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코오는 그 벽돌 두께 부분에 새겨진 명문을 읽어보았다.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한자의 훼손도 없는 완벽한 명문이었다. 순간 사코오의 가슴에는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 P173
삼가 생각컨대 옛적 추모왕(鄒牟王)께서 국기(國基)를 창사하시다. 북부여에서 나섰으며, 천제의 아들이시며, 어머니는 하백여랑(伯)이시다. 알을 깨뜨리고 아들을 낳으시니 성덕이 있으시다. - P182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내리실 때에 부여의 엄리대수(俺利大水)에다다르시다. 왕이 나루터에서 외쳐 가로되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여랑이시다. 나를 위해서 나룻배를 발(發)할지어다‘하시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거북(浮龜)이 떠올라 연(連)해졌으므로 왕이 건너서비류국(治國) 홀본(忽本) 서성산상(西城山上)에이르러 도읍하시다. 불락세위(병고)하셨으며, 천제황룡(天帝黃龍)을보내시어 왕을 맞이하시니 왕이 홀본 속강(束昰)에서 황룡에 업히어하늘에 오르시다. - P182
후사를 세자 유류왕에게 부탁하였으매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시다. 대주류왕(大朱留王)이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전하여 17세손 국가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다. 29세에 등조하셨으며 호를 영락대왕이라 하였다. 은택(恩澤)을 황천(黃泉)에 받으시어 위무(威武)가 4해에 떨치시다. □□ 을 소제(掃際)하니 서민(庶民)이 그 업에 평안하며 나라가 - P183
부강하고, 백성이 은성하며 오곡(五穀)이 풍숙(豊)하다. 호천이 불조하시와 39세에 평안히 수레에 오르셔서 나라를 버리시다. 갑인년 9월29일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공훈과 업적을 명기하여 후세에 전하니 그 사詞)에 가로되………. - P184
영락 5년(395년) 을미왕이 비(碑麗,契丹)가 □□을 침범하므로 사(師)를 거느리시고 거부산(巨富山) 부산(負山)을 토벌(討伐)한다음 염수상(鹽水上)에 이르러 그 삼부락(三部落) 600~700을 파(破)하고 노획(鹵獲)한우, 마, 양이 부지기수라. 이에 어가개(御駕凱) 선(旋)하매 평도를 지나 동으로 와 ㅁㅁ력성(力城)과 북으로 풍오비유(豊五備猶)를 거쳐 변방을 순찰하고 유럽(遊獵)하면서 귀국(歸國)하시다. - P184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조공해 왔다. 그러하던 바 왜(倭)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라(羅)를 파하고 신민으로 만들었다. ……….. - P185
6년 병신(丙申)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과잔국(百濟)을 토벌하여 군(軍)□□ 먼저 일팔성(壹八城)을 공취하고 ……………(중략)·····…. ...... 적(賊)이 □기(氣)치 아니하고 감연(敢然)히 나와 백전하는지라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정병(精兵)을 척박성(刺迫城)에 보내어 횡□□□□ 그 국성(國城)에 다다르니 백제왕(百濟王)이 곤핍(困逼)하여 남녀주(男女主) 1000인과 세포 1000필을 헌납하고 왕에게 귀순(歸順)하여 스스로 맹세(盟誓)하되 자금이후(自今以後)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 하였으므로 용서하고 태왕이 미지어(迷之御)로 하여금 항복문을 받게 하다…. - P185
약오만년지후, 안수묘자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사코오는 소리를 내어 그 문장의 뜻을 중얼거려 보았다. ・・・・・・ 나의 만 년 후까지 어찌 묘(墓)를 편안히 지킬 수 있으리오." 아마도 장대한 비문의 거의 끝부분인 모양이었다. 만 년 후일지라도 자신의 무덤이 타인에 의해서 도굴되지 않고 편안히 지켜지기를 바랐던 왕의 바람이 적혀 있는 단 한 줄의 문장이었다. - P190
이고 육군 포병 대위종6위, 혼5등 사코오 가게노부의 유적명치 27, 28년의 전역(戰役, 청일전쟁을 가리킴)에 이바지한 바 적지 않으므로 금 5백 엔을 하사함.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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