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민주화를 외치는 이유는 단순히 시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태국 어디에서 태어났든, 어느 가정에서 자랐든, 어떤 학교에 다니고 어떤 직장을 다니든 간에 공평한 기회를 갖고 정당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게 그들의 소망이었다.

실로 아이러니한 일은 이들이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 하는 스카이 캐슬은 이 세 가지 요구가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무너질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왕정개혁은 태국의 권위주의적 전통과 역사를 기초부터 흔들어 그들이 학연을 통해 진입하고자 하는 정치·사회·경제적 엘리트층의 입지를 완전히 뒤틀어놓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결국 제일 먼저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라는 것을 Z세대가 깨닫게 되면서 새로운 민주화의 역사가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태국의 왕실 모독죄는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 왕실 모독죄가 특히 2006년 쿠데타 이후 광범위하고 일관성 없이 적용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검열을 강요해왔다.

군부독재자도 왕의 발밑에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낮추는 것은, 비록 실질적인 권력은 없지만 왕정이 붕괴되는 순간 가부장적 권위주의 위에 세워진 태국의 모든 전통이 무너져 내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2020년 Z세대가 요구한 왕정개혁은 권위주의 타파라는 더 큰 사회적·문화적 개혁이었던 것이다.

2월 7일 랏차담넌 길과 시 아유타야 길을 잇는 랏차담넌 길에 있는 유엔 건물 앞에서 미얀마 국기를 들고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태국의 젊은이들과 미얀마 이주 노동자들이 나란히 행진했다. 반목의 역사를 갖고 있는 두 나라의 청년들이 함께 방콕을 민주화의 성지로 재탄생시키는 순간이었다.

짜끄리 왕조의 역사만큼, 독재의 역사만큼, 방콕의 민주화의 역사도 결코 짧지 않다. 그리고 오늘도 민주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땀과 눈물과 핏방울이 수만 개의 쏘이 사이사이에 녹아들고 있다.

관광객이 주로 찾는 곳은 ‘단지평원’ 혹은 ‘항아리평원’으로 불리는 곳이다. 넉넉히 잡아 20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돌항아리들이 있는 곳이다. 특히 2019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폰사완의 관광산업을 촉진하려는 라오스 정부의 관심이 단지평원에 집중되었다.

단지평원 제1구역에만 가도 이 평원에 숨어 있는 슬픈 역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불발탄 점검 중이라는 표지판들이다. 베트남 전쟁의 화염을 피하지 못했지만 베트남 전쟁에 가려 지금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라오스 내전의 상처가 이 단지평원에 오롯이 남아 있다. 폰사완은 작은 도시가 담기에는 너무나 큰 역사를 등에 지고 있는 도시다.

폰사완 역사기행은 단순히 이 도시만의 역사가 아니라 프랑스 식민정부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벌여야 했던 인도차이나 국가들(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단지평원이 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의 장이 되었는지를 되짚어보며 라오스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리도 찾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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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주 바로 옆에 있는 치앙라이주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자연과 예술, 그리고 커피의 도시"라고 나온다. 사실 치앙라이주가 커피 생산지로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7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세계 최대의 아편 무역지였다.

치앙라이주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려고 한다면 여권이나 비자 없이 산길과 강줄기를 따라 태국과 미얀마/버마, 라오스를 자유로이 넘나들던 소수민족이 현 짜끄리 왕조가 재창조해낸 타이 민족국가의 경계인이 되어가는 가슴 아픈 역사를 피할 수 없다.

2021년 6월 말 태국 정부가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55만 명에 이르는 국적 없는 인구의 대다수가 태국 국경 지역에 살고 있고, 그중 42퍼센트가 치앙마이주와 치앙라이주에 몰려 있다.

이 도시의 역사기행을 태국, 미얀마, 라오스의 국경이 만나는 황금 삼각지(Golden Triangle)가 위치한 치앙센에서 시작해서 치앙라이주의 주도인 치앙라이시티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제국의 경계에 정착한 소수민족

13세기부터 태국 북부 지역은 란나(‘100만 개의 논’이라는 뜻) 왕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치앙라이는 란나 왕국의 수도였으나, 왕국이 건설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마족에 의해 점령당한다.

