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D]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학이야기
김주한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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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해 이다.(1517. 10.31)
그가 없었다면 우린(기독교 인),난 아직도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알지 못한채 우매함 속에서 율법에 짓눌리고, 성직자들에 의해 착취와 영혼의 유린을 당하며 살고 있을 게다.

나에게 신앙의 자유와, 사랑의 하나님을 돌려준 루터에게 경의를 표한다.
루터의 철저한 신앙의 고뇌와,열정과, 확고함의 뚝심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 질수 없었던 종교개혁!
수많은 생명의 위협속에서도, 개혁 동지들과의 불협화음 속에서도, 병든 몸을 이끌고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 까지도 개혁의 설전을 멈추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불태운 온전히 하나님께 합한 자.

이 책은 지루하거나, 어렵게 루터의 종교개혁 연대를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와 신앙의 고뇌와 주요사상, 개혁의 발단과 과정을 쉽게 서술해서 일반인도 루터를 더 자세히 알수있고 이해하기가 쉽게 쓰여졌다. 단순히 종교개혁 자 루터가 아닌 인간으로써 고뇌하는 루터를 알수 있다.

16세기 유럽은 '다중심주의', '유동성'의 시대로 교황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중세의 수도승들이나 사제들은 '선행의인화'
신학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수행과 경건 훈련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믿었다.
루터 또한 그의 스승을 만나 신앙의 자유,
사랑의 하나님을 깨닫기 전까지는 탁발 수도승으로 세상에서 구걸을 하며 자신을 철저히 버리고 고행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 애썼다. 루터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에게 그리스도는 위로와 축복과 해방을 선사하는 분이 아니라 독재자 였다.

그런 루터에게도 종교적인 위기가 있었다.
루터는 어릴적부터 실존적인 고통과 인생에 대한 깊이를 너무 일찍 경험하고 있었다.
종교성이 강한 사람으로서 늘 내적인 고민과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놓고 씨름하였다.
과연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인가? 내 인생의 미래는 어떻게 될것인가?
루터도 나와 같은 고뇌를 했다는 점이 위로가 되고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루터가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한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에서 탈출하게 된 계기는.
스승 슈타우피츠의 가르침을 통해서였다.
그는 우리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완전에 이르려는 노력보다는 죄의 한복판에서 있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신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보라고 가르쳤다. 우리와 함께하신 고통받으신 그리스도를 보라고.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서를 교권과 교리로부터
해방시켰다. 교황만이 성서의 무오류한 해석가라는 점을 거부하였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지니고 있다고
주창하였다.

루터의 테제는 당시 부패한 교회의 상징이었던 면죄부 판매와 고백성사에 관한 문제, 교회의 권위, 교황권, 복종의 문제,상례전, 구원의 교리 등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문제들을 다시 검토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루터의 신앙은 어느 누구도 강제할 수 없는 자유로운 선물이라고 말한다.
"나는 어떤 사람도 무력을 통해서 구속하지 않을 것입니다.왜냐하면, 신앙은 강압으로가 아닌 자유롭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계몽 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본문 중-

루터는 신앙에 있어서 강하게 억압하거나. 강제적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았지만,
로마 교황청을 향한 질타와, 이단 들에 대해서는 불과같은 독설을 서슴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청의표적이 되었고, 개혁동지들로 부터 루터의 개혁방식이 너무 중세적이며 가톨릭 교회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질타를 받았지만, 루터는 '오직성서'만을 주창했다. 혁명이 아닌 개혁을 원했던 것이다.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라고 주창한 루터의 부르짖음을 오늘, 지금의 교회들이 듣고 회개하며, 제2의 종교개혁을 할 때 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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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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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면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듯 바로 읽게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한참을 서로 줄다리기 하듯 가만히 두고보다 읽게 되는 책이 있다.
어?! 왜 이제야 읽었을까 진작에 읽을걸 하고 밀당한 것을 매우 후회하며,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음~~ 밀당을 더 할걸 하는 마음이 드는 책이 있다. 언어의 온도는 내게 밀당에 진듯한 기분이 드는 책이다
출판되면서 계속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와 있기에 관심만 두다 이번에 눈을 맞추며 읽어 내려갔다.
작가의 주변에 대한 호기심과 관찰력이 대단하다.
주변의 모든 풍경과 상황과 사람들을 흘려 보내지 않고 세심하게 눈길을 주며 이야기를 하며 마음속에 담아낸다. 딱 거기 까지 .
더 이상의 특별함도 새로움도 없다.
왜? 이토록 오래도록 베스트셀러 인지를 모르겠다.
쉽고 편하게 읽혀지기 때문일까? 아님 자신의 주변 사람들 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을 소소하게 대립시키며 써내려가서 일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읽던 내용 같은 부분이 많다. 그건 아주 보편적으로 우리 일상에서 마주치는 풍경, 상황을 다루고 있어서 인듯하다. 작가는 많은 호기심과 주변에 관심이 많아야 글감과 필력이 좋아진다.
그런점에서 이기주 작가는 적확하다.
내용도 어렵지 않고, 언어의 온도도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사람의 체온 36.5도를 유지하고 있다. 누구나 쉽고 부담없이 읽기에 좋은 책 이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에는 감정이 잔뜩
실리기 마련 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정서적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얼음같은 차가운 표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돌려세우긴커녕 꽁꽁
얼어붙게 합니다."-
- 본문 중 -

