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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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으로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소감에서 언급한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 만든 영화 '사일런스'의 원작이다. 스콜세이지 김독은 소설을 읽고 너무 감동해 즉시 영화화 판귄을 샀다고 한다.

내용은 17세기 일본 기독교인들이 심하게 박해받던 때를 배경으로
신과 신앙에 대한 회의를 깊이있게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예수회 소속의 포르투갈 선교사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하고 소식이 끊긴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가 그의 행적을 쫓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과 갈등의 내면을 겪는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아주 오래된 영화로 모두의 기억에 역력한, 장엄한 폭포를 배경으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장면에서 그 유명한 곡 '넬라 판타지아' 가 흐르는 "미션"과는 조금 다른 감동이 있다. 동일한 점은 비슷한 연대 배경으로 예수회 소속의 포르투갈 신부라는 것. '미션'의 가브리엘 신부는 사명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 비폭력으로써 순교를 택한 반면, '침묵'의 로드리고 신부는 고통받는 신도들을 위하여 배교를 선택 했다는 것이다. 순교를 주제로 한 얘기는 뻔할 거라 생각했는데 읽는 내내 가슴에 바위을 얹어 놓은 듯한 눌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의 고뇌와 성직자로서의 갈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한없이 약하고 약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의 고통에 침묵하고 계신 것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아니 나를 버리셨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로드리고 신부도 하나님이 이 가난하고 불쌍한 농민들의 박해와 순교를 왜, 가만히 침묵하고 계시냐고 울부짖는다.

-"당신은 어째서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까?
'저희가 당신을 위해 만든 마을조차 불타 버리도록 당신은 방관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사람들이 추방당할 때도 당신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지 않고 이 어둠처럼 다만 침묵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왜, 어째서? 왜인지 그 이유만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는 당신이 시련을 주기 위해 그 악창에 걸리게 했던 욥처럼 강한 인간이 못됩니다. 신도들은 가난하고 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고통을 이제 더는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신부는 기도했지만 바다는 여전히 어둡고 차디차게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결국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그는 두려움에 떨며 생각했다.~~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로드리고 신부가 배교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이 배교를 하지 않으므로 평생을 착취당하며 가난에 굶주려 살던 신도들의 구멍 매달기 고문을 지켜만 봐야 한다는 무력함과 서글픔 때문이었다, 페레이라 신부의 진정한 순교는 저 불쌍한 교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라는, 설득에 동의하며 배교를 한다. 아니 그 수많은 갈등 속에서,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에서 신부는 열렬한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깨달으며 성화를 밟고 배교를 한다.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많은 부분이며, 스콜세이지 감독이 1990년에 판권을 사고도 2016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이유 이기도하다. 원작의 마지막 20쪽의 내용인 신을 부인 한다는 것이 무엇이여, 예수의 음성을 어떻게 영상으로 해석할지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25년이 넘도록 고민하여 만든 영상인데 흥행하지는 못했다. 배교라는 예민한 주제 때문인듯하다.
신부는 불쌍한 신도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구멍 매달기 고문을 했다면 절대로 배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 읊조린다. 아니 그건 변명이고 핑계일 뿐, 자신은 기치지로와 같은 배교자 일뿐이라고 말하지만, 아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에게 그 순간은 거룩한 순교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었을 것이다. 순교는 성직자에게 큰 영광의 메달이기에 그걸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침묵에서 아주 흥미롭고 핵심적인 인물로 원주민 기치지로가 있다. 그를 보면서 인간의 나약함, 순수함, 간교함을 모두 볼 수 있다.
세 번의 배교를 하고 세 번의 회개를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을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로 흉내 내라고 말씀하신다고, 그건 자기에게 무리라고 억지라고 주장하며 억울해 한다. 그로서는 신앙을 지키려 한 최선의 노력이었다는 걸 알수있다. 마치 새벽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부인하던 베드로의 모습과 흡사하다. 베도로의 모습이, 기치치로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다.

기치지로의 이런 모습을 '신앙의 상태' 라고 말 할 수 있다.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일시적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늘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악이 번성하고 하나님이 내 고통에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느낀다. 이는 우리에게 허용된 의심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셨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의심을 탓하지 않으신다. 신앙에서의 의심은 퇴보가 아니라 전진 일 수 있다. 믿음이란 말과 신앙의 상태에 있다는 말을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신앙의 상태는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이는 신앙 상태의 본질적인 상태로 의심은 불가피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해의 한계, 인식의 한계,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분이기 때문이다. 의심이라는 것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뼘 빛밖에 없을 때의 지팡이 같은 것이다. 의심이라는 지팡이는 우리의 나아갈 바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 연세대 신학박사 김학철 교수 저서 중 -"

기치지로의 배교와 회개의 반복은 그가 신앙의 상태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치지로는 믿지만 의심했고, 의심했지만 믿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삶의 가치에 대해 묻지 않고 살 순 없다. 순간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지 않고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살기는 정말 힘들다. 문제는 믿음의 주제에 대해서 의심도 갖지 않고 관심도 없는 상태 냉담자가 되는 것이다.

신부는 신앙의 배교를 하였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예수회에서 쫓겨나고 배교자란 핍박을 받아도 자신 안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괜찮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평안하고 기쁨이 넘쳐나 보였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게 아니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셨다는 걸 그는 느낀 것이다.

영화와 책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책을 택하겠다. 영화에 원작자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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