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백로白露들판 가득흰 이슬 내리고 - P178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더니, 바람 한번 설핏 불자 가을이 발치에서 맴돈다. 입추 지나 저서를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백로 지나 추석을 보냈다. 농경사회의 절기가 요즘 같은 새로운 유목의 시대에 가당키나 하겠는가마는, 때가 되면 절기에 눈길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오래도록 내 몸 어딘가에 박혀 있는 선조의 숨결때문일 것이다. - P178
밤 열시, 강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뛰는 발걸음이 가뿐하다.한참을 뛰고 난 뒤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초사흘 밤 눈썹달이 어두운 산허리 저편으로 빛을 흘린다. 밤 날씨는 제법 차가운데,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길섶에 달맞이꽃이 한 송이 피어 있다. 여름밤을 뛰다보면 온밤을 화사하게 수놓던 달맞이꽃이다. - P179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별은 보이지 않는다. 밤안개가 내리는지우둑한 하늘 저편에서 흰빛이 몰려온다. 아니면 밤이 깊어지자 흰이슬이 하늘 가득 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P180
오행五行으로 보면 가을은 금金에 속한다. 모든 기운을 죽이는숙살지기자신의 근간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는를형벌을 관장하는 기관과 연결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수많은 관계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것들을 매정하게가지치기를 해서 나의 근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절, 그게 가을이다. 가을이면 마음이 왠지 모르게 엄숙해지기도 하고 무겁게가라앉기도 하는 건 아마도 이런 탓일 게다. - P181
계절의 변화를 짐작조차 못하다가 뒤늦게나마 깨닫는 건 오로지자연 속에서 뭔가를 하는 덕분이다. 작은 풀잎의 색깔이 변화하는걸 보면서도 우주의 변화를 짐작하는 것은, 아마도 내 몸속에 여전히 천지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이라 풀벌레 소리가 잦아든 줄 알았는데, 발길 멈추고 희뿌옇게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어디선가 가늘고 희미하게 풀벌레가 운다. - P182
낙타털옷 사이로 이슬 스미며 새벽 찬 기운 살짝 느끼는데비껴 있는 별들은 너무도 밝아라.고요한 작은 다리 꿈속에서 지나는데깊숙한 저쪽에서 가을 벌레가 운다.露侵駝褐曉寒輕 星斗蘭干分外明寂嘆小橋和夢過 稻田深處草蟲鳴진여의陳與義, <이른 아침에 길을 가며早行> - P183
옛 어른들은 이른 저녁에 잠이 들어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보통새벽 네 시나 다섯 시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에 낮은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 새벽별을 보면서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네들은 언제나 별자리를 보고 천기를 짐작했다. 요즘은 밤늦도록 일을하다가 새벽이 되어야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새벽 별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어쩌다 새벽 별을 보게 되면 그 맑고 천연한 모습은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 P183
한밤중이 되어 뜰을 거닐어도 좋은 시절이 바로 백로 무렵이다.늦더위가 기승을 부린다지만 밤이 되면 제법 선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책을 읽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쯤이면 뜨락을 거닌다. 맑은 하늘에 별이 무수히 빛날 때도 있지만, 더러는 하늘 가득 흰 이슬이 내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고개를 쳐들고 계절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인다. 달빛이라도 밝을 양이면 더더욱 좋다. - P184
책을 덮고 뜰로 내려오니달빛은 물처럼 넘실거린다.가을 기운 서늘하게 옷깃에 가득하고소나무 그늘 빽빽하게 땅을 덮었다.온갖 벌레는 밤이 가기를 재촉하고기러기 한마리에 추운 계절 시작될 것을 안다.고요한 마음으로 세상 번뇌 잊었으니이 아름다운 맛을 뉘와 함께 할거나 - P184
捲卷下中庭 月色浩如水秋氣凉滿襟 松陰密鋪地百蟲催夜去 一雁領寒起靜念忘世粉 誰同此佳味문동文侗, <달빛 아래를 거닐며步月> - P185
무더위로 떠들썩했던 여름은 처서를 지나 백로에 이르면 거의 사라진다. 이제는 뭔가 고요한 생활로 진정되는 듯하다. 차분한 자세로 책을 읽고, 순선한 마음으로 달빛 아래를 거닐며, 세상의 온갖 명리와 번뇌를 잊는 것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이상적 삶이다. 그럴 때 느끼는 ‘아름다운 맛佳佳‘은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 P185
무더위에 처져 있던 온갖 물상들이 겨우 몸을 세우자 서늘한 가을 기운이 한해의 살림살이를 정리하라고 재촉한다. 이따금씩이라도 집 주변을 거닐어보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지 감동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그 작은 것들에 감동하는 사이, 우리는 나이를 먹고 머리는 서서히 흰빛으로 변해간다. 흰빛 이슬이 어느새 달빛과 함께 온 천지를 슬며시 적셔놓듯이. - P186
2023.09.16. 오늘부터 필사 시작어쩌면 꽃들이 아름다움으로너의 가슴을 채울지 몰라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영원히 닦아 없애 줄 거야그리고 무엇보다도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야