내면이 강한 사람은 강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말로써 상대방을 감싸버린다. 강한 말투는 자신을 확신할 수 없어서 이며,약함을 포장하기 위함이다.
활화산 같은 말은 상대를 설득시킬 수 없으며
나와 상대방을 태워 버릴 뿐이다.
나는 얼마나 많이 확신에 찬 말을 했으며,
차갑고 뜨거운 말들을 쏟아냈는지 모르겠다.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 또한 하나의 수행이며 많은 노력이 필요한것 같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좀더 언어의 품격을 높일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겠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36.5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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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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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으로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소감에서 언급한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 만든 영화 '사일런스'의 원작이다. 스콜세이지 김독은 소설을 읽고 너무 감동해 즉시 영화화 판귄을 샀다고 한다.

내용은 17세기 일본 기독교인들이 심하게 박해받던 때를 배경으로
신과 신앙에 대한 회의를 깊이있게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예수회 소속의 포르투갈 선교사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하고 소식이 끊긴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가 그의 행적을 쫓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과 갈등의 내면을 겪는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아주 오래된 영화로 모두의 기억에 역력한, 장엄한 폭포를 배경으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장면에서 그 유명한 곡 '넬라 판타지아' 가 흐르는 "미션"과는 조금 다른 감동이 있다. 동일한 점은 비슷한 연대 배경으로 예수회 소속의 포르투갈 신부라는 것. '미션'의 가브리엘 신부는 사명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 비폭력으로써 순교를 택한 반면, '침묵'의 로드리고 신부는 고통받는 신도들을 위하여 배교를 선택 했다는 것이다. 순교를 주제로 한 얘기는 뻔할 거라 생각했는데 읽는 내내 가슴에 바위을 얹어 놓은 듯한 눌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의 고뇌와 성직자로서의 갈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한없이 약하고 약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의 고통에 침묵하고 계신 것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아니 나를 버리셨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로드리고 신부도 하나님이 이 가난하고 불쌍한 농민들의 박해와 순교를 왜, 가만히 침묵하고 계시냐고 울부짖는다.

-"당신은 어째서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까?
'저희가 당신을 위해 만든 마을조차 불타 버리도록 당신은 방관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사람들이 추방당할 때도 당신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지 않고 이 어둠처럼 다만 침묵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왜, 어째서? 왜인지 그 이유만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는 당신이 시련을 주기 위해 그 악창에 걸리게 했던 욥처럼 강한 인간이 못됩니다. 신도들은 가난하고 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고통을 이제 더는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신부는 기도했지만 바다는 여전히 어둡고 차디차게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결국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그는 두려움에 떨며 생각했다.~~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로드리고 신부가 배교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이 배교를 하지 않으므로 평생을 착취당하며 가난에 굶주려 살던 신도들의 구멍 매달기 고문을 지켜만 봐야 한다는 무력함과 서글픔 때문이었다, 페레이라 신부의 진정한 순교는 저 불쌍한 교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라는, 설득에 동의하며 배교를 한다. 아니 그 수많은 갈등 속에서,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에서 신부는 열렬한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깨달으며 성화를 밟고 배교를 한다.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많은 부분이며, 스콜세이지 감독이 1990년에 판권을 사고도 2016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이유 이기도하다. 원작의 마지막 20쪽의 내용인 신을 부인 한다는 것이 무엇이여, 예수의 음성을 어떻게 영상으로 해석할지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25년이 넘도록 고민하여 만든 영상인데 흥행하지는 못했다. 배교라는 예민한 주제 때문인듯하다.
신부는 불쌍한 신도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구멍 매달기 고문을 했다면 절대로 배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 읊조린다. 아니 그건 변명이고 핑계일 뿐, 자신은 기치지로와 같은 배교자 일뿐이라고 말하지만, 아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에게 그 순간은 거룩한 순교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었을 것이다. 순교는 성직자에게 큰 영광의 메달이기에 그걸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침묵에서 아주 흥미롭고 핵심적인 인물로 원주민 기치지로가 있다. 그를 보면서 인간의 나약함, 순수함, 간교함을 모두 볼 수 있다.
세 번의 배교를 하고 세 번의 회개를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을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로 흉내 내라고 말씀하신다고, 그건 자기에게 무리라고 억지라고 주장하며 억울해 한다. 그로서는 신앙을 지키려 한 최선의 노력이었다는 걸 알수있다. 마치 새벽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부인하던 베드로의 모습과 흡사하다. 베도로의 모습이, 기치치로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다.