18세기에 치앙마이로 수도를 옮긴 란나 왕국은 치앙라이를 버마족으로부터 수복했지만, 19세기 말에 짜끄리 왕조(1782~현재)에 굴복하면서 치앙라이와 치앙마이는 모두 시암(지금의 태국)에 합병되었다.

1940년대 말, 치앙라이주 행정관으로 임명된 분추에이 시사왓은 휴일이면 산으로 하이킹을 가곤 했다. 치앙라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지방 풍속도 배우고 지리도 익힐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1950년에 쓴 책이 『삼십 찻 나이 치앙라이』다. 이 제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55 ‘치앙라이 안의 30개 나라’ 혹은 ‘치앙라이 안의 30개 민족’. ‘찻’은 영어로 ‘nation’으로 번역되는데,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 의견이 분분하다. 분추에이가 정의한 ‘찻’은 역사를 가진 문화 공동체였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종교가 비슷하며, 먹는 음식과 습관이 비슷한 그런 공동체 말이다.

태국 북부 지역의 소수민족이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냉전시기부터다. 특히 1949년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미국의 중앙정보부(CIA)는 국경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소수민족이 공산당의 선전에 넘어가 동조자가 된다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버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까지 공산당 천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고산지대에 사는 소수민족들은 아편을 재배해 마약상에게 팔아 본의 아니게 골든트라이앵글 마약 거래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국적이 없었기에 태국이라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짜끄리 왕조에 굴복하기 전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도 북부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란나 왕국의 무역 중심지가 바로 이 치앙센이었다. ‘치앙’은 한자 ‘성(城)’에서 나온 말이고, ‘센’은 ‘10만’이라는 뜻이다. 왜 ‘십만 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만큼 많은 재물과 사람이 모인 것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렇게 거래된 아편은 버마 국경에서 중국 공산당에 저항하고 있던 국민당 잔류군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했고, 수많은 소수민족의 현금 축적 수단이 되었으며, 태국의 일부 군부가 재산을 불리는 데도 기여했다.

소수민족에게 국경의 의미는 남다르다.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이 다수민족의 편의에 따라 그려지면서 소수민족들은 가족이나 친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소수민족 다수가 시민권이나 국적이 없어서 학교에 다니거나 취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들이 인신매매나 브로커를 통해 태국으로 들어와 취업한 경우 노동권은 고사하고 인권도 보호받을 수 없다. 태국도 미얀마도 반기지 않는 국적 없는 소수민족의 문제는 사실 20세기에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이 빚은 비극이다.

치앙라이가 보여주는 역사는, 그리고 이 도시를 통해 본 태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국경’과 국경에 사는 ‘변방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없이 평화롭고 한없이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란나 제국의 흥망성쇠와 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등장, 그로 인해 우리와 그들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지면서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대하드라마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는 끝나지 않을 그런 역사가 치앙라이에 있다.

태국 역사에서 이성계만큼 명장으로 기록되는 딱신이 1768년에 짜오프라야강 동쪽에 있는 톤부리라는 도시에서 톤부리 왕조를 시작했고, 1782년에 아유타야 귀족 출신인 텅두앙이 짜오프라야강 서쪽에 있던 방콕이라는 도시에서 라타나코신 왕조를 시작했다.

방콕이 대도시로 성장하게 된 것은 해외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대영제국, 동쪽으로는 프랑스, 북쪽으로는 중국이라는 열강의 틈새에서 완충지대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국가라는 점도 주효했다.

태국의 세종대왕이라 불릴 만한 라마 5세 쭐라롱껀 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받아 행정, 교육, 경제, 외교 분야에서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가 가장 개혁적이고 가장 사랑받는 국왕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노예제와 왕족 앞에서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절하는 의식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냉전시기 민주화의 성지 탐마삿대학과 랏차담넌 길

