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주 바로 옆에 있는 치앙라이주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자연과 예술, 그리고 커피의 도시"라고 나온다. 사실 치앙라이주가 커피 생산지로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7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세계 최대의 아편 무역지였다.

치앙라이주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려고 한다면 여권이나 비자 없이 산길과 강줄기를 따라 태국과 미얀마/버마, 라오스를 자유로이 넘나들던 소수민족이 현 짜끄리 왕조가 재창조해낸 타이 민족국가의 경계인이 되어가는 가슴 아픈 역사를 피할 수 없다.

2021년 6월 말 태국 정부가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55만 명에 이르는 국적 없는 인구의 대다수가 태국 국경 지역에 살고 있고, 그중 42퍼센트가 치앙마이주와 치앙라이주에 몰려 있다.

이 도시의 역사기행을 태국, 미얀마, 라오스의 국경이 만나는 황금 삼각지(Golden Triangle)가 위치한 치앙센에서 시작해서 치앙라이주의 주도인 치앙라이시티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제국의 경계에 정착한 소수민족

13세기부터 태국 북부 지역은 란나(‘100만 개의 논’이라는 뜻) 왕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치앙라이는 란나 왕국의 수도였으나, 왕국이 건설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마족에 의해 점령당한다.

18세기에 치앙마이로 수도를 옮긴 란나 왕국은 치앙라이를 버마족으로부터 수복했지만, 19세기 말에 짜끄리 왕조(1782~현재)에 굴복하면서 치앙라이와 치앙마이는 모두 시암(지금의 태국)에 합병되었다.

1940년대 말, 치앙라이주 행정관으로 임명된 분추에이 시사왓은 휴일이면 산으로 하이킹을 가곤 했다. 치앙라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지방 풍속도 배우고 지리도 익힐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1950년에 쓴 책이 『삼십 찻 나이 치앙라이』다. 이 제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55 ‘치앙라이 안의 30개 나라’ 혹은 ‘치앙라이 안의 30개 민족’. ‘찻’은 영어로 ‘nation’으로 번역되는데,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 의견이 분분하다. 분추에이가 정의한 ‘찻’은 역사를 가진 문화 공동체였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종교가 비슷하며, 먹는 음식과 습관이 비슷한 그런 공동체 말이다.

태국 북부 지역의 소수민족이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냉전시기부터다. 특히 1949년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미국의 중앙정보부(CIA)는 국경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소수민족이 공산당의 선전에 넘어가 동조자가 된다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버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까지 공산당 천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고산지대에 사는 소수민족들은 아편을 재배해 마약상에게 팔아 본의 아니게 골든트라이앵글 마약 거래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국적이 없었기에 태국이라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짜끄리 왕조에 굴복하기 전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도 북부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란나 왕국의 무역 중심지가 바로 이 치앙센이었다. ‘치앙’은 한자 ‘성(城)’에서 나온 말이고, ‘센’은 ‘10만’이라는 뜻이다. 왜 ‘십만 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만큼 많은 재물과 사람이 모인 것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렇게 거래된 아편은 버마 국경에서 중국 공산당에 저항하고 있던 국민당 잔류군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했고, 수많은 소수민족의 현금 축적 수단이 되었으며, 태국의 일부 군부가 재산을 불리는 데도 기여했다.

소수민족에게 국경의 의미는 남다르다.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이 다수민족의 편의에 따라 그려지면서 소수민족들은 가족이나 친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소수민족 다수가 시민권이나 국적이 없어서 학교에 다니거나 취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들이 인신매매나 브로커를 통해 태국으로 들어와 취업한 경우 노동권은 고사하고 인권도 보호받을 수 없다. 태국도 미얀마도 반기지 않는 국적 없는 소수민족의 문제는 사실 20세기에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이 빚은 비극이다.

치앙라이가 보여주는 역사는, 그리고 이 도시를 통해 본 태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국경’과 국경에 사는 ‘변방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없이 평화롭고 한없이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란나 제국의 흥망성쇠와 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등장, 그로 인해 우리와 그들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지면서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대하드라마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는 끝나지 않을 그런 역사가 치앙라이에 있다.

태국 역사에서 이성계만큼 명장으로 기록되는 딱신이 1768년에 짜오프라야강 동쪽에 있는 톤부리라는 도시에서 톤부리 왕조를 시작했고, 1782년에 아유타야 귀족 출신인 텅두앙이 짜오프라야강 서쪽에 있던 방콕이라는 도시에서 라타나코신 왕조를 시작했다.

방콕이 대도시로 성장하게 된 것은 해외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대영제국, 동쪽으로는 프랑스, 북쪽으로는 중국이라는 열강의 틈새에서 완충지대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국가라는 점도 주효했다.

태국의 세종대왕이라 불릴 만한 라마 5세 쭐라롱껀 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받아 행정, 교육, 경제, 외교 분야에서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가 가장 개혁적이고 가장 사랑받는 국왕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노예제와 왕족 앞에서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절하는 의식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냉전시기 민주화의 성지 탐마삿대학과 랏차담넌 길

1950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막대한 원조개발과 베트남 전쟁 특수로 태국의 경제가 성장하게 된다.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중산층이 확대되었고, 이들은 더 큰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누리고 싶어 했다. 우리의 1970년대가 그러했듯 태국 학생들은 군인 정치가들이 미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며 반미 민주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탐마삿대학에 모여 1973년에 퇴진한 군부의 귀국과 정치활동 재개를 반대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를 했다. 이를 시작으로 극우 청년들이 정문을 뚫고 들어가 시위하던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하거나 죽였다. 그날 오후 군부세력은 쿠데타로 정권을 탈환했다. ‘혹뚤라’(‘10월 6일’이라는 뜻)로 알려진 탐마삿대학 학살은 우리의 광주 민주화운동처럼 오랜 시간 동안 의도적으로 지워진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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