다. - P416

그러나 이 소설과 드라마는 허구로 엮은 것이어서 반중잡영」의 내용이 전혀 관계없는 스캔들로 변질되기도 했다. 이에 성균관스캔들이방영될 때 성균관 측은 강하게 항의했고, 결국 제목 로고에 ‘과자를 붙여 성균관 스캔들로 바꾸었다고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 P416

면책과 처벌
재사에는 면책 (面)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면전에서 꾸짖는행위다. 마치 요즘 대학에서 선배들이 하는 신입생 길들이기 같은 악습이다. 선배가 면책 줄 후배를 부르면 재직들이 깡충깡충 뛰며 모여들었고 이름이 불린 유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함부로 성과 이름을 부르면서 "면책이오!"라고 하고는 후배의 옷을 휘어잡아 밀쳤다 끌었다 하며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홉 번을 넘어뜨리면서 후배를 호명한 선배 앞에 - P430

이르게 하고 흩어졌다. 무명자가 말하기를 이는 후배에게 곤욕을 주기위함인데 비록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정이라고는 하나 결코 좋은 장난은아니라고 했다. - P431

성균관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건물 생김새나 둘러보다가 대성전 안을 들여다봤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대성전에 공자만 모셔져 있는 줄 알았다. 안자, 맹자 등 중국의성현과 정이,주희 등송대유학자를 함께 모신 것까지는 그랬었구나 하는 새로운 일깨움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 18명의 위패가 있는 것은 신기했다.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 조광조·이황이이송시열 등 교과서에 많이 나오는 낯익은 인물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김굉필 · 정여창·이언적·김인후·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준길·박세채 등 그 이름을 들어보긴 했으나 내 지식으로는 학문과 이력을 말하기 힘든 학자들의 위패도 있었다. - P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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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은행나무
내 스마트폰 다이어리의 11월 첫째 일요일과 둘째 일요일에는 성균관(成均館)이라고 메모가 되어 있다.  그날 석전제라든지 무슨 행사가 있어서가 아니라 성균관 은행나무의 단풍이 피크(peak)를 이루는 날짜를기억하기 위해서다. 성균관에는 모두 네 그루의 은행나무 고목이 있고그중 명륜당(明倫堂) 앞마당의 수령 500년 된  한 그루는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는데 해마다 11월 초가 되면 아름답다기보다 환상적으로 물든 그 모습이 보고 싶어 발길을 옮기게 된다. - P377

우리나라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아주 많아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 142주 중 은행나무가22주나 되고 그중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등은 수령 1천 년을 헤아리고 있다. - P378

성균관의 건립 과정조선왕조의 성균관이 한양에 세워진 것은 건국 6년 뒤인 1398년 7월이지만 그 역사의 뿌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에서는 태학(太學, 372년), 신라에서는 국학(國學, 682년),  고려에서는 국자감(國子監, 992년)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이름과 성격은 다르지만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점은 같다. 고려의 국자감은 이후 국학·성균관·성균감(成均監) 등으로 불리다가  공민왕 11년(1362)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그 상태에서 조선왕조가 들어섰다. - P380

‘성균‘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하며 『주례(周禮)』의 「대사악(大司樂)」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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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의 첫문장 比較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
雪国であ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 군마 현(郡馬縣)과 니가타 현(新潟縣)의 접경을 말한다. 본문의 <국경>은 모두 이 뜻이다.
† 군마현과 니가타 현을 잇는 시미즈(淸水) 터널을 가리킨다.

1. 민음사, 유숙자 번역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島村)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듯,
「역장님, 역장님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감싸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을 내려 덮고 있었다.

2. 청목사, 유승휴 번역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희뿌연히 밝아 왔다. 신호소에 기차가 멎었다.
맞은편 자리에서 처녀가 일어나 시마무라 島村 앞의 유리창을 열었다. 차가운 냉기가 밀려 들어왔다. 처녀는 창 밖으로 온통 몸을 내밀고 멀리 외치듯이 소리쳤다.
˝역장님! 역장님!˝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고 온 사내는 목도리를 코 위에까지 두르고 귀에 모자의 털가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3. 문예출판사, 장경룡 번역
현(懸)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雪)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멎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시마무라(島村) 앞에 있는 유리창을 열었다. 차디찬 눈의 냉기가 흘러들었다. 처녀는 차창 밖으로 잔뜩몸을 내밀더니 멀리 대고 외쳤다.
˝역장니임, 역장니임!˝
등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다가온 사나이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싸매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으로 내리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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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29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명한 첫 문장으로 자주 언급되지요. 저도 저 문장이 넘 좋아서 읽다가 줄거리가 ?! ㅎㅎㅎ 전 민음사 판으로 읽었어요.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좋네요 *^^*

대장정 2022-09-29 18:18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민음사판으로 읽고, 청목사판 또 읽고 있습니다. 편안한 저넉시간 보내세요 미니님! ><.
 

<이봐요, 당신은 젊은 여성이에요. 그런데지금 당신은 남자가 쓴 책에 대해 글을 쓰려 하는군요. 다정하고 상냥하게 굴어요. 아첨하고 적당히 비위를 맞추는 거예요. 우리 여성의 모든 술수와 책략을 쓰도록 해요. 당신에게 당신만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요. 무엇보다도, 정숙하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내 펜을인도할 태세였습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녀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녀를 죽였습니다. 만일 내가 법정에 서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정당방위였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죽였을 테니까요. 그녀는 내 글쓰기에서 심장을 움켜 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펜을 종이에 대자마자 깨달았기때문입니다. 소설책 한 권을 평하려 해도, 자기만의 생각을 가져야 하며, 인간관계와 도덕과 성에대해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집 안의 천사>에따르면, 여성은 이 모든 문제를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성공하려면 매력적이라야 하고 환심을 사야 한다. 요컨대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내 종이 위에 그녀의 날개 그림자나 후광의 광채가 느껴질 때마다 잉크병을 집어 그녀에게 던졌습니다. 그녀는 좀처럼 죽지 않았습니다. 그녀가허구적인 존재라는 것이 그녀를 도왔지요. 유령을죽이기란 실재하는 존재를 죽이기보다 훨씬 어려우니까요. 그녀는 내가 쫓아 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기어 나왔습니다. 결국은 그녀를 죽여 버렸다고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주질긴 싸움이었고, 차라리 그리스어 문법을 배우든지 모험을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데 썼더라면 좋았을 만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경험, 그 시절의 모든 여성 작가에게 닥칠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집 안의 천사>를 죽이는 것은 여성 작가가 해내야 할 일의 일부였습니다.

소설가의 주된 욕망은 - 제가 행여 직업적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랍니다만 - 가능한 한 무의식적이 되는 것이랍니다. 그는 자신 안에 항시 나른한 상태를 유도해야 합니다. 그는 삶이 더없이 고요하고 규칙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 날마다 같은 얼굴들을 보고 같은 책들을 읽으며 같은 일들을 함으로써,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환상이 그 무엇으로도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상력이라는, 그 지극히 수줍고 가뭇없는 정신 작용을 둘러싼 모색과탐사, 그리고 그 날쌔고 돌연한 발견 같은 것들이그 무엇으로도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이런 상태는 남녀 불문하고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우리가 싸우고 있는 목표, 이 막강한 장애물들과 싸움을 벌이는 목적에대해서도 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목표를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수많은 직종, 나로서는 다 알 수도 없는 직종에서일하는 여성들로 둘러싸인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보듯, 그 전체적인 형세는 대단히 흥미롭고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남성들이 전유하던 집에서 자기만의 방을 획득했습니다. 여러분은엄청난 노력과 수고 끝에 그 집세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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