1950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막대한 원조개발과 베트남 전쟁 특수로 태국의 경제가 성장하게 된다.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중산층이 확대되었고, 이들은 더 큰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누리고 싶어 했다. 우리의 1970년대가 그러했듯 태국 학생들은 군인 정치가들이 미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며 반미 민주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탐마삿대학에 모여 1973년에 퇴진한 군부의 귀국과 정치활동 재개를 반대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를 했다. 이를 시작으로 극우 청년들이 정문을 뚫고 들어가 시위하던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하거나 죽였다. 그날 오후 군부세력은 쿠데타로 정권을 탈환했다. ‘혹뚤라’(‘10월 6일’이라는 뜻)로 알려진 탐마삿대학 학살은 우리의 광주 민주화운동처럼 오랜 시간 동안 의도적으로 지워진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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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제2의 도시는 제법 큰 규모와 인구를 갖고 있지만, 제1의 도시가 가진 규모와 위상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지 않는다. 때로는 해당 도시에 위치한 건축물의 규모와 역사에도 ‘두 번째’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제2의 도시인 부산과 오사카는 그 도시만의 고유한 특징이 매력적이지만, 제1의 도시인 서울과 도쿄에 비해 국제적인 인지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인 수라바야 중심부에는 약 29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수라바야 광역 대도시권은 약 1000만 명이다. 수라바야는 마두라 해협에 있는 자바섬 북동쪽 경계선에 위치하며, 동부 자바의 가장 큰 강인 브란타스강의 두 갈래 중 하나인 칼리마스강 하구의 저지대에 인접한다.

수라바야는 ‘영웅의 도시(Kota Pahlawan)’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인도네시아가 300여 년에 걸친 네덜란드 식민의 역사를 청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상징성 때문이다.

수라바야는 자바어인 ‘수라 잉 바야(Sura ing baya)’에서 유래한 말로 ‘위험에 용감하게 대처하다’라는 의미다.

라덴 위자야(Raden Wijaya)39와 그의 군대가 1293년 5월 31일 쿠빌라이 칸의 몽골 군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즉 수라바야의 기원을 칸의 군대에 맞선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킨 것이다.

수라바야 명칭의 또 다른 어원은 상어를 뜻하는 ‘수라(sura 혹은 suro)’와 악어를 뜻하는 ‘바야(baya 혹은 boyo)’의 합성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동부 자바 지역에서 수라바야가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선 것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기였다. 15세기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유럽 열강들은 정향과 육두구로 대표되는 향신료를 얻기 위해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육두구 500그램이 황소 일곱 마리 값이었다니 향신료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수라바야 항구는 네덜란드와 식민지 지배를 둘러싸고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의 지배권에서 벗어난 이점도 있었다. 네덜란드는 수라바야 항구를 농산물을 수출입하는 항구이자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항으로 활용했다.

독립 이후 수라바야시

도시가 쇠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강원도 정선군은 1950년대 초 함백탄광을 시작으로, 1960년대 사북, 원동, 동원 탄좌가 문을 열면서 호황을 누렸다. "개들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탄광산업은 이 지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전성기를 누리던 이 지역은 석탄에서 석유로 연료가 바뀌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경제구조의 변화로 인해 도시 성장을 주도했던 산업이 더 이상 발전을 이끌지 못할 때 그 도시는 점점 쇠퇴한다.

수라바야 전투는 인도네시아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당시 인도네시아공화국의 군인 1만 5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20만 명의 수라바야 시민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공화국 입장에서는 많은 피해를 입은 전투였지만, 희생적인 저항으로 혁명의 상징성과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더욱이 국제외교 측면에서 수라바야 전투는 영국이 인도네시아 문제에 있어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11월 10일은 훗날 ‘영웅의 날(Hari Pahlawan)’로 제정되어 외세에 저항한 수라바야 시민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광복 76주년을 맞이한 인도네시아공화국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수라바야와 밀접하게 연결된 인물이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다. 수카르노를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국한하기에는 그의 삶과 사상을 다 담을 수 없다.

그는 사상가이자 민족주의자이자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동시에 사회주의자로서 반식민주의 투쟁을 벌인 혁명가였다.43 그는 23년간(1945~1967) 대통령에 재임했고, 1959년에 대통령령을 통해 제12대 외무장관 겸 종신 대통령으로 독재자의 길로 들어섰다.