둘 이상의 세대가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분업의 일환으로 이타 행동을 하는 동물을 진사회성眞社會性 (eusociality) 동물이라고 한다. 개미, 꿀벌, 말벌 같은 ‘막시류‘ 곤충과 호모 사피엔스가 여기에 들어간다. - P35
"너 자신을 알라." 인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되었을 이 문장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아폴론 신전에 적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철학자가먼저 말했다고도 한다. 누구 말이든 어떤가.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되뇌어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 P43
그런 흐름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출산 파업‘이라는말이 나올 정도로 출산율이 떨어졌고 대입 수능시험 지원자수는 급감했다. 서울에서 먼 지역의 대학부터 대규모 정원미달 사태를 맞는 현상에 언론은 ‘벚꽃 엔딩‘이라는 노래 제목을 붙였다. 벚꽃이 먼저 피는 곳부터 대학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 P26
2022년도 출생 수는 25만 명에 미치지 못했다. 20년 후에는 이 아기들이 대부분 대학에 가도 정원을채우지 못한다. 지방의 대학이 멸종 상황에 들어가고 수도권 대학이 입학 정원을 줄인다면 어떤 학과가 과녁이 될까?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 분야 학과들이다. 놀랄 건 없다. 뻔히예측했던 일이니까. - P26
호모 사피엔스의 뇌가 생물학적으로 진화해 자신을이해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인문학이 사라지는 일은없을 것이다. - P27
과학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인문학에는 진리와진리 아닌 것을 가르는 분명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매우 그럴법하거나 그럴 것 같기도 한 주장과, 별로 그럴듯하지 않거나 아주 말이 안 되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럴법한 견해끼리 충돌하면 승패를 가리지 못한다. 어느 쪽도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 P28
인문학에는 과학과 달리 영원한진리가 없다. 한때 진리로 통하는 이론도 100년을 견디지 못한다. 스미스Adam Smith(1723~1790)의 ‘보이지 않는 손‘,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의 ‘사회다윈주의 ‘social Darwinism,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의 역사이론이 다 그랬다. - P28
오래된 울타리 안에 머물면서 오래된 것에 집착하면, 과학이 새로 찾아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과학과 소통하고 교류하기를 거부하면, 대학의 인문학은 존재의 근거를 잃을 것이다. 대학 밖의 인문학은 그렇지않다. 대중은 대학이라는 제도를 거치지 않고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인문학을 만나며 학습하고 있다. - P29
‘내 몸과 똑같은 배열을 가진 원자의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 P32
‘정신은 물질이 아니지만 물질이 없으면 정신도 존재하지않는다.‘ - P32
‘자아는 뇌세포에 깃든 인지 제어 시스템이다.‘ - P32
‘내몸을 이루는 물질은 별과 행성을 이루는 물질과 같다‘ - P32
‘지구 생물의 유전자는 모두 동일한 생물학 언어로 씌어 있다.‘
‘태양이 별의 생애를 마칠 때 지구 행성의 모든 생명은 사라진다.‘ - P32
‘모든 천체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서로 멀어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우주 전체가 종말을 맞는다.‘ - P32
인문학에 가장 크고 깊고 넓은 변화를 가져다준 과학적 발견은 무엇이었을까? 누구에게 가장 큰 감사패를 주어야 할까? - P32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와 다윈을 공동 수상자로 추천한다. 두 사람은 ‘우리 집과 우리 엄마‘의진실을 밝혔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진실을 받아들여야한다. - P33
16세기에 과학이 가장 높게 발전한 곳은 유럽이었다.그렇지만 그때는 유럽 사람들도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을 믿었다. 천동설은 유치한 관념이어서 누가 창안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땅이 멈추어 있다고 느낀다. 해와 달이 동쪽에서 올라와 서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본다. - P33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 한 바퀴 도는 별의 움직임과 태양계다른 행성의 ‘여행‘ 현상을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괜찮았다. ‘인문학 천재‘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상계와 천상계는 서로 다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이론으로 문제를해결했다. - P33
우리의 감각으로 우리의 공간에 특권을 부여한 천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 권위와 로마 교황청의 권력을 등에 업고 진리인 양 군림했다. 과학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턱대고 믿을 만한 사람이아니다. 그 사실이 드러나는 데 2,000년이 걸렸다. - P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