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제2의 도시는 제법 큰 규모와 인구를 갖고 있지만, 제1의 도시가 가진 규모와 위상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지 않는다. 때로는 해당 도시에 위치한 건축물의 규모와 역사에도 ‘두 번째’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제2의 도시인 부산과 오사카는 그 도시만의 고유한 특징이 매력적이지만, 제1의 도시인 서울과 도쿄에 비해 국제적인 인지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인 수라바야 중심부에는 약 29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수라바야 광역 대도시권은 약 1000만 명이다. 수라바야는 마두라 해협에 있는 자바섬 북동쪽 경계선에 위치하며, 동부 자바의 가장 큰 강인 브란타스강의 두 갈래 중 하나인 칼리마스강 하구의 저지대에 인접한다.
수라바야는 ‘영웅의 도시(Kota Pahlawan)’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인도네시아가 300여 년에 걸친 네덜란드 식민의 역사를 청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상징성 때문이다.
수라바야는 자바어인 ‘수라 잉 바야(Sura ing baya)’에서 유래한 말로 ‘위험에 용감하게 대처하다’라는 의미다.
라덴 위자야(Raden Wijaya)39와 그의 군대가 1293년 5월 31일 쿠빌라이 칸의 몽골 군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즉 수라바야의 기원을 칸의 군대에 맞선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킨 것이다.
수라바야 명칭의 또 다른 어원은 상어를 뜻하는 ‘수라(sura 혹은 suro)’와 악어를 뜻하는 ‘바야(baya 혹은 boyo)’의 합성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동부 자바 지역에서 수라바야가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선 것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기였다. 15세기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유럽 열강들은 정향과 육두구로 대표되는 향신료를 얻기 위해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육두구 500그램이 황소 일곱 마리 값이었다니 향신료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수라바야 항구는 네덜란드와 식민지 지배를 둘러싸고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의 지배권에서 벗어난 이점도 있었다. 네덜란드는 수라바야 항구를 농산물을 수출입하는 항구이자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항으로 활용했다.
독립 이후 수라바야시
도시가 쇠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강원도 정선군은 1950년대 초 함백탄광을 시작으로, 1960년대 사북, 원동, 동원 탄좌가 문을 열면서 호황을 누렸다. "개들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탄광산업은 이 지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전성기를 누리던 이 지역은 석탄에서 석유로 연료가 바뀌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경제구조의 변화로 인해 도시 성장을 주도했던 산업이 더 이상 발전을 이끌지 못할 때 그 도시는 점점 쇠퇴한다.
수라바야 전투는 인도네시아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당시 인도네시아공화국의 군인 1만 5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20만 명의 수라바야 시민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공화국 입장에서는 많은 피해를 입은 전투였지만, 희생적인 저항으로 혁명의 상징성과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더욱이 국제외교 측면에서 수라바야 전투는 영국이 인도네시아 문제에 있어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11월 10일은 훗날 ‘영웅의 날(Hari Pahlawan)’로 제정되어 외세에 저항한 수라바야 시민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광복 76주년을 맞이한 인도네시아공화국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수라바야와 밀접하게 연결된 인물이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다. 수카르노를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국한하기에는 그의 삶과 사상을 다 담을 수 없다.
그는 사상가이자 민족주의자이자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동시에 사회주의자로서 반식민주의 투쟁을 벌인 혁명가였다.43 그는 23년간(1945~1967) 대통령에 재임했고, 1959년에 대통령령을 통해 제12대 외무장관 겸 종신 대통령으로 독재자의 길로 들어섰다.
수카르노 말년에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폄훼했고, 그의 우상화 작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득권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수하르토의 군사독재에 저항한 중심인물로 수카르노는 재평가를 받았고, 그의 딸이자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초크로아미노토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사상적 기초를 세운 교육자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그에게 ‘왕관 없는 자바의 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도시면서 국가인 싱가포르는 특이한 나라다. 면적은 부산보다 조금 작은 728.6제곱킬로미터이며, 570만 명(2019년 기준)의 인구가 거주한다. 2020년 기준 1인당 GDP는 5만 9797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부자 나라이지만 자원도 거의 없고, 첨단산업을 제외하면 한국처럼 제조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570만 인구 가운데 170만 정도는 외국인이다.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이 중국계라서 중국에서는 중화권으로 인식하는 반면, 정치·경제·행정 시스템은 서구식인 데다 영어를 사용해 미국과도 가깝다.
심지어 싱가포르는 미군이 상시 주둔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우방이다. 그 때문에 미국과 중국이 동남아시아에서 패권 경쟁을 할 때 둘 다 최소한 싱가포르는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2018년 1차 북미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사회 시스템의 기초를 세운 이가 바로 싱가포르의 국부라 불리는 리콴유(李光耀, Lee Kwan Yew)다. 그는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 자치를 획득한 1950년대 말부터 싱가포르의 기틀을 마련했다.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는 국가의 기초 요소라 할 수 있는 재료들이 없었습니다. 동질적인 인구, 공통으로 쓰는 언어, 공통으로 추구하는 미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는 길죠. 제가 해야 할 몫은 한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여기에 싱가포르가 감추고 싶어 하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싱가포르는 중국계가 주류인 사회라는 것이다. 인구 규모로 보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으로 보나, 사회 구조로 보나 중국계가 핵심이다.
싱가포르 역시 도시계획과 구획은 영국인들이 했지만, 실제 개발과 건설은 대부분 중국계 이주민들이 담당했다. 이후 인구의 최소 50퍼센트 이상(20세기에는 70퍼센트 이상)이 중국계일 정도로 싱가포르는 중국계 이주민 중심의 식민도시로 성장했다.
그런 이유로 식민도시 싱가포르의 개발은, 도시 건설 동원, 자유무역항의 이점 및 상업 주도권 획득, 새로운 노동의 기회를 찾아 페낭, 믈라카, 푸젠, 광둥으로부터 이주해온 중국인들의 거주구역을 조성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굳이 ‘차이나타운(唐人街)’이라고 지칭하진 않았지만, 중국인들이 조성하고, 중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거리 및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차이나타운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래플스가 이 같은 지침에 따라 도심 거리를 조성하도록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고온다습한 열대 기후와 뜨거운 태양 빛, 우기에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성 소나기를 피하기 위한 배려였고, 두 번째는 배수와 방화를 고려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통풍이 잘되도록 해서 식재료 및 공간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네 번째는 질서정연하고 통일감 있는 건축물을 배치해 도심의 미관을 돋보이도록 고려한 것이었다. 다섯 번째는 도심지에 상점으로 연결된 도로를 형성함으로써 일종의 쇼핑 아케이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공간은 주로 상업을 담당하던 중국계 이주민들의 주거 공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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