수카르노 말년에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폄훼했고, 그의 우상화 작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득권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수하르토의 군사독재에 저항한 중심인물로 수카르노는 재평가를 받았고, 그의 딸이자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초크로아미노토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사상적 기초를 세운 교육자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그에게 ‘왕관 없는 자바의 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도시면서 국가인 싱가포르는 특이한 나라다. 면적은 부산보다 조금 작은 728.6제곱킬로미터이며, 570만 명(2019년 기준)의 인구가 거주한다. 2020년 기준 1인당 GDP는 5만 9797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부자 나라이지만 자원도 거의 없고, 첨단산업을 제외하면 한국처럼 제조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570만 인구 가운데 170만 정도는 외국인이다.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이 중국계라서 중국에서는 중화권으로 인식하는 반면, 정치·경제·행정 시스템은 서구식인 데다 영어를 사용해 미국과도 가깝다.

심지어 싱가포르는 미군이 상시 주둔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우방이다. 그 때문에 미국과 중국이 동남아시아에서 패권 경쟁을 할 때 둘 다 최소한 싱가포르는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2018년 1차 북미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사회 시스템의 기초를 세운 이가 바로 싱가포르의 국부라 불리는 리콴유(李光耀, Lee Kwan Yew)다. 그는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 자치를 획득한 1950년대 말부터 싱가포르의 기틀을 마련했다.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는 국가의 기초 요소라 할 수 있는 재료들이 없었습니다. 동질적인 인구, 공통으로 쓰는 언어, 공통으로 추구하는 미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는 길죠. 제가 해야 할 몫은 한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여기에 싱가포르가 감추고 싶어 하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싱가포르는 중국계가 주류인 사회라는 것이다. 인구 규모로 보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으로 보나, 사회 구조로 보나 중국계가 핵심이다.

싱가포르 역시 도시계획과 구획은 영국인들이 했지만, 실제 개발과 건설은 대부분 중국계 이주민들이 담당했다. 이후 인구의 최소 50퍼센트 이상(20세기에는 70퍼센트 이상)이 중국계일 정도로 싱가포르는 중국계 이주민 중심의 식민도시로 성장했다.

그런 이유로 식민도시 싱가포르의 개발은, 도시 건설 동원, 자유무역항의 이점 및 상업 주도권 획득, 새로운 노동의 기회를 찾아 페낭, 믈라카, 푸젠, 광둥으로부터 이주해온 중국인들의 거주구역을 조성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굳이 ‘차이나타운(唐人街)’이라고 지칭하진 않았지만, 중국인들이 조성하고, 중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거리 및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차이나타운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래플스가 이 같은 지침에 따라 도심 거리를 조성하도록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고온다습한 열대 기후와 뜨거운 태양 빛, 우기에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성 소나기를 피하기 위한 배려였고, 두 번째는 배수와 방화를 고려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통풍이 잘되도록 해서 식재료 및 공간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네 번째는 질서정연하고 통일감 있는 건축물을 배치해 도심의 미관을 돋보이도록 고려한 것이었다. 다섯 번째는 도심지에 상점으로 연결된 도로를 형성함으로써 일종의 쇼핑 아케이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공간은 주로 상업을 담당하던 중국계 이주민들의 주거 공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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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까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게 발리는 별로 매력적인 섬이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가 관심을 갖고 있던 육두구, 정향, 커피, 사탕수수 등 향신료와 상품작물이 발리에서는 충분히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풍부한 쌀, 노예무역을 위한 인력 공급지, 인도네시아 동부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연결하는 중계무역항으로 활용되었다.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1846년 발리섬 북부의 싱아라자 항구가 있던 불레렝(Buleleng) 왕국을 시작으로 1906년부터 1908년까지 바둥(Badung), 타바난(Tabanan), 클룬쿵(Klungkung) 왕국까지 8개 소왕국을 정복했다.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의해 소왕국이 정복당하던 시기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906년 9월 바둥 왕가의 ‘뿌뿌딴(puputan)’이다.

덴파사르에 도착한 네덜란드군은 기존의 전투와 다른 모습에 직면했다. 1906년 9월 20일 행진의 선두에 있던 왕이 타고 있던 가마에서 내리자, 힌두교 사제는 왕의 뜻에 따라 크리스(keris, 단도)를 왕의 가슴에 꽂았다. 왕을 따르던 귀족과 주민들도 자결을 선택했다. 아이를 안고 있던 여성은 보석과 금화를 네덜란드 군대를 향해 던짐으로써 그들을 조롱했다. 당황한 네덜란드 군인들은 소총과 포탄을 난사했고, 수백 명의 주민이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발리인은 네덜란드군의 엄청난 화기를 이미 경험했기에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마지막 항전이자 무저항 자결 행진을 택했던 것이다.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약 1000여 명의 발리인이 명예의 죽음 행진을 선택했다. 이후 발리 전 지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에 포함되었다.