기치지로의 이런 모습을 '신앙의 상태' 라고 말 할 수 있다.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일시적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늘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악이 번성하고 하나님이 내 고통에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느낀다. 이는 우리에게 허용된 의심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셨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의심을 탓하지 않으신다. 신앙에서의 의심은 퇴보가 아니라 전진 일 수 있다. 믿음이란 말과 신앙의 상태에 있다는 말을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신앙의 상태는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이는 신앙 상태의 본질적인 상태로 의심은 불가피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해의 한계, 인식의 한계,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분이기 때문이다. 의심이라는 것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뼘 빛밖에 없을 때의 지팡이 같은 것이다. 의심이라는 지팡이는 우리의 나아갈 바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 연세대 신학박사 김학철 교수 저서 중 -"

기치지로의 배교와 회개의 반복은 그가 신앙의 상태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치지로는 믿지만 의심했고, 의심했지만 믿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삶의 가치에 대해 묻지 않고 살 순 없다. 순간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지 않고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살기는 정말 힘들다. 문제는 믿음의 주제에 대해서 의심도 갖지 않고 관심도 없는 상태 냉담자가 되는 것이다.

신부는 신앙의 배교를 하였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예수회에서 쫓겨나고 배교자란 핍박을 받아도 자신 안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괜찮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평안하고 기쁨이 넘쳐나 보였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게 아니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셨다는 걸 그는 느낀 것이다.

영화와 책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책을 택하겠다. 영화에 원작자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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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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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가방에서 뭔가 톡하고 떨어졌다.
떨어진 바닥을 내려다보니 노란색 작은리본이 덩그마니 떨어져있다.
작년 촛불 집회에서 받아 가방에 달고 다니던 세월호 고리였다.

-문제가 없어서 문제없었던 것이 아니라,
문제가 없는 척했고,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문제를 감췄거나, 미뤘거나, 포기했거나, 망각했기에, 문제를 정상으로 오인하며 자욱한 안개 같은 문제들 속에 함께 어울려 살았기 때문에 문제 없이 오늘 하루의 무사함을 심드렁하게 영위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끄덕끄덕 흘러가는 태평한 그날그날이 4월16일의 세월호는 아닌가?-
-본문 중-

그렇게 난 또 끄덕끄덕 태평한 그날그날을 살고 있었나보다. 그 꽃다운 아이들을 보내며
내 자식인양 부르짖고, 기도하고, 간헐적 단식에 동참하며 목소리 높여 분노의 소리를 내지르던 때를 뒤로하고~나는 또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에 이 책을 다시 집어들게 되었다.
어쩜,내 자식인양 이라는 마음은 거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통해서 자기 행복을 확인 한다고 했던가? 내 아이는 저기에 없어서 다행이란 마음이 먼저 있었으리라 그래서 그 몰지각한
마음에 뉘우치듯, 내 아이같은 마음이라는 말로 덮어 씌웠을 것이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말도 안되는 해결책을 들이미는 이유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세금을 너무 많이 쏟아 부었으니 국민 경제를 생각 하라느니, 유족이 벼슬이라는 막말을 던지던 교수,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는 회피의 말 등) 괴로워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이 힘들어서일 거다.
얼른 문제가 해결되어 같이 깔깔거리고 싶은 마음, 더이상 답답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은 마음, 적어도 내 주변에는 행복한 사람만 있어서 나 역시 그 에너지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 이런 이기심이 위로가 필요한 순간 딴짓을 하게 만든다고. ~~
나의 슬픈 위로는 여기까지, 이만큼 다독여 주었으니 이제그만 마음에 묻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충고 같지 않은 충고를 해대면서.