바둥 뿌뿌딴은 발리를 넘어 전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저항을 상징하는 국가 유산이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인에게 뿌뿌딴 공원(Taman Puputan Badung), 자갓나타 사원(Pura Jagatnatha), 발리주립박물관(Museum Negeri Propinsi Bali)은 발리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약 100년 전 수많은 사람이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던 자리에 뿌뿌딴 공원과 기념조형물을 건립하여 이들의 정신을 기린다. 기념조형물은 네덜란드 군대에 대항해 보잘것없는 무기를 들고 영웅적인 자세를 취한 3명의 발리인 가족을 묘사한다. 여성의 왼손에는 네덜란드군을 조롱하려고 던진 보석이 들려 있다.

신들의 섬에서 만나는 전통 무용과 음악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 강희정,김종호 등저

미국의 인류학자 기어츠는 발리인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주술적 신앙과 관행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했다. 발리의 어원 역시 ‘제물 등을 바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스크리트어 ‘와리(wari)’인데, 발리 힌두교의 믿음의 기반은 천상계의 신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행위의 일상적 반복이다.

수십 명의 남성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그런 원을 만든 후 개구리 울음소리인 "께짝께짝"을 합창한다. 원숭이 군단의 군무와 라마야나 이야기에 기초한 춤이 한데 어우러져 한 편의 종합 예능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참상을 겪은 서구인들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에서 ‘진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에덴의 가든’이나 ‘진짜’의 이미지를 발리에서 찾고자 했다. 과거에 대한 복고적인 향수를 발리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관광지 발리’는 1920년대 이러한 믿음에서 시작되었고, 한 해 500만 명의 외국인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하지만 발리섬의 상업화에 따라 관광객의 여행 만족도가 점점 더 낮아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공정관광, 대안관광, 생태관광 등 좀 더 나은 관광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어쩌면 100년 전 서구인이 찾았던 ‘진짜 발리’나 좀 더 나은 여행을 찾는 현대인에게 발리인의 진정한 삶이 펼쳐지는 덴파사르가 새로운 대안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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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소개 Caffe人(카페인)
서울대학교 커피 동아리

잠 쫓기 위해 마시던 커피,
이제 맛과 향을 즐겨 보아요!

2007년 3월, 국내 최초의 커피 동아리로 
태어났습니다.
카페인(Caffe)에는 커피와 디저트의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때문에 커피를 사랑하고 아침에 만든 
갓 볶은 커피의 향기를 알고 있다면 누구나
카페인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모든 단과대에 걸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고, 대학원생도 가입 가능합니다.
동아리의 주된 활동으로는 커피 모임, 
커피 교육 등이 있습니다.
커피 모임은 서울의 유명한 카페들을 
찾아다니는 활동입니다.
한 학기에 한 두번씩 커피 교육을 진행하고, 
평소에는 동아리방에서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실 수도 있습니다.
3월 초에 열리는 동소제에 오셔서 자세한 사항을 물어보세요!

동아리소개 Caffe人(카페인)
서울대학교 커피 동아리

잠 쫓기 위해 마시던 커피,
이제 맛과 향을 즐겨 보아요!

2007년 3월, 국내 최초의 커피 동아리로 
태어났습니다.
카페인(Caffe)에는 커피와 디저트의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때문에 커피를 사랑하고 아침에 만든 
갓 볶은 커피의 향기를 알고 있다면 누구나
카페인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모든 단과대에 걸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고, 대학원생도 가입 가능합니다.
동아리의 주된 활동으로는 커피 모임, 
커피 교육 등이 있습니다.
커피 모임은 서울의 유명한 카페들을 
찾아다니는 활동입니다.
한 학기에 한 두번씩 커피 교육을 진행하고, 
평소에는 동아리방에서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실 수도 있습니다.
3월 초에 열리는 동소제에 오셔서 자세한 사항을 물어보세요!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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