-돌아가다니 어디로
일상으로.
사람은 언제까지 슬퍼할 수는 없는, 언제까지 끔찍한 것을 껴안고 살 수는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안심하고 살 수 있지, 잊을 수 있지.
그런 이유로 자 일상이야,
어떤 일상인가,일상이던 것이 영영 사라져버린 일상, 사라진 것이있는대도 내내 이어지는,참으로 이상한 일상.
그보다 내가 좀 살아야 겠으니 이제는 그만 입을 다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 본문 중-

그런것같다 우린, 난 더이상 마음이 불편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빚진자의 마음으로 살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가슴에 묻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등떠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미수습자 5명의 장례를 1313일 만에 치루었다. 더이상 국민의 세금을 쓸 면목이 없다면서 가슴에 묻고 가겠다고 수색 종려를 알렸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너무도 많다, 이젠 우리가 윤리적 선택을 할 때이다. 그것이 아이들을 잊지 않는 것이고,약속을 지키는 것이며, 끄덕끄덕 아무일 없이 행복하다고 안도하며 살아온 날들의 반성일 것이다.

-인간은 무능해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 하고 또 인간은 나약해서 일시적인 공감도 점차 흐릿해진다. 그러니 평생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정부가 죽은 사람을 죽이려고 할때, 그런 말들은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죽이려 든다.-
-본문 중-

정신분석 학자, 커뮤니케이션 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문학 평론가 등 여러분야의 분들이 집필한 것이라 뒤로 갈수록 다소 생소하고, 어렵고, 딱딱한 부분도 있지만 앞의 글을 터치해주며 써내려가는 옴니버스의 형식이라 차근차근 곱씹어 읽어나가니 다양한 분야에서 세월호를 생각할 수 있어서 괜찮았다.
누군가는 기록하고, 누군가는 기억 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린 그 아이들에게 진 빚을 조금은 갚아나갈 수 있을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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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장막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10주년 기념판
토미 테니 지음, 이상준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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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배자란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예배의 형식은 있으되 경건은 없다고 질책하신 하나님. “다윗의 장막”을 읽고 나의 형식적인 보는 예배를 회개하고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언제나 생활에 쫓겨 끝내야 할 숙제를 처리하듯이, 찜찜함을 해결하듯이, 출석 도장을 찍듯이, 하나님의 임함이 없는,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갈망함이 없는, 올리는 예배가 아니라 보는 예배를 드렸다. 예배 뒤에 숨어버리고 종교의 행사 뒤에 숨어서 진정한 신앙인인 양 나를 치장하였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은 얼마나 받으셨을까?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예배는 우리와의 만남의 예배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예배를 가장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셨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15:16, 암9:11~12)
하나님은 왜? 그 집을 재건하기를 원하시는가?
최초인 모세의 장막도 아니고, 웅장한 솔로몬의 성전도 아닌, 초라하기 그지없는, 휘장도 없는 장막을~~
그건 다윗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좇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좇는 사람이었다.

-본문 중–

다윗은 단 한 번도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임재 속의 예배 만을 드렸다. 광기 어린 사울 왕에게서 도망을 다니면서도, 자식인 압살롬의 반역에 도망을 가면서도 신세 한탄이나 원망 없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예배를 드리며, 병사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설교할 정도였다. 내 생각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라고 하나님께 이름을 받기 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한 가나안 땅에 기근이 오자 기도하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급기야 자기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다. 만약 다윗이었다면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며 찬양하고 예배하지 않았을까? 사도 바울은 나를 때릴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을 배울 뿐이라고 했다. 바울이 다윗의 교훈을 잘 따른 듯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그저 흥분하는 정도나 소름이 끼치는 정도로 만족한다. 다윗은 일시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만족하지 않는다. 날마다 양질의 좋은 음식을 먹으면 결국에는 그 음식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듯 현대의 좋은 음향 시스템의 찬양, 언변이 뛰어난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이미 우리에게 충분하다. 음식 재료 본연의 맛을 음미하고 즐기듯 설경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대면하며 얘기를 하듯이 내 속에서 우러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좋은 예배, 좋은 찬양, 좋은 설교가 아닌 하나님 그분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은 뜨거운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본문 중-

찬양은 곡조가 있는 기도라 하지만 요즘의 교회는, 우리는 곡조에 취해 눈물을 흘리며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라고 착각한다. 천사장 루시퍼는 자신의 연주에 취해서 교만해짐으로 타락하고 쫓겨났다. 이것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내가 만족함에 취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하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을~ 다윗처럼 은혜의 보라를 세